[GL] 내 절교를 받아라 - 2화
"임신했다구, 나."
"......"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어-"
"미쳤어!?"
그러나 정수현은 여전히 빙긋 평소에도 자주 보여주는 포커페이스의 그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입만 슬쩍 웃고 있다. 나는 그 짧은 찰나에 나와 눈이 마주친 정수현의 그 치켜뜨는 그 눈매가 나로선, 도대체 얘가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아픈 건지, 놀란 건지, 도저히 감정을 느낄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어...어떻게 된 일이야."
"으응- 이거."
"......"
정수현은 핸드백에 손을 넣어 잠시 뒤적거리더니 파우치를 꺼내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는 하얀 막대 같은 플라스틱을 들어 한 번 더 살펴보더니 이내 내 앞에 내밀었다. 투명한 비닐에 싸여있는 그 물건을 보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분홍색과 하얀색이 투톤으로 섞인 체온계 같은 물건.
헐.
나는 남들이 볼까 봐 정수현이 뻔뻔스럽고도 차분히 내놓은 그 물건을 황급히 테이블 밑으로 감추듯 내렸다. 얜, 진짜 부끄러움이 없어! 내가 눈을 부라리자 수현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혀를 내밀며 배시시 웃을 뿐이다.
...이건...
나는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어서 억울했다. 그 언젠가 내가 정수현을 위해 샀던 물건이니 잊을 수가 없다. 덕분에 과의 동기들이 설레고도 조심스럽게 그 물건의 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무심결에 "그거 아마 3000원짜리가 제일 쌀 거야. 여러 개 사려면 3000원짜리로 열 개 맞춰서 달라고 해. 제일 좋은 건 8000원짜리. 그냥 5000원짜리 두 개 사서 확실히 해 보는 게 제일 무난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동안 요상한 의혹을 한 몸에 받게 된 것도 다 정수현 때문이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래, 이것.
임신 테스트기.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또다시 정수현과 함께 이걸 보게 되다니.
"......"
"......"
"....아..."
선명하게 찍힌 두 줄. 오차 따위는 5% 안팎.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이 꺼졌다. 나는 임신 테스트기를 손에 들고 망연자실한 눈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정수현을 쳐다보았다가 했다. 덜덜덜, 갑자기 내 손이 떨려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침착해야 해. 침착하자 김아연, 하고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말했다. 그래, 나보다 얘가 더 불안하겠지? 일단 정수현을 진정시켜야 해. 그래 그래야... 하는데,
얜 왜 이렇게 태연해? 도대체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정수현은 그저 턱을 괸 채 내가 보는 물건을 같이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리고 나 쫓겨났어."
"....어?"
"엄마한테 들켰어. 아빠는 골프 채로 이번에 경매에서 사 온 도자기를 깨버렸어. 그거 비싼 건데... 차라리 그거 나 주지. 아빤 바보야...."
"..... 병원에 가서 제대로 검사해보자."
"다녀왔는데?"
"어?"
"다녀왔다구. 어떻게든 해야 할 거 같아서."
“......”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병원이고 나발이고 세상에서 귀찮은 걸 제일 싫어하는 정수현의 성격에 세월아 네월아 되는대로 있어보자, 할 줄 알았던 나로서는, 먼저 병원에 데려가기 전에 제가 먼저 다녀왔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그리고 혼자 다녀왔을 생각에 조금 측은하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어?”
입이 바싹 말라 왔다. 저 예쁜 쉬폰 원피스를 입고, 예쁜 화장을 하고 그런 걸 상담하러 다녀왔을 정수현을 생각하니 내 다짐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올해가 가기 전엔 얘랑 절교하자, 라는 다짐.
"어떻게?"
너무나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오히려 나를 보며 싱긋 웃는 정수현은 이내 턱을 괴며 구부정하게 있던 몸을 반듯하게 펴더니, 팔짱을 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빙긋, 이번엔 눈꼬리까지 휘어지게 웃으며 그 하얗고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낸다.
"무슨 그런 질문이 있어.“
그리고는 잘 들으라는 듯 천천히,
“당연히-”
또박또박 말한다.
