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이샤] 당신이 나의,
그래, 그렇게 웃어주면 좋다.
* 티스토리에 19. 5. 26.에 올렸던 조각글 세 개를 다듬어서 옮겼습니다(모 님께서 우리집자컾오비츠 옷을 지어다주셔서 받아!했었음)
* <괴수를 위한 시간>에 나오는 그 두 누님들이 맞습니다. 지인분들 자컾입니다. 제가 정말 사랑합니다. 누님들 행복하세요….
* 시계열은 괴수시간 이전이거나, 아이샤 누님이 나오는 다른 시리즈(배터리어&플레어) 근방이거나 제각각.
* 각 조각글에 연관성은 없습니다. 그냥 보고싶은 장면들만 슥삭슥삭 했음.
#01_당신은 때때로 약할 때가 있어서
이따금 당신의 살굿빛 손끝을 생각하곤 했어요.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바닥을 더듬듯 엷게 깔렸다. 아이샤는 빠르게 뛰던 심박이 아주 조금씩 귀퉁이를 무너뜨리며 침잠하는 것을 들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몇 분 전까지 습지게 데워졌던 공기는 이제 서서히 가라앉아 새벽에 섞이고 있다. 지아 씨의 목소리는 이 시간의 투명한 청색을 닮았다고, 그리 생각하면서.
“좀 웃기죠. 결국에 앞을 볼 수 있는 건 아닌데.”
온기에 감싸여 말랑말랑하게 풀어진 사고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싹둑 하고 끊겼다.
“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품 안에 갇혀있는 탓에 불가능했다.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걸까. 보지 못하니 지아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서 저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볼 수 없어 찾아온 불안이 파도처럼 밀어닥친다. 슬금슬금 해안선을 침범하다가, 쏴아아-, 철썩하고 뒤집히면 죽은 바다생물이 뭍으로 밀려난 것처럼 문장이 떠오른다. 주지아, 제 애인은 이런 형태의 불안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살아온 걸까, 하고. 그는 늘 의연하고 늠름하게 지내지만, 갑자기 그 사실이 못내 쓸쓸해져서 아이샤는 몸을 뒤척여 저를 끌어안고 있는 온기에 바투 붙었다. 킥킥 웃는 소리가 달라붙은 가슴팍에서부터 울려 퍼져 평소보다 웅웅 울렸다.
“역시 내 천사님이야.”
“아, 그리고 제 손, 굳은살 많아요.”
무엇이 역시, 인지는 서로 묻지 않는다. 대신에 처음의 말에 부루퉁하게 덧댄 말에 지아가 드디어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렇게 웃어주면 좋다. 여기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어린애 생떼 같은 생각을 대신으로 마주 안은 팔에 힘을 실으며.
#02_내 숨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세계는 수없이 많고, 그 모든 곳에는 당신이 있을 테다. 유일하게 의존할 신탁, 구명줄로 품은 절박切迫이었다.
지독한 일이 연거푸 벌어진 결과는 참혹했다. 삶의 시초부터 많은 것을 끌어안았던 정신은 세계가 녹아내리는 결말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다. 강건하게 모든 일을 견뎌온 동력이 역으로 참사를 일으켜, 셀 수 없는 죽음으로 화化해, 바라지도 않은 권능으로 임했다니. 지키지 못한 자에게 뒤늦게 내린 만능의 힘이란 얼마나 처참한가.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거야말로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온전히 허무한 끝일 것이므로.
홀로 완전해져 궤를 이탈한 존재는 미쳐버리기 전, 우연히 당신의 자락을 붙들게 됐다.
“지아 씨.”
목이 메었다. 살아있는 주지아가 여기 있다. 이곳의 주지아는 살아 있었다. 위임된 권능으로 온 세계선을 부감하여 읽을 수 있게 된 제가 이 사람을 잘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같은 영혼 앞에서 지금까지 제가 얼마나 목 졸려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겨우 한 마디나마 숨통이 트인다. 그래, 우리는 서로의 끝을 알면서도 사랑을 했고, 그리하여 그리하여 저는 그를 통해서만 숨 쉴 수 있게 되어버린 거겠지. 이런 식으로라도 당신은 내가 살아있기를 바랐을까.
