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O.C./탐정조수] 이상 현상

빛 하나 닿지 않는 어둠 속에 데스마스크처럼 희게 뜬 얼굴이 있다.

* 툿친 비첼님네 리바이(탐정)와 탐넘 분의 헤르만(조수)의 짧은 조각글. 악몽을 꾼 리바이와 그걸 발견한 헤르만.

* 캐해나 설정 틀린 곳 지적받으면 잽싸게 고칩니다…!

* 첼님이 악몽 관련된 자캐 툿을 쓰신 걸 보고, 뭔가 삘받아서 슥슥

* 마스토돈에 썼던 조각을 좀 더 덧대고 손봤습니다


꽤 골치 아픈 의뢰가 들어온 탓에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탐정과 조수는 영 피로한 얼굴을 하고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걸로 사건 해결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겨우 실마리 비슷한 거나 쥔 게 다다. 그것도 내일 새벽바람부터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별다른 말 없이도 더는 움직일 기력이 없다는 건 서로 얼굴 꼴을 보면 아는 터라, 둘은 척척 담요며 목배게며를 끌어와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그냥 사무실에서 선잠을 자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 거다. 하나는 소파에 하나는 구석에 구겨놨던 접이식 매트리스에 각자 찌그러져 눕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곯아떨어졌다. 그래, 분명 그랬는데,

헤르만은 문득 기묘한 예감으로 눈을 떴다. 실은 잠에서 깬 줄도 몰랐다가 씻어내듯 사라진 잠기운에 뒤늦게 어리둥절한 거다. 암만 전직이라고 해도 군에 몸 담았던 기감은 변하지 않았고, 우리 탐정 나으리께서는 간혹 위험한 곳에도 그 연약한 모가지를 훅훅 드밀곤 했으므로 위기감지력은 여전히 현역이다. 그런데 위협도 안 느껴지는 이 고요한 밤에 왜 제가 갑자기 깬 걸까.

조금은 얼떨떨한 채로 헤르만은 주위를 훑었다. 창밖은 가로등이 다 꺼져 깜깜하고, 구름이 껴 이지러지던 달조차 보이지 않아 아무런 광원이 없이 새까맣기만 하다. 잘 들어보면 빗소리가 미약해 어쩌면 자정 넘기며 비가 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옛 상처가 쑤신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도대체 이 평화로운 밤, 무엇 때문에 깨버린걸까를 멍하니 생각하던 조수는 문득 숨을 삼킨다.

빛 하나 닿지 않는 어둠 속에 데스마스크처럼 희게 뜬 얼굴이 있다. 리바이다. 익숙하면서도 지독하게 낯선 면을 하고 있는 리바이. 늘 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곤 하던 그의 탐정은 지금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딱딱하게 굳은 공포를 입에 꽉 물고 있었다. 회색으로 착각할 정도로 파리하게 질린 얼굴, 이마께에 말라붙은 식은땀, 좁게 꽉 죄어 떨리는 동공…. 미세한 움직임을 보지 못했더라면 화산재에 묻혔던 폼페이 사람으로 착각했을 거다.

때로 잘 우려낸 홍차 같은, 진실을 꿰어내는 눈동자는 노리는 목표도 없이 허공을 헤맨다. 리바이는 의욕이 나기 전까진 미적거려서 그렇지, 그의 시선이 헛손질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제 그의 곁에 선 제가 제일 잘 안다. 그러므로 헤르만은 이 어둠 속에서 무얼 이리 세세히 볼 수 있었냐는 의문 대신으로 혼란스러운 침묵에 잠겼다.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평소 같은 타박이나 농담, 심지어는 비아냥조차도 저 비극의 한 조각을 구현한 듯한 앞에선 가만히 스러졌다.

그러다가 겨우, 암순응을 완전히 마친 눈이 어둠 속에서 힘이 잔뜩 들어가 뻣뻣한 어깨선을 건져내고서야, 마취에서 풀려난 짐승처럼 간신히 목소리를 내는 거다. 물 좀 마시겠습니까, 하고. 평소보다 잠잠히 깔린 목소리에 리바이는 지나칠 정도로 흠칫 놀랐다가 이내 낙엽이 나부껴 내리는 것처럼 서서히, 아주 느리게 그가 아는 탐정님으로 돌아간다. 올라갔던 어깨선이 완연히 나사 빠진 평상시로 돌아가서야 탐정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조수는 별 말없이 컵에 물을 따라서 가져온다. 삼 분의 이 쯤 찬, 실온으로 미지근한 물이었다. 헤르만은 머그컵을 건네고 리바이는 여상하게 받아든다. 낮이었다면 아무런 이변도 없었을 일상의 한 모습은, 그러나, 리바이의 손에 잔이 넘어가는 순간 흔들려 물이 넘친다. 헤르만은 제 쪽으로 튄 물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양 가만히 눈 감고 지나간다. 물이 목울대를 타고 넘는 소리가 괜히 선명했다. 컵이 근처 탁상에 탁, 하고 놓인다. 곧 목멘 소리로 잠이나 더 자라는 퉁명스러운 말이 날아들었고, 헤르만은 그제서야 자리로 돌아갔다. 이상 현상만을 눈꺼풀 아래로 가라앉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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