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7일
사람의 생이라는 것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던가?
서도윤은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어렵지 않게 손아귀에서 놓을 수 있었다. 그건 너무나 쉽고 가벼워서 그동안 왜 이것을 포기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숨이 의식되는 것 이상으로 느리게 폐를 부풀렸다. 깜박, 깜박, 바람에 깎여나가는 조각상처럼 눈꺼풀을 깜박였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쏟아진다. 거대한 작업실 한 켠에 온전하게 세워둔 유일한 작품이 찬란한 빛을 투과해 서도윤의 몸 위로 쏟아냈다. 슈티, 내가 그렇게 좋아? 귓가에서 이안이 속삭였다. 언젠가의 싱그러움이 고루 스며든 청량한 목소리다. 한낱 착란에 불과한 목소리에 홀려 서도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응, 사랑해, 이안.
바로 근처에서 문 긁는 소리가 들렸다. 낑낑거리는 개의 울음소리, 무게를 실어 팍팍 긁어대는 소음이 희미한 진동으로 느껴졌다. 이제와 백색소음 비슷한 것이 되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3일째 되던 날의 당혹 어린 그르렁거림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서도윤은 오토가 그렇게 짖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너 그동안 형을 봐주고 있었구나. 그런 농담을 하며 쓰다듬어주고 싶었는데 밀물 같은 슬픔을 위시로 한 무기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이 작업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제 손으로 빚어낸 이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 주저앉았던 것이 이젠 완전한 구속이 되어 서도윤을 느린 죽음으로 이끌었다.
빛의 온기가 서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막 새벽이 되었는데, 때아닌 수마가 쏟아졌다. 이제 자려고? 웃음 섞인 이안의 목소리가 서도윤의 창백한 뺨을 어루만졌다. 온기가 나긋하여 그대로 잠들고 싶었으나 서도윤은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를 앞에 두고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말라붙은 입술이 달싹였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자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에 색색의 빛이 담겼다. 초점이 좀처럼 맞지 않아 빛이 혼재된다. 엉망으로 섞인 빛이 오롯이 하나의 형상을 빚어냈다. 그가 다가와 서도윤의 눈 위로 제 손을 내리덮었다.
쉬이,
이제 잘 시간이야, 슈.
*
오토가 문을 긁었다. 발톱자국이 무수히 난 문에 재차 발톱을 세웠다. 무신경하게 돌아다니던 아델하이트 역시 사흘째 되던 날부터 작업실 옆에 자리를 잡았다. 종종 문을 힐끗거리며 자동배식기계의 시간에 맞춰 배를 채우던 아델하이트가 귀를 퍼득 떨었다. 확장된 동공으로 작업실 문을 응시하던 고양이가 날카롭게 울며 문을 긁기 시작했다. 드득, 득, 자잘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구하려는 두 동물의 움직임이 간절해진 순간이었다.
삑, 삑, 삑, 삑, 삐이―.
개와 고양이가 동시에 현관을 보았다. 컹컹 짖으며 달려간 오토가 현관 앞에서 펄쩍였다. 익숙한 발소리인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며 현관을 배회하던 오토가 철문에 대고 박박 발톱을 세웠다. 그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문 앞의 사람이 떠나지 않은 모양인지, 잠시간의 침묵 후에 초인종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거실과 부엌을 연결하는 벽에 부착된 인터폰이 환한 빛을 뿜었다. 깨끗한 화질의 화면에 익숙한 이의 모습이 비쳤다. 까만 머리, 은색 눈. 상황을 지켜보던 아델하이트가 인터폰과 가깝게 배치된 아일랜드 식탁 위로 훌쩍 뛰어올라갔다. 팍팍 거칠게 인터폰 화면을 후려치는 주먹은 분명 문을 열어주려 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인터폰은 문을 열어주는 대신 음량만을 끝없이 키웠다.
이윽고 음량이 최대치에 도달했을 즈음, 인터폰 화면의 인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문 열어줘. ……열어줄 때까지 이대로 밖에 서서 기다릴거야.]
*
연약하고도 푸른 새벽빛에 잠겨 잠들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밖이 시끄러웠다. 서도윤은 이미 내리감은 눈을 뜨기보단 엷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오토랑 아델이 뭔가를 떨어뜨렸나. 빛이 그를 다독였다. 그 안온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안이 끊임없이 속삭였다. 도윤아, 슈테펜, 연기 같이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서도윤의 의식을 가라앉혔다. 조금만 더 자자. 그럼 깼을 때 분명 좋은 기분일거야. 그래, 그러자. 너랑 같이…….
