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육체와 영혼을 저울에 올리고
술이 확 깼다.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조용해서는 안 되었다. 기침 소리를 예상했는데 환청을 들었나 의심될 만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곧 눈이 어둠에 익어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는데, 아까의 천 소리는 넓은 옷소매에서 난 듯 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지금은 팔을 살짝 내려 어정쩡한 자세였다. 루모흐다.
"제가... 놀라게 해드렸나요."
그리 질문하면서도 동요한 것은 마찬가지라 문장에 물음표를 넣는 것을 잊고 평평한 어조였다.
"그랬다면 미안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모흐는 비너스가 오기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왔기에 무시할 수 없다 여겨 인사를 한 게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왔다.
비너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손에 힘이 풀려 스프레이를 떨어트렸다. 금속이 땡그랑 바닥에 부딪혔다.
"죄, 죄송해요!"
비너스가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변명이지만, 오해를...!"
"아니, 아니예요. 일어나세요."
루모흐가 손사래를 쳤다. 그 탓에 후추 향이 확 퍼져나가 비너스가 잘게 기침했다. 루모흐는 두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저는 괜찮아요."
그럴 수밖에 없다. 루모흐는 상인을 떠올렸다. 독을 팔다가 폐 건강이 완전히 망가진, 언제나 쓰고 텁텁한 풀 냄새를 몰고 다니는 노인. 겨우 후추액에 반응했다면 예의 그 비틀린 기침을 섞어가며 웃어댔을 게 분명하다. 일반인이 뿌린 약을 그대로 맞았다면 더욱 즐거워 했을 테고.
"그래 보이지 않나요?"
"...네."
비너스는 여전히 얼떨떨한 채로 루모흐를 올려보았고, 그동안 루모흐는 비너스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상대의 이름을 떠올렸다. 원 이름은 비너스, 개명을 해 비너스 첼 러블리. 사람 앞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던데 원인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 루모흐는 비너스의 옷에 흥건하게 와인이 쏟아진 것을 눈치챘다. 보통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얼룩진 옷을 입고 주위를 활보하지는 않으니 무늬겠거니 했는데 지레짐작이었다. 어깨를 얕게 떠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쁘신 분을 붙잡은 것 같아 죄송하네요."
루모흐가 조금 건조하게 웃더니 비너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고개를 까딱이는 것조차 생략한 작별에 비너스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스프레이를 뿌려놓고 할 생각은 아니다만 무례한 행동이 아닌가. 분노했다기보다는 이해가 더뎌졌다. 태도를 본다면 차분하고 예의 바르고 '그룹'의 그 누구도 안 닮았고. 즉 뭔가를 덜 말하는 식으로 남을 망신 줄 인물은 못 될 것 같았는데 필시 자신이 의도를 오해하는 듯 했다.
"조금 전에는 계단으로 가시려던 것 같은데."
세 걸음 뒤 설명이 뒤따랐다.
"천천히 따라오세요. 향이 독해 겉옷은 못 드리겠군요."
저벅저벅 낮은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조금 전에는 본인의 침묵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기척을 내려는 모양이었다. 다만 고요는 습관이고 소음은 고의라 박자가 사람 걸음 같지가 않고 바닥을 두드리는 것과 비슷한 게 흠이었다. 물론 흠은 사람을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진심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려 쓴 수단이 순식간에 무력화되자, 비너스는 원하든 원치 않든 두려워했는데. 적어도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느리고 서투른 굽 소리가 나는 지금은. 비너스는 곧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구두가 밟은 마룻바닥을 따라 디뎠다.
***
계단에는 도톰한 카펫을 깔아 두어 발소리가 미미하다. 그렇다 보니 다소 불규칙하던 구두 굽 소리도 내기 어려워졌는데, 계단에는 파티룸 내 대화장처럼 빛이 환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가끔씩 올라오는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비너스가 파우치로 얼룩을 가렸고, 루모흐가 가까이에서 걸었기 때문에 모두 간단히 목례하고 두 사람을 지나쳤다.
고마운 마음과 어색함이 동시에 들었다. 비너스는 천천히 앞서 걷는 루모흐를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뚝 떨어지는 길고 검은 겉옷은, 밖에서는 몰랐으나, 지금은 금실로 수놓은 문양이 간간히 반짝여 아름다웠다. 사슬 형태의 얇은 허리띠가 계단을 내려가며 살짝씩 찰그락거렸는데, 바꿔 말하자면 그만큼 고요했고 비너스는 그것이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 모르네요."
비너스가 톤을 살짝 높여 운을 뗐다.
"저는 비너스 첼 러블리예요. 다들 비너스라고 하죠. 그쪽은요?"
잠깐 망설임이 있었다.
"루모흐라고 부르세요."
"독특한 이름이네요."
"그런가요."
다시 말 없이 몇 걸음.
"잘 어울려요."
"네?"
"당신 이름이요."
루모흐가 한 계단을 더 디딘 후 멈춰섰다. 그 덕에 서로 부딪히지 않았다. 비너스가 당황한 것은 똑같았지만.
루모흐가 계단 난간을 짚고 비너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선명한 빨간 머리에 눈길이 닿았다. 심장이 화륵 간지러웠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음, 고마워요."
