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름을 먹는 시간
칼바람과 눈동자의 시간
멸망은 팔다리를 던지고 시체들 사이에 누워 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는 깊었다. 정의로운 살인자들이 피 웅덩이를 밟고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희망의 숨소리.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으므로 터지지 않는 함성이 있다. 그러나 그날, 선의가 승리했으므로 절규하지 않는 자들만이 걷는다. 황궁을 향해, 황좌를 향해, 악취 어린 부패와 탄압과 핍박과 혼란을 불태우기 위해 걷는다.
피 웅덩이에 누운 채, 데닉 위스펜 레브텔지아는 사람의 것이 아닌 숨을 내쉰다. 웃음처럼, 조금 허탈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패배했다.
끔찍하게 다행이었다. 레브텔지아의 이름을 들고 황가의 개가 되기를 자처한 순간부터 데닉 위스펜은 환난의 불씨요 그 자체로 장작이었다. 검을 들고 싸우되 죽기를 바랐다. 먹고 걷고 숨을 쉬되 그 끝에 가장 모욕된 이름으로 죽기를 바랐다. 그는 창조의 그림자다. 그는 파괴와 궤멸이다. 그는 멸망이다. 증오로 벼린 비수를 들고, 가문의 이름을 갈가리 찢어야 했다. 그러나 레브텔지아의 이름이 욕되게 무너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무너졌는지도. 그것이야말로 그의 숙원이고 기쁨일진대, 제노스의 이름으로 전장에 누운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데닉은 생각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이에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이죠, 이건 음모에 가까운 거대한 오해랍니다. 저는 사실 제노스 기사단이 망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곳에 있거든요. 비록 당신네 기사들을 좀 죽이긴 했지만 그건 전부 오해받지 않으려고 한 일이었어요. 저는 착실히 제노스 기사단의 군량을 축내기 위해 끼니당 2인분씩 먹으며 지냈어요. 부디 저를 용서하시고 살려주시면, 저한텐 멸망시켜야 할 가문이 하나 있어서 말인데 얌전히 가 볼게요.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먹힐 리가 없지 않은가? 데닉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금껏 하던 대로 열심히 죽은 척을 계속했다. 몸통과 다리에 난 베인 상처가 그의 죽은 척을 뒷받침해 주었다. 티 나지 않게 숨을 죽이자, 데닉 위스펜 레브텔지아는 바헬리에서 가장 생기 있는 시체가 되었다.
발걸음이 지나간다. 반란군은 당장 시체를 들쑤셔 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체로 추정되는 것들을. 대신 제노스와 황가의 깃발을 짓밟는다. 깃대를 부러뜨리고 휘장을 불태운다. 살아 도망가는 자들을 잡아 죽인다. 끌고 간다. 황가의 개돼지들. 고혈을 빨아먹고 잘도 살아 숨 쉬고 있었구나. 뻔뻔한 목숨을 앗아 벌해주마. 외치는 말에 죽은 자들은 대답이 없다. 변명할 기회조차 그들에겐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의 이유는 명확하다. 그릇된 곳에 충성한 결과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지 않았을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편이 무슨 짓을 저지르며 역겨운 삶을 이어갔는지? 적어도 데닉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 이곳에 왔다.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음의 맛은 짜다. 허공의 떠도는 것이 해묵을수록 고약해져 갈 것이다.
데닉 위스펜 레브텔지아는 자신을 불사를 줄만 알지, 죽음을 바란 적이 없었다. 해서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죽을 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그의 생각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지런하다. 그가 레브텔지아의 이름을 단 채로 죽는다면, 그리고 가문의 뜻에 따라 제노스의 기사로 참전했다는 유서의 내용이 공개되면 그의 저주받은 이름은 모두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데닉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혹시라도 죽었을 때. 성벽에 목이 걸리는 것은 제노스의 단장과 황가 식구들뿐일 테다. 이유가 있다면, 제노스의 말단 기사까지 전부 목을 걸기엔 자리가 모자라니까. 그러니까 운이 좋으면 그럭저럭 목은 안 잘리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아인카르테 바를리오니의 창에 꿰뚫릴지도.
