籠鳥戀雲
외전
새는 달렸다. 날아가야 할 새가 날지 못한 채 두 다리를 쓴 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안데르센이 쓴 동화 인어공주에서 주인공은 두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었다고 했던가, 딱 그 처지에 놓인 그녀였다. 아니, 더 심각할 수도. 너덜거려 피투성이가 된 날개와 절뚝거리는 두 다리, 품에 소중히 안겨 이 와중에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한 생명이 더 이상 앞을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건물이 보인다. 벽을 하얀 흰색으로 도배해놓은 것이 어딘가 수상한 건물인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부스럭- 풀을 밟는 소리가 누군가에게 들켰던 것일까.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한 사람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인데."
"...누구냐."
"저 건물에 사는 사람."
".....네 놈, 봉황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봉황(鳳凰), 동아시아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상상 속에서나 나오는 새여서 그런지 희귀종으로, 본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을 것이다. 그 의미나 이름,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모두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할 수 있다. 봉황은 실재한다. 왜 그렇게 확신하냐고? 당연하잖아, 내가 바로 그 봉황이니까. 우리 종은 이 세상이 아직 이렇게나 발전하기도 전에, 즉 인간과 동물의 피가 섞인 인간이 확실하게 나누어졌을 때부터 살아있었다. 물론 그때도 개체 수는 적어 멸종하기 직전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그런 나의 가족들과 공들이지 않은 원석처럼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이 세상을 마구 돌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나, 금세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해나가고 넓은 숲과 높은 나무 대신 넓은 아스팔트 도로와 높은 벽돌과 콘크리트 벽이 세상을 뒤덮이게 했다. 그리고 또한 혼혈종들이 늘어났다. 인간과 동물의 피가 섞인 인간이 사랑에 빠지고, 또한 그것이 아무렇지 않을 시대가 되었을 때. 나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가족들과 독립하고 조용한 공간을 찾아 나섰다. 동굴 안, 숲속 등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인 나에게 한 장소가 눈에 띄었다. 연못에 하얀 연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고 조용하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따스하게 비쳐오는 햇살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 곳을 발견한 이후로 거의 그 장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장소에다가 이렇게나 편한 마음이 드는 곳이라니, 이 곳을 거처로 삼을 까 하고 있었던 어느 날, 소년을 만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 소년을. 딱 봐도 몸집이 작은 것을 보니 어린아이 같았다. 소년이라고 부르기도 어딘가 애매한 그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한마디 중얼거렸다. '예쁘다'고 말이다. 당연하다, 봉황은 환상종이라고도 불릴 만큼 아름다운 종이니까. 놀라운 반응은 아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옅은 금빛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히려 아무런 색깔도 입히지 못할 금색의 눈동자가 나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 보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황급히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하고 소년에게 다가갔다. 이것은 경고이다. 아직 어린아이라서 살려주는 것뿐이니까.
"꼬마야,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가거라. 나를 봤다는 말을 한다면..."
"저, 이렇게 예쁜 사람 처음 봤어요...!"
말을 듣지 않네, 딱 보니 혼혈종도 아니고 수인종도 아니다. 순수한 인간이 왜 여기까지 온 지 모르겠지만 나는 빠르게 뒤를 돌아 날개를 펴고 그 소년의 앞에서 날아갔다. 어린아이가 순수한 혈통의 봉황을 봤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뒤에서 소년은 외쳤다. 다음에 또 와달라고 했었나... 무슨 얘기인지는 까먹었다. 분명 길을 잃고 여기까지 온 거겠지. 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부모에게 돌려보내 준다던가 하는 그런 친절은 베풀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인데, 내가 잘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소년은 계속해서 쫓아왔다. 이 장소를 어떻게 그 작은 뇌로 기억해서 찾아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계속해서 찾아와 내 시간을 방해했다. 아아, 지겨워. 꽤 맘에 드는 장소였는데! 나는 한동안 그 곳에 가지 않았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가 잊을 수 있도록, 혹시나 호기심을 갖고 만나게 된다면 죽여야 한다. 아무리 어린 꼬마라도 인간이기에 방심할 수 없다. 봉황이 어째서 멸종 직전의 종이 되었는지 아나? 인간들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수인종도 포함이다. 봉황은 아름답다. 그것은 누구나 동의할 사실이고 누구든 갈망하는 것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서 그들은 봉황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미신이 여러 가지로 퍼져 봉황의 목을 베거나 봉황의 피를 마시면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거 아나? 봉황은 죽지만 않으면 영원히 아름답게 살 수 있다. '죽지만 않으면' 말이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죽지만 않으면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니 어느 누가 욕망을 버리고 순수하게 다가올 수 있겠나? 하지만... 그 소년은 달랐다. 이런, 괜한 생각을 했다... 봉황에게 시간은 정말이지 덧없다. 거의 불로불사에 가까운 약한 몸이라 상해를 입지만 않으면 수명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살 수 있으니까. 벌써 몇 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그 연못가로 한 번 가볼까.