바싹 마른 낙엽처럼 버석버석한 웃음에 서서히 물기가 어렸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암석이 바위로, 바위가 자갈로, 자갈이 다시 모래로 무너지듯이 극단으로 몰려있던 감정이 형체를 잃으며 풍화한다. 휘몰아치는 이 절박함에, 그 아래 원래 쓰여 있던 이름이 무엇이었을지는 이제 모른다.
#03_결국 당신이 보고 싶어서
볕이 좋았다. 노래 가사로 흔히 부르는 푸르른 5월처럼 놀러 나가기에 딱 좋은 날씨다. 앞이 안 보인다고 해도 다른 감각으로 일기日氣를 구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지아는 개인 핸드폰을 쥐락펴락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일은 아직 많이 남았다. 일정에 숨통 좀 트게 하려거든 바지런히 일하는 게 맞기는 하다. 제가 이런데 천사님 역시 같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멋진 날에 애인을 못 만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억울하고 심통이 나서. 이렇게까지 생각이 들었으면 보통은 곧장 맘내키는 대로 움직였을 텐데 지아는 한숨을 폭 쉬었다. 주저하는 까닭은 하나다. 저야 시간을 어떻게든 쪼개면 나갈 수 있다지만 아이샤는 어떨까?
한숨도 벌써 여섯 번째가 되다 보니 옆 책상에서 잡무를 처리하던 비서가 이쪽을 기민하게 살피는 낌새가 났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지, 안 그러면 저 친구의 집중력까지 다 까먹겠다 싶다. 핑곗거리가 되어준 비서에게 속으로만 고마움을 표하며 지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놀랍게도 수신음이 한 번 끝나기가 무섭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하루를 초분 단위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NST의 관장님께서.
― …지아 씨?
“아, 응.”
― 아뇨, 그, 말이 없으셔서 전화 끊겼나 했어요. 그런데, 조금 놀랍네요.
“뭐가요?”
조심조심 말을 걸어온 아이샤에게 반사적으로 대꾸하니 안심한 듯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저는 답지 않게 당황해서 그 흔한 인사도 건네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각이 없었는데, 모양 빠지게 뭐람. 지아는 화급하게 정신을 차리며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 같은 천사님의 목소리가, 놀랍다고 말하는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어쩐지 알 것만 같아서.
― 저도 마침 지아 씨께 연락하려고 했었거든요. 엄청 고민했는데, 그, 날이 너무 좋아서요….
“그렇죠? 나도 그랬어요. 날이 이렇게 좋은데, 일하고만 있긴 싫었어. 그럼 지금 만날래요?”
웃음으로 무너지는 입가를 애써 누르면서 지아는 한참 전부터 하고팠던 말을 성마르게 올렸다. 아, 세상에. 이 사람을 어쩌면 좋아. 저절로 환한 미소가 맺혔다. 같은 생각을 했다고 알았으면 망설이지 않았는데. 고민한 시간이 아까웠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반갑게 숨을 삼키는 기색이 난다.
― 지아 씨가 괜찮으면요?
“천사님 만나는 건데, 당연히 되지. 없는 시간도 만들 수 있어.”
― 그러면 제가 15분 안에 마중 나갈게요.
“조금 이따 봐요.”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에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여기 좀 부탁해.”하는 목소리가 흐리게 들렸다. 정말로 오는구나. 자각하기 무섭게 아까 전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이 벅차오르다 못해 붕 떠오를 것만 같다. 지아는 한참 억눌렀던 환호성을 지르고서 겉옷과 지갑을 챙겼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아니, 네? 사장님! 잠깐만요!”
설마설마하며 저희의 통화를 숨죽여 듣고 있던 비서가 비명을 지르건 말건, 지아는 활짝 피어난 작약처럼 웃으며 밖으로 향했다.
새맑은 5월의 하늘 아래, 간만의 데이트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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