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로운 평화나라

ep1/ 퇴근하려고 했는데(2)

요즘 들어 피시방녀를 보는 벤츠남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내 감이 특출나다기 보다 확실히 추근덕거리는 횟수가 늘었다.

잘 봐줘도 조카뻘인 여자다.

피시방녀를 보며 몸을 꼬아대는 벤츠남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가 다 민망해진다.

그러니 이건 모두.

아파트의 평화를 위해서다!

라는 건 거짓말이고 내 밥줄을 위해서라도 묵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경비원인 내가 벤츠남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일이 커지지 않도록 잘 수습하는 것뿐이다.

벤츠남도 8단지의 실세 중 하나라 할 수 있기에 심기를 건드리면 이쪽이 위험해질 수 있다.

단지 내 외진 길목까지 쫓아온 벤츠남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아, 잠깐 얘기만 하자니까 그러네.」

「싫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30분만. 아니, 딱 10분만! 응?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갖고 싶은 거 오빠가 다 사 준다니까 그러네.」

「후......」

피시방녀가 한숨을 내쉬고는 멈춰선다.

「그래, 잘 생각했어. 흐흐, 후회 안 할거야. 일단 내 차로 가서 얘기 좀 하다보면 너도......」

「손 주세요.」

「응? 손? 아하, 의외로 대범한 스타일? 나야 좋지! 내 손 거쳐간 애들치고 한번 만나는 걸로 만족한 여자를 내가 못봤......」

손이 어깨 부근에 닿자마자 피시방녀가 벤츠남의 소매깃을 와락 잡아챈다.

-휘리릭!

몸이 공중을 날더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벤츠남의 등어리가 돌바닥을 때린다.

깔끔한 업어치기다.

「크으윽......」

벤츠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린채 눈을 깜박인다.

1초만에 세상이 뒤집혔다 돌아왔으니 비몽사몽인 게 당연하다.

「그러게,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피시방녀가 냉담한 얼굴로 돌아보며 손을 탁탁 턴다.

그러다 나무 옆에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친다.

「겨, 경비원… 아저씨?」

구경에 몰두한 나머지 잠시 넋을 놓았던 모양이다.

당황하기는 피시방녀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있어서 놀랬나?

「아, 그게......」

뭔가 설명을 하려다 포기한다.

벤츠남이 널 어떻게 할 것 같아 따라왔다고?

이상하다. 되려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그 사이 정신을 차린 벤츠남이 큼지막한 손으로 뒷덜미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킨다.

「이 미친년이 잘해주니까 뵈는 게 없나?」

벤츠남은 우드득 소리가 나도록 목을 꺾더니 피시방녀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어디, 다시 한번 해봐.」

그러고는 먹이를 발견한 호랑이처럼 단박에 달려든다.

움직여야 할 때다.

「아이쿠, 누가 여기에 돌부리를!」

쭉 뻗은 내 양팔이 벤츠남의 허리를 붙잡고 급격히 진로를 변경한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그늘진 잔디밭 위를 구른다.

까슬까슬한 촉감이 몸을 마구 찌른다.

장미 덩굴을 깜박했다.

이쪽만 정리를 안 했던가? 더럽게 따갑네.

「크윽, 이......이건 또 뭐야.」

엎어치기를 당한 걸로 모자라 흰 정장에 풀 범벅을 한 벤츠남이 신음하더니 몸을 일으킨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피시방녀와 나를 번갈아 본다.

「이 새끼들이 지금 짜고 나를 물 먹여?」

「그게 아니고요, 선생님. 제가 정원 손질을 하다 발을 헛디뎌서 그만.」

변명이다.

물론 믿지는 않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 보다야 나을 것 같았다.

그러자 벤츠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발을, 헛디디셨다? 그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난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어제 정원을 손질하는 걸 깜박했지 뭡니까. 그래서 퇴근하기 전에 잠깐 둘러보고 가려다 그만......아이고, 죄송합니다. 흰 옷인데 실수로 이렇게......제가 세탁비는 어떻게 하든 마련해 드릴테니 화 푸시고......」

「하......하하하하!」

벤츠남이 허공에 웃음을 뿌린다.

박수까지 치는 게 반쯤 미친 것 같다.

사이코 패스인가?

난 어제 저녁 경찰이 수의로 덮어둔 맨발의 피해자를 생각한다.

정말 벤츠남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연 웃음이 그친다.

「좋아, 세탁비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얼마나 드려야......」

「천만 원.」

「네 천만......네에? 천만 원이요?」

「그래 천만 원.」 벤츠남이 웃는다. 「이 옷이 얼마 짜린 줄 알아? 천만 원이야. 세탁 같은 소리 하네. 흰 정장 세탁한다고 찢어진 게 돌아와? 그러느니 다시 사는 게 낫지. 안 그래?」

우려했던 일이다.

그토록 조심했는데 결국 이 사단이 나고 말다니.

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어떻게 그 큰 돈을......」

「아 돈이 없으시다? 그럼 다른 방법도 있긴 한데.」

「다른 방법이라면?」

벤츠남이 입꼬리를 말아올린다.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표정이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검지를 펴 보인다.

「한 대당 십만 원. 나한테 백 대만 맞아. 그럼 배상이고 뭐고 없던 걸로 해주지. 단, 지금 여기서 결정해야 돼. 어떡할래?」

한 대당 십만 원이라.

난 속으로 그 말을 곱씹어 본다.

「아저씨, 저 사람 말 듣지 마요. 저 사람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세상에 이런 법이......」

옆에 있던 피시방녀가 다급하게 끼어든다.

경찰?

아마 소용 없을 것이다.

주민과 경비원의 갈등.

언론에서 몇일 떠들어 줄 수야 있겠지만 결국 내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발적 퇴사 처리 될 테고 실업급여는 꿈도 못 꾼다.

그럼 또 이력서 넣으며 여기저기 전전하겠지.

난 양손을 들어 손가락 열 개를 펴보인다.

「뭐, 뭐야?」 내가 때리는 줄 알았는지 벤츠남이 슬쩍 몸을 뺀다.

「백만 원.」 내가 조용히 말한다.

「한 대당 백만 원에 쳐주시면 맞겠습니다.」

벤츠남과 피시방녀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린다.

왜. 흥정 좀 하면 안 되나? 세상에 살 수 없는 게 어디 있다고.

「너, 지금 그 말 진심이지? 무르기 없기다.」

「물론입니다.」

「아저씨!」

벤츠남이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어디서 좀비라도 튀어나왔으면.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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