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아론의 사제/아네이디] 범람

계연자동갱신이 되었지만 231231 이라는 숫자가 탐이 나서 날짜에 맞춰봄

* 아론의 사제 기반 캐릭터 페어(이자 오너끼리는 합의되었고 얘들끼리만 서로 계연/짝사랑인줄 아는)의 계연 이후, 어차피 자동 갱신되었지만 231231이라는 숫자는 탐나네-싶어서 쓰려고 맘에 두었던 글을 날짜에 맞춰봄

* 앞선 글, <불을 삼키다>와 이어집니다(클릭 시, 새 창)

* 글 내에 특정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올 한 해가 저물어간다.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서 기숙사 이인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문밖에선 번듯한 신부님으로 행세하던 이디스가 몸을 풀어가며 표정을 무너뜨렸다. 누가 보더라도 신실한 주님의 종이라기엔 무리가 있는 모양새다. 아이고, 삭신이야. 가끔은 연병장에서 오열을 맞추는 것보다 이게 더 하다니까. 이 꼬락서니를 임무지에서부터 사생활까지 질리도록 보아온 터라 아네스는 이제 타박할 의욕도 없이 제 몫의 소파에 몸을 묻는다. 어차피 저쪽도 대답을 요구하고 입 밖에 낸 게 아니고, 그냥 ‘이디스 사제’에서 ‘네가 아는 유안 길모어’로 전환했다는 신호를 보낸 것뿐일 테다. 예상대로 이다음에 이어지는 말 따위는 없었다.

사이에 놓인 침묵은 어색함보다는 물리도록 써서 몸에 익은 오래된 담요처럼 안온했다. 첫 만남이 그토록 요란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인 셈이다. 목숨을 몇 번씩이고 건 임무를 함께 했고 괴이에 휘말리기를 한두 차례 열병처럼 치르고 난 다음, 저희 사이는 얽히고설켜 분리조차 어려운 살점처럼 된 것도 같다. 실타래라는 비유로는 약하다, 우리는 역시 저런 괴악한 비유가 어울리겠지, 하고 아네스는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한창 알곡이 여물던 즈음에 치기를 부려 붙인 이름조차 썩 틀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여전히 일말의 죄책감과 그걸 압도하는 초조함(혹은 애정이라 하겠다)을 가지고 몸을 얽고 있고, 예정된 날은 실상 지나갔으나 흐지부지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는 파트너를 곁눈질한다. 시선을 느꼈을진대 때로 유화물감처럼 색이 짙은 파랑은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저거 절대로 일부러 저러는 거지. 아네스는 속으로만 숨을 뱉었다. 이디스는 겉보기와 달리 훨씬 직정적이며 그 몇 배로 교활한 면이 있었다. 제가 나름대로 사람을 잘 본다고 자부하지만, 제 파트너의 속을 제대로 꿰뚫어 본 적은 손에 꼽을 지경이니까. 연륜에서 비롯한 차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고, 이미 반쯤은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고는 매번 제자리를 헛돈다. 부나방과도 같은 제안이 입을 미끄러졌을 땐, 저 역시 나름대로 각오했더랬다. 멋대로 붙인 이름표를 유유히 뜯어낼 쪽은 제 파트너 씨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서 능구렁이마냥 저를 살살 놀려먹는 투로 그저 한참 어린 병아리의 소꿉장난에 어울려줬을 뿐이라며, 저것과 꼭 같은 말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함의를 던져 결국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이디스-유안 길모어는 끝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화제를 살랑살랑 피하는 것 같다고, 아네스는 짐작한다. 확신이라기엔 막연하지만 드물게도 파트너의 사고가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있으니 아마 맞지 않을까 싶다.

계약 연애도 일단은 연애랍시고 한 박자 늦게 떼어지는 포옹과 오히려 가벼워진 키스, 때때로 이쪽을 바라보며 아주 옅게 올라간 입매 따위에서 저는 도대체 무엇을 유추해 진의를 끌어내야 하는 걸까.

