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하는 재앙

부서진 것

"허억, 허억..." 이번 조난자의 상태는 꽤 심각하네. 치료하는 데 제법 품이 들겠어. 하연은 그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어 눈을 감고 집중한다. 이내 하연의 손 근처에서 터져 나오고, 물이 스며들며 배의 상처는 아물어 간다. 온몸이 성치 못한 조난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점점 편안해져 간다. 세상을 멸망시킨 식물의 축복으로, 임시로나마 그는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연은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뒤통수가 아릿하게 아프고 가슴께가 조여온다. 

'아으으, 썩을, 응급처치만 간단히 한 수준인데도 이 정도라고? 그 역겨운 자식들은 대체 뭘 원하길래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는 거야. 규율을 깨고 공격에 약탈까지 하면 후폭풍이 두렵지도 않나?'

"...대장, 이 사람의 상처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계속해서 저희 마을 근처에 머무르며 약탈을 저지르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가방을 뒤져 없다는 말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따로 찾는 물건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그자는 진이한테 맡기고, 우리는 물건 챙겨서 나중에 간다."
"예."

녹색 머리의 남자가 경계를 멈추고 하연에게 다가온다. 금장발의 소년은 조난자에게 자신의 겉옷을 입힌 뒤 그를 업고 마을을 향해 달려 나간다. 비록 소년의 미움을 조금 사긴 하겠지만 이로써 그는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우리는 잃어버린 물건들 찾고, 수색 조금만 더 하다가 간다."

"괜찮을까요? 곧 밤이 와요."

"어쩔 수 없는 것 알면서 어리광 부리지 마, 신하연. 조난자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일행이 있는지 묻지 못했어. 만약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네, 죄송해요."

"됐다, 너 노숙 싫어하는 거 모르는 놈이 어디 있냐. 그리 미안해할 것 없어."

*

해가 떨어진 뒤로도 둘은 한참을 더 돌아다녔으나 조난자의 물건들-이를테면 과수분 이끼나 콩이 가득 든 자루, 침낭 같은-을 제외하면 특별한 수확은 없었다. 남자, 임호경은 가지고 있던 손도끼로 나무를 잘라 자신의 능력으로 불을 붙인다.

"난 담배 좀 피고 온다."

"다녀오세요, 너무 오래 나가 계시진 마시고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나? 내가 무슨 얼어 죽을 감기냐? 녀석, 걱정은. 알았다, 한 대만 태우고 올게."

그렇게 소녀는 홀로 잠을 청한다. 몇 번이고 맞이하는 밖에서의 밤은 외롭거나 두렵지는 않지만, 조금 축축하고 불쾌했다.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의식은 꺼져간다.

아, 아침이다. 눈을 뜬 소녀는 짐을 정리하고 잠시 명상을 한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에 활기가 돈다.노숙을 할 때는, 또는 능력을 사용한 날에는 맨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게 좋다. 모든 게 완벽하지만 끔찍한 기분이다.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야. 그렇게 하연은 중얼거린다. 전쟁도 테러도 아닌 식물에 의해서 문명은 멸망했다. 그 식물에 의해 우리는 또다시 삶의 터전을 위협받았으나, 그들과의 공명으로 살아남을 능력을 얻었지. 참 놀라운 모순이다, 삶과 죽음 모두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저 녹색 줄기들에 좌지우지 된다는 건.

이전 문명은 고도로 발달했었다는데 그 시절의 이 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전의 수도인 '서울'은 어떤 곳이었을까. 하연은 늘 싱그러운 재앙이 온 세상을 뒤덮기 전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 세계에서, 그는 어떤 능력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친구들과 함께 깔깔 웃으며 놀고, 맛있는 고기를 잔뜩 먹고, 따뜻한 집에서 부모님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잠을 청한다. 

하연은 자기 자신이 지독히도 싫었으나, 동시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부모와 피로 이어진 유일한 것이 자신의 몸뚱어리였기에.

"일어났냐?"

"네, 좋은 아침이에요."

