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육체와 영혼을 저울에 올리고
"6일 뒤 마지막 축제 날, 그 여자가 가장 추한 모습으로 죽었으면 좋겠군. 모두의 앞에서!"
캥은 고의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과격한 언사를 썼다. 하지만 특별히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고 오히려 어느 삼류 연극의 배역 중 하나 같아 그의 발언조차 일종의 질 나쁜 농담 같았다.
캥은 따뜻한 실내에서 이미 실컷 거짓말을 하다 왔기 때문에, 이 어두운 창고에서 하는 그의 말은 전부가 진실이었다.
"어째서 의뢰를 하시나요?"
루모흐가 질문을 한 이유이기도 했다. 암살 의뢰 동기는 관계 없이 일을 마칠 것이지만, 궁금한 것 또한 사실이라서.
"말이 많군. 말해봤자 알겠나? 신분이 다른데!"
'두 번 선거했다간 저 배가 부풀다 터지겠어.'
인리언은 어느 국가의 대통령 후보였다. 누가 보면 왕정국가의 고매하신 신분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알려주시는 편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저희 둘 다 같은데요."
"큼, 그건 그렇지. 뭐 별 건 아니고!"
캥 인리언이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지하 공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어린 게 콧대만 높아서 남편 될 사람을 무시하는 게 꼴보기 싫고.... 같이 살기 좋은 성격도 아니란 말이지. 건드려 보지도 못하게 하니."
"네, 그리고요?"
"그것 애비도 딸자식을 꼭 닮아 거만한 게 재수없단 말이야. 애지중지하던 딸이 죽으면 그 얼굴도 볼만 할테지...."
캥 인리언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든, 잘해. 알겠지?"
그리고는 루모흐의 팔을 툭툭 두드리더니 휘적휘적 창고에서 나갔다.
달칵. 녹음기를 멈췄다.
가방 손잡이를 받아든 쪽의 장갑에 얼굴 화장 분이 묻었다. 술기운이 남아 벌겋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색이다. 비... 약혼자와, 서로 관계가 나쁜 듯 보였고. 그러고 보면 인리언은 직업 치고는 과하게 추문을 뿌리고 다니는 자였다. 즉시 징그러운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기어댔다. 거칠게 손을 털어냈으나 글리터 섞인 연분홍빛은 여전하다.
그러다 누군가를 떠올렸다. 온갖 독한 짓을 다 저지르며 천박한 것 하나는 못 견디던 인사였다. 루모흐는, 그렇다면, 이곳에서만큼은 안전할 수 있겠다 상상했다. 모든 곳을 뒤질 힘이 되지만 이 지하까지는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다면 발효된 포도 냄새도 얼굴 모를 누구의 화장품 자국도 아무래도 상관 없겠다고, 그러니. 더러운 일에 손을 빌려주고 몸을 빌려주고 영혼도 잊어버리기를 계속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지었다.
결단을 내리자 행동이 빠르다. 하루는 짧다.
***
수건으로 머리를 닦자 금세 물기가 가신다. 폭신한 새것이라 딱딱하게 마른 것과는 흡수하는 속도가 다른 게 이유다. 이질감은 들었지만 오래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바다가 한가득 보이는 자리에는 통유리 창이 위치했다. 사실, 벽 한 면이 전부 유리라 보아도 무방했다. 루모흐는 간단히 실내복을 걸치고 흰 쉬폰 커튼을 걷었다. 바다도 하늘도 공평하게 재색이다. 끔찍하게 흐린 날이다. 다시 커튼을 쳤다. 벽면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축축한 장갑 한 켤레가 걸려 있다. 혀를 찼다. 후추 냄새는 더 나지 않고 장갑은 깨끗하지만, 마르기까지는 한참이 걸리겠다.
크루즈에 와서까지 빨래를 하려는 사람은 없고, 애초 이 배에 탈 정도의 사람이라면 스스로 세탁물을 처리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루모흐는 남의 손에 옷을 맡길 만큼 태평한 성격이 못 됐다. 암살자 백 명을 더 데려와도 루모흐 그 자신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루모흐는 욕실의 문을 닫고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손바닥에 기름을 덜어다 얼굴에 발랐다. 평소 안 하던 짓이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반들반들한 얼굴들 사이에 끼어야 하니 모방이라도 하는 것이다. 그러며 의뢰의 내용을 떠올렸다. 마지막 날, 가장 추한 죽음, 비너스 첼 러블리. 실제로, 암살자는 이 세상에 백 명도 천 명도 있을 텐데, 왜 이 의뢰가 자신에게 들어온 건지 의문이었다. 맨 뒤의 단어 때문은 아니고, 두 번째 조건 때문에.
