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로운 평화나라

ep1/ 퇴근하려고 했는데(3)

벤츠남이 내 앞에서 주먹을 흔들며 위협한다.

「어떻게 때려 줄까? 응?」

느긋한 태도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내 얼굴을 살핀다.

열 대만 때리기로 합의한 만큼 신중하기로 한 모양이다.

계속 이러다간 끝이 안 날 것 같다.

-툭

「엇, 뭐야?」

「한 대. 이제 아홉 대 남았습니다.」

「뭐라고!」

벤츠남이 깐족거리는 틈을 타 슬쩍 얼굴을 들어 주먹이 뺨에 닿게 했다.

약하든 강하든 아무튼 접촉한 건 사실이므로 한 대로 친다.

녀석도 그걸 알았는지 별 말 하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만 본다.

이로써 암묵적인 룰이 성립되었다.

피부에 닿으면 한 대.

그러게 뜸 들이지 말고 때렸으면 좋았잖아.

'일단 100만 원 깠고.'

「어서 하시죠.」

「알았다, 이 새끼야. 어디 한 번 해보자 이거지?」

한 대 날려먹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벤츠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행여나 또 잔재주를 쓸까봐 한 걸음 떨어져서 열심히 때릴 곳을 찾는다.

-타닷.

도움 닫기는 반칙 아닌가?

주먹이 날아와 내 왼쪽 뺨을 정통으로 가격한다.

-퍽!

「카하핫-! 적중! 맛이 어때? 아주 정신이 번쩍 들지?」

하이톤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벤츠남의 말대로다.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구한테 맞아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는데.

얼얼한 감촉에 몸이 뜨거워진다.

'이제 200만 원.'

「여덟 대 남았습니다.」

「크큭. 아직 말 할 힘이 있나 보네.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고.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 걸.」

벤츠남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손목을 푼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피시방녀도 더 이상 나서지 않는다.

남자란 생물은 이해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기분으로 두 얼간이를 지켜보겠지.

상관 없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게 아니니까.

-퍽!

'300만 원.'

-퍽!

'400만 원.'

-퍽!

'500만 원.'

네 대를 남겨두고 있을 때 치사하게도 벤츠남이 턱을 조준하는 척 복부를 친다.

「크윽.」

아릿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전해져 온다.

「하하, 후우......어때? 이번 건 좀 괜찮았지? 후우......후우......어째 아까보다 말 수가 적어졌는 걸. 지금이라도 빌지 그래. 그럼 그만둬 줄 용의도......후우......있는데 말이야.」

벤츠남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다.

생각보다 약골인지도 모른다.

맞는 나보다 때리는 녀석이 더 힘들어 하는 걸 보면.

어떻게 할까?

그래도 아픈 건 싫었기에 빌어볼까도 생각했으나 역시 그건 아니다.

벤츠남에게 이겼다는 기분이 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어릴 적부터 줄곧 깡다구로 버텨온 나다.

그에 비하면 이까짓 고통은 새발에 피라고 볼 수 있다.

「세 대 남았습니다.」

「하하, 그렇단 말이지.」

벤츠남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자세를 보니 이번엔 발차기인 모양이다.

난 가만히 서서 맞을 준비를 한다.

「아주 골로 가게 해주지.」

벤츠남이 거리를 재고는 곧장 발을 날린다.

머리를 노린 하이킥.

그러나 방향이 좋지 않다.

-빡!

발등이 내 어깨에 맞고 튕기자 녀석의 중심이 무너진다.

「으아아악!」

벤츠남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지른다.

낙하할 때 다친 손으로 바닥을 짚은 게 실수다.

녀석이 부들부들 떨며 벌겋게 부푼 손목을 살핀다.

「너, 너 이 새끼! 죽여버리겠어.」

벤츠남이 벌떡 일어나더니 눈에 핏발을 세우며 악을 쓴다.

맹세하건대 내 잘못이 아니다.