거대한 소음이 벼락처럼 서도윤의 뇌리에 떨어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도저히 뜰 수 없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겨우 가까워진 것 같았던 이안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몽롱했던 이성이 빠르게 태세를 갖추고 잔잔히 부서지던 감각이 한순간에 되돌아왔다. 서도윤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회색 눈이 연신 깜박이다 이내 크게 벌어졌다.
작업실의 방음으로도 온전히 차단되지 않을 만큼의 소리가 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말하는 이는 침잠하여 소리치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서도윤의 집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서도윤은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물조차 제때 마시지 않은 몸이 급격한 운동에 휘청였으나 그의 단단한 손은 손잡이를 잡았고 끝내 문을 열었다.
그가 문을 엶과 동시에 그의 두 반려동물이 환영하듯 달려왔으나 서도윤의 좁아진 시야는 그 너머를 향했다. 비척이는 걸음이 두어 걸음 의미없이 주춤거렸다가 이내 달리듯 거실을 가로질렀다. 인터폰 앞에 더디게 멈춰선 그가 선명한 화면 너머의 이안을 응시했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눈이 한참 동안 이안의 인영을 더듬었다. 인터폰 화면의 이안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지도,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지도 않았다. 단호하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양보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는데도 서도윤은 홀린 듯 현관으로 걸어갔다. 지금 당장에라도 눈 감으면 다정한 이안의 목소리가 저를 안락으로 데려갈 것을 앎에도,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이안에게로 향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이 한 번의 헛손질 끝에 도어락을 해제했다. 문이 열리고 현실의 이안이 곧장 눈을 마주쳐왔다.
아, 그는 저 눈 앞에서 도저히 거짓을 뱉을 수 없었다. 감히 거절의 말을 상상할 수 없었고, 또한 물러설 수 없었다. 서도윤은 창백히 핏기 없는 이안의 낯을 살피며 울컥이는 목울대를 억눌렀다. 숨이 천천히 조여들고 폐가 아프게 당겼다. 여전히 현관문 문고리를 움켜쥔 손이 얕게 떨렸다. 그는 울지 않기 위해 버텨야 했다. 그가 울어선 안 되지 않은가…….
푸른 새벽빛을 등에 진 이안이 편지를 내밀었다. 시선을 떨어뜨리자마자 이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일곱 개의 편지를 보내던 순간의 감정이 아직도 살아 있을진데,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안,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러나 서도윤의 빛은 언제나 그러하듯 그가 물러서게 두지 않을 것이기에, 이안은 핼쑥한 낯을 하고서도 문장을 세게 뱉었다.
"진짜 내가 싫어졌다면, 이 편지도 태우고 내가 썼던 편지도 다 태워. 내 눈앞에서."
"……."
"그리고 내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시 말해. 그러면 돌아갈게."
은하수 같은 은색 눈동자가 매섭게 뜨여 서도윤의 잿빛 눈을 곧게 응시했다. 흔들림 없이, 망설임 없이, 이미 부정 당한 증거를 믿음으로 들고서 서도윤에게 내밀었다. 증거를 앞에 둔 서도윤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굳이 그런 게 필요한가? 내가 묻겠는데, 차이안, 내가 왜 널 위해서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해. 난 쓰레기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야. 네 쓰레기는 네가 알아서 치워. 내게 변심을 증명하랍시고 이 새벽부터 대뜸 찾아오지 말고. 그리고 문을 닫으면 끝.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서도윤은 실제로 그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니 특별히 어색한 말도 아니었다. 이 정도 말은 해야 이안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겠지. 서도윤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표정을 천천히 다듬고 단단하게 힘을 준 목에 숨을 불어넣었다.
"굳이―,"
눈이 마주친다. 시선이 닿았다. 빛을 머금은 은빛 눈이 선명한 믿음으로 깨끗이 반짝인다. 언제고 그럴 것처럼, 어느 하늘의 화사한 빛줄기처럼….
내뱉는 숨이 떨렸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이안."
목소리에 울음이 배여 문장 끝이 갈라졌다. 시야를 일그러뜨린 눈물이 기어이 뺨을 가로질러 떨어졌다. 서도윤은 무너지려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폐부가 조였다. 속이 숯을 삼킨 것처럼 뜨겁게 아팠다. 어느 새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한 그가 결국 무너져내렸다.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고해했다. 숨겨서 미안해. 상처줘서 미안해. 잘못했어, 이제 거짓말 안 할게. 울음과 뒤섞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 되풀이됐다. 죄인에게 드리워진 새벽빛이 그를 찌르고 갈라 그 속의 진실을 끄집어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이안,
"사랑해……."
서도윤이 엉엉 울었다. 지난 칠 일 간의 눈물을 모조리 쏟아내겠다는 것처럼 끊임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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