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인지 ; 05
“삼하인에요?”
크리스텔은 베르다미어에게 통행증을 건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의 얼굴엔 걱정하는 표정과 감사함의 미소가 뒤섞여 있었다.
“네, 그때는 에린과 마족의 세계가 연결되는 절기... 삼하인이 되면 바리 던전에 제가 드린 통행증을 바치세요. 그러면 티르 나 노이로 가실 수 있을 거에요.”
마족의 세계라는 말이 신경 쓰였지만, 베르다미어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타르라크가 했던 ‘마족의 땅’이라는 말도 그렇고, ‘티르 나 노이’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낙원은 아닌 모양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크리스텔이 다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가실 건가요? 그곳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무도 몰라요. 어쩌면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잔뜩 보게 되실 거예요.”
사제는 그가 결국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런 식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동그란 붉은 눈동자 한 쌍이 크리스텔을 바라보다 언뜻 웃었다.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는 통행증을 소중하게 가방에 집어넣었다. 정말 끝에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드는 게 약간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기묘하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죠.”
“... 그런가요.”
“음, 뭐, 사실 아직 실감이 안 나요. 사명이니 정의니 하는 것도 여전히 잘 모르겠고.”
베르다미어는 해가 지면서 보랏빛이 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크리스텔을 바라보며 으쓱였다. 일단 될 때까지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포기하지, 뭐, 라는 생각은 그가 에린에 처음 올 때부터 그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결국 될 때까지 해본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까 해보려고요. 타르라크도 해내야 하는 게 있으니까 계속 나아갔었잖아요?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아요.”
그는 장난스럽게 짚었다. 크리스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세 무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린 밀레시안은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발걸음을 가지고 있었다. 위대한 사명이나 무거운 의무는 그의 둥근 어깨에서 흘러 떨어졌다. 오직 작고 단단한 마음이 그를 여기까지 이끈 것이다. 온후한 사제는 한숨을 내뱉듯이 입을 뗐다.
“그렇다면 약속해 주세요, 베르다미어 씨.”
밀레시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무사히 돌아오겠다고요. 아시겠죠?”
“좋아요.”
베르다미어가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꼭 무사히 돌아올게요.”
그리고서 그는 바리 던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바람에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나폴거렸다. 크리스텔은 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 짧은 기도를 올렸다. 사랑의 신께서 부디 여행자를 굽어살피시기를.
베르다미어는 성당에서 내려와 광장을 향해 걸으면서 생각했다. 동료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지? 안타깝게도 베르다미어는 밀레시안 친구가 많지 않았다. 가족은 있었지만, 바쁠 텐데 부르기 좀 그랬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그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엉성한 표지판을 만들어 세워 두고 그는 옆에 앉아서 그동안 얻은 것들을 복기해보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수첩을 꺼내 낙서처럼 끄적였다. 타르라크와 일행들이 봤던 모리안은 사실 모리안이 아니다. 마신 키홀은 에린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타르라크의 스승은 키홀에게 협력하고 있었고, 마리와 루에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마족은 글라스 기브넨이라는 거인을 소환해서... 그는 깃펜의 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왜 그렇게 눈을 벌겋게 뒤집고 달려드는 걸까. 단지 땅을 차지하려고? 그들의 땅이 황폐하기 때문에? 모리안의 모습은 사람들을 더 잘 회유하기 위해서 뒤집어쓴 거라는 건 알겠다. 그는 깃펜을 손가락 위에서 빙글 돌렸다.
야욕과 욕심이라는 말은 그에게서 약간 먼 단어였다. 시골 마을에서 야욕이라고 해 봐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수프가 좀 더 많은 그릇을 잡거나, 차기 촌장의 자리를 노리는 등의 사소하고 자그마한, 야욕이라고 할 것도 없는 마음들 뿐이었다. 베르다미어는 특히나 그런 마음이 없는 쪽이었다. 수프 좀 덜 받으면 어때, 나중에 한 그릇 더 먹지 뭐. 촌장 자리는 던컨 촌장님이 계속하시면 좋겠다. 그는 입술을 잠깐 비쭉거렸다. 결국 인간을 욕하던 책도 그냥 다 선전이었잖아. 아무튼 쟤들이 나빴다! 우리가 아무튼 저 땅에 살아야 한다!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베르다미어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약간 삐끗하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밀레시안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이 쾌활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재미있는 곳에 간다면서요!”
“우리도 껴도 돼요?”
“... 어, 네. 자리 비었어요.”
밀레시안들은 와! 소리를 내며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낯설고 이상하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그는 괜히 옷에 손바닥을 닦으며 표지판을 도로 해체했다. 엉성한 파티의 첫 시작은 아무렇지 않게 찾아왔다.
