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테디

[최시현] 고백로그 백업

녹는점


녹는점 (고백로그)

 

“시현 오빠는 보기와는 다르게 다정다감하네.”

 

그 말에 뭐라고 답했더라? 7년은 된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래? 그렇게 보여서 다행이야.”

 

아무래도 사람이니 감정이 없진 않았으나 이성보다는 많이 희미한 편이다. 시현은 감정이 치밀어오를 때 ‘내가 이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게 옳은 일인가’를 먼저 재단했다. 이성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감정은 깔끔하게 휘발되어버리고, 맞다 판단하면 의식적으로 얼굴근육을 움직여 표정을 만들어내고 그에 맞는 목소리와 행동을 냈다.

 

그렇기에 시현에게는 본래 제 성격과는 정반대인 ‘다정함’을 표현하는 건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안 그래도 미미한 감정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데다 계산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정한 사람을 보면 더 눈길이 갔다.

 

―그때도 ‘완벽한 애인’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시현이 생각하기에 완벽한 애인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

“검사님, 좋은 아침…… 아니, 휴가 중에 무슨 일이십니까?”

 

김현진 수사관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신의 영감님을 보고 당황했다. 평소에도 깔끔한 정장을 입고 다니긴 했으나 저런 각 잡힌 스리피스까진 아니었는데. 혹시 언론사 인터뷰라도? 아니면 대검에 들어가시나? 그런 일정이 있다곤 말씀 안 해주셨는데?

당황한 기색의 수사관과 실무관을 보고 시현이 눈꼬리를 접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전에 주문했던 물건을 오늘 보냈다고 연락받았는데 주문 당시에 수령 주소를 이쪽으로 했지 뭡니까. 퀵 받으러 왔습니다. 연락이 오면 알려주세요. 제가 가지러 가겠습니다. 온 김에 일도 좀 하죠. 어차피 휴가 끝나면 해야 할 일이니까요. 아, 제주도에서 선물 사 왔는데 휴가 끝나면 들고 오겠습니다.”

 

실무관은 ‘우리한테 자택으로 퀵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게 낫지 않나?’ 하고 생각하다가 '어차피 휴가 끝나면 해야 할 일'이라는 말에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건의 처리기한은 법적으로 정해져 있고 그건 담당 검사의 휴가 같은 사정을 반영하지 않으니 일은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았다.

수사관이 시현을 피의자 심문할 때의 눈으로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혹시…… 오늘 무슨 인터뷰라도……?”

“프러포즈하러 갑니다. 실무관님, 저 없을 때 특이사항 있었습니까?”

“프……?”

“아뇨, 없었습니다.”

 

갑자기 떨어진 질문에 실무관이 화들짝 놀라 대답하곤 자리에 앉으며 시현을 힐끗거렸다. 평소보다 생기가 있는 얼굴, 고급스러운 정장에, 조끼의 버클을 조여 드러난 허리선을 보곤 ‘난리 나겠네…….’하고 중얼거린다.

시현은 자리에 앉아서 이프로스에 접속하고는 제게 할당된 사건 개수를 확인했다. ……파견과 휴가 덕분에 형사3부 검사들이 좀 나눠서 떠맡았을 텐데 어떻게 이런 숫자가? 심지어 지금 동계 휴정기 아닌가? 믿을 수 없는 숫자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켜 커피를 사러 간다고 하자 실무관이 급하게 뜯어말렸다.

 

“제가 갈게요. 검사님은 오늘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혹시 점심도 드셔야 하면 배달시켜 먹어요. 그리고 퀵도 제가 받아올게요.”

 

실무관은 시현의 비주얼이 너무 강렬해 프러포즈라는 말을 넘겼다가 점심 때쯤 돼서야 뒤늦게 ‘검사님이 프러포즈요?’하고 놀랐다.

 

 

 

 

 

 

첫인상은 ‘뭐지, 이 사람?’이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이웃. 현관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자신에게 가벼운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자신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자신보다 훨씬 커서 살짝 올려다봐야 하는 중년인. 얼굴 골격부터 동양인의 것이 아닌데다 홍채도 푸른색인 이국적인 외모면서 하는 말은 충청도 사투리다. 누구든 진짜 뭐지, 이 사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아침으로 반주와 함께 국밥을 먹을 때까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서로의 비밀을 걸고 내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저 은근히 꼿꼿한 사람을 굴종시키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 후 필름이 끊겼다. 술에 절어 뜨거운 눈 위를 차가운 뭔가가 덮었다. 뇌가 열기에 익었는지 아무 생각도 못 하는 상태였다. 이 열을 식혀야겠다는 본능에 차가운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 위로 손을 겹쳤다. 무언가 목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은 인식했으나 무슨 말인지 해석 불가능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시끄러워.’ 내뱉은 말에 귀를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눈 위를 덮은 차가운 것이 미지근해졌을 때, ‘이제 말해도 되나.’ 시현의 귀에 닿은 조심스러운 속삭임에, 제 눈 위를 덮은 것이 손이라는 것을 그제야 인식했다. 자신의 체온과 비슷해진 손. 그 손을 놓아주고 푸른 눈에 비친 자신을 마주했을 때, 굴종한 건 자신임을 직감했다. 시현을 꿇린 건, 시현이 동경하던 다정함이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시현에겐 사소하지 않았다. 약간 냉정을 잃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물었다.