'가장 추한 죽음이라.'
정확한 조건이 붙지 않은 의뢰. 말하자면, 창의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저들이 예술가인 줄 아는 암살자들은 표식을 남기고 편지를 쓰고 무기를 남겨놓고 가고, 하여튼. 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굴었는데 루모흐는 그 방식도 그들 자체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루모흐의 방식이다. 비너스는 크루즈 마지막 날 가장 추한 모습으로 죽어 있을 것이다.
-"고마워요."
손을 멈췄다. 불필요한 회상이다. 천천히 기름을 마저 발랐지만 화장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습관처럼 거울을 보는 걸 피한다.
화장대 옆 책자에 눈길이 닿았다. 협탁 위에서 번들거리는 종이. 루모흐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선공개! 아스라이 각본 및 연기, 사랑스러운 연인들을 위한 뮤지컬'. 비너스 그 사람은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던데 이 '사랑스러운 연인들'에게 바치는 극도 기쁘게 볼지가 궁금해졌다. 책자를 넘기자, 크루즈 4일차에 올라올 뮤지컬이라고 적혀 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볼 극이 될 텐데. 참석할지, 아닐지. 캥 인리언은 과시하길 숨쉬듯이 하는 인간이니 약혼자와 함께 그 좌석에 앉을지도 모르겠다. 비위가 상해 책자를 원 자리에 내던졌다.
그리고 거울을 똑바로 쳐다봤다. 곱슬대는 빨간 단발. 마르고 뻣뻣하게 보이는 신체. 화장품을 발라 봤자 장미빛 윤기 같은 것은 돌지 않는 평소의 창백한 얼굴색. 두 눈이 응시하고 있다. 다른 것은 익숙하더라도, 가끔은, 저 눈과 마주치면 속이 메슥거렸다. 누렇게 가라앉은 눈동자. 생선 기름처럼....
크루즈는 선체에 순금을 입혀 놓아 파도에 노란 빛으로 일렁였다. 저번 밤의 풍경이다.
비너스 첼 러블리.
퍼뜩 자리를 벗어나려 일어났다. 그 풀에 화장대가 덜컥 흔들렸다. 꺼내 둔 많지 않은 화장품이 와르륵 넘어지고. 답지 않게 요란한 짓이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도로로로록.
유리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깨진 걸 수습할 정신까지는 없어 다른 한 손으로 짚어 멈췄다. 차갑다. 낡아서 푸슬푸슬한 종이 조각의 감촉.
손 안에 짙은 갈색의 유리병. 얇은 홈이 작은 면을 가득 채워 오돌토돌했는데 구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난 것도 그 탓이었다. 다만 라벨을 붙일 자리만큼은 평평했는데, 적힌 글씨는.
'페로몬.'
참 쓸데없는 걸 집어왔구나 싶었다. 파인애플과 체리 따위의 향을 흘리고 다니는 킬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물건은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노인에게서 향수를 받아든 것은 시시콜콜한 이유였다. 당시 루모흐는 이계의 꽃향기를 떠올렸다. 매혹하는 향이다. 도망쳐온 곳의 향. 더럽고 천박한 것을 못 견디던 인사의 것이었다. 페로몬 세 글자를 보니 그 생각이 나 챙겼다. 큰 돈이 들었으나 마음을 놓을 용도로는 괜찮겠다 여겼다. 소유하고 통제할 기회가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뚜껑을 열고 손 안에서 병을 굴리다, 그대로 얼굴에 분사했다. 요령 없는 짓이지만 그 방식 외엔 몰랐다. 향이 강해 목을 가다듬었다. 향수는... 달짝지근했고, 고양이 털 냄새가 났으며, 후추 향이 알싸했다. 늘 두렵던 이계의 꽃 향기는 아니었으나, 아니었으나.
그저 지독하게 지겨웠다.