셋이서 함께 던전을 주파하고, 구르고 깨지고 우여곡절 끝에 베르다미어는 일행과 함께 문 앞에 섰다. 제법 섬뜩하게 생긴 문을 노려보던 그는 뒤에서 어깨를 건드리는 손 때문에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근데 여긴 왜 가려고 하는 거예요?”
일행 중 한 명이 방금 있던 전투 때문에 약간 숨이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흠, 밀레시안은 싸움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진짠가 봐. 베르다미어는 자기 얼굴도 반짝거리고 있는 걸 모르고 그렇게 생각했다.
“할 일이 있어서요. 음, 나쁜 놈들이 에린을 침략하려고 한 대요.”
그러자 일행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의 눈이 ‘세상에나!’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걸 막아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돼요?”
갑자기 질문이 쏟아졌다. 베르다미어는 ‘아, 어, 그게, 잠시만요.’하고 삐걱거리다가 겨우 그들에게 일련의 과정을 설명했다. 일행은 주의 깊게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티르 나 노이로 가야 한다는 거죠?”
“낙원인 줄 알았는데 사실 마족의 땅인 곳에요?”
“일단은요.”
“좋아요, 그럼 갑시다!”
“문 잠겨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든 하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요, 리더?”
갑자기 폭탄 돌리기처럼 질문이 날아왔다. 그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버벅거렸다. 사실 딱히 뾰족한 방법도 없지 않나? 그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방법을 택했다. 그의 손이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마치 티르 코네일에서처럼.
“...”
“...”
“...”
“안 되는데?!”
“아냐, 더 세게 두드려봐요.”
“크흠.”
베르다미어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인정사정없었다. 곁에 있던 일행들이 문을 그렇게 두드리면 잡혀간다며 기겁할 만큼 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그러게, 누가 바쁜데 가로막으래? 그리고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문이 열렸다.
“와.”
“역시 두드리면 열린다니까.”
“보스방은 열쇠 없으면 두드려도 안 열리던데.”
“네가 열쇠를 주웠어야지!”
“... 저기, 들어가도 돼요?”
“아, 죄송해요! 얘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만.”
두 사람은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다미어가 보기에 두 사람은 꽤 친해 보였고, 던전도 함께 다니는 사이 같았다. 흠, 그건 좀 부러울지도 모르겠네. 보기 좋기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그럼 갈까요? 티르 나 노이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환영받지 못할 여행자들이 메마른 세계에 첫발을 딛는다.
소년이 쏜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에 무심하게 꽂혔다. 그는 등이 약간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벌써 수십 개의 화살을 쐈으니 슬슬 아플 때가 되긴 했다. 사실 쥐어보고 싶었던 건 석궁이었는데, 아직 장전법이 손에 익지 않아 자칫하다간 상처를 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카즈윈은 머릿속의 순서에서 가장 마지막에 석궁을 두고 있었다. 괜히 처음 훈련에 사용하다가 손을 다쳐서 나머지 훈련까지 망치는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나았다. 그가 다시 화살을 재어 시위를 당길 즈음, 옆에서 함께 훈련하던 동료 중 하나가 시위를 놓치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고 둔탁한 핑, 소리는 못 알아듣기가 더 힘들었다. 카즈윈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시위를 놓았다. 견습 기사들이 훈련 중에 자잘하게 다치는 일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다. 주인을 닮아 무심한 화살이 다시 과녁에 가서 꽂혔다. 끙끙거리는 동료에게 다른 견습 기사가 걱정의 말을 건넸다.
“아이고, 괜찮아?”
“응. 으, 근데 활은 더 못 쥐겠다.”
“피는 안 나서 다행이다.”
“피부만 벗겨지는 게 더 싫지 않아? 계속 욱신거려서.”
“그것도 그렇긴 하지. 나 붕대 있어! 감아줄게.”
훈련 중에 일어나는 돌발상황은 다르게 말하면 약간 재잘거릴 시간이 허용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부상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금세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긴 하겠지만, 어쨌든 훈련을 맡은 정식 기사가 약간의 잡담을 눈감아주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떠들기 시작했다.
“이럴 땐 밀레시안이 좀 부럽다. 다쳐도 금방 낫는다며?”
“맞아, 회복력이 엄청나다더라. 난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죽지도 않으니까 다친 것도 금방 나을 것 같긴 해.”
“내가 들었는데, 늙지도 않는대. 대체 어떤 종족들인 건지 모르겠다니까.”
