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육체와 영혼을 저울에 올리고

비너모흐 AU 연재소설

*크루즈 소설의 설정을 차용한 비너스×루모흐 장편입니다. 세계관 주인: 박혁거세

*이 소설은 박혁거세 님의 소설 "생 아몬드서는 체리같은 향이 난다"의 스토리라인을 차용했으며, 일부 대사 및 표현을 인용했습니다. 재밌으니까 꼬옥 읽어주세요: https://gogogogogogogogogogogogo.postype.com/post/12764936

시 앤 더 월드 크루즈는 오천 명이 족히 탈 수 있는 거대한 배였는데, 상류층에게 인기가 많아 출항할 때 빈 객실이 남는 경우가 없었다.

루모흐가 오천 명의 개인 신상을 외우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낭비도 참 정성이지.'

창이 없는 방. 침침한 불빛 아래서 눈가를 눌렀다. 여유를 갖고 준비하게 준 시간이 겨우 일주일인 것도 우스웠지만, 그 많고 많은 장소 중 크루즈에서 사람을 죽여야 할 이유는 고민을 해도 알 수 없었기에 더욱 성질을 긁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크루즈의 입구가 열리는 날은 바로 내일이다. 승선객의 명단을 입수하는 데도 애를 먹었지만, 그들의 정보를 단기간 내에 기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대한 양도 양이었으나 하나같이 시시콜콜한 내용들이었기에 권태가 밀려왔다. 인간 관계는 어쩌고, 흥미를 보이는 대화 주제는 저쩌고. 가문과 사업과 사소한 취향 같은 걸 최소화했는데도 양장본 도서 커버 세 권이 필요했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루모흐는 어찌 되었든 서류를 모두 정리했고 주어진 시간 전부를 자료를 익히는 데 쏟아부었다. 물론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가공을 거쳤다. 내용물을 싹 뜯어내고 책등에 서류를 붙여 만든 가짜 책은 제법 그럴듯 했으며, 사진을 없애는 대신 외관 묘사가 모조리 작은 폰트의 글로 대체되었기에 뒤에서 훔쳐 본대도 허점을 알 수 없었다.

"크헤- 헤, 헤. 좋은 오전입니다요, 선생님."

탁, 두꺼운 '책'이 덮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루모흐는 앉은 자세에서 허리를 숙여 상대를 지긋이 바라봤다. 독을 팔다 완전히 폐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말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기침과 빈 호흡을 잇는 노인. 쭈글쭈글한 인간이 손을 샥샥 비비며 루모흐 앞의 의자로 풀쩍 뛰어 앉았다.

"새벽 3시 41분도 오전으로 치시나요? 네, 좋은 오전입니다."

"아이쿠, 아직 그렇게밖에, 켈록, 되지 않았는지요."

"부르신다면 언제라도 방문하겠다 말씀 드린 것은 제 쪽이니,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케흠흠. 노인이 고개를 쭉 치켜들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늙은 조류 같다는 짧은 감상을 뒤로 했다.

"그보다 이유가 궁금하군요. 거래를 마친 건 얼마 전의 일일 텐데요."

루모흐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낮은 탁자와 작은 상대에게 맞추려 몸을 숙이며 작은 전구의 빛을 완전히 등진 탓이다. 노인은 턱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침음했다. 기묘한 압박을 주는 인물이었다. 죽인 이의 수를 짐작할만 해서인지, 저 건조하게 들끓는 목소리 때문인지. 저 새파란 젊은이에게 위축되는 스스로에게 실망했으나 곧 본론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선생님께 필요할 만한 물건을 구해서 말입니다...."

딸그락.

자그마한 유리가 탁자에 부딪히며 경박한 소리가 났다. 루모흐는 그것에 손을 대는 대신 가만히 관찰했다. 하얀 천 장갑이 서로를 스치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채웠다. 건드리면 터져 버리는 독성 폭탄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으나 그것은 루모흐에게는 덜 중요한 부분이었고, 손을 대었으니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며 돈을 떼어먹는 노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한 것이 신중함의 원인이었다. 지갑이 얇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온 사방에서 돈을 뜯겨도 괜찮을 만큼 재물이 쉽게 굴러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향수병에 넣어 두셨네요. 분사하면 되는 종류입니까?"

"그야 그렇지요. 향수니까 말입니다요."

루모흐가 고개를 들었다. 흐린 전구 빛이 얼굴을 비추며 살짝 미간을 찌푸린 얼굴이 드러났다.

"제가 하는 일을 잊으셨나요."

"잊지 않았지요, 않았고말구요."

