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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얼음의 세계
이소브 곤은 지난달 열일곱 번째의 생일을 맞았다.
끝없는 겨울을 열일곱 번 난 사람은 성인이다. 미혼의 성인은 매년 초 겨울이 잠시 사그라드는 시기에, 장로와 함께 마을 집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는다. 이것은 눈과 얼음의 땅에 거하는 모든 주민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세계의 규칙이자, 곤이 제 열일곱째 생일을 손꼽아 기다려 온 이유였다.
다른 모든 촌락이 그렇듯이 그녀가 사는 마을 또한 이소브의 집성촌이다. 혈연 관계답게 전부 비슷비슷한 색깔의 사람이 곤은 지긋지긋했다. 하루빨리 여러 공동체에서 온 또래가 모두 참석하는 집회에 나가 신랑감을 탐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곤은 상대가 이쪽으로 오는 편도 나쁘지 않겠지만, 제가 남자의 마을로 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는 이소브가 아닌 사람들, 이소브의 특징인 푸른 머리카락이 없는, 익숙하지 않은 이목구비의 사람들뿐이다. 온통 새로우리라. 그것이 곤은 마냥 설렜다. 남편의 것으로 제 머리색도 바뀐다 해도 상관없었다.
지루한 반복을 겪는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여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이들, 반대로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자극을 갈구하는 이들. 일찍이 깨닫고 있었지만 이소브의 곤은 후자의 부류였다.
이제 일주일만 더 버티면 겨울이 잠시 사그라드는 때다. 생일이 그맘때인 것, 곤이 이 점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뒷집에 사는 - 촌수 관계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이소브인 - 빈카의 생일은 겨울이 잠시 사그라드는 시기 직후였다. 곤은 종종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는 했지만, 빈카가 얼마나 억울해하는지를 생각하면 그냥 배부른 소리였다.
"자거라."
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 열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소브 실라일란이 어느새 뒤에 서 있었다.
"할머니."
곤이 우물거렸다. 그녀의 할머니, 이소브의 우두머리 장로는 도무지 기척을 내며 다니는 법이 없었다.
"이제 그러려고 했어요."
물론 곤이 잠드는 일반적인 시각까지는 아직 두어 시간은 남았다는 점에서, 방금의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실라일란도 그 점을 알고 있어 눈썹을 살짝 모았지만, 곤이 정말 안에 들어가려는 동작을 취했기 때문에 별달리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내일 일찍 일어나겠다 하지 않았느냐?"
"그랬지요…."
곤은 말꼬리를 흐렸다. 정확하게는 밤을 새우고 일찍 일어난 척 하려던 계획이었다. 실라일란이 들어가면 아직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곤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보려 밍기적대며 움직였다. 신발 안쪽에 겹쳐 신은 가죽의 끈도 괜히 풀었다 다시 여매었다.
"할머니는 안 주무시나요?"
"나갈 데가 있다."
다시 보니 실라일란은 외출하려는 차림새였다. 곤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의 위치로 보아 자정을 넘길락 말락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요?"
"이제베가 부르더구나."
"아."
이제베는 이소브 공동체의 별지기, 하늘의 움직임과 별의 흐름을 읽고 마을을 위해 가장 안전한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눈과 얼음의 땅을 가호하는 마법사의 축복이 부러워, 한때는 곤도 별지기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한 마을에 별지기는 한 명씩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이제베가 죽어야 다음 대의 별지기가 태어난다는 말이니 애초에 곤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짝을 만들지 못하고 평생을 공동체에 봉사해야 한다는 별지기의 제약도 금방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그럼 언제 오시는데요?"
"동틀 즈음이나 돼서야 올 게다."
"그러세요…."
곤이 불퉁하게 웅얼거렸다.
한 공동체를 책임지는 장로답게 실라일란은 엄격한 규칙을 따라 생활했고, 그 규칙은 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오히려 손녀딸이기 때문에 더 강하게 규제되는 부분도 있었다. 저녁에 외출할 일이 생기면 그녀는 집 문을 꼭 잠가 두곤 했다. 곤이 혹여나 몰래 빠져나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이제 저도 성인인데 그만 봐줄 때 되지 않았어요, 하고도 투덜거려 봤지만, 실라일란은 집회에 참석하기 전 가장 일탈이 많이 발생한다는 주장으로 가볍게 반박했다.
"짝도 없는 것이 무슨 어른이라고. 내가 네 나이대의 애들을 한두 명 본 줄 아느냐."
실제로 지난 해인가 지지난 해만 해도, 갓 열일곱 생일을 넘긴 애 둘이 몰래 마을 밖을 나갔다가 큰일날 뻔한 적이 있었다. 그 애들은 물론이요 곤에게도 썩 유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원칙에 더는 불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형편이니, 할머니가 외출한다면 곤에게 밤을 새울 기회 같은 건 사라지는 셈이었다. 열석(熱石)의 온기로 훈훈하게 데워진 실내에서 그녀는 졸음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다녀오마. 얌전히 있어라."
"네…."
어둠 속에서 문이 딸깍, 하고 잠겼다.
곤은 그냥 잠이나 자기로 했다.
.
.
.
올해로 마흔 세 살 난 이소브 이제베는 호리호리하게 키가 큰 청년이었다. 실라일란이 보기에 썩 괜찮아 뵈는 외모는 아니었다. 자고로 사람이 위아래로 길면 옆으로도 적당히 넓어야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이 별지기는 그런 것 없이 그냥 길쭉하기만 한 것이, 조금만 힘을 실어 툭 치면 꼭 부러질 것만 같았다. 저 바람에 날아갈 듯한 다리로 이 추위를 어떻게 버티는지 실라일란은 가끔 신기했다.
"오셨어요."
"오냐."