"낳을 거야."
"....뭐어?!"
내 절교를 받아라
2화 아빠는 김 씨가 좋겠어
정수현에게 남자란?
이라는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내가 자신 있게 정답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수현에게 남자는 액세서리였다. 그것도 대내외적 과시용 액세서리로서, 패션의 완성이었다. 나는 정수현이 대학생활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할 때 적어도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에겐 철드는 시기가 다 다른 법이며 남자로 치자면 군대에 가서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이들과 같이, 정수현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철이 들 것-이라고 말이다.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무려 이 개망나니 같은 정수현이 수업을 빠지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사회대였고 정수현은 놀랍게도 꼴에 영문과의 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한 손엔 전공 책을, 한 손엔 핸드백을, 그리고 샤랄라 쉬폰원피스와 선글라스, 하얀 다리를 돋보이게 해주는 하이힐과 금빛 은빛으로 매번 버라이어티하게 반짝이는 귀걸이, 시계, 팔찌들. 그리고...
남자.
그랬다. 패션의 완성, 남자.
늘 캠퍼스를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정수현의 옆에는 언제나 남자가 있었으니, 그 수준도 가히 특별급이었다. 어떤 날엔 쇼핑몰 모델 같은 길쭉하고 샤프한 남자가, 어떤 날엔 체대의 훈남이, 어떤 날엔 ROTC 제복을 입은 쾌남이, 어떤 날엔 정수현보다 예쁘게 생긴 패셔너블한 남자가, 어떤 날엔 만학도인지 교직원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사장님 스타일의 남자가(이 남자와 만나는 동안 수현의 핸드백을 하루하루 시즌 동안 모든 신상을 섭렵하리만치 다양해졌다) 정수현의 패션의 완성이 되었다.
새내기 때 나는 바빴다. 기숙사에 떨어져 자취를 하는 것도 그랬고, 그 자취 비용과 등록금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 시작한 교내 근로와 학점관리로 차라리 문과 14등의 시절이 좋았다고 느끼기까지 했으니까. 내가 바쁜 만큼 정수현도 바빴는데, 시력표에서나 나올 법한 학점을 받은 걸로 봐서 나와는 다른 이유로 바빴던 것 같다. 그래서 우연히 정수현의 동생 수정이를 만나서야 정수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일하는 패스트푸드점에 들린 수정이는 주문을 넣다 말고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우리 언니 때문에 고생이 많죠?"
"어?"
"우리 언니가 맨날 언니네 집에서 잔다던데... 엄마가 맨날 아연 언니 한 번 데려오라고 그래요. 용돈이라도 주겠다고..."
"뭐야?"
순간 툭, 하고 이성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단언컨대 그 당시 정수현은 내 자취방이 어딘지도 몰랐으며, 맹세컨대 단 한 번도 내 자취방에서 잔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이 순진하고 착한(정말 친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맑고 향기롭게 생긴) 수정이에게 차마,
"너네 언니인지 등신인지는 맹세코 우리 집에서 단 한 번도 잔 적이 없단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요즘 수현이가... 바빠... 영어공부도 하고...토, 토익도 하고... 하하... 주문표를 꾹꾹 누르며 나는 맑고 향기로운 수정이의 눈을 제대로 보질 못 했다. "언니 귀여워요. 유니폼 진짜 잘 어울린다." 하며 수정이 싱긋 웃었을 때도 나는 웃지 못 했다. 하하... 막또날도 유니폼이 하하... 좀 귀엽지... 마치 광대가 된 기분이란다... 하하...
불행하게도 내가 정수현처럼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으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수정이의 시선을 끝까지 마주하지 못한 채 겨우 말을 마쳐야 했다. 억울했다.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 왜 그 등신 같은 정수현 때문에 내가...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처음으로 '먼저' 정수현에게 연락했다. 새벽 한 시였고, 사실 몸이 피곤해 막 잠자리에 누운 참이었다. 정수현이 내 자취방을 핑계로 어딜 싸돌아 다니든 말든, 그때 정말 나는 내 코가 석자였으므로 그냥 잤다. 아니 자려고 했다. 막 잠이 들려는데 맑고 향기로운 수정 같은 수정이에게 문자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잤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동안은 평화롭지 않았을까.