여전히 좋은 곳이다. 그날과 똑같이 연꽃이 활짝 피어 있는 연못에 자리 잡고 누웠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상태로. 부스럭- 풀숲을 지나서 오는 발걸음 소리에 나는 자세를 잡았다. 인간이면 바로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날붙이도 준비했다. 멀끔한 하얀 셔츠에 검은색 바지인 차림을 한 남자가 책을 한 손에 들고 나타났다. 아직도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니, 내 불찰이다. 빨리 내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내 정체를 들켜선 안된다. 나는 그 남자에게 힘껏 달려가 그를 넘어뜨렸다. 그리곤 두 손으로 목을 꽉 졸랐다. 죽여야 해, 죽여야 해, 죽여야...
"울지 마세요..."
내가 운다고? 무슨 말이지? 아, 정말이다. 그 남자의 뺨에 후드득, 눈물이 쏟아진다. 나는 두 손에 힘을 풀고 그의 위에 주저앉았다. 알고 있었다. 옅은 금빛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본 순간 준비해둔 날붙이를 쓰지 않았던 것도, 그 남자가 소년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도, 사실은 내가 엄청 외로움을 타고 있었던 것도... 그래 맞아... 나는, 내 존재를 순수하게 받아들여 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야.
"여기 휴지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우는 모습마저 아름다우셨는걸요."
"그런 아첨을 해도 난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
"아첨이 아니에요, 진심인 걸요."
흥, 말만 잘하네. 그나저나... 많이 컸다.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구나. 어느 새 소년의 키는 나를 따라잡았고 덩치도 나보다 좀 더 커진 것 같았다. 그 이후로 그 소년... 아니, 그와 자주 만났다. 사람들도 오지 않는 곳이라 서로만의 비밀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간 친구는 처음이었으니까. 그의 집안은 엄격해서 가끔 이렇게 혼자 산책하러 나오는 척 나를 만난다고 했다. 게다가 집안이 인간 순혈주의라니, 나와는 척 봐도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것이 눈에 보였다. 어느 날은 부모에게 혼혈종 친구가 생겼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더니 매를 맞았다고도 했고, 집안에서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한 연구소에 거액의 후원을 하기도 했다며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남기기도 했다. 인간은 참 복잡하게도 사는구나 싶었다. 어느 날,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앞에 나타났다. 왜 우냐고 물어보니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당신이 너무나도 좋은데, 집안이 허락하지 않을 거라며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기뻤다. 아, 나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물론이고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고 있었구나. 나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이 감정은 뭘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 아 그래, 나 지금 행복한 거구나.
사랑이란 감정은 눈마저 멀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사람이 너무나 소중해서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 계속해서 보고 싶은 이 감정이 심장 안에서 뛰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 나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놀랍다. 그는 시간을 중간중간에 내서라도 나를 보러 와줬다. 그가 내 배에 귀를 대고 두근거리는 고동을 들을 때마다 행복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입을 맞춰주면 나도 따라서 웃었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만이 계속될 줄 알았으나 그 사람의 집안에 들켜버렸다. 게다가 그냥 혼혈종이나 수인종도 아니고 순수혈통 봉황이라니, 곤란해질 만도 하다. 집안은 나에게 아이를 지우라며 압박했다. 그리곤 다시 그와 만나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 마치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이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으나 아이는 잘못이 없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 아이는 내 사랑의 집합체 같은 존재이다. 절대 잃을 수 없다. 나는 집안을 피해 도망 다니며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찾아가 아이를 키워달라며 부탁했더니 당연히 쫓겨났다.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온 거냐며 날개를 난도질 당했지만 그것보다 더 아팠던 건 그의 혐오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저런 새랑 사랑을 맺었다고?'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더 상처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지 않은 내가 더 바보 같다. 정말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구나, 사랑이란 거.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는 건가?"
"그래."
"근데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아까도 말했지만.. 봉황은 거의 불로불사나 다름이 없어."
"..."
"당신 연구원이지? 그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지, 내가 여기서 죽든 아니면 실험실에 끌려가든 상관 없으니까 이 아이를 살려줘. 내 몸을 표본으로 써도 상관없어."
"...당신, 이름은?"
"...알리움이야. 그 쪽은?"
"...엔네스."
"잘 부탁해 엔네스, 그 아이의 이름은..."
"꽃 이름으로 짓자고?"
"네, 분명 예쁜 아이일 테니까요."
"꽃 이름이라고 해도 다양하잖아, 애초에 난 이름도 없어."
"이름이 없다고요?"
"하긴, 넌 항상 나를 봉황님이라고 불렀잖아."
"그럼 혹시 제가 이름을 지어드려도 될까요?"
"내 이름을?"
"네."
"그래, 뭐로 지을 건데?"
"알리움이라고 짓고 싶어요. 그 꽃 정말 예쁘거든요. ...당신이랑 딱 맞아요."
"알리움이라... 뭐, 그래서 애 이름은 어떡하고?"
"음... 이건 어때요?"
"라그라스!"
籠鳥戀雲(농조연운): 「새장에 갇힌 새가 구름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몸이 속박(束縛) 당(當)한 사람이 자유(自由)를 얻기를 바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알리움 : 멀어지는 마음, 무한한 슬픔
라그라스 : 당신의 친절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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