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마지막 밤

탈리아

유적 by 량돌
7
0
0

늦봄의 어느 밤은 서늘하고 이슬의 기색이 어려 있다.

트리스탄은 김이 오르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언뜻 붉고, 그보다 조금 갈색에 가까운 듯하다. 향 나는 풀을 대충 냄비에 넣고 끓인 방랑자들의 차와는 차원이 다른, 값비싸다면 값비쌀 사치품. 근 몇 달 사이 그의 입은 이런 물건에 익숙해졌고 트리스탄은 그것이 달가웠다. 정성이 들어간 물건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 그가 찻잔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단순히 기호의 문제는 아니다.

트리스탄은 고개를 들어 옆에 앉은 여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탈리아는 근래 들어 그에게 화를 곧잘 냈고 그때마다 트리스탄은 슬픈 얼굴로 침묵했다. 떠나는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려는 탈리아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럴수록 트리스탄의 심정은 참담해졌다.

죽음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힘을 가졌든, 어떤 삶을 살아왔든 불가능한 일이다. 트리스탄은 남들보다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수없이 죽음을 목격했고, 방관했고, 선물했기 때문에. 탈리아 역시 남들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여자는 나기를 죽음의 망토 아래서 났고 자라기를 그 그림자를 쫓아갔다. 죽음에 대해 잘 아는 두 사람이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다. 언젠가 끝날 삶이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에 감사했다. 그러기를 꼭 100일이었다.

그리고 트리스탄과 탈리아는 침대 옆으로 끌어온 식탁 앞에 앉아 차를 한 잔씩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탈리아는 마른기침을 뱉었다. 그 소리가 침묵을 깨는 듯했다. 트리스탄은 입을 열어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가? 알 수 없었다.

“탈리아.”

“아무 말도 하지 마.”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탈리아는 싹을 잘랐다. 그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래서 트리스탄은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꺼낸들 의미가 없을 것이다. 끝이 다가온 이상은. 도망칠 수 없다. 울 이유도 없다.

트리스탄은 김 오르는 잔을 손으로 잡았다. 천천히 들어 올려 안에 든 것을 단숨에 마셨다. 차는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했건만, 탈리아는 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트리스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간소한 티타임은 트리스탄의 마침표로 끝났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탈리아는 한참 동안 찻물이 식어가도록 두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도할래.”

반쯤은 묻는 듯한 말이었고, 나머지 반은 결심이었다.

트리스탄은 묵묵히 목에 건 십자가를 벗어 연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와 10년을 함께한 나무 십자가는 손때 묻고 칠이 벗겨져 맨들맨들했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렀던 염원이 성마른 손 위로 떨어진다.

트리스탄은 손을 뻗어 탈리아의 손 위에 겹쳤다. 늦봄의 밤공기 때문에 손끝은 서늘했다. 탈리아가 푸른 눈을 천천히 감고, 트리스탄은 한쪽 눈을 감았다. 그들은 잠시 조용히 기도했다. 트리스탄은 탈리아가 무엇을 기도하든 그것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지난 100일을 더듬어 생각해 보아도 탈리아가 무엇을 바랐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은 트리스탄을 조금 슬프게 했지만, 이제 와서는 슬픔이라는 것도 바닥을 보이는 것이다.

“전능하신 레이.”

탈리아가 입술을 열어 말했고 트리스탄은 눈꺼풀 뒤의 어둠 속에서 그것을 가만히 들었다.

“저희가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평화와 바꿔야 할 일을 바꿀 용기와 그 둘을 구분할 지혜를 주소서. 천지의 창조주이자 만물의 지배자 되신 레이여.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평화의 기도. 트리스탄과 탈리아는 그 기도문을 그렇게 불렀다.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 그날 밤은 그것으로 족했다. 트리스탄은 천천히 탈리아의 손을 놓았다. 여인은 다시 마른 기침을 했다. 젊은 레인저는 자신의 것인 십자가 목걸이를 그 손에서 거두어 다시금 목에 걸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듯했지만, 그들은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껏 지나온 모든 밤을 돌이킬 수 없다.

“트리스탄.”

탈리아는 침대에 기대어 그렇게 속삭였다. 그의 이름이 마치 무엇이라도 되는 양 생경하게 발음했다. 트리스탄은 대답하는 대신 침대맡에 앉아 연인의 홀쭉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마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면서, 그 분노는 어디로 갔고 슬픔은 어디에 숨겼는지.

“그래.”

그는 나직하게 대꾸한다.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슬픔을 담지 않는다. 해서 그 목소리는 조금쯤 건조하게 들린다. 연인은 말하지 않는다. 트리스탄은 이유를 알면서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일어나 찬장에 넣어 둔 종이봉투를 꺼냈다. 아편을 꺼내든 그는 여인에게 그것을 건넸다. 단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탈리아는 별말 없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트리스탄은 연인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램프의 불을 불어 껐고, 희미한 달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것 외에는 사위가 캄캄해졌다. 그는 연인의 옆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기다렸다.

무엇을?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감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지, 트리스탄 오데어? 그는 자문했다. 답을 알고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침묵했다. 바람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집안을 약하게 흔들었다. 커튼과 식탁보 자락이 흔들렸고 트리스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트리스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행여나 연인을 깨울까 두려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자신이 움직여도 연인이 깨어나지 않는 것이 더 두려웠다는 것을. 그것이 정말로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조용히 돌렸다. 탈리아의 어깨가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눈을 잠깐 감았다.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여인의 숨소리는 조금 거칠고 얕았다. 눈을 떠올려도 그 소리는 그대로였다. 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 가느다란, 그러나 밭은 숨소리.

“탈리아.”

트리스탄은 입을 열었다. 여인이 마지막으로 듣기를 바라면서.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듣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그러니 나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그는 거짓말 뒤에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러자 잠든 새벽이 천천히 덮쳐왔다. 트리스탄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을 즈음, 정확히는 그 사실이 의미 없어질 즈음 트리스탄은 무언가가 끊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인의 어깨가 더는 오르내리지 않았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귓가에 울리는 소리는 한 개의 심장이었다. 무언가가 끝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트리스탄은 돌아누웠다.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기에 여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젊은 레인저는 그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등에 가만히 이마를 기댔다. 온기가 여전했다. 그리고 그는 소리 없이 기도했다.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평화를.

바꿀 수 없는 일을.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