[언니! 우리 언니 거기 있죠?]
[저 수정이에요. 내일 아빠 생일인데 언제 올 건지 물어봐 줘요^^]
"......"
결국 나는 부스스 일어나 누르기도 싫었던, [개수현]이라는 이름을 누르고 퀭한 눈으로 벽에 기대 신호음을 들었다. 최신곡 컬러링이 이어졌고, 아마 전화를 받지 않나 보다 싶어서 그 컬러링을 흥얼거리며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하는 호출음을 기다리는데, 아슬아슬하게 컬러링이 끊겼다.
어? 뭐야... 전화받잖아?
새삼 새벽 1시에 아주 오랜만에 듣는 정수현이 나는 조금 반가워지기도 해서, 조금 애정을 담아 물었다.
"야. 너 내 핑계 대고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수정이가...!"
그때 나는 그래도 오랜만에 정수현과 통화한다는 생각에 드는 설렘에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이내 그 미소가 차갑게 굳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고막을 압박해오는 거친 숨소리.
- 으응...응...자, 잠시만...흐응...나...지금...전화..못...받...아앙...나...중에..전화...흐응! 응..!
".....?"
뚝.
................
........................?!
................................!!
그러했다.
그러했던 것이었다.
그러!! 했던!!! 것이!!! 었다!!!!!
나는 정수현을 잡으러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엄청난 책임의식과 윤리의식 등이 내 안에서 넘쳐 흘렀다. 이 개망나니 같은 것이 내 자취방을 핑계로 무슨 문란한 짓을 하고 다니는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애초에 내 핑계를 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죄책감을 들게 했다.
아, 정말 전생에 나는 정수현에게 무슨 죄를 지었나. 지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일단 인문대에 아는 친구를 불러 정수현의 모든 것을 수소문하고, 영문학과의 모든 강의 시간표를 섭렵해 강의실 문 앞을 지켜야 했다. 내 전화도, 문자도 씹던 정수현은 이튿날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놀랍게도 울면서, 마스카라가 까맣게 번진 채로,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 여리여리한 팔다리가 무색하게 내 자취방을 네 발로 기어 왔다.
"기이이임아아아아여어어언!"
쾅쾅!! 자취방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여대는 동네 미친 꽐라가 정수현의 목소리임을 깨닫게 된 나는 새벽에 다급히 문을 열었고, 정수현은 비틀비틀거리며 현관에 우당탕 주저앉고는 히히히 거리며 내 손을 잡고 나를 끌어내렸다. 물론 인사도 잊지 않았다.
"아이고오오 김아연이이이 너허어느으흐으은 못 본 사이에 어떠케, 어떠케에에 더 하얘졌다아."
"야!"
"꼭 찹쌀떡 같아아. 찹쌀떠어억. 내 찹쌀떠어억."
"일어나, 일어나 봐."
"후후후흐.... 우리 김아연이 나 안 보고 싶었쪄? 푸흐흐..."
하면서 키득키득 거리더니 이내 제 앞에 쭈구리고 앉은 내 가슴에 온몸을 묻으며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생리가 안나와아아아- 흐어어엉-"
그리고 오열의 내용은 기가 막히기 짝이 없었다.
"내 쉥뤼가!!! 쉥뤼가 안나와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
남의 생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생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수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오 신이시여. 이 미친년이 드디어... 이 사단까지 만들었나이다. 아니, 아이까지 만들었나 봅니다.
"나 임신이면...!!"
그러나 순식간에 나를 덮친 불안감에 제대로 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정수현은 계속해서 내게 상상 그 이상의 말들을 퍼부어댔다. 제발 취했으면 이놈의 주둥이라도 좀 다물었으면, 싶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쭈구려앉아 게슴츠레 눈을 뜨며 딸꾹질을 하던 정수현의 술주정을 한없이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기가 막히면 화가 날 힘조차 빠지는 것을 몸소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 내 앞에 척, 소리 나게 아주 절도 있는 손가락질을 하며 정수현은 말했다.