자연스레 모르는 이들의 목이 걸린 성벽을 데닉은 떠올린다. 알렉세이 소칼로프의 목이 걸렸다던 그날의 성벽을. 그리고 그토록 커다란 성벽 앞에 선 작은 까마귀도. 등에 닿아오던 숨결과 생각보다 단단하고 무거운 몸을.
안테이아 디케 스톰크로우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물리적으로 단단하고 묵직한 사람인 것을 넘어, 정체 모를 것들이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어떤 스톰크로우보다도 겨울을 닮았고, 서릿바람탑에 걸맞은 자였으며, 살인을 잘 알았다. 디케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그가 죽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적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그는 순진했던 열 살 아이를 멍청한 계집애라고 칭할 수밖에 없던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유년을 배반한 자들을 찾아가 목숨을 앗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굴곤 했다. 데닉은 못내 그것이 안타까웠다.
스톰크로우. 데닉은 그 이름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폭풍, 그리고 까마귀. 바헬리의 흉조. 어쩌면 곧 죽을 수도 있을 순간에, 어째서 그 이름이 떠오르는 것일까. 그도 여기 있을까.
“죽었습니까?”
“꺄아아악!”
데닉은 새된 비명을 우렁차게 질렀다. 죽은 사람이라고는 거꾸로 서서 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바헬리 최고로 생기 있는 시체가 되겠다는 그의 야심에 찬 계획은 기가 차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스톰크로우 백작은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데닉이 눈을 감고 그를 생각하는 사이 지척에 다가온 채로, 까마귀는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앳되고 끝이 조금 갈라지는, 다급하지도 느릿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아니, 조금 다급했던가? 돌이켜 생각하면 백작치고는 제법 여유 없는 목소리였을지도 몰랐다.
데닉은 급하게 도로 감았던 눈꺼풀을, 다시금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눈치를 보며 한쪽 눈만 뜬 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피에 젖은 두 사람이 마주 본다. 데닉은 몸을 움직여 시체 더미에 등을 기댄다. 죽은 이의 부러진 뼈가 살갗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끔찍한 느낌이 옷 너머 피부로 닿았다.
“……오랜만이에요, 경.”
“오랜만입니다.”
안테이아 디케 스톰크로우는 작금의 추태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를 다쳤는지 이마를 타고 피가 얼굴로 흘렀다. 선홍색의 생피가 꾸준히 턱에 한 방울씩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케는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전의 기쁨과 정의의 실현에 고양되지 않은 사람처럼, 어쩌면 그곳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 있는 건 누구였을까. 바헬리의 겨울바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좀 어떻습니까. 꼴이 말이 아니군요.”
나는 말이죠, 디케 경. 당신의 그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말투가 참 좋거든요. 정말로 이 커다란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요. 커다란 문제란 어쩌면 당신이 나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 복잡한 소속 관계겠지요. 하지만 경은 나를 죽이지 않을 거죠? 아닌가요? 우리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요? 그 약속에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말은 안 들어갔던가요? 그도 아니라면 경은 아직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한 상대의 목을 꿰뚫고 그가 죽어가는 꼴을 볼 수 있는 사람인가요? 꼴이 말이 아니라는 말 말인데요, 경도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괜찮은 거 맞나요? 데닉 위스펜 레브텔지아는 그렇게 주절주절 말하는 대신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이에요……”
목구멍을 긁으며 목소리가 기어 나온다. 담담한 사실을 전하듯, 어쩌면 조금 웃음 섞인 소리로 데닉은 말했다. 최악이었다. 다친 몸은 아프고, 가문에 저주스러운 오명을 뒤집어씌우지도 못한 채로 죽을지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으니까. 살아남은 기사들은 모두 처형될 것이다. 반란군, 노티스의 수뇌부는 그들을 살려둘 만큼 멍청한 방향으로 자비롭지 않다. 그 말은, 지금 투항하더라도 데닉 위스펜 레브텔지아는 결국 죽는다. 죽는 것이 상관없다는 말은 제 이름을 멸망시킨 뒤의 이야기다. 남이 그 과업을 빼앗아갈까 전전긍긍하는 지금은 죽을 수 없다. 죽는다 한들 육신에 깃든 멸망의 파편이 땅에 쏟아진 진득한 액체처럼 지면으로 녹아들 뿐이다.
