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아주 느린 바다

패스파인더

유적 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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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숲그림자에서도 여자를 찾지 못했다.

네펠레 숲을 떠나온 지 2주가 지났고 젊은 레인저는 여전히 여자의 손을 탄 안대를 쓰고 있었다. 생의 수치를 아는 눈을 가리는 물건이다. 그의 검은 안대는 바늘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의 손길을 기억하는 뺨과 얼굴을 기억하는 눈이 그에게 아직 있다.

트리스탄 오데어는 기억의 숲에 가장 아픈 기억을 두고 왔다. 이제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슬에 축축한 그림자 사이에서 춤추는 흰옷의 여인이 아니고서야. 그러나 어떤 숲그림자 아래서도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범람하는 기억의 틈바구니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할 때쯤 춤추는 인영은 더 보이지 않았다. 기꺼운 일이다. 그리고 슬픈 일이기도 했다.

네펠레 숲을 떠나 말 위에 짐을 싣고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남쪽의 사막이었다. 땅이 버석버석해지기 시작할 때쯤, 그는 지급받은 갈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탁 트인 곳은 영 공허한 느낌이 있다. 오랜만에 걸치는 모래색 망토에 금색 단풍잎 핀을 걸며 트리스탄은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거친 땅이었다. 짙은 초록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숨어들 그림자라고는 발밑에만 있는 척박한 땅. 그런데도 꽃 핀 구릉과 닮아 있는 것들. 사라지지 않는 사이프러스 나무.

전초기지에 다다라 그가 본 풍경은 사뭇 달랐다.

모래의 파도처럼 크게 굽이치는 언덕과 지평선을 가리는 거대한 모래 산은 쓸쓸한 풍광이었다. 바람이 불면 언덕의 위치는 조금씩 바뀌었고, 그곳에 남은 공통점은 그저 같은 모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말고는 곧 남지 않게 되었다. 파도가 바다와 같은 물방울로 이루어졌듯이.

아주 느린 바다. 트리스탄은 정의했다. 느린 금빛 바다였다. 사막은.

그리고 그는 서럽게 쌓인 모래 위를 걸어 새벽에 닿는다. 모래는 그의 발걸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것이 트리스탄을 기껍게 만들었다. 수면 위를 걷는 듯한 심상이 맺힌다. 사막의 하늘은 타오르고, 이내 지평선 너머로 해를 집어삼켰다.

땅이 식으며 한기가 올라왔다. 늦여름의 밤하늘이 차츰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트리스탄은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어스름이 걷히고 하늘에 균열이 생겼다. 혹자는 그 균열을 은하수라고 부른다.

트리스탄은 그 자리에 망토를 깔고 주저앉았다. 목을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다, 이내 팔다리를 던지고 모래 위에 드러누웠다. 별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푸른빛이 도는 밤의 빛 때문에 그의 얼굴은 창백한 듯이 빛났다.

그림자가 없는 이유는 당신을 찾지 말라는 뜻일까.

트리스탄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대신 입을 열었다. 잠시 그대로 버석버석한 바람이 들어오도록 두었다가, 잠긴 목소리로 느리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 나의 사랑. 당신은 나를 모질게 대하는군요. 나를 매정히 떼어내기 위해서인가요. 나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는데. 당신 주변을 즐겁게 만들면서요.

푸른 옷소매 나의 기쁨이었네.

푸른 옷소매 나의 고결한 마음이었다네.

그의 낮고 맑은 목소리가 갈급함을 모르고 노래했다. 사방이 트인 탓에 소리는 한없이 뻗어간다. 트리스탄은 손을 뻗어 차갑게 식어가는 모래를 손가락 사이로 흘렸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그를 섪게 만든다. 이 하늘을 당신은 영영 볼 수 없었겠지. 왜 이 풍경을 나는 몰랐지. 왜 당신이 모르도록 두었지.

두고 온 기억이 떠올랐다. 트리스탄은 눈을 감지 않았다. 별이 흘러갈 때까지 그저 바라보았다. 별과 별 사이를 이으며, 둥글고 모난 이름을 붙였다.

 


깊은 생각에서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는 아직 어스름이 짙은 새벽이었다. 지금이구나. 당신이 말한 시간이. 그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칼 사이로 들어간 듯한 모래알을 대강 털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언덕을 오르는 인영은 모래언덕 위의 작은 모래언덕처럼 보인다.

언덕의 꼭대기까지 다다른 그는 두 발로 선 채 동쪽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직 별빛은 야트막하고, 슬픈 곡선의 모래 구릉도 그대로다.

일출은 찰나와 같을 것이다. 채 반 시간도 되지 않는 핏빛 하늘을 보기 위해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 태양은 매일 뜨는 그 태양이다. 매일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그 태양이다. 그런데도 서러운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사랑하니까.

지평선 너머가 꿈틀거렸다. 트리스탄은 자신이 떠나는 감각을 사랑함을 알았다. 그래서 슬픈 마음으로 사이프러스 구릉을 떠날 때 행복했다. 그는 방랑을 사랑했다. 이렇게 마주하는 풍경을 사랑했고, 인파를 헤치고 붙잡는 손을 사랑했다. 트리스탄은 입을 다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직한 기다림이었다.

트리스탄 오데어는 사랑하는 길의 위에 있다.

그날의 아침은 트리스탄이 그 시간을 유독 길게 곱씹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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