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량돌
여기 이안 머레이라는 작자가 있다. 하루의 8할 정도는 카페인 중독성 두통을 앓으며 지내던 사람이다. 매일 아침 사무실 앞 카페에 출석 도장을 찍지 않으면 하루를 심하게 망치고 마는 부류였다는 뜻이다. 물론 다른 모든 교양 있는 회사원과는 다르게, 그 과정에서 그가 자신의 하루뿐 아니라 남의 하루도 같이 망친다는 것이 눈에 띄는 흠이기는 했다. 그런 그에게
에이라 그웬돌린 델라니는 짧은 순간, 유년의 조각을 돌이킨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가는 숲의 봄바람, 터지는 꽃망울과 발목께를 스치는 젖은 풀, 소리로 가득한 그림자 속의 내달리는 작은 동물들. 맨발로 푹신한 흙 위를 걸었던 기억. 뒤에서 그를 소리 높여 부르는 목소리. 달리기 시작한다. 길게 늘어지며 에이라, 산들바람이 둥글려 살며시 깨뜨리고 마는
어떤 숲그림자에서도 여자를 찾지 못했다. 네펠레 숲을 떠나온 지 2주가 지났고 젊은 레인저는 여전히 여자의 손을 탄 안대를 쓰고 있었다. 생의 수치를 아는 눈을 가리는 물건이다. 그의 검은 안대는 바늘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의 손길을 기억하는 뺨과 얼굴을 기억하는 눈이 그에게 아직 있다. 트리스탄 오데어는 기억의 숲에 가장 아픈 기억을 두고 왔
늦봄의 어느 밤은 서늘하고 이슬의 기색이 어려 있다. 트리스탄은 김이 오르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언뜻 붉고, 그보다 조금 갈색에 가까운 듯하다. 향 나는 풀을 대충 냄비에 넣고 끓인 방랑자들의 차와는 차원이 다른, 값비싸다면 값비쌀 사치품. 근 몇 달 사이 그의 입은 이런 물건에 익숙해졌고 트리스탄은 그것이 달가웠다. 정성이 들어간 물건을 접할 수 있다는
멸망은 팔다리를 던지고 시체들 사이에 누워 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는 깊었다. 정의로운 살인자들이 피 웅덩이를 밟고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희망의 숨소리.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으므로 터지지 않는 함성이 있다. 그러나 그날, 선의가 승리했으므로 절규하지 않는 자들만이 걷는다. 황궁을 향해, 황좌를 향해, 악취 어린 부패와 탄압과 핍박과 혼란
화창한 목요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금요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윈은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펠리컨 마을 사람들이 비밀의 숲이라고 부르는 그 공터는 햇빛이 부족하거나 습하지는 않았지만 음울한 나무 그늘이 짙었다. 집 뒤편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나뭇잎을 몇 개 떨어뜨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예민했더라면 이런 시골 마을의 외딴 오두막에
모든 이야기는 본래 실제로 있었던 일이므로, 아주 오래전에 한 사건이 있었다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탐욕스러운 용이 있었고, 용을 죽인 한 영웅이 있었다. 그는 불살의 몸으로 사랑을 쟁취했으나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죽은 영웅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차츰 흐려졌다. 실제로 있었던 일에서 이야기가, 이야기에서 전설이, 그리고
아티야 베르게르트는 어둡고 오래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그날이 어떤 날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단지 창밖이 썩 밝지 못했고, 안개 어린 공기밖에 없었다. 묵직하고, 축축하고, 질질 끌리는 공기. 맨살에 닿는 차가운 습기 때문에 몸을 조금 웅크리며 아티야는 생각했다. 정말 살기 거지같은 곳이라고. 침대 밖으로 한쪽 다리를 미끄러뜨리고, 이어 다른 다리까
선장 일지. 우주력 2260. 24. USS Starman. USS 스타맨의 선장 루 라몬테인이다. 현재 임무 사항, 중립 지대 성운 내부에서 감지되는 미확인 형태의 신호 추적, 미확인 유기 종족 존재 여부 확인. 현재 연방 순양선 USS 스타맨은 목표 성운에 도달 중이다. 대상 확인 후 보고 예정. 라몬테인 선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수신기에서 짧은
1980년 여름, 까만 배냇머리의 남자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디트로이트 남부의 뒷골목에 도착했다. 그때 아이는 클리브 라몬테인이라고 불렸으며, 그마저도 자주 언급된 적 없었다. 모친은 그를 낳다 죽었으며, 손위의 형제 제이슨 라몬테인이 생계를 책임졌다.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는 디트로이트 할렘가의 젊은이가 택한 일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깨끗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