“왕성에 다니는 사촌오빠 말을 들어보니까 그러면서 욕심은 없다더라고. 뭘 사고팔고, 던전을 다니고, 유랑하고, 그런다던데?”
“헤에, 신기하다. 하긴 왕성에 밀레시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던 것 같아.”
카즈윈은 그동안 다섯 발을 더 과녁에 쏘았다. 미세한 차이를 가지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화살들이 과녁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훈련을 담당하는 기사가 그에게 짧은 칭찬을 던졌고, 그는 가벼운 묵례로 답했다. 석궁은 아마 이렇게 연속으로 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장전법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그걸 효과적으로 단축하려면 연습과 기본적인 근력을 늘리는 훈련이 더 필요했다. 그는 다시 시위를 당긴다. 곁에서 시시덕거리는 소리는 조금 더 작아졌다.
“그러고 보면 우리 기사 중에도 밀레시안이 없잖아.”
“아, 그렇네? 흠, 그냥 이런 데에 관심 없어서 그럴까?”
“글쎄, 그렇게 욕심도 없고 자유로우면 사명 같은 거 이해 못하지 않을까?”
소년의 화살이 약간 빗나갔다. 그는 동요하지 않고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더 꺼낸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아마 아닐걸. 소년의 목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았다. 대신 화살이 다시 공기를 찢고 날아갔다. 그의 동료들은 슬슬 정식 기사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잡담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뭣보다 신성력도 발현하지 않을 것 같아.”
“맞아, 그들은 음, 이방인이잖아.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지?”
“으앗, 많이 떠들었다. 손 조심하고, 이따 봐!”
그들이 각자의 자리로 바쁘게 흩어지고 나서, 카즈윈은 낮은 숨을 내쉬며 화살 끝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아주 짧게 사명이 없는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챙, 하고 금속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베르다미어는 재빠르게 바닥에 구르며 생각했다. 이게 말이나 돼?
파티는 성공적으로 티르 나 노이에 도착했다. 타르라크의 말에서 반쯤은 예상했지만, 낙원과는 멀어도 한참 먼 모습이었다. 티르 코네일과 비슷한 것 같긴 한데 훨씬 더 기분 나빴고 훨씬 더 삭막했다. 아예 모르는 곳으로 떨어진 것보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게다가 도우갈은 어쩐지 던컨이 생각나는 옷과 머리를 하고 서 있지를 않나, 묘지에는 좀비가 돌아다니질 않나. 베르다미어는 넝마가 되고 나서 함께 온 일행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무슨 피크닉 가듯이 허름하게 사람을 찾았는데 호의로 와 준 사람들을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았다. 일행들은 웃으며 괜찮다고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저놈의 거인을 어떻게 해야 하지.”
베르다미어는 입가에 묻어나는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일행은 겨우겨우 여신을 구하고, 기묘한 사명감을 등에 업은 채 전설 속의 거인인 글라스 기브넨을 마주했다. 거인은 지금까지 보았던 몬스터들은 애들 장난으로 느껴질 만큼 강력했고, 도우갈이 경고했던 것처럼 무자비하게 검과 손을 휘둘러 댔다. 덕분에 바닥에 널브러졌다가 다시 일어난 게 몇 번인지 몰랐다. 베르다미어는 그 와중에도 구석에 모닥불을 피우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다른 일행을 보며 심호흡했다. 그는 그들이 죽음에 가까워졌다 되살아나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던컨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네가 자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길수록, 자네를 걱정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플 걸세.’ 그게 이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만난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며 이런 기분이 든다면, 오래 지낸 이들은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처음으로 궁금해했다.
베르다미어는 다시 글라디우스의 손잡이를 손에 꽉 쥐었다. 이런 게 에린에 풀려났다간 확실히 재앙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이곳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이런 꼴을 보는 건 밀레시안 몇 명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는 거인의 단단한 살갗에 힘겹게 칼날을 휘둘렀고, 고통을 인지한 거인의 거대한 검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 척추를 타고 흐르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를 힘들게 만든 존재에 대한 복수나 사건의 원흉을 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일행으로 온 밀레시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막아내고 싶었다. 지키고 싶었다. 전투의 흥분과 전율 이전에 조약돌처럼 단단한 마음이 있었다. 그는 숨 가쁘게 뛰어 칼날을 피한다. 땅에 떨어진 스크롤을 주워 불 속에 던져넣고, 등 뒤에서 일렁이는 여신의 가호를 느낀다. 기나긴 전투를 지나면서도 지치지 않는 몸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피와 땀과 눈물이 한데 섞여 흘러내렸다. 그는 이 방의 문 앞까지 밀려났다가, 다시 도약한다. 함성처럼 동료들과 합을 맞추어 거대한 위협에 대적한다. 글라디우스엔 셀 수 없는 흠집이 났고, 손바닥의 피부는 벗겨져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베르다미어는 포기하지 못한다. 지킬 것이 있는 자는 나아가지 못할망정 물러나는 일이 없었다.