그렇게 곰곰이 생각을 곱씹고 있으려니, 문득 눈앞에 그늘이 졌다. 어느샌가 제 앞에 이디스가 서 있었다. 너무 깊이 생각해서 주위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한때 직업군인이었다는 작자의 기술인 건지 쉬이 가늠되지 않아 아네스는 눈만 깜빡였다. 빛을 등지고 있는 이디스의 표정은 그림자에 가려 영 흐리멍덩했으나, 그는 파트너가 쓴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쿵, 하고 심장이 반 뼘쯤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선고다. 사람 기미에 저보다 훨씬 민감한 이 작자가 끝을 고민하는 제 기색을 읽고서 먼저 선수를 치려는 가보다. 충분히 오래 상상해왔던 결말이기에, 작은 사제는 지난 약속 중에 “그래도 우리는 계속 구마 파트너잖아.”라고 속삭였던 구절 하나를 구명줄로 삼아 표정을 단단히 했다.

“…있잖아, 파트너님.”

“왜요?”

“우리, 꼭 끝을 내야 할까…?”

내가 뭘 들은 거지. 아네스는 파트너의 드물게 우물거리는 목소리는 둘째치고 말의 내용을 듣고, 한 번 곱씹고서도 그걸 제대로 삼켜내지 못해 눈만 깜빡였다. 이건 상정했던 몇 가지 패턴 중엔 아예 없는 건데. 제 침묵이 길어지자 앞에 서서 가만히 있던 인영이 살그머니 뒤로 빠지려는 낌새가 났다. 아네스는 반사적으로 발꿈치를 걸어 넘어뜨렸다. 이것도 이 사람한테 어거지로 끌려가 배운 몸싸움 기술인데, 기습으로 성공해보는 건 또 처음 같다. 왜, 왜, 왜? 물음표가 붙는 상황이 연속으로 몰아닥쳤지만, 이제 악마와의 난전도 겪으며 몸부터 움직일 줄도 알게 된 회색 병아리는 제 앞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파트너에게 올라타다시피 하며 제압부터 했다.

“휘유~. 갑자기 화끈하게 나오네, 우리 병아리?”

“먼저 말 꺼내놓고 도망치지 마요.”

“…….”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이제 불빛 아래 얼굴이 드러난 파트너는 제가 알던 여유작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째 그가 도망치려고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일단 내뱉고 보자 입을 다문다. 작위적이기엔 태연한 표정도 이쪽을 살피며 멈췄다. 맞았구나. 그걸 깨닫기가 무섭게 뱃속 깊은 데서부터 뭔가 확 끓어올랐다.

이 사람도 나를 잃기 무서워해.

나만 열을 올리는 게 아니라고, 저 인간이 내게 꽤나 파고든 것처럼, 나 역시 저 사람한테 깊이 각인되었다고. 들끓는 것은 순수한 환희라기엔 질척하다. 따지라면 소유욕과 정복욕일지도 몰랐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들에게서, 과거에게서 이 인간을 뺏어왔다고 외치고 싶은 걸 보면 그렇다. 너는 보기보다 훨씬 끈질기고, 애 같이 움켜쥐어서 맘대로 하고 싶어 하는 구석이 있어. 언젠가 끈덕지게 붙어먹은 후에 그가 제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 기억을 되짚어 보고서야, 아네스는 그때 이디스가 지었던 표정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기쁨이었다. 놀려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나, 심심풀이 땅콩까지는 아니구나?”

“하, 하하…. 사람을 엎어뜨려 놓고선 한다는 말이. 내가 언제 우리 사제님을 그런 싸구려 장난감 취급했다고 그래.”

밑에 근육을 긴장시킨 채로 깔려있던 아네스가 몸을 늘어뜨리며 짧게 웃었다. 아까까지 보였던 막연한 그림자는 없이, 아네스가 아는 이디스가 거기 있었다. 가까이 있어서 편리하게 붙어먹기 좋은, 그런 의미에서의 파트너 같은 건 아니라고 확언을 받은 게 마냥 기뻤던 아네스는 길모어가 가장 중요한 걸 들키지 않았다는 식으로 안심하며 웃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