별지기답게 별을 닮아, 이제베의 머리색은 이소브 공동체에서 가장 환했다. 밝은 파랑의 긴 머리카락을 허리께까지 늘어뜨리고 하얀 곰 모피를 어깨에 두른 채 이제베는 부유(浮遊)하듯이 걸어왔다. 모피를 고정하는 끈 끝에 매인 붉은 열석이 희미하게 짤랑짤랑 부딪혔다.
실라일란은 거센 외풍에 흔들리는 옷자락을 꼭 잡아 여몄다. 옷에 단추 삼아 달린 열석 탓에 뼈가 시리지는 않았지만, 장성한 아들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긴장을 유발했다.
"무슨 일로 그리도 급하게 나를 부르느냐."
"이상한 별이 있어서요."
이제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 끝을 실라일란도 눈으로 쫓았다. 북극성 옆에 처음 보는 별 하나가, 분홍색으로 빠르게 깜박이고 있었다.
실라일란이 동의했다.
"…독특하긴 하구나."
오는 길에는 평소와 꼭 같으나, 별터에 도착해 올려다보면 확연히 하늘의 모습이 다르다. 여러 번 겪어 봤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경험이었다.
어디에서나 별의 특이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 별지기와는 달리, 보통의 사람들은 별터라고 불리는 특별한 공간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별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그리고 별의 언어를 해석하는 일은 오로지 별지기만의 능력이었다.
"예."
이제베가 눈을 감고 읊조렸다. 문장이 부드럽게 성대를 타고 올라왔다. 이소브의 별지기는 평소 찬바람에 말린 고기마냥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으나, 오로지 하늘의 메세지를 읽을 때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별들의 언어가 목에 기름칠이라도 해 주는 모양이지, 하고 실라일란은 가끔 생각했다.
"신의 딸 하나가 끝없는 겨울을 헤치고 눈과 얼음의 땅을 헤매나니."
"신의 딸?"
실라일란이 되풀이했다.
신은 아래쪽 대륙의 개념이고 마법사와 마녀가 수호하는 이곳 눈과 얼음의 땅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신의 자녀란 곧 대륙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먼 옛날, 마법사와 마녀가 깨끗한 눈밭에 처음 발을 디딘 그날 이후로 눈과 얼음의 땅은 대륙과는 완전히 별개인 공간으로 치부되었다. 두 지역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나 광대한 바다보다도 훨씬 크고 넓은 간격이 있었다.
그러니 신의 자식, 이곳에서는 겨울의 끝만큼이나 보기 힘든 것에 속했다.
하지만 실라일란이 놀란 이유는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부족했다.
이제베가 눈을 뜨고 덧붙였다.
"마을 근처까지 온 듯 보이는군요."
"마법사의 가호도 없이 어떻게…."
눈과 얼음의 땅은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지독한 추위뿐이다. 눈과 얼음의 성에 거하는 마법사는 제 얼어붙은 영토에서 거주민들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몇 가지 안배를 했다. 각 공동체의 별지기가 받는 직접적인 축복에서부터 열석이나 광석(光石)따위의 수호가 깃든 돌까지, 마법사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이 땅에서의 생존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제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한 뒤, 눈을 감고 못다 읽은 별의 말을 마저 읊었다.
"이는 한 세계의 큰 축을 이룰 자니,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걷게 해주어라."
말을 마치고 별지기는 천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터에 장식된 광석의 불빛이 이제베의 얼굴에 노랗고 붉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가장 애틋한 손가락이다. 실라일란은 아들의 금빛 홍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누이와 마찬가지로 제 아비를 닮아서, 사람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고집이 묻었다. 이소브 실라일란이 첫 집회에서 만난 남편과, 그가 안겨 준 자식들과 단번에 사랑에 빠진 이유였다. 손녀딸인 곤은 사위의 푸른 눈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제 이소브에는 단 한 명의 금빛 홍채만이 남지 않았다.
실라일란은 그대로 조금 기다렸지만, 전할 말은 끝난 듯 이제베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시는 말씀은 그게 전부더냐?"
"예."
이제베는 위쪽에 눈을 고정한 채로 답했다. 실라일란은 아들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분홍색으로 큼지막한 별이 여전히 북극성의 곁에 남았다. 그러나 아까와 꼭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실라일란은 별이 천천히 꺼져가는 모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빠른 깜박임은 점점 희미해져서, 이제 북극성 옆에는 검은색의 어두운 밤하늘밖에 남지 않았다.
"세계의 큰 축이 무엇일까."
"그건 알려 주시지 않는데요."
이제베는 파리한 손가락으로 새까만 하늘을 되짚었다. 세계의 천장에 달린 것은 아무런 특징도 색깔도 없는 평범한 별들뿐이지만, 숙련된 별지기인 그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랑은 상관없을 일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럼 됐다."
한 공동체를 이끄는 장로로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마을의 안정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주목해서 들은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가고자 하는 길.
그녀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딸의 마지막 선택.
자기 손으로 결정한 앞길을 걷는 여자는 그 길 위에서 어떤 모습일까.
실라일란이 중얼거렸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구나."
이제베가 대꾸했다.
"우선은 돌아가시죠."
이제베는 별터의 광석 하나하나마다 가죽 덮개를 입혔다. 광원이 모두 사라지자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까만 어둠만 남았다. 희미한 별빛만으로도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별지기와는 달리 그의 어머니는 불빛을 필요로 했다. 올 때는 별터의 광석이 길잡이가 되어 괜찮았으나 돌아가는 길은 아닐 터이다. 이제베는 마지막 광석의 덮개를 벗기고 실라일란에게 쥐여 주려 했다. 그러나 이소브의 장로는 어느새 저 멀리, 암흑을 성큼성큼 헤쳐 나가고 있었다.
별지기는 광석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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