디케는 쭈그려 앉아 있던 자세에서 검을 완전히 가로로 눕히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가 고인 자리를 피한다고 피했지만, 망토 자락이 핏물에 젖어 들었다. 그 작은 동작만으로 지친 듯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디케는 데닉의 눈을 바라보았다. 꿰뚫듯 똑바로. 그러니까요, 그 눈 말이에요. 뭐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경의 눈이요.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하늘처럼, 디케의 눈은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데닉은 내심 그 눈이 진실을 말하게 만드는 고문 도구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어스름 빛으로 아름답기는 했지만,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앞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본심을 말하고 마는 것이었다.
당신, 뭔가 묻고 싶은 말이 있군요? 데닉은 말하지 않는다. 당신, 이곳에서 나를 만나 안도하고 있군요. 디케 역시 말하지 않는다. 멸망은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시체들 사이에 누워 있다.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죽음의 맛은 쓰게 느껴질 정도로 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흐르는 돌벽 아래, 그들 둘이 그러쥔 삶의 맛이 달콤한 것은 아니다.
한참 침묵하던 디케 스톰크로우는 언뜻 부드럽게 들릴 정도로 무감하게 입을 열었다.
“이젠……, 인간으로 살고 싶어졌습니까?”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 은근한 말투는 마치 대답이 어떻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것에도 실망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다. 데닉은 스물 하고도 몇 해를 더 살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사람의 마음에 대해 잘 모르지만, 분명히 디케 스톰크로우는 어떤 대답도 감히 예상하지 않았다. 굳게 믿으면 배반당하듯이, 인간의 예상은 너무 쉽게 빗나가고 마니까. 디케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디케에게는 바라는 것이 있었다. 좀처럼 이루어지기 쉬운 것이 아니었지만.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모두 그런가? 인간으로 사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욕망을 저울에 재는 행위의 반복인 것인가? 데닉은 알 수 없었다.
말라붙은 침묵이 오간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도처에 머물러 있다.
데닉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인간으로 산다.’라는 말은 그에게 너무 어려웠다. 애당초 인간이란 무엇인지, 무엇이기에 고민하는지, 고민해서 무엇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살기를 멸망으로 살았으니 죽을 때에도 멸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디케 스톰크로우에게 귀싸대기를 호되게 얻어맞은 이후로, 그는 종종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멸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본질적인 질문 앞에서, 그의 뱃속에 도사린 검은 무언가는 꿈틀거리기를 멈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디케의 멱살━은 너무 예의 없는 행동이니까 어깨를 그러쥐는 정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을 붙잡아서라도 묻고 싶었다. 나는 뭐죠?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온 거죠?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 거죠?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직접 알아내십시오.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디케 스톰크로우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인간이 아닌 폭풍은 나아갈 뿐이다. 그것은 무자비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애당초 자비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처럼, 폭풍의 까마귀이자 바헬리의 흉조는 무심한 낯을 한다. 그러나 디케는 인간이다. 적어도 디케 자신은 그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듯이 굴었다.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그 모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솔직히…… 인간으로 산다는 거, 그게 뭔지 아직 모르겠거든요.”
고민 끝에 뱉은 말은 조금 아득하게 느껴진다. 팔다리와 갈비뼈와 정수리를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하다. 데닉은 자신이 땅 아래로 뻗어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러나 조금쯤 둔감한, 그래서 발끝을 간질이는 두더지의 앞발이나 지렁이의 꿈틀거림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뿌리 박힌 존재.