"오냐, 근데 난 그다지 좋지 못해. 아침이다 보니 이 미친 것들이 벌써 성장하고 있어. 돌아가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거다."

"...죄송합니다."

대답 없이 호경은 배낭을 등에 멘다. 자책 그만하라고 출발하라는 뜻이다. 다정한 사람, 하연은 살포시 웃었다. 그러나 세상은 다정하지 않으니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하연은 지도를 붙들고 나아가는 호경의 뒤로 따라붙었다.

""... ...""

애석하게도, 몇 걸음 가지도 못해 그들은 멈추어 섰다. 거대한 가시덤불 군락이 그들을 가로막은 탓이다.

"유진 이 녀석, 그때도 상당한 크기였을 게 분명한 크기인데 용케 뛰어넘었군."

"아니면 경화해서 그냥 밟고 갔을 수도 있죠. 안 그래 보여도 상당히 무식하니까요. 어쩌면 그냥 저처럼 집에 가고 싶었던 걸 수도요."

"어찌 됐건 이걸 처리해야 하는데, 이건 가시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냥 태워?"

"대장이 자꾸 그렇게 구니까 진이가 배워서 똑같이 무식하게 구는 거에요."

"어쩌라고."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인 호경이 이내 손에 열기를 모아 불을 피운다. 불은 순식간에 크기를 불려 덤불 전체를 집어삼키고, 눈 깜빡할 사이에 군락은 흔적도 없다. 이게 선배의 이능, 단순히 불을 만드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통제권까지 가지는 것. 

'차라리 나도 선배처럼 식물이 아닌 염원에서 기원한 부류였다면 좀 더 좋았을 텐데.'

이 후로도 이와 비슷한 일은 몇 번이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먹을 것을 채집하거나, 작은 줄기를 타고 올라 큰 줄기를 넘거나 하며 '마을'에 도착했다.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아, 드디어 도착이네. 아침부터 내내 먹은 게 하나도 없는데, 아주 기대가 돼."

"전... 괜찮아요. 들어가서 조금 잔 뒤에 알아서 먹을게요."

"오오냐, 너무 많이 자지는 말고, 그러다 수면 패턴 망칠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둘은 들어가 있는 틈에 이끼를 잔뜩 집어넣었다. 이내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틈에 담긴 이끼가 위로 올라가고, 건물의 문이 열린다.

*

"잘 돌아왔어요, 호경 씨!"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덕분에 멀쩡하게 돌아왔습니다."

하연은 옅은 미소와 함께 묵례했다. '이런 활기찬 인사는 영 적응이 되지를 않는다니까.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마저 자고 싶어, 긴장해서 하나도 못 쉬었다고. 으으.' 호경이 쾌활하게 문지기와 대화할 동안, 하연은 잽싸게 발을 놀려 수정에게로 향했다.

"저희 돌아왔어요, 언니."

"어어, 애기 왔어? 다친 데는 없고? 고생했네."

"하아... 어제 자는데 내내 식물들 자라는 소리가 들려서 긴장하고 있느라 한숨도 못 잤어요."

"아이고... 같이 못 가주는 게 한이다, 우리 하연이 눈에 다크서클 짙어진 것 좀 봐. 아이구, 아이구."

수정이 하연의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아마 그 나름의 위로일 것이다. 호경 선배에게는 그렇게 못살게 구시면서 우리 같은 연하들에게는 한없이 무르시다. 자주 투닥대시는 모습이 보기 좋은 콤비지. 이상하게 수정과 호경이 붙어있는 모습만 보면 하연은 정겨운 기분이 든다. 정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야, 신수정, 나 왔..."

"임호경 이 미친 새끼야! 뭐가 어떻게 됐길래 가뜩이나 골골대는 애가 이 꼴이 되냐? 어? 하연이 이러다가 쓰러지겠어, 인마."

"어어 그래, 미안하다, 내가 다~ 잘못했다. 근데 어떡하냐, 사람이 죽어가는데. 아니 그보다 넌 왜 오라는 대로 와도 성질이냐? 하여튼."