노인이 쭈글쭈글한 손바닥을 비벼 열을 올린 후, 루모흐가 라벨을 볼 수 있도록 향수병을 돌려 놓았다. 낡고 해진 종이 조각에 필기체로 쓰인 글씨는...

"페로몬?"

노인이 다시 예의 기침 같은 웃음을 내었다.

"사람을 홀린다고들 하지요. 들어 보셨습니까?"

"알죠. 관심은 없는데."

루모흐가 대화의 흐름을 잘라냈다. 노인은 루모흐에게서 그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다. 마음이 안 가는 주제는 흘려 보내던 루모흐의 이전 태도와는 다른 방식의, 직설적인 대답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루모흐가 손가락으로 무릎을 천천히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초조함인가? 어째서?

"이유를 물어도 될지요?"

"...개인 기호죠.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루모흐가 허리를 폈다가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노인은 루모흐가 거짓말을 하는 중이라고 느꼈다. 빨간 속눈썹 아래 노란 눈에 튀는 빛과 향수병에 고정된 시선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사람을 압박하면서도 순간순간 드러나는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 노인의 말라붙은 입술에 보일락 말락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추천하시려던 물건은 이 향수 하나입니까?"

"백의 가치를 가진 하나지요, 선생님."

이제는 노인이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람과 사람은 향기에 끌리지 않습니까?"

일단 노인의 향은 타인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다. 각종 독초와 약품이 한데 섞인 쓰고 텁텁한 냄새를 피부 밑바닥에서부터 내뿜고 있었다. 루모흐는 잠시 이 노인이 향수를 팔기 위해 고의적으로 어떠한 연고를 바르고 온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참 좁은 방에 사람을 불러냈다.

"타인을 매혹하는 일이 손쉬워지는 겁니다, 선생님."

"곧 죽을 사람들의 환심을 사 무슨 득을 보나요?"

루모흐가 냉소했다.

"환심보다는 연심인가? 사실, 그런 요술도 주인이 누군지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나지 않습니까?"

"선생님께선 그 효과를 충분히 누리실 것 같습니다만...."

노인이 연달아 기침을 내뱉느라 말을 멈췄다. 루모흐는 노인에 대한 특별한 걱정 혹은 동정심 없이 그저 향수를 내려다 보았다. 얼핏 까만색이라 착각할 수 있었던 유리는 노란 조명 아래 짙은 갈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노인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루모흐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오만한 구석이 있지만, 참. 가끔씩 드러나는 본심에선 자만은 커녕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속이 썩어있더라도 겉껍질은 꽤나 고운 열매들이 있지요."

"아하. 그게 저군요."

"선생님께서 아부를 싫어하시는 것은 알지요."

"대놓고 까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닌데."

드르륵. 다소 직설적인 답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노인도 황급히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선생님, 루모흐 님. 사랑을 하고 싶으셨던 적이 없습니까?"

자신보다 걸음이 빠른 상대를 잡기 위한 무작위적인 발언이었다.

"마침내 노망이 나셨는지...."

루모흐는 으르렁대며 노인 쪽으로 몸을 확 돌렸다.

"컥, 켈록! 그냥, 선생님, 별에 관심을 두고 계신 듯 하여...."

별? 루모흐가 한 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곧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대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읽고 있던 서류는 "천체의 궤도와 변화의 관측 및 기록, III"이라는 제목이 적힌 책등에 붙여 위장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방에 들어 있는 대신, 막 자리를 뜨려던 루모흐의 손에 들려 있었고.

"모든 천체가 별은 아닙니다. 점성학이 별에 대한 지식의 전부도 아니고."

루모흐가 문고리를 막 잡았다가,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섰다. 이번에야말로 거래가 무산될 것을 예상했던 노인은 따라 뛰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손끝으로 금속 손잡이를 문지르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만큼, 길고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다가.

루모흐가 홱 몸을 돌렸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노란 눈은 예의 형태 모를 빛을 띄고 있었다.

"그 향수, 저한테 넘기세요."

***

이번 승선객 중에는 연인들이 많아서 혼자 다니는 사람이 이목을 끌었다. 특히나 이름이 신문지에 굵게 인쇄되는 사람들이 그랬다. 입수한 정보를 통해서 미리 알고 있던 일이기도 했지만 루모흐는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크루즈 여행을 낭만과 연관 짓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지만, 크루즈의 모두가 낭만에 젖은 연인들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출항하기 전의 배 앞에서 애정 행각을 하는 여러 쌍을 빠르게 지나쳐 들어와 순식간에 객실 문을 걸어잠갔다. 협탁 위, 번들거리는 책자의 앞 표지를 보았다. '선공개! 아스라이 각본 및 연기, 사랑스러운 연인들을 위한 뮤지컬'. 알 만 했다. 루모흐는 책자를 펼쳐 읽으려다 곧 손을 거뒀다. 연극을 구경하러 배에 탄 게 아니었다.