쇄도하는 강력한 힘 앞에서 그는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피가 시야를 가리는 와중에 그런 소망을 품었다. 정말 정말 강해져서, 이런 위협이 다시 찾아오더라도 그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수호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가 다시 까맣게 죽었다가 깃털의 온기를 통해 되살아난다. 일행의 강직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일어나요!”
“아직 안 끝났어요, 리더.”
그들의 눈 속엔 별빛이 있다. 베르다미어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고 웃었다.
“알아요.”
그들은 다시 일어나 거대한 위협을 상대한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불멸의 종족이었다. 전투는 그들의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들과 대적하는 적들은 그들의 불멸성에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이전에, 여행자들은 사명도 정의도 없이 오직 그들의 선한 마음으로 검을 치켜든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한 것이었다.
“여신을 구출했대!”
게이트 내에는 한바탕 뉴스가 돌았다. 밀레시안들이 여신을 구출하고 마족의 음모에서 에린을 구했다는 이야기였다. 부슬부슬 비가 올 때였는데 어린 기사들은 빗방울도 감내해가며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카즈윈은 적당히 빗방울이 닿지 않는 차양 아래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소리를 조합해보자면 밀레시안 몇 명이 티르 나 노이로 떠났고, 그들이 기어이 구속된 여신을 구출하고 마족이 준비하던 침공을 막아냈다는 모양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몰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견습 기사들이 온종일 찧고 까불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딱히 거기에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빗방울 몇 개를 맞아 촉촉해진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던 카즈윈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도로 팔을 내렸다. 하늘이 어두운 걸 보니 꽤 오래 내릴 비였다. 그는 왁자지껄한 게이트 중앙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그들에게 사명이 없을까. 의무 없이 바람처럼 흘러가는 종족이 어째서 거기까지 가서 그 모든 걸 해낼 수 있었을까. 생각은 종결되지 않고 의문으로만 떠올랐다. 왜 하필 그들이었을까? 그는 드물게 운명과 주신의 뜻을 생각한다. 만일 정말 마족에 의한 침공이 일어났다면, 기사단 쪽에서도 손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다른 강력한 누군가가 나타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흐름은 밀레시안을 향해 굽이쳐 들어갔다. 이제 그들은, 혹은 그는 무시할 수 없는 누군가가 되었다. 어쩌면 영웅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누군가.
카즈윈은 차양 아래로 빗방울이 굵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조장급 기사나 되어야 할 것이다. 흥미보다 권한이 앞서게 될 게 뻔했고, 그는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훌훌 털어냈다. 저쪽에서 피네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적절한 때가 되면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혹은 직접 대면하거나.
베르다미어는 말 그대로 기절했다 깨어났다. 함께 다녀온 일행들을 마을 입구까지 배웅하고, 촌장의 집으로 들어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가 깨끗했다. 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채 천장을 쳐다봤다.
“진짜 했네.”
작은 혼잣말이 났다. 이상한 고양이가 그걸 들은 듯이 그의 침대로 뛰어 올라와 옆구리에 몸을 비볐다.
“야, 침대엔 올라오지 말랬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손은 고양이의 정수리를 긁어주고 있었다. 그는 눈을 끔벅거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낸 것 같긴 하다. 충격적인 진실들을 마주하고, 진짜 여신을 보고, 나오의 본명도 알아내고... 생각이 흘러 흘러 결론은 ‘참 다행이다.’ 비슷한 마음이었다. 며칠 간은 티르 코네일에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던컨은 마음을 이해한다며 따뜻한 특제 수프를 해주겠다고 잠시 외출한 상태였다. 그는 역시 싸우길 잘했다는 생각을 약간 했다.
붉은 눈 위로 다시 졸음이 살랑살랑 내려왔다. 베르다미어는 작게 하품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평화로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목가적이고 소박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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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도?
근데 너보단 아닌 듯.
※ 이것이 드림 통합의 날 ※ 날조 100% ※ 내드림 + 남에 드림(ㅋㅋ) 지금 이곳, 이슈가르드의 오래된 술집에는 두 명의 유명인이 앉아 나란히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짙은 머리색의 엘레젠과 밝은 머리색의 엘레젠. 오랜 친우 사이에, 서로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그러한 두 남정네들. 다른 이들에게는 유명인이고 동경하는 이들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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