***
엘리베이터는 널찍했고, 바닥의 상아색과 갈색 타일이 파도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승객들에게 이곳이 어느 대도시의 호텔이 아니라 거대한 배라는 걸 상기시키기 위한 것처럼. 짐을 들고 탈 것을 예상해 널찍하게 만들어 두었는데, 폐쇄된 공간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향수를 뿌렸는데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보통은,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는다.
루모흐는 현재 엘리베이터에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루모흐를 비너스가 불러세운 게 원인이다. 조금 떨어져 서고 싶었으나, 대놓고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짓은 무례하다. 숫자판의 층수가 오르기만을 기다리며 살짝씩 곁눈질 하는데.
"향 좋네요."
루모흐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정말요?"
멍청이처럼 되물었다. 아차 하는 마음에 입가를 문질렀다.
"음, 고맙습니다."
떨떠름한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왜, 아예 욕을 하지. 신경질이 났으나 웃음을 꾸며냈다.
"오늘 처음 써본 향수라... 괜찮을 줄 몰랐어요. 다행이네요."
꺼낸 말은 진심이었다. 조금 다듬었을 뿐. 이렇게 고약한 향을 물건이랍시고 판 노친네한테 실망이 컸고 앞으로는 거래 횟수를 줄여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특이하고 좋아요. 자스민 향도 나는 것 같고. 어디서 구하셨어요?"
루모흐는 자스민이 무슨 향인지 몰랐다. 달짝지근한 고양이 털 냄새라고 생각한 게 자스민 꽃 기름일 수도 있겠다고 넘겨 짚었다.
"선물 받았어요. 어디서 샀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러시구나."
비너스가 살짝 미소 지으며 끄덕인 뒤, 이내 옆의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 말을 지어내느라 애를 썼다. 복도에서 만나고 반가워 멈춰세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대화를 하려니 어려웠다. 상대가 특별히 무례하거나 딱딱하다 느끼지는 않는다. 본디 그런 태도고 속내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즐거운 감정에 휩쓸려 온갖 말을 떠들어대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고, 이상한 주제를 꺼내 밉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거울에 비친 루모흐는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전의 까만 겉옷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지금은 걸치지 않은 채다. 와인빛 셔츠와 검은 정장 바지를 간단하게 차려입었고, 물방울 모양 진주 귀걸이가 장신구의 전부였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차림새를 짚어 말하는 게 불편하게 느껴질까 걱정되었다.
"비너스 님."
"어, 네?"
파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부른 루모흐도 덩달아 당황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 같아서.... 편하게 이야기하시라는 뜻으로."
어째 크루즈에 타고 나서 매일 한 번씩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지 않은지, 행적을 곱씹는 루모흐였다. 그것도 두 번 다 같은 사람을. 비너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루모흐를 보았다. 문득 어제의 말이 생각났다. 이름이 어울린다고 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저번에...."
띵.
가벼운 알림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6층. 아무도 누르지 않은 층수다. 누군가가 휘적휘적 들어왔다. 캥 인리언이다.
"오! 비너스."
"여기서 보네요?"
비너스가 환하게 웃었다. 캥은 비너스와 같은 1층 객실을 쓴다. 그가 6층에서 나타났다면 이유는 하나. 모르는 향이 엘리베이터를 채웠다. 값싼 꽃 향기다.
별개로 루모흐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 전 손바닥에 얼굴 화장품을 묻히고 나타난 인간이 그새 다른 층에서 나타나니. 의뢰인은 표적과 가볍게 포옹을 한 뒤 루모흐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
"루모흐입니다."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굳이 이름을 붙여 인사한 것은 초면인 척 하라는 신호였다. 반갑다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 짧게 악수했다.
"나는 캥 인리언이네. 이쪽은 우리 약혼자, 비너스."
캥이 대뜸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둘은 이미 아는 사이인가? 아무튼 반갑네, 반가워."
"좋은 기회 덕분이죠. 두 분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하하하! 듣기 괜찮구만."
캥이 루모흐의 팔을 팡팡 두드렸다. 비너스는 그 모습에 조용히 기겁했다. 이 인간이 대낮부터 술에 취했나? 처음 보는 사람을 대뜸 건드릴 정도로?
