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괴수시간/지아이샤] 듀라한

* 23년 7디페에 발행한 배포본 공개. 주지아X아이샤. 지인분의 자컾으로 2차하는 사람이 나야 나.

* <괴수를 위한 시간>이 완결난 후, 아직 에필로그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대. 그렇지만 괴수시간 자체에 대한 강력한 미리니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뭔가 나중에 찾아보고서 어라? 싶을 수 있을 정도??

* 신서아/유서아-류서아의 표기 혼용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멋진 윙크). 이 사소한 말장난이 대체 뭐시당가 궁금하시다면 저랑 같이 괴수를 위한 시간 읽어주세요(맨 밑에 링크 달아둠). 해당 말장난을 알고서 저는 정말로 잇몸 바싹 마른, 웃음 만개 오타쿠가 됏엇으닛가요


최근 중고등학생 사이에 어느 도시 괴담 하나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목 없는 귀신의 이야기다.

경찰 언니, 그거 알아요? 재개발한다던 ㅇㅇ아파트 놀이터 이야기. 네, 그 칠이 다 벗겨져서 을씨년스러운 거기요. 거기에 목 없는 귀신이 나온대요. 본 사람도 많대요.

 야간 순찰 나가는 시간이 야자 끝나는 시간과 비슷한 덕에 자주 마주쳐서 얼굴도 말도 튼 고등학생들이 먼저 재잘재잘 붙여온 이야기를 서아는 적당히 대답하며 흘려들었다. 원래 그 무렵은 공부 말고는 뭐든지 재미있을 때 아닌가.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도시 괴담이겠거니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때는 무슨 괴담이 유행했었더라. 빨간 마스크였던가. 새까만 좀비 같은 거였나.

잡생각은 거기서 대충 치웠다. 지금은 직업 정신을 발휘할 때다. 갑자기 생겨난, 근원이 짐작 가지 않는 도시 괴담이란 의외로 분명한 발생 원인이 있기도 하다. 좋지 않은 일을 꾸미는 무리를 멀찍이서 봤던 목격담에 실존하던 공포심을 뼈대로 살이 붙고 상상력이 숨을 불어넣어 주면, 짠, 하고 훌륭한 괴담이 되기도 하니까.

류서아 경장은 오늘 밤에 괴담의 현장을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범죄의 흔적이 보인다면 바로 지원부터 하는 거고, 그게 아니면 며칠 동안은 만나는 학생들이 알아서 재잘거릴 이야기를 유심히 듣다가 내용이 안 좋은 낌새로 변한다 싶으면 그때 출동하는 거고. 이전부터 그런 감은 좋았으니 해볼 만하겠지. 어느 쪽이건 미연의 범죄를 막을 수 있긴 할 테다.

그러므로 그는 야간 순찰을 나온 참이다. 기존 순찰 루트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문제의 장소는 확실히 폐허 같기는 했다. 이 분위기에 눌려 겁먹고 괜히 헛걸 보는 사람도 있을 법할 정도다.

‘진짜 으슥하네. 뭐 튀어나와도 이상하진 않겠어.’

그게 귀신이고 사람이고 말이지. 서아의 무덤덤한 생각은 그 다음에 끼어든 말에 냉큼 잘려 나갔다.

“그으, 유 경장님. 정말 저 안까지 순찰 돌아야 하나요…?”

이가 딱딱 부딪히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다. 서아는 그제야 아차했다. 오늘 밤, 저와 순찰조로 편성된 햇병아리 신입은 아무래도 공포물에 약한 듯 바람에 풀이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화들짝 놀란다. 하긴 별다른 설명도 없이 오늘은 따로 둘러볼 데가 있다고 하고 끌고 나왔으니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냥 대충 훑기만 하고 올 거야. 아니면 여기 있, 지는 못하겠구나. 그래, 그럼 일단 여기서만 살펴보고 별일 없으면 돌아가자.”

그리고선 손전등을 비췄다. 곧게 뻗은 빛이 노랑, 초록, 파랑…, 한때는 온갖 형형색색을 하고 있었을 낡은 놀이기구에 닿았다. 지금은 폐허의 일부에 지나지 않은 철골들이 세워진 모랫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그 뒤로 전구가 깨져있는 가로등 하나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어쩌면 저 가로등이 간당간당하게 살아있을 때 불빛이 깜빡이는 사이로 길고양이가 지나갔다든가 해서 보였던 그림자가 괴담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한 건 없네. 거기에 옆에서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서아는 그만 가자는 의미에서 병아리 파트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터져 나온 새된 비명. 서아는 냅다 손바닥으로 파트너의 입을 막았다. 얘는 이렇게 담이 약해서 어쩐다나 싶은 걱정은 일단 치우고서 다른 쪽 손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신입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기존 순찰 루트로 되돌아갔다.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난 후, 필라멘트가 꺼져 죽은 줄만 알았던 가로등에 희미하게 빛이 어렸다. 전기로 켜지는 불빛보다는 차라리 가스등의 탁한 빛이다. 노랗기는커녕 보랏빛으로 어슴푸레하다. 깜빡, 깜빡.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 누군가 선다. 빛이 닿았음에도 실루엣은 어둠에 잠겨있다. 그림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인영에는 목 위가 비었다. 취객 하나가 길을 잃고 비틀비틀 걸어 올라오다가 그걸 보고 눈을 홉뜨더니 뒷걸음질을 치고 바닥을 기다시피 하여 도망갔다.

