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레지레이] 당신을 위한

취급설명서

* 모바일게임 월드플리퍼의, 지인 분 드림컾(레지스/레이츠) 짧은 글입니다

* 그래서 레이츠가 누구냐며는요!!!

* 남의 드림컾으로 신나게 2차를 볶아먹는 사람 나야 나

* 드림주인 트친님이 니시노 카나의 '취급설명서'(클릭 시 새창)가 레이츠 같다고 하신 것에서 출발했는데, 실제로 남은 건 가사 중 '꽃 한 송이' 뿐인 것 같습니다.

* 일명 백지스라고 불리는 백화레지스(한정) 캐릭터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그가 들고 있는 꽃의 정체)

* 개인적으로 레이츠와 어울리는 건 해바라기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작중의 꽃 종류는 고르지 않았으니 읽어주시는 개개인의 상상에 맡기는 쪽을 택해보았어요.


레지스는 제가 뽑은 쪽지를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렇다고 쪽지에 쓰여있는 내용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답이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들고 있는 자그마한 종이는 실제의 질량을 몇십억 배 상회하는 심리적 무게(이런 연산 수치를 감지하고 즐거워해야 하나 망설였다)로 탈바꿈해 그의 연산 모듈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 파트너에게 어울리는 꽃을 선물해보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 것인지 처음부터 기술해보자면 이러하다.

당연하게도 우리 안드로이드 일동은 인류의 문화에 각별한 관심이 있기에, 모험과 모험 틈바귀마다 아르크를 졸라다 이야기를 듣곤 했다. 다시 말해, 그 애가 매번 이런 게 재밌느냐며 주저주저 꺼내는 ‘진짜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전달해주는 이야기 그 14번째’ 세션을 가졌다는 뜻이다. 거기서 튀어나온 것이 마니또 게임이었다. 원래는 여럿이서 마니또 짝꿍을 정해서 한다는데, 시공간이 엇나가는 사는 이들이 태반인 이곳에서 대뜸 실행해볼 수는 없어서 레지스는 언젠가 이걸로 대대적인 이벤트를 열면 어떨까, 정도의 가벼운 구상으로 클라우드 저장소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웬걸, 우리 해바라기 같은 아가씨께서 우연히 주워들은 이 이야기에 완전히 꽂힌 거다.

“레지스, 우리 저거 하자!”

감정 표시등이 과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음향 모듈 파츠가 하늘 높이 치솟은 채다. 누가 봐도 흥미 100%, 의욕 100%인 모습이라 레지스는 그냥 맥없이 졌다. 옆에서 디어가 그 모습에 깔깔 웃은 건 덤이다. 강철의 가희는 제 음흉한 매니저가 파트너 기체에게 가차 없이 휘둘리는 걸 보는 게 낙이라며 즐거워했고, 아르크를 비롯한 다른 친애하는 유기체 친구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여기엔 내 편이 없느냐고 거짓 울음을 좀 냈더니 레이츠가 “그야, 내가 레지스 편이지!”라며 손을 번쩍 들어서, 모두가 웃음바다가 되었더랬다.

자, 그래서 다시 이 쪽지로 돌아온다. 레이츠가 아르크에게서 얻어온 ‘전형적인 마니또 쪽지 리스트’ 스무 가지를 쪽지에 적고, 각 쪽지에 일시적 스캔 저항 처리(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희 안드로이드는 각 쪽지의 차이를 알고 만다. 이 점은 추후 이벤트를 진행하기 위한 중요한 사항으로 다루자고 메모했다)를 한 후, 레이츠와 동시에 쪽지를 뽑았다.

레이츠의 디스플레이에 느낌표가 한 번 떴다가, 곧 평소의 밝기로 돌아왔다. 무엇을 뽑았는지 궁금했지만, 뭐, 그건 굳이 노력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일이라 슬금슬금 뻗으려는 연산을 강제종료한다. 그러면 손에 들린 아주 가벼운 종이의 무게가 메인보드 위로 올라온다. 아까까지만큼의 흥미는 없었다. 난 참여자보다는 사회자가 성에 맞을 것 같은데. 그렇게 사고가 딴 데로 흐르기가 무섭게 시각 센서에서 가벼운 알람이 온다. 레이츠가 저를 빠-안히 쳐다보고 있었다. 레지스는 급하게 보조 센서 모듈의 기록을 열람했다. 그는 쪽지를 열어볼 생각이 없어봬는 저를 보고선 아까부터 저렇게 저를 들여다 보고 있던 모양이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부탁해요’라는 시선만 내세우며. 누군가처럼 강제성은 없는 그것에 레지스는 언제나 약했고,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에 그는 별다른 뜸을 들이지 않고 쪽지를 열었다가, 그대로 덜그럭 멈췄다.

“좋아! 그럼 레지스, 기대할게! 내 것도 기대해!”

확인만 하면 좋았던 걸까. 레이츠가 발랄한 목소리를 내고서, 호버링 출력을 높여 사라지는 동안 렉-레지스터는 오버플로된 것마냥 하염없이 멈춰 서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자, 결국 잠시 간의 현실도피였다. 레지스는 일단 모든 연산을 초기화하고, 냉각장치의 출력을 높인다. 그새 조금 뜨끈하게 달아오른 금속부가 천천히 식었다. 유기체들이 흔히 그러하듯, 심호흡을 따라하고서 차근차근 사고회로를 기동했다.