'의뢰인을 만나는 게 내일이지.'

의뢰인과 루모흐는 각각 다른 시간에 승선해 아직까지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의뢰인은 루모흐에게 방을 배정해 주었고, 표를 구한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루모흐는 겉옷을 의자에 걸쳐 놓고 방을 수색했다. 녹음기나 카메라가 숨겨져 있을 것을 의심해서였다.

널찍한 VIP 룸을 뒤집어 엎는 데는 시간이 좀 들었다. 루모흐는 자신이 방 중앙으로 모아 둔 화장대, 소파 및 각종 가구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저 빼빼 마른 몸집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지를 궁금해했을지도 몰랐다. 침대보의 주름을 없앤 뒤 루모흐가 꺼낸 것은 작은 스피커였다.

철컥.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웬만한 승객들은 밖으로 나간 것으로 보였다. 친목을 다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어디서든 놀고 있겠지. 사람이 없다면 테스트를 하기도 좋았다. 루모흐는 문이 굳게 닫혔는지를 확인한 후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스피커와 연결된 리모컨이다. 객실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다. 스피커의 음량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지만 결과는 같았다. 루모흐는 한 칸만 남겨두고 소리를 줄인 뒤 방문을 열어 보았다.

"한낮에도 더위는 없겠습니다. 오후 날씨 또한 내내 맑을 것으로...."

정상 작동. 스피커가 오는 도중에 망가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루모흐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복도 벽의 등 아래에 붙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들 하지, 다들. 초소형 녹음기였다. 특별한 소리를 감지하면 작동하고, 조용해지면 기록을 정지한다. 복도에서 떠드는 말들을 수집하기 적합한 도구. 개인사가 들통날 것을 싫어하는 고객들의 항의 탓에 객실이 위치한 층의 복도에는 CCTV가 없다. 문은 서로를 마주보는 대신 지그재그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기에, 현관 렌즈로 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곧 1층 복도에서는 루모흐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실내 파티룸에서부터 희미하게 음악과 말 소리가 흘러내려 온다.

***

크루즈의 선체에는 금칠이 되어 있어 조명과 함께 찬란하게 황금빛이었다. 배가 바다에 비치며 파도가 노랗게 출렁였다. 워낙에 높이 지은 배라 막상 바다를 가까이에서 보는 기분은 없었으나, 루모흐는 물결치는 황금을 잠시 내려다 보다 시선을 거뒀다.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 배를 탄 거의 모두가 그렇듯, 부유 계층이었다. 가슴팍에 큼직하게 드러난 명품 브랜드의 문양 때문은 아니었다. 알 작고 동그란 안경을 뾰족한 코에 척 얹어 놓자 그의 눈동자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는데, 그는 루모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루모흐는 고개를 까딱해 인사하고, 승선 전 읽은 정보를 되짚어나갔다. 외형을 보자면 그의 이름은 알리에르, 부유한 집안에 기대 여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예리하고 지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종류. 그런 식의 오만이라면 차고 넘치게 알았던지라, 루모흐는 느른한 눈으로 여태 떠나지 않은 시선을 마주했다. 열화된 자신감에는 관심이 없다.

알리에르의 가뜩이나 연한 눈썹이 찌푸려지자 두꺼운 안경테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종종, 당황한 사람들은 다양한 정도의 화를 표출함으로서 방어한다. 몸집을 부풀리는 부류의 특성이었다. 알리에르는 아무도 듣지 않는 헛기침을 하더니, 광 나는 구두에 따각따각 힘을 실어가며 자리를 떠났다.

루모흐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누군가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잘 닦인 홀을 가로지르는 알리에르의 작은 머리는 바빴고 평상시보다 뜨거웠다. 알리에르는 불만족했다. 자신의 시선을 받고도 기뻐하거나 인사를 나누러 달려오는 대신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점이 불쾌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는데, 어디에서 굴러먹어 돈을 번 건지 모를 것이 같은 위치에, 어쩌면 더 높은 곳에 선 것마냥 무덤덤한 것이 기분 나빴다. 언젠가 제 편과 함께 마주치게 된다면, 역시 못난 그 새카만 벨벳 드레스에 얼룩을 만들어줄 의향도 있었다. 그래도 누가 만든 건지도 모를 옷이며 장신구를 걸친 모습을 떠올리며 비웃을 수 있었는데 그것만은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흉을 보고 싶은 것은 일종의, 무결함을 표방한 루모흐의 모습에서 나쁜 인상을 얻지는 못했다는 뜻이었고, 얼룩까지 내 가면서 망치고 싶었던 옷은 적어도 가슴께에 명품 마크가 대문짝만하게 찍힌 것보다는 나았다. 여럿이 모여야만 붙어볼 만 하겠다는 생각도 그 본질이 비겁하였고.