"네가 책임져."
이게 미쳤나.
"내가 왜!"
"왜냐하믄... 그건... 그거슨... 네가..."
딸꾹!
"네가...."
갑자기 오열을 하며 미친년같이 술주정을 하던 정수현은 급속도로 표정을 굳혔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보기 힘든 얼굴을 했다. 웃음기도, 울음기도 하나도 없는 얼굴을 만들며 네가... 하던 수현은 오랫동안 무언가 곰곰 생각하더니 드디어 입을 뗐다.
"네가..."
나는 정수현의 입술에 집중했고, 그리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
으면 좋겠지만,
"우웨에에엑-"
충격적인 토사물을 치워야 했다.
나는 그날 인생의 첫 경험을 두 가지 했다. 하나는 친구의 뺨을 때리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처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산 것이었다.
정수현은 내가 뺨을 때려도 "히히..."하고 고개를 푸욱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지 우는지 모를 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정수현의 옷을 벗기고, 질질 끌어서 욕실에 눕혀 씻겼다. 사람을 씻기는데 꼭 손빨래를 하는 기분이었다. 화장을 지우며 부러 정수현의 양볼을 아무렇게나 꼬집어댔고, 강제로 가글을 시키고(이 과정에서 나는 정수현에게 머리채를 두 번 잡혔다) 다음날 막또날도 알바는 잠을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해야 했다. 놀랍게도 정수현은 내가 알바를 다녀와서까지 늘어지게 쳐 자고 있었다. 배를 벅벅 긁으며, 내가 해장을 위해 콩나물을 다듬는 소리에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임테기 사 왔어."
"응."
"..... 하고 와."
"......."
정수현은 일어나자마자 집을 둘러보더니, "이 집은 김아연처럼 조그맣다..."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웅얼거렸다. 그렇게 일곱 평짜리 자취방의 실내 인테리어에 대해 비평을 한 뒤, 그래도 전날 밤의 전과를 기억하는지 얌전한 고양이처럼 가만히 앉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긴장을 무릅쓰고 사온 임테기를 덜덜 떨며 건넸다.
아, 왜 니 임신테스트긴데 내가 떨어야 하는 거야?! 게다가 5000원... 비싸. 나한테 5000원은 너무나 비싸. 억울한 마음에 나중에 꼭 5000원을 갚으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임신이냐 아니냐를 앞두고 있는 친구에게 그런 말까지 하는 건 너무 야박하다 싶어서 나는 그냥 최대한 무심한 척했다. 괜히 내가 긴장하고 있는 걸 들키기도 싫었다.
"같이 가. 떨린단 말야..."
"어딜 같이 가자는거야.“
“힝... 쉬야 하러 같이 가자. 나 떨려.”
“미쳤어?! 떠, 떨릴게 어딨어!! 그냥 오줌을... 누, 누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더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정수현의 앞에서 쿨한 척 일어섰는데 오금이 저려 올 정도였다. 정말 제 앞가림도 못하는 정수현이 임신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정말 ‘걱정’에 가까운 것이긴 했다.
결국 정수현의 손목을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갔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가빠졌다. 정수현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내 손에 잡힌 제 손목을 빼내고는 오히려 내 팔을 질질 끌고 그저께 밤 내가 제 몸뚱어리를 빨래하듯 씻긴 욕실로 끌었다.
"진짜 생리 안 해?"
"응 생리두 안 하구 막..."
헐.
정수현은 뜬금없이 멍하니 서 있는 내 손을 끌어 자기 가슴팍에 갖다 대었다. 내가 미쳤냐며 황급히 손을 떼내려 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팔자 눈썹을 한다. "아니, 아니, 여기 좀 만져봐 봐." 하고 흐으응- 앙탈에 가까운 신음까지 낸다. 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고양이 같은 얼굴, 진짜 줘 패고 싶은 정수현의 얼굴.
"이것 봐봐. 찌찌가 땡땡해."
으. 과연, 땡땡하긴 했다. 어색하게 손을 쫙 펴고 민망함에 눈을 때굴때굴 굴리던 나는 괜히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해서 이 사단을 만들어!?"
"그런 짓?"