 

‘설마 우리, 자기로 했습니까?’

 

 

 

 

 

 

오후가 되자 퀵이 도착했다. 실무관이 받아온 갈색의 종이박스를 뜯어보았다. 안에는 초록색 쇼핑백 두 개가, 그 초록색 쇼핑백 안에는 흰 박스가 하나씩 들어있다. 매장에 가도 공기만 있다는 제품이라 구하기 힘들어서 친가의 도움까지 받을 뻔했다. 돈과 인맥을 이용해 어찌어찌 제힘으로 구했지만. 쇼핑백을 확인하고 다시 종이박스를 덮어 책상 아래에 두었다.

 

 

 

 

 

‘수염은 일부러 기르는 겁니까? 키스할 때 방해돼요.’

‘자르라고? 오늘만 참아. 아니면 그렇게 싫어하는 거 보니 북실북실 더 기르는 것도 괜찮네. 생각은 해볼게.’

‘밀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이 있다면요.’

 

 

그런 대화가 오간 날에서 며칠 후, 집 근처에서 마주친 그의 턱은 수염 없이 깨끗했다.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며칠 전의 상황과 현재 그의 태도를 바탕으로 그가 어떤 의도로,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배려를 했는지를 순식간에 도출했다. 이미 확신했으면서 그의 입으로 제대로 된 ‘말’을 듣고 싶어 괜히 떠보듯 물었다.

 

‘왜 면도한 겁니까? ―저랑 키스하려고?’

‘여우 같은 놈. ……뻔히 아는 거 묻지 좀 마.’

 

그때 시현의 머릿속에 있던 천칭이 쓰러졌다. ‘성별’, ‘나이’, ‘입장’, ‘위치’. 천칭 위에 올라가던 추들이 같이 나뒹굴었다. 쓰러진 천칭에는 추를 올릴 수 없다. 계산이고 뭐고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천칭이 무너진 건, 감정이 이성을 짓누른 건 33년간 살아오면서 이때가 처음이었다. 떨어지려는 입술을 집요하게 쫓아 다시 입술을 겹쳤다. 타액과 호흡이 섞이면서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차올랐다. 가슴을 다 채우고도 넘쳐 머리까지 잠식했다. 이땐 그게 뭔지 몰랐다.

 

‘좋아요. 안 거슬려요.’

‘―길에서 이러면 안 되지. 검사님 공연음란죄로 잡혀가면 어떻게 해.’

‘저를? 감히? 그러니까 한 번 더 해요. 사실 저번에 많이 못 했어요.’

 

평소 이성이 정상적으로 동작하면서 천칭을 기울일 때의 시현이라면 사진이라도 찍힐까 봐 조심했을 거였다. ‘검사 최시현’의 이미지를 지키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심력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임관 후 5년의, 아니 평생의 노력을 날려 먹을 수도 있었다.

 

‘데이트하자.’

 

이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휴가 중에 출근한 미친놈이 멋있게 차려입고 왔다는 소문 듣고 얼마나 멋있는지 구경하러 왔다~.”

 

수사관과 실무관이 사건 서류를 가지러 간 사이 혼자 있던 시현은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여성을 보고 보란 듯이 인상을 구겼다. 턱밑까지 오는 칼단발에 바지 정장을 입은 그녀는 시현과 동갑이면서 검사로는 2년 선배인 강새빛 검사다. 같은 형사3부에 바로 옆방이었고 나이까지 같아 발령 당일부터 친하게 지냈다. 기수보다 나이로 따지자는 강새빛 검사의 제안 때문에 가능한 관계였다. 기수를 신경 쓰지 않는 것부터 웬만한 건 그냥 웃어넘기는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그녀 앞에선 시현도 어느 정도는 사회성을 내려놓는다. 강새빛 검사도 시현이 까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걸 더 좋아했다. 재밌다면서.

 

“워킹이라도 보러 왔어?”

“어. 해. 볼래.”

 

강새빛 검사가 깔깔 웃으면서 의자에 자리 잡고는 얼른 해보라며 손바닥을 테이블에 팡팡 두드렸다.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턱을 괴고는 들고 있던 형광펜으로 문을 가리켰다.

 

“지금 꺼지면 사건 3개 받아준다.”

“아, 바로 꺼지겠습니다!”

 

강새빛 검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나가기 직전, 시현을 쳐다보고 음흉하게 웃는다.