"앗."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생긴다. 금발의 여자가 휘청이며 작게 소리냈다.

"이런! 내 비너스."

여자의 곁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외쳤다. 시선들이 알리에르와 여자에게 집중되었다. 여자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잔은 이제 비어 있다. 와인이 새하얀 드레스에 흥건한 얼룩을 만들었다.

"오, 미안합니다. 고의가 없었음을 밝힐 수밖에 없겠군요...."

알리에르는 그 둘을 알았다. 캥 인리언. 전부터도 영향력이 강한 정치인이었는데 판사 집안 딸과 약혼을 하고부터 입김이 훨씬 거세진 자였다. 캥의 약혼자는, 말 그대로, 비너스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외형이었는데. 하늘하늘한 흰 옷은 미를 주관하는 여신상의 모습을 닮아 있었는데 알리에르가 완전히 망쳐 놓았다.

"옷이 다 젖었잖아! 괜찮아, 비너스?"

승객들은 티를 내지 않고 흘끔흘끔 비너스를 훔쳐보았다. 대화 거리도 동이 날 참에 재밌는 사건이 생겼다. 캥은 이전보다 배는 크게 알리에르를 윽박지르려 준비하듯이 숨을 들이쉬었으나.

"괜찮아요. 먼저 객실 가서 갈아입고 올게요."

그리 말하며 살풋 웃었다.

"기다려 주실 거죠?"

"...흠, 그래. 다녀와."

비너스는 사뿐히 걸어 소리 없이 자리를 떴다. 캥은 그 찰랑이는 금발이 인파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정장 겉옷 깃을 펴 정리했다. 결혼식에서 부부가 으레 그렇듯이 희고 검은 색으로 서로의 옷을 맞춘 듯 보였다. 알리에르는 시선이 흩어진 것을 느끼고 안도하며, 은근한 얼굴로 캥에게 칭찬을 던졌다.

"고운 약혼자 분을 두셔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쁘시겠습니다."

"그럼, 그렇고말고. 내 복이지."

나이 차이가 스물은 넘는 짝이었다. 어린 쪽이 눈에 띄게 아름다운. 캥은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결혼 후에도 금슬이 좋으시겠군요."

알리에르는 '자신의 그룹'에 속한 사람을 마음 상하지 않게 한 것 같다 느끼고 마음을 놓았다. 같이 미소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약혼자께서 본래 배우가 되려고 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혼을 하셨으니 그분께 참 다정히 대해 주시나 봅니다."

"그럼, 그럼."

감탄사가 다양한 축은 못 됐다. 캥은 이 뒤로도 한 번 더 "그럼," 하며 흡족해하고는 술을 입에 잠시 머금었다.

"비너스가 내 부인이라니, 그만한 행운이 있을까."

한편 그 비너스는 다소 어지러운 걸음으로 승객들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얼룩을 가릴 무엇도 없이 많은 시선을 헤쳐나오려니 얼굴이 홧홧했다. 객실은 파티룸 아래 10층씩이나 되는 위치 중 하필 1층이라 멀다.

'그나마 잘된 건가?'

어쩌면 그... 알리오올리오인지 누구인지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대외적인 애정 행각은 약혼 전 서로 합의한 내용이었지만, 축축한 손으로 팔을 붙들어대던 것에 이골이 난 참이다.

'술 냄새 짜증나....'

이럴 줄 알았다면 캥이 권하든 말든 잔을 받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본래 음주를 하지 않는데 이미 몇 잔을 추가로 마신 상태라 정신이 흐리다. 태연할 수 있는데 괜히 서럽고 화가 치미는 것은 그 때문인지.

인지하기 전 비너스는 이미 바다 앞이다. 엘리베이터 쪽에 사람이 북적댈 시간대라 피해 온 결과다. 지붕 아래인 파티룸에서는 몰랐는데 하늘이 꽤 어둑해져 공기가 시렸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가볍게 소름이 돋아 두 팔을 쓸었다. 민소매를 입는 게 아니었다. 계단이 있는 방향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

"안녕하세요."

"!"

모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비너스가 숨을 들이켰다. 반사적으로 후추 스프레이를 집어 뿌렸다. 펄럭 두꺼운 천 소리가 나더니 수상할 만큼 고요해졌다.

몸이 뻣뻣히 굳은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여차하면 후려칠 기세로 주먹을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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