"아, 됐어. 빨리 하기나 해."
"응..."
고분고분 말을 듣나 싶던 정수현이 갑자기 훌러덩 바지를 내린 것은 그때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고 뒤로 돌았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자취방 욕실의 타일만 한없이 쳐다보았다. 타일의 무늬가 새삼 기하학적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쪼르르... 소리를 들었다. "히잉... 조준이 잘 안돼... 아이 묻었다..." 하는 정수현의 말에 속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잘 좀 해봐!"하고 소리를 쳤고,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자 빙그르르 뒤로 돌았다.
우리는 꼭 무슨 합격자 발표라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임신 테스트기의 중간에 있는 네모난 확인란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 줄이면 임신이 아닐 것이고, 두 줄이면 나는 정수현의 뺨을 최소 두 번 때릴 것이었다(정말 나는 그런 시뮬레이션을 머릿 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절교선언을 하고, 그리고 정수현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 정수현의 부모님 앞에 던질 것이었다. 그래, 반드시 그럴 것이었다.
그때 정수현이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우리는 욕실에서 2분 동안 말없이 임테기만 바라봤다. 2분, 그 2분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몰랐다. 온갖 소리들이 모두 크게 내 귀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정수현의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 욕실 천장의 환풍기 소리, 그리고 내가 덜덜 떠는 소리. 그리고 찰나를 참지 못하고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하는 정수현의 개소리. 아연아, 김아연아, 있잖아-
"임신이면... "
임신이면, 하는 정수현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담담하고 평소와 같지 않게 여성스럽기까지 해서 나는 얘가 무슨 소릴 하려나 싶었다.
"네가 아빠 해줘야 해요."
"......."
이때 나는 내 스스로도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눈을 부라리며 정수현을 돌아보았다. 정수현은 내가 저를 쳐다보든 말든 임신테스트기만 바라보며 마저 짖었다.
"어째서야?!"
"이왕이면 김 씨면 좋을 것 같아서. 무난하잖아. 너 김해 김 씨 아냐? 딱 좋은 것 같아."
"... 너 한 대 더 맞고 싶어?"
"딸이면 너랑 나랑 한 글자씩 따서 현아, 아들이면 그냥 외자로 연이로 지을래. 김연. 좋지?"
야, 이 미친 기집애야! 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 뭔 한 글자씩 따긴 개뿔. 그리고 이름 물려주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 게다가 죄 없는 내 이름은 왜? 이 순간까지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정수현이 원망스러워서 막 소리를 지르려는데, 정수현이,
"어? 한 줄이다." 라고 말했고,
나는 정수현에게 향했던 고개를 황급히 임신 테스트기로 돌렸다.
오 신이시여.
... 감사합니다....
나는 정수현 몫까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 우리는 맥주를 깠다. 원래 술은 잘 마시지 않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정수현의 두 번째 오바이트를 치우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제법 행복했다. 안도감이 들어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는 모르겠다. 음... 뭔가 다시금 정수현의 그 천진하고 철딱서니 없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좀 이상한 상태이긴 했다.
물론,
"너 진짜 다시는 이런 일 생기면 절교야."
여느 때와 같이 그 언젠가 꼭꼭 하고 말 '절교'선언도 했다.
"찹쌀떠어억-"
"내 말 듣고 있어?"
"깨물어 주고 싶어, 찹쌀떡. 그렇게 놀랐어어?"
"책임 지지 못할 짓은 하지 마. 알았어? 응?"
"넌 찹쌀떡처럼 어떻게 이렇게 쫀득쫀득하게 생ㄱ.."
"야!"
나는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흐느적거리는 정수현의 두 손 목을 잡고 두 눈을 부릅떴다. 정수현, 이 바보야. 잘 들어. 내 말 잘 들어야 해. 따라 해 봐.
"무책임한 부모가 되지 말자, 피임을 꼭꼭 하자, 문란하게 살지 말자, 사랑은 한순간의 유희가 아니다."
"......"
"따라 해!"
"... 흐응."
어째 정수현은 따라 할 생각은 않고 빤히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그 얄쌍한 눈매를 새끼 여우처럼 휘어뜨린다.