 

“너 차려입은 거 소문 다 났다? 단톡방에 사진도 돌더라?”

“미쳤나…….”

“넌 나만 보면 입에 필터링이 없어지더라. 아무튼 바로 꺼질 테니까 3개 받아주세용~. 어려운 걸로 넘겨야지~.”

 

한 호흡 동안 생각한 시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이걸 이용하면 은근히 치대는 사람들을 차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강 프로.”

“응?”

“소문내. 최시현 검사 품절 된다고.”

“헐. 뭐야. ……아, 잠깐. 설마 오늘 프러포즈해? 대박. ……그런데 그럼 아직 품절일지 반품일지, 구매결정된 건 아니지 않냐?”

 

역시 검사답게 추론이 정확하다. 시현이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툭 내뱉었다.

 

“―――.”

 

 

 

 

 

이젠 인사와도 같은 입맞춤, 추위에 몸을 떨자 품 안으로 당겨 전해주는 체온, 괜히 심술을 부리자 깍지 껴 잡아온 손의 온기, 어지러울 때 뺨에 닿아온 손등, 여수에 가자는 약속, 제 역린을 실수로 건드리자마자 잘못을 깨닫고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행동.

 

‘시현아, 이름으로 부르는 게 더 좋아? 앞으로 많이 말할게.’

 

그 때문에 한 번 고장 났던 천칭은, 그 후로 그의 앞에서만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그리 긴 시간을 교류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함께 있는 매시간, 매분 시현의 이성과 벽을 녹였다.

―그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다정함으로, 자신을 이렇게까지 길들였으면 책임을 져 줘야 하지 않나.

 

 

 

 

 

퇴근 후 꽃집에 들러 예약한 꽃다발을 찾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하고 조수석의 초록색 쇼핑백 두 개와 백 송이 장미꽃다발을 힐끗 보곤 차에서 내렸다. 조수석 문을 열어 장미가 상하지 않도록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지하 주차장에 가벼운 구두 소리가 울린다. 이상하게 긴장이 안 됐다. 저번에 자신의 비밀을 들고 찾아갈 때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는데,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계단을 올라 1층으로 가선 꽃다발과 쇼핑백을 든 오른손을 뒤로 숨기고 103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의 손목을 끌어당겨 오늘의 인사부터 했다. 짧게 입을 맞추고는 뻔뻔하게 집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최시현.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빼입었어?”

“왜겠어요? 새도 구애할 땐 꽁지에 깃 꽂잖아요.”

 

시현이 씨익 웃으면서 현관문을 닫고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저 이런 프러포즈가 처음이라서 정석대로 하려고 했는데, 레스토랑에서 하면 경감님이 사람들 시선 같은 걸 신경 쓸 것 같아서요. 이건 집에서 드릴게요. 그래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예약은 해뒀습니다. 저녁 먹으러 가자고 약속한 거니까요.”

 

퍽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고 시현이 해사하게 웃었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예쁜 표정이었다. 그가 당황해서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꽃다발을 받자 연이어 초록색 쇼핑백 두 개를 내밀었다.

 

“커플링으로 할까 했는데 좀 안 어울리는 것 같고 반지 치수도 몰라서 시계로 했습니다.”

 

 

‘저, 경감님의 시간을 받고 싶어요.’

‘……검사님 시계랑 내 시계가 달라서 안 돼. 후회할 말 좀 쉽게 하지 마. 뭐 어린애들 꼬시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라도 같은 시계 쓰고.”

 

 

‘아, 저 완전히 길들여졌어요. 언제부터지? ―황금빛 밀을 보면 당신 생각이 나겠지요.’

‘여우야, 몇 시에 오면 돼.’

‘지금 시간을 기약할 수 있습니까?’

‘……검사님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다. 자, 약속했다. 12시 땡.’

‘그럼 경감님의 여우는 열한 시부터 마음을 부풀리고 있을게요.’

 

 

“시간 맞춰서 오시라고요. 저 길들인 책임 지셔야죠.”

 

 

 

‘……지금 이거 자존심 다 버리고 얘기하는 거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나중에 정말 힘들 것 같아서, 딱 이 거리 유지하자고.’

‘관계를 떠나서, 떠보고 시험하지 말라니까. 난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 것 같은데. 검사님 생각은 아닌가 봐.’

 

 

그리곤 가벼운 태도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그땐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내뱉었다.

 

“저는 이 거리가 안 괜찮아요. 불확실한 관계는 불안해집니다.”

 

시선을 들어 푸른 눈을 직시했다.

 

“제가 경감님을 시험하거나 떠보지 않게, 경감님이 물러나지 않게. 애매했던 저희 관계를 특정한 단어로 정확히 칭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곤 최선을 다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 제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쓸 셈이다. 화사한 얼굴과 어울리는, 언뜻 달콤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저랑 연애해요, 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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