실컷 때려놓고 성을 내다니. 어이가 없네.

「더 하실 거 아니면 여기서 끝내는 걸로 알겠습니다.」

「으으으으으!」

슬쩍 목례를 하자 벤츠남은 부아가 치미는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린다.

「아저씨, 조심해요!」

돌아서는데 피시방녀가 다급하게 외친다.

벤츠남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

'접이식 군용 나이프.'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런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위험한 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칼 앞에서는 장사 없다. 무조건 도망치는 수밖에는......

흘끗 보니 302호가 저만치 물러나는 게 보인다.

상황파악 빠르네.

「흐흐, 넌 이제 죽었어.」

벤츠남이 침을 탁 뱉고는 나를 쏘아본다. 외지다고는 해도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서 흉기를 꺼내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일단 빈틈을 만들기로 한다.

「왜, 갑자기 쫄았냐? 크큭, 조금 전까지는 잘도 주절대더니. 어디 칼빵 생겨도 여유부릴 수 있을지 보자고.」

벤츠남이 땀을 흘리며 싱긋 웃더니 칼을 내질러 온다.

몸을 뒤로 물리며 두 어번 피하고 나자 등어리가 금새 땀으로 축축해진다.

녀석이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압박해온다.

나만 사라지면 뒷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이 미꾸라지 같은 새끼.」

하지만 쉽게 잡혀줄 생각은 없다.

난 마침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 하나를 주워 벤츠남을 향해 던진다.

「악!」

명중. 살짝 스친 정도지만 그걸로도 충분하다.

난 곧장 다리를 뻗어 칼 든 손을 걷어 찬다. 경쾌한 감촉이 느껴지고 군용 나이프가 수풀 사이로 떨어진다.

끝났다.

「그만 하시죠.」

「아아악! 이 좆도 아닌 경비원 새끼가 진짜!」

결국 분노 폭발.

벤츠남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바닥에 솟은 잡초를 마구 뜯어내 분풀이로 삼는다.

소리를 들었는지 몇몇 사람이 창문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숨는다.

아마 CCTV에 다 찍혔겠지. 경찰이 와도 변명거리는 있으니 안심이다.

「너, 실수한 거야.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난 딱히 대꾸하지 않는다. 대신 얼른 수풀 속으로 들어가 칼을 챙긴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어디 두고 보자고. 내일부터 발 뻗고 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해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천천히, 고통스럽게 알려줄...... 너 이자식! 사람 말하는데 지금 어딜 보는......」

나를 졸졸 따라오며 위협하던 벤츠남의 말소리가 멈춘다.

나도 걸음을 멈춘다.

조금 전까지 살벌한 드잡이를 벌이던 사람과 나란히 지상 주차장 길목에 서 있으려니 기분이 묘하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 이상한 광경을 봤기 때문이다.

「뭐야, 이게.」 내가 중얼거린다.

옆에 있던 벤츠남이 먼저 뒷걸음질을 친다.

「어......어어?」 말을 잊은 듯 얼버무리더니 점점 시야 밖으로 벗어난다.

그를 쫓을 생각은 하지 못한다.

새로운 위험이 코앞에 닥쳤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니까.

벤츠남이 내일부터 발 뻗고 자기는 글렀다고 했던가.

틀렸다.

오늘부터다.

-그르르륵, 카하......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서 대자로 널부러진 사람을 마구 물어뜯던 사람이 고개를 틀어 이쪽을 바라본다.

백태가 낀 듯한 텅빈 눈이 두어번 깜박거린다.

「괜찮으세요?」

복장으로 미루어 보아 폐지를 모으러 자주 들리던 아저씨가 분명하다.

-카아......

그가 입을 벌리더니 기이한 소리를 낸다.

마치 짐승이 하는 것 같은.

그러더니 무릎을 펴고 일어나 똑바로 선다.

피와 함께 버무린 살점이 턱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뭔가 잘못됐다.

폐지 아저씨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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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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