그러나 눈앞의 인간은 그를 계속해서 채찍질한다. 나아가라고. 일어나라고. 생각하라고 한다. 살아가기를 종용한다. 이유 모른 채로 내팽개쳐지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데닉은 그런 말이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제법, 기분이 좋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레브텔지아가 아닌 데닉 위스펜이, 생각했다.
디케는 실망한 낯이 아니었다. 사실 데닉은 그의 무감하고 지친 표정에서 어떤 것도 읽을 수 없다. 어쩌면 애석함을 참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디케는 갓 스물이 된 어린 흉조고, 어떻게 해도 그 사실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해 줄래요. 당신에게는 별로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요. 데닉은 어깨를 으쓱이고 싶어졌지만, 옆구리가 아파 그만두기로 했다.
데닉은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해도 만일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력해 보고 싶어졌어요.”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뱉는지 정확히 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고, 슬픔을 바닥에 소리 내어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그런데도 제 앞의 어린 사람이 다음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 뭐라고 말할지는 알 수 없었다. 디케 스톰크로우는 실망할까? 안도할까? 아니면 말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다시 뺨을 내리칠까?
그러나 디케 스톰크로우는 웃는다. 희미한 안도를 섞어.
데닉 위스펜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마주한 채로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데닉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조심스러운 투로 말을 꺼낸다. 혀끝에서 짠맛이 난다. 피의 맛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에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애처롭고, 어리석고, 주제넘을 정도로 간절한 말에, 폭풍은 무심한 전진을 멈춘다.
디케는 피 묻은 오른손 장갑의 손가락 끝을 이로 물어 벗는다. 땀에 젖은 흉터투성이의 성마른 손이 드러난다. 바지에 대충 손을 문질러 닦은 그는 그 손을 그대로 데닉에게 내민다. 거창한 예의를 차리지 않는 무신경한 행동이었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악수. 그리고 그 너머의 것까지 담아.
디케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그걸로 됐습니다.”
으레 그렇듯, 끝이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선언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안과 밖이 뒤집히고, 인간은 자신의 말을 정의한다. 힘이 실린 말이 무겁게 떨어진다. 바닥과 부딪힌다.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굴러가지만, 그 말을 향해 간절히 손 뻗는 자가 있다.
데닉은 느리게 손을 들어 올려 그 손을 마주 잡는다. 디케의 손은 땀이 말라 조금 서늘하다. 선명한 흉터가 여럿 있는, 죽음을 아는 사람의 손을 붙잡은 채 데닉은 생각한다. 기쁘다. 인간 데닉 위스펜이, 아주 희미하게 즐거움을 느낀다. 이토록 깊은 피 웅덩이와 살육의 현장 바헬리에서, 데닉은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싶어졌다. 하지만 생기 있는 시체의 권위자로서 그는 그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금껏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기 위해 미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미쳐버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악수한다. 오른손을 맞잡는다. 서로의 손을 굳게 쥔다. 천천히, 아주 미약하게, 위, 아래. 멈춘다. 그러나 떨어져야 할 때도 손을 놓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다. 미약하고 신경질적인 웃음이 잠시 오가다가, 두 사람 모두 맑게 소리 내어 웃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동시에 웃음을 멈춘다. 5초를 채 넘기지 않는 웃음. 직후에 놀랍도록 부드러운 침묵이 감돈다.
디케는 그대로 오랫동안 데닉의 손을 잡고 있었다. 잠든 친우의 옆을 지키듯 그 시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 한 침대에서 꿈을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고 멸망의 등에 업혀 어린 날을 이야기했던 때처럼.
데닉은 디케의 손을 놓지 않고 쥐고 있었다. 여전히 시체에 등을 기대로, 차츰 굳어가는 죽음의 악취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계집아이의 행복을 바랐던, 취기 어린 밤처럼. 그는 인간의 가죽 너머로 닿는 무언가를 가만히 느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많은 말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어떤 일의 결과로 그들은 여기에 있다. 그간 어찌 지냈는지. 편지에 쓴 말은 진실들인지. 그러나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두 사람은 말하지 않고 동의했다. 모든 질문을 훗날로 미룬다. 그날은 그래도 괜찮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포옹과 키스, 그리움의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해는 느리게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고, 곧 피 먹은 하늘이 디케 스톰크로우의 눈 색으로 변해 갔다.