꽃. 솔직히 이 주제는 이미 예전에 다뤄본 적이 있다. 어드미니스터에게 바친 헌화가 아주 먼 일은 아니지 않나. 어드민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흰 꽃을 바쳤다. 그렇다면 레이츠에게는?

변질된 어드민에게 대항하며 암약하면서도 끝끝내 부서지지 않았던 레지스의 양자두뇌는 이전에 헌화를 위해 찾아보았던 지식을 다시 빠르게 메인보드에 올렸다. 전자가 그리는 세상에 하얀 물결이 친다. 어딜 보아도 흰 빛이 단색으로 그득하다. 이게 아니야. 레지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 물결을 흩었다.

같은 흰 꽃을 줄 수는 없다. 그건 죽은 자를 위한 꽃이니까. 레이츠는 분명히 여기 살아 있고, 어드미니스터에게서 연장되었으나 틀림없이 다른 존재다. 그렇다면 산 자를 위한 꽃을 골라야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레지스는 검색엔진에 키워드를 달리 넣었다. 곧 새로이 검색한 결과가 밀려들어 온다. 오만 색채다. 가시광선 영역의 모든 색을 다 불러들인 듯한 색깔의 향연에 레지스는 망연해졌다. 이 중 레이츠에게 가장 어울릴 꽃을 하나만 골라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1비트도 엄두가 안 났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한 꽃은 오히려, 결국엔 한 점으로 수렴하니 손쉽게 고를 수 있었다. 망망하기만 하던 흰 바다는 그 광대한 풍경에 비해 단일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자를 위한 꽃은 이렇게나 다채로워서, 결단코 수렴하지 않고 모든 생生이 저마다의 길을 걷듯이 오만 곳으로 뻗어나간다. 거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선택은 곧 사고思考의 결과이며 필연적으로 관찰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담긴다. 그러므로 남겨진 결론은 겨우 데이터 몇 조각 짜리 얄팍한 문장임에도, 손에 쥐어졌던 쪽지가 무겁도록 마음에 얹었던 것과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서 저를 짓누른다. 저는 레이츠를 진지하게 마주 보고 꽃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레지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가, 이상 압력 감지 메시지가 뜨고서야 연산 메인스트림으로 돌아왔다.

단절되고 변형된 과거의 편린에서, 저에게 두 번째 기회처럼 다시금 뻗어진 손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무겁지만 달아날 수는 없는 무거움이었다. 레지스는 여전히 어드민에 대한 고정된 데이터와 레이츠에 대한 갱신되는 데이터 사이에서 매번 갈팡질팡하고 스스로의 연산 값을 믿지 못할 때가 자주 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레이츠만을 염두하고서 성심껏 전심전력으로 고민해야 함을 안다. 레이츠는 어드미니스터가 아니기에, 그가 과거의 모체에서 탈피했다고 선언했기에. 이어져 있으나, 분명 틀림없는 별개의 존재이므로. 그래서 레지스는 레이츠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부정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그 어떠한 언행도 해서는 안 된다. 그게 어드민과 레이츠 모두를 존중하는 길이다.

아무래도 지금껏 유들유들 피해왔던 문제를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온 듯했다. 피할 수는 없다. 기록자는 단 한 번 직무를 회피했던 적이 있고, 그 결정은 영구히 저를 온전한 기록자로 만들지 못하며, 두 번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노라고 결정한 사항이다.

무겁게 침잠하던 사고는 곧, 급부상한다. 구부정하게 굽었던 자세를 바로하며 레지스는 스스로에게 남겨진 기록 한 줄을 띄워본다. 비록 온전한 존재의의를 달성하지 못하지만, 렉-레지스터는 프로젝트를 세우고 목표에 올린 것을 반드시 달성하는 안드로이드이기도 하다. 어드민 그녀를 끌어내리는 일조차, 기어코 성공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는 다시금 색채의 향연 중 단 하나의 최선을 찾으러 뛰어들었다.


어떤 선택지는 너무 식상했고, 또 어떤 선택지는 너무 과장되었다. 아무리 보기에 예쁜 꽃이어도 조금이라도 허투루 고른 티가 나면 가차 없이 잘라냈다. 그렇게 오래도록, 제 곁에 기꺼이 남아준 단 하나의 존재만을 연산하며 숙고한 시간이 마침내 끝났고,

“자, 레이츠. 자네를 위한 꽃이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보이스 박스를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는 태연자약했으나, 레지스는 제가 유기체였다면 실제로는 엉망진창으로 떨려서 볼품없는 목소리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유기체를 이해해보겠답시고 연산 플로우에 맞춰서 뛰게 해둔 유사심장구현 모듈이 미친 듯한 속도로 진동하고, 외부 시각센서 비트(불법이다)를 포함한 온 센서가 제 앞에 선 레이츠에게 모든 자원 할당량을 배정한다. 주홍색을 포인트 컬러로 한 안드로이드는 건네진 꽃을 바라보고, 저와 번갈아 쳐다보고선, 곧 아주 행복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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