"그래애. 그래애."
"정수현. 나 진짜 진지해. 이게 장난인 줄 알아?"
아이를 갖는다는 건, 그건, 엄마와 아빠의 사랑과 책임이 따른다는 거야. 너 그런 게 얼마나 진지하고 엄청난 건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얼마나 놀라고 화가 났는데!
"왜 놀라고 화가 났는데?"
정수현이 갑자기 웃음기를 거두고 내 눈을 진득이 바라보며 말했다.
"뭐?! 그야 당연히 네가 임신을..."
순간 묘하게 바뀐 분위기에 나는 화를 내다 말고 정수현을 의아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임신을 하는 게... 화가 날 일이야?"
"......"
당연하지! 라고 나올 말이 갑자기 입술을 채 뚫고 나가지 못하고 멈춰버린다. 아니, 그건, 그러니까- 아직 개망나니인 네가 아이를 낳고 제대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야- 하고 말해야 하나?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려서 나는 내가 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곰곰 생각에 빠져야 했다.
"너니까... 당연히..."
"나니까?"
"아직, 음... 아직 결혼도 안 한 애가... 아무튼 넌... 넌 뭔가 걱정이 돼."
그리고, 탁 까놓고 말해서... 너 임신하면 왠지 내가, 내가, 이것저것, 그러니까 내가, 으으...
나는 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보다 정수현의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더 속이 부대끼는 걸 느꼈다. 결국 시선을 돌려버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시원한 물이나 한 잔 마셔야겠다 싶었다.
"내가 많이 신경 써 줘야 할 것 같단 말이야"
"으응. 맞아. 나 임신하면 김아연만 찾아올 테야."
"......"
"그래도 되지?"
"그럴 일을 만들지 마."
"근데 찹쌀 떠어억. 너 볼이 많이 작아졌다. 요즘 힘들어?"
너 같은 초부잣집 딸내미가 뭘 알겠냐고 쏘아붙이려다가 나는 그냥 찬물만 꿀꺽꿀꺽 삼켰다. 그 자리에서 생수병의 반의반을 한꺼번에 삼키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행실이나 똑바로 해.
"살 빠졌냐구. 응? 찹쌀떡?"
"그런 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아닌데. 볼살 엄청 빠졌는데. 나는 딱 보면 아는데."
갑자기 정수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한 번 스르륵 쓸어넘기더니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 왜?"
"한 번 깨물어 봐도 돼?"
"응? 뭘?"
"이거, 찹쌀떡 같은 이거."
정수현이 이거, 하면서 가리킨 것은 내 뺨, 내 볼, 나의 살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랫동안 또라이의 습성을 몸소 겪은 내 경험상 엄청 진지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내 경우, 친구의 볼을 한 번 깨물어 봐도 되냐는 그 말이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 잠이나 자."
"응. 자려구 그래. 내가 잘 자려면 네 볼을 한 번 깨물어 보구 자야겠어. 그럼 걱정을 좀 덜할지도 몰라. 정확하게 치수를 재자. 내가 딱 깨물어보면 네가 살이 빠졌는지 안 빠졌는지 알 수 있어."
아 정말 절교하고 싶다.
정수현은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무슨 강아지가 재롱 피우는 걸 보는 주인처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끄덕 거리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내가 눈을 부릅뜨며 채 분노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한참 동안 정수현을 노려보고 있으니 알았어, 알았어, 하고 물러갔다. 그러더니만 결국 픽! 쓰러져서 잠에 들었다. 정말이지, 아주 평온하고 천진한 표정이었고, 끝까지 민폐를 끼치는 습성은 버리지 못해 계속 내 허리를 끌어안고 아침까지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잠에 들었었다.
그래, 그게 3년 전이다.
불과 3년!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내 앞에 정수현은,
"약속해, 얼른."
".....?"
"아빠 해준다고. 나, 너 찾아온다고 했잖아. 임신하면."
그때의 사건에서 일말의 교훈도 얻지 못하고 또 임신 운운을 하며 나를 찾아온 것이다.
씨익,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잘 부탁해."하고 윙크까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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