"...에휴. 이번은 맞는 말이니까 봐준다. 다음은 없어. 왜겠냐? 네가 자꾸 하연이 굴리니까 그렇지. 굴릴 거면 차라리 날 굴리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이 자식아."

두 분은 참...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신다. 듣기로는 어릴 땐 사이가 좋았다는데, 수정 언니가 의사가 된 이후로 지금 같은 관계가 되셨다나. 그래도 호경 씨가 저렇게 편하게 말하는 사람도 거의 갓난아기 시절부터 함께했다고 했으니까 그럴 만도 한가.

"여하간에 이리로 와. 안색 보아하니 또 능력 썼구만. 먹어,"

수정의 손에서 작은 줄기가 튀어나와 열매가 맺힌다. 저러니까 매번 싸우지. 언니가 병약한 게 이능 쓰느라 에너지 끌어다 쓰는 탓인 거 모르는 사람이 우리 마을에 누가 있다고.

"...너, 그거 그만하라고 내가 했다. 아주 누가 재채기 한 번만 해도 열매 맺어다 주고..."

아, 분위기가 험악하다. 그러니까, 유진은 이런 식으로 해결했던가...

"저어, 말씀하시는 도중에 죄송해요. 피곤해서 그런데 이만 가서 자도 될까요."

"아, 그렇네. 내가 너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구나. 가서 쉬어, 하연아."

아마 내가 말싸움을 제지했다는 건 두 분도 아시겠지. 그렇지만... 수긍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런 말을 했다간 당장 너도 진이랑 눈만 마주치면 싸우지 않냐는 말을 듣겠지만, 그건 나보단 걔 잘못이 큰걸. 그러고 보니 얼마 안 가서 농장 방문할 때구나. 가서 힘 많이 쓰겠네... 하하, 빌어먹을. 우리가 먹을 것도 아닌 고기를 왜 이렇게까지 키워야 하는지... 높으신 분들이란, 참 욕심도 많다.

*

하품을 하며 나온 하연은 제 방을 찾아가 잠에 든다. 이번 수색도 참 힘들었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질질 끄는 걸음으로, 하연은 옷을 갈아입고 제 침대에 누웠다. 고개를 대자마자 수마가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야, 일어나서 밥 먹어." 

진의 채근에 슬그머니 눈을 뜬 하연은 저가 얼마나 오래 잠을 자고 있었는지를 보았다. '아, 6시네. 저녁 시간... 그냥 건너뛰고 잠이나 자야지.'

"안 먹어, 잘래, 꺼져."

"얼씨구. 그럼 그거 그대로 주방장한테 전한다? 속상해하실 텐데."

"...넌 꼭 말을 그딴 식으로 해야 직성이 풀려? 좀 멀쩡하게 전하면 어디가 덧나냐? 아오..."

"뭐래, 내가 봐도 너는 좀 먹고 살아야 해. 그렇게 비쩍 곯아서 사람이 어떻게 산다고."

"아, 너보다 하루 늦게 왔잖아, 멍청아... 좀 쉬게 해달라고, 나 야영도 했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재수없는 새끼 같으니. 다른 마을에서 온 놈이라 그런가, 행동 방식도 사고 방식도 전부 다르다. 죽을 걱정도 안 하고 이능이랑 결혼을 할 기세인 게 마음에 안 들어. 요즘 서울 근처에서 식물이 다시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데, 걱정도 안 되나. 저거랑 수습 기간 가지느라 고생 깨나 했지... 

아, 잠 자긴 글렀네. 하연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 너때문에 잠 다 깼어!"

"꼴 좋다, 잠탱이. 난 가서 밥 먹을 거니까 너 혼자 눈이나 멀뚱멀뚱 뜨고 있던지 알아서 해."

허무하다. 어떻게 얻은 소중한 휴식시간인데 이렇게 날려버릴 수가 있지. 가슴이 공허해. 하연은 한동안 좌절했다. 잠은 사랑이요 영원한 친구인데, 친구를 떠나보내다니 이렇게 슬플 수가 없다. 하는수 없이 하연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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