희푸른 시간이 잠시 지나가고, 바람이 한층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반군의 한 병사가 디케를 알아봤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돌아다니며 포로를 이송하는 중인 듯했다. 병사의 뺨에는 피가 튀어 있었고, 시체를 들쑤셔야 하는 구질구질한 일 때문에 죽음의 냄새가 났다. 데닉보다 디케가 먼저 그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병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디케 경, 포로 이송 작업 중입니다.”
“그렇습니까. 수고하십시오.”
뻔뻔한 디케의 말투에도 병사는 헛웃거나 하지 않았다. 단순히 지쳐서 웃을 힘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병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치열했던 전투의 가운데 있었고,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투지에 고양되었다가 진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
“생존한 제노스의 기사들을 포로로 이송해야 합니다.”
그래서 병사는 인내심 있게 다시 말했다. 디케 역시 인내심 있게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처럼 보였고 그래서인지 포로 이송을 일종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위대한 역사의 한 부분에 가담하는 방식치고는 소극적이지만. 기실 어떻든 상관없었다. 데닉은 살그머니 눈치를 보듯 디케와 병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 나를 넘길 건가요? 재판도 안 하고 날 썰어버릴 거라고요!
디케는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는 사람치고는 조금도 비밀스럽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데닉 위스펜 레브텔지아는 죽었습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초라한 선언이었다. 멸망이 숨을 거두었다는 진언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특히 이렇게나 전무후무한 정복 전쟁의 끝이 내전과 반란으로 날 때, 사람은 무더기로 죽어 나가곤 한다. 짐승이 뜯을 뼈다귀도 남지 않은 거죽의 뭉치로. 피를 간신히 담은 주머니처럼. 볼품없는 냄새와 고깃덩어리의 모습으로 죽어간다. 숭고한 죽음이라고 한들 아름다운 방식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시대는 죽은 사람을 어떤 이름으로 칭할 수조차 없게 된다. 그들이 죽었다. 삶을 가진 어느 개인이 아닌, 이름을 박탈당한 거대한 사람의 덩어리가.
일련의 일과는 달리,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 칭하는 것은 아예 별개의 문제다. 그것도 가장 죽이고 싶은 이름을 알면서도 붙여 주는 일은. 데닉은 이번에야말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초라한 선언에, 뱃속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던 검은 것은 영영 멈추고 만다. 작게 키득이고 만 그는 디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마디가 트고 갈라진 손은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놀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 데닉 위스펜이 무언가를 사랑스럽다고 여겼다. 데닉은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처음이었고 그래서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디케는 그전의 말을 되풀이하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호송할 기사는 여기 없습니다, 병사. 가서 다른 포로를 찾으십시오.”
병사는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명령에 따르는 일에 익숙했고, 이번에도 따르면 그만이었다. 디케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앞에서 언뜻 권위적으로 침묵했다.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병사는 잠시 디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들 둘을 지나쳤다.
병사가 떠난 뒤에도 디케의 선언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데닉 위스펜 레브텔지아가 죽었다. 레브텔지아의 이름도 곧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처참히 멸망할 것이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데닉은 못내 흐뭇해졌다. 알고 있나요, 디케 경? 나는 당신이 언젠가 나를 이렇게 구원할 줄 알았어요…… 거짓말은 그만할까요? 네, 그럼요. 전혀 몰랐어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느낄 줄은요. 그리고 기타 등등의 독백 가운데, 디케가 그의 손을 꽉 붙들지 않았더라면 데닉은 바헬리의 칼바람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디케는 속삭였다.
“갑시다.”
짧은 말이었지만 데닉은 그 말이 문득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고 생각했다. 디케의 말은 돌아가자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평생을 돌아갈 곳을 되새기던 서릿바람탑의 주인은 다시 한번 선언했다. 함께 돌아가자고.
함께, 인간으로 살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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