 

다음 날, 야자가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은 이 근처 파출소의 유서아 경찰관을 찾았다. 적어도 애들이 느끼기에 이 경찰 언니/누나는 저희의 말을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의 헛소리라며 대충 흘려보내지도, 들어보지도 않고 막지 않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정말로 특종이다. 그 듀라한(학생 중 판타지를 좋아한다는 애가 그 이름을 제안했다)을 목격했다고 한 건 지금까지 쭉 저희 같은 학생이었더랬다. 분명 그래서 믿어주는 어른이 없었을 거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드디어 그걸 본 어른이 나타난 거다! 쩌어기 골목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어젯밤에 그 듀라한을 봤다는 거 아닌가. 비록 열에 여덟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라지만, 어른들은 늘 같은 어른의 말만 들으니까. 이 경찰관은 다르지만.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은 한참 동안 죽치고 눌러앉았다가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가라고 타박을 들은 후에야 돌아갔다. 손이 비는 대원들이 안전한 귀가를 위해 출동했음은 물론이다. 서아는 그 목록에 없었다. 사유는 학생들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지니까. 이미 전례가 있는 사건이었으므로 학생들도 파출소의 대원들도 서아가 자기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학생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흩어지고서야 체통을 지키겠답시고 이제까지 열심히 웃음을 참았던 파출소장이 드디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역시 인기 좋네. 유서아 경장! 이제 어쩔 거냐?”

“요즘 애들은 참 똑똑해요. 원하는 순찰지역을 지정하는 그 서비스를 신청한 거잖아요. 여튼 해야죠. 민원인이 민원 넣은 건데.”

“경장님은 이거 아녔어도 가실 거였잖아요. 소장님, 어제 저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경장님은 겁도 없구!”

이번 주 서아의 짝이라는 명목하에 학생들 바래다주기에서 제외된 파출소 막내가 징징거렸고, 남아있던 한 줌의 사람들은 바로 껀수를 잡고 놀리는 타겟을 바꾸어 막내놈을 놀려대기에 바빴다.

 

어쨌거나 공언한 대로 서아는 출동 장비를 다 갖추고 예의 장소에 다시 가기로 했다. 오늘은 혼자다. 신입 녀석이 너무 겁을 내서는 아니고, 아이들이 어제의 순찰을 듣더니만 그 듀라한은 혼자 가야 볼 수 있다고 몇 번이고 언급해서다.

혼자라곤 했지만 그 놀이터에 혼자 가는 거지 저 아래 골목에는 막내놈이 대기하고 있긴 하다. 처음에는 호러 영화 한복판에 안 가도 된다는 말에 화색이었다가 2인 1조 규칙은 어길 수 없다면서 제딴엔 비장하게 바로 옆에 골목에서 대기할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부르시라고 가슴을 탕탕 쳤다. 서아는 그 애의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 못 본 척하고 그러겠노라고 답했지만, 저 꼴을 보아 뭔가 생겨도 부르지 않는 게 낫지 싶었다. 일련의 콩트 같은 상황을 지켜본 상급자의 반응은 깔쌈했다. 용기는 훌륭하군. 소장님의 평가였고, 고참들의 끄덕임이 이어졌다. 다 같은 생각인 거지. 막내는 울상을 지었다.

서아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랐다. 그냥 아주 약간의 경사가 있는 길이었다. 이제 10미터 정도, 을씨년스러운 놀이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학생들 말마따나 혼자일 때만 나타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지능을 가지고 행동하는 거수자일 수 있는 법이라 만일을 대비해 카본 제압봉에 손을 얹은 채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나아가는데,

“저기, 경찰 선생님?”

“네?”

곁에 사람이 있었다. 옅은 금발에 취록색 눈동자. 아니, 머리카락에는 조금 분홍빛이 비치는 듯도 하다. 요즘은 좀 특이한 색으로 염색하는 사람도 많고 눈동자 색이야 컬러렌즈도 흔해졌으니 그건 별로 신경이 안 쓰였다. 오히려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난 게 더 맘에 걸린다. 분명 눈 한 번 깜빡하기 전까진 아무도 없지 않았던가. 경계하는 기색을 읽은 건지, 상대는 무해하게 웃어 보이며 양손을 펼쳤다.