캥은 취하지 않았다. 몇 모금 마신 술이 적당히 기분을 올려주긴 했지만, 사리 분별을 못할 정도로 만취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것이 루모흐였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었다. 아랫사람이라는 걸 정확히 인식하기 때문에. 분명한 권력의 차이가 캥을 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어두운 곳에서 나와 이런 장소에서 보니, 몇 시간 전 느낀 기묘한 위압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곳은 캥의 공간이다. 캥의 판단이었다.
루모흐는 자신과 캥을 번갈아 살피는 비너스의 시선을 느꼈다. 짧은 팔이 비너스의 허리를 감싸안는다. 잠깐 안색이 굳는 것이 눈에 띄었다.
"두 분 사이가 좋으십니다."
"그렇지?"
말을 걸자 이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캥이 두 젖은 손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가는 중인가? 식당은 위층에 없는데."
이해가 되지 않아 대답이 약간 느렸다. 그러고 보면 아침부터 점심, 저녁 식사까지 꼼꼼하게 챙겨먹는 것이 이곳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입맛이 없네요. 산책을 할 생각입니다."
"좋지. 놀 거리가 다양하니 즐기다 가도록 해."
자신이 암살자의 표를 대신 구해준 걸 티 내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군다. 엘리베이터에 탄 건 역시 나쁜 선택이었다.
"비너스. 네가 루모흐를 어떻게 아는지가 궁금한데!"
좁은 엘리베이터에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얌전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너스는 소음에 살짝 질렸으나, 사람 앞에선 얌전할 줄도 마음 없이 웃을 줄도 알았기 때문에 싱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 도움을 주셨어요. 감사한 일이죠."
"오! 그런가."
"계단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때 길을 알려 주신 분이세요."
"이거 보답을 해야겠는걸."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잠시 나 좀 보지. 할 이야기가 있어."
그리고 캥은 비너스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비너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루모흐에게 짧게 인사한 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캥은 비너스가 시야에서 사라진 즉시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신호 없이도 의도가 명백했기에 따라갔다. 그리 오래 걷지 않고 한산한 곳에 도착했다. 기둥 뒤 구석진 자리였다.
캥은 그 즉시 속닥속닥 따졌다.
"비너스를 안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잖아?"
"물으셨나요?"
캥은 말문이 막혀 잠시 입술을 뻐끔댔다. 루모흐가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여쭤 보셨다면 알려 드렸을 텐데요."
"그런... 그래도! 너는 내가!"
"조용히."
낮은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여러 사람들의 발이 타일에 부딪히는 게 들린다. 웃음과 음악.
"똑똑하게 구세요. 제가 의심된다면 쓰신 돈을 믿으시면 됩니다."
묘한 향기가 기중을 떠돌았다. 달고 맵고 진한 향. 꽃내음의 모조품과는 근본이 달랐다.
"하시려던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침묵. 긍정의 의미였다. 루모흐가 허리를 폈다. 의중 모를 웃음을 얼굴에 띄운 채로.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원하시는 대로 될 겁니다."
눈빛에 든 것은 예의 따갑게 깨지는 불꽃.
"배웅하겠습니다."
캥은 루모흐가 바라는 대로 했다. 왔던 곳이 아닌 방향으로 떠나버렸을 뿐.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루모흐는, 문득 비너스가 제 약혼자를 기다리는 중일지 궁금해했다. 걱정이라기엔 무심하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움직이기 시작한다.
느리게 걷는 루모흐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레몬색, 하늘색 투명한 눈동자. 머리칼에는 파란 별이 수없이 조각나 반짝이고.... 눈꼬리가 휘 곡선을 그린다. 촉촉한 유리색 입술이 열렸다.
"도와줄까."
루모흐. 오싹 서늘한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둔한 편은 아니고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쪽인데, 그래서인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선'을 느꼈다. 목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아스라이 흩어진 듯.
"꺄아아악!"
비명이 석재 벽에 부딪히며 멍멍하게 울렸다. 먼 곳이다. 필시 사람이 몰렸을 것이다. 반대로 가야 한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면.
루모흐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저 너머에 혼자 남은 사람을 알았다. 아는 목소리가 아니지만, 만약 사고가 난 것이라면, 혹여 휘말렸을까 봐.
비너스가 죽어야 하는 날은 마지막 축제일이었다. 지금은 다치게 둘 수 없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눈이 있다.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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