답지 않게 답이 느렸다. 루모흐는 또 잠시 비너스를 바라보다가, 스스로도 약간 동요하는 것 같다가, 아까보다 조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어울린다는 이름은 비너스였을까? 아니면 개명한 쪽일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묻고 싶었다. 비너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기가 겁나 손부채질을 했다. 사실, 당장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얼굴에 설핏 열이 올랐다. 술기운인가.
***
VIP 룸을 제외한다면 각 객실의 층고는 그리 높지 않다. 때문에 1층까지 내려오는 데도 많은 체력을 쓸 필요가 없었다. 루모흐는 루모흐대로, 겨우 계단을 오르내리며 숨이 찰 직업이 아니었고. 비너스는 배우 지망생일 적 오랫동안 체력을 단련했기 때문에 역시 가뿐히 지나왔다.
'내 객실이 1층인 걸 어떻게 알지?'
조금 전의 안심이 무색하게도 목이 차게 식었다. 옷에 쏟은 술 탓은 할 수 없다. VIP실이 배치된 1층 복도는 언제나 훈훈하게 데워져 있기 때문에. 탓해야 한다면 날카로워진 신경을 지목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렌즈를 너무 많이 겪었다.
삑.
무의미한 불안이었다. 루모흐는 101호실의 문의 잠금을 열었다. 비너스가 쓰는 110호실과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비너스는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VIP룸은 이 큰 배에 하나가 아닌데 왜 날을 세웠는지 후회하며. 계단을 내려가며 중간중간 마주치던 사람들을 덜 의식할 수 있었던 건 선의 덕분이었으니까.
한편 루모흐도 후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 후회했는데, 객실 문을 연 지금은 최고점을 찍었다. 덜컥덜컥 모르는 인간들을 초대하는 짓은 어려서도 한 적이 없는데 지금은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가방에 챙겨온 독약들과 작은 날붙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신음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잘근 물었다. 애초 방문 앞까지 이 사람을 데리고 온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문지방을 넘기 전 뒤돌았다. 금빛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조명이 밝아 그렇다.
"잠시 계실래요? 겉옷 가져올게요."
"아니예요, 감사합니다."
문 틈으로 빛이 새어나오다가 달칵 멈췄다. 루모흐가 문을 등지고 섰다.
"방이 이 근처라서요. 갈아입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유를 묻기 전 빠르게 설명했다. 루모흐는 그 말을 듣고서야 서류에 추가로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110호의 배우 지망생이 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루모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객실까지 바래다 드릴 수 없을 것 같아 드린 제안인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다행입니다."
파우치를 든 손에 금빛 실반지가 끼워져 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이 배에는 연인이 많아 혼자 다니는 사람이 되려 이목을 끌었다. 어째서 비너스에게는 짝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 비너스, 비너스 첼 러블리.
"남의 겉옷을 걸치고 다니시면 연인께서 싫어하실 테고요."
입 밖으로 꺼낼 의도 없이 나온 말이었다. 루모흐 그 자신도 놀라 입가를 소매로 가리려고 했다. 지독한 후추 향이 다시 코를 찌르자 그만뒀지만. 비너스가 낮게 웃었다.
"그 자는 제가 무슨 꼴로 돌아다니든 관심도 없던 걸요."
비너스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현재형이라면 아마 그는 지금 객실 칸 위의 파티룸에 남은 걸까.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으나 굳이 질문하지는 않았다. 비너스 또한 고의 없이 대답해버리고 만 것 같았기 때문에.
"가 볼게요. 오늘 죄송했고... 정말 감사했어요."
비너스가 능숙하게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루모흐 역시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바로 객실로 들어갔다. 역시 웃어보려고 했으나 그다지 능숙하게 보였을 것 같지는 않다고, 루모흐가 추측했다. 신발을 벗기 전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음이 잘 되는 건 진작 확인했다.
현관에서 보이는 글자는 금박으로 반짝인다. "천체의 궤도와 변화의 관찰 및 기록, III". 문득 비너스의 짝이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커튼은 걷히지 않고 그대로이다. 별 없는 밤을 기다렸다.
***
아하. 여기에 계셨군.
"넉넉하게 넣었어. 크루즈 비용과... 이것저것, 뭐 그런 것들."
크루즈 '지하'의 어수선한 주류 창고. 루모흐는 형식적으로 가방을 열어 지폐를 확인했다.
"할 수 있겠지? 넌 최고의 암살자니까!"
건너건너 들어서 알 뿐인 이야기를 자명한 사실인 양 외쳐대는 게 꼴사납다. 불콰한 얼굴을 보면 새벽까지 마셔대다 술이 덜 깬 채로 온 건지도. 지폐 더미 위 서류, 첨부된 사진.
"물론입니다, 캥 인리언 님."
인리언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살피면 겁쟁이처럼 보일 거라 여기는 듯 했는데 어느 쪽이든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최고의 암살자'라는 말은 루모흐에 대한 말이지만 '최고의 암살자에게 의뢰하는 캥 인리언'은, 의심의 여지 없이, 평판을 깎을 말이었고 캥은 그것이 조금 겁이 났다. 나무 통이 빼곡히 정리된 주류 창고는 오전인데도 어두컴컴하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공포심이 캥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 너는 그 여자 하나만 죽이면 되는 거야. 알겠지?"
루모흐가 흘긋 서류를 내려다 보았다. 금발의 여자. 사진 옆에 적힌 이름, 비너스 첼 러블리.
"6일 뒤 마지막 축제 날, 그 여자가 가장 추한 모습으로 죽었으면 좋겠군. 모두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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