“저 이상한 사람 아녜요.”

찰나이긴 해도 이자를 거수자로 취급, 불심검문을 해야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서아는 자기 감을 믿기로 했다. 어쩐지 나쁜 느낌은 안 난다. 겉보기 인상으로 받은 게 아니고 각 사람이 뿜는 아우라라는 게 있지 않나. 그게 악인은 아니란 뜻이다. 게다가 어디서 본 거 아닌가 싶은 낯익음이 아주 살짝 들기까지 했다.

“음, 일단 무슨 일이신지 여쭤봐도?”

“선생님, 지금 저 위에 무슨 괴담 때문에 오신 거죠? 제가 그거 해결하려고 온 거라. 자리 좀 양보 부탁드리려고요.”

뭐야, 무슨 무당 같은 건가? 아까의 판단을 번복한 서아는 잽싸게 요즘 돌았던 사기꾼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좌르륵 돌렸다. 아니, 근데 개중에 이런 화사하게 생긴 외국인이 있던가. 있었으면 보자마자 딱 기억이 났을 텐데. 오늘따라 믿고 따르던 직감이며 판단력이 엉망이 되기라도 한 걸까. 왜 이렇게 버벅거리지. 제 표정이 요상해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 외국인은 쿡쿡 웃다가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이번엔 웃음기를 싹 지웠다. 인상이 삽시간에 바뀐다. 오만 수라장을 다 겪으며 다듬어지고 깎인 사람의 얼굴이다. 많은 것을 어깨에 짊어져 봤던 사람 특유의 단단함. 어딘가에서 이런 얼굴을 봤던 듯도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떠오르진 않는다. 마음 한 켠이 조금 갑갑해졌다.

“제가 가면 해결됩니다. 다시는 같은 현상이 출현하지 않을 거예요. 거짓 보고는 좀 그렇겠지만, 그냥 길고양이 그림자였다거나 하는 식으로 무마해주세요. 류서아 경장님.”

뭐든지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에 서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믿어도 된다고. 그런 판단이 들었다. 아니, 판단이나 직감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린 것 같은 감각이다.

“뜻대로 하세요.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면 소리 지르셔야 해요. 바로 달려갈게요.”

“알았어요. 저 위에 가로등이 꺼지면 해결된 거니까, 그 후로는 올라오셔도 괜찮아요. 충고대로 감당 못 할 것 같으면 부를게요.”

긍정의 답을 얻자, 외국인 무당인지는 다시금 곱게 웃더니 발길을 돌려 언덕 위를 향했다. 먼 데 있는 가로등이 돌연 켜진다. 가스등같이 희미한 빛 아래에서 연한 금발은 역시 봄날의 분홍으로 보였다가, 이내 언덕을 넘기며 사라졌다.

서아는 그제서야 의문을 품었다. 이 언덕은 말이 언덕이지 그렇게 고개가 높아서 사람이 안 보이게 될 수는 없을 텐데?

 

깜빡, 깜빡.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 누군가 선다. 빛이 닿았음에도 실루엣은 어둠에 잠겨있다. 그림자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인영에는 목 위가 비었다. 그는 섬세한 세공이 박힌 지팡이를 쥐고 서 있다. 그저 가만히, 보이지도 않을 앞을 기웃거리면서.

아이샤는 여전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똑바르게 걸어간다. 여기, 남겨진 어느 파편에게.

“지아 씨, 제가 늦었죠. 데리러 왔어요.”

아주 많은 세계가 멸망을 거듭했고, 나와 당신은 어쨌거나 만났으며, 한쪽이 죽기도 하는 경우는 훨씬 더 흔했다. 오히려 당신과 내가 안온하고 안전한 나날을 보내는 세계란 없는 게 아닌가 자조할 정도로. 서로의 만남이 행복으로는 이어지나 평안한 나날로 향하지는 않았으므로, 간혹 이런 일이 벌어졌다. 남겨진 파편이 생전의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 이 세계와 이웃한 자리, 멸망한 어느 세계에서 ‘아이샤’를 기다렸던 어느 ‘주지아’는 세상의 틈새를 건너 또 다른 기다림을 반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신서아, 아니지, 지금은 류서아가 이야기를 목격한 덕에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 고요히 쉽시다. 우리가 머무는 숲에서.

아이샤가 손을 뻗어 건넨 보석이 짧게 빛나고, 곧 두 사람의 자취는 사라졌다.

누군가 서 있던 자리는 풀 누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로등의 빛 아래 잠겼다. 뒤늦게 달려온 서아는 깜깜한 그늘 아래를 손전등을 켜서 샅샅하게 뒤졌지만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어 앓는 소리를 낸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다며 망연히 서 있다가 길 아래로 내려간다.

목 없는 귀신, 듀라한의 괴담은 그 후로 다시는 목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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