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거울과 안개숲과 오래된 방

어떤 □□.

유적 by 량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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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야 베르게르트는 어둡고 오래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그날이 어떤 날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단지 창밖이 썩 밝지 못했고, 안개 어린 공기밖에 없었다. 묵직하고, 축축하고, 질질 끌리는 공기. 맨살에 닿는 차가운 습기 때문에 몸을 조금 웅크리며 아티야는 생각했다.

정말 살기 거지같은 곳이라고.

침대 밖으로 한쪽 다리를 미끄러뜨리고, 이어 다른 다리까지 내려 일어나 앉은 그는 잠깐 어두운 허공을 보았다. 서서히 방 안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옅은 푸른빛을 띠는 그림자가 길었다. 투박한 가구, 희끄무레한 침대의 시트, 구겨진 이불, 그리고 옆자리에 누운 사람 한 명.

옆에 누운 그는 좀처럼 맑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일그러져 있지도 않은, 증오나 분노 같은 것으로 번득이지도 않는 얼굴. 아티야는 몸을 틀어 자신의 뒤에 누운 그의 얼굴에 손을 뻗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트를 옆으로 조금 젖혀 치우며 침대 밖으로 나왔다. 느리게 방을 가로질러, 방의 한구석에 놓인 거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이제 갓 서른 하고도 두 살이 된 레인저의 몸은 여전히 다부졌다. 나무타기나 등반, 등산, 승마, 궁술, 검술 등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했고, 간밤 있었던 정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미 전쟁의 세월이 긁어댄 몸에서, 손이 짓누르고 간 허리께의 자국, 울혈이나 멍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듯했고 또 금방 사라질 테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아무리 꿰매도 붙지 않는다. 어떤 흉터는 숨이 다할 때까지 아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아티야는 거울 속의 자신을 날카로운 눈으로 뜯어보고 있었다. 어스름에 익숙해진 사냥꾼의 눈은 엷고 짙은 음영을 쉬이 구분해냈다. 그 몸에 어린 흉터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 상처가 나은 자리였다. 그러나 몇 개는 날붙이가 파고드는 순간 코끝에 닿아온 냄새까지도 기억났다. 겨울의 흰 빛이나, 땅을 적신 피가 기억났다. 얼어붙은 안개숲이 생각났다. 눈치라도 챈 것인지, 찬바람이 문틈으로 불어와 그의 등을 더듬었다. 섬짓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거기에 누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가까이 대고 보느라 숨결이 닿는 것만 같았다.

아티야는 거울 앞에 한참 서 있다가 다시 침대 옆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방을 가로지르는 동안 맨발이 카펫을 스쳤다.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카펫 위에도 막연한 습기가 어려 단단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자다 깨었다기엔 이르고, 아직 안 잤다기엔 꽤 늦은 시간에 하기 좋은 잡생각이었다. 아티야는 침대 옆에 떨어진 자신의 옷을 주워들었다. 어둡고 오래된 냄새가 났다. 옷에서, 사실은 사방에서, 심지어는 제 몸에서까지. 그래서 팔다리를 옷에 꿰어 넣는 대신, 아티야는 옷을 내던졌다.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들자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침대맡까지 발을 뻗거나 단단한 온기를 향해 팔을 내미는 대신 아티야는 웅크렸다. 척추를 둥글게 말고 다리를 접어 끌어안았다. 새우잠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건 차라리 완벽하게 원이 되길 바라는 사람 같았고, 또 동시에 작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아티야는 조용히 숨을 쉬었다. 단지 자신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 귀 아래에서 뛰는 맥박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반쯤 선잠이 들었을까. 꿈을 꾸었던 것도 같다. 조심스럽게 닿아오는 손 하나에 깨질 얄팍한 꿈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았다. 등과 팔에 신중한 손길이 와 닿았다. 부드럽게, 아티야의 접힌 팔다리를 펴고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잠결에 몸을 다시 웅크리지 않도록 그 손길은 꽤 단단히 아티야를 제 쪽으로 당겨 왔다. 혹은 꽉 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것도 아니면 아마도, 다시 꿈결처럼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려는 것처럼. 아티야는 저항하지 않고 그 품에 기댔다. 단지 옆에 누운 이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의 가슴팍 너머, 뛰는 맥박을 느끼기 위해서.

아티야는 문득 무거운 눈을 들었다. 녹회색 눈이 고요하게 아티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곽이 도로 흐릿했다. 그러나 짙은 흉터가 어디까지 번져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는 그 눈빛이 어둡고 오래된 방 같다고, 또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 얼굴에 손을 뻗는 자신을 상상했다. 어쩌면 실제로 손을 뻗었던 것도 같다. 한 사람분의 온기가 어린 뺨에 손끝에 닿아왔다. 갓 서른둘이 된 레인저는 거칠고 아름다운 손으로 그 뺨을, 열기 어린 흉터를 천천히 쓸어 보았다. 그리고 느낀다. 어떤 상처는 아무리 꿰매도 붙지 않는다. 어떤 흉터는 숨이 다할 때까지 아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기다리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는 모른다. 아티야는 눈을 감고, 뺨에서 손을 미끄러뜨려 그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온기가 닿아온다. 어느 쪽 피부가 비교적 서늘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살기 거지 같은 곳에서, 그런 것이 의미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가를 것 없이 창밖은 춥고, 서서히 밝아질 테고, 흐리고 묵직한 것이 가득할 테다. 겨울이 길었다.

그러나 아티야는 이 어둡고 오래된 방이 좋았다. 이 방에서는 깔끔한 나무 냄새가 났고, 언뜻 상쾌한 풀 향기도 났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살 냄새도 났다. 무엇보다 한 사람분의 온기가 있었다. 느리고 확실한 손길도, 망설임 가득한 대답도 꾸준한 맥박도 있었다.

해서 아티야 베르게르트는 잠에 들기 직전 다시금 생각한다. 아마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__은 생각보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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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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