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생일 연성

아주 보편적인 존재의 축복

말레우스 드라코니아 드림


* 23년도 말레우스 생일 기념 연성

* 23년도 생일 카드 홈 대사 네타가... 아주 약간 있음.

저녁부터 내리던 눈이 잠깐 그친 밤. 내일이 제 생일이라고 떠들썩한 기숙사 안에서 독서 중이던 말레우스는 결국 책을 덮고 고요함을 찾아 밖으로 나섰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건 제 종자(從者)들을 걱정시키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온다면 괜찮겠지.’ 안일한 마음으로 기숙사 밖으로 나선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학교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조각상들만이 자리를 지키는 메인 스트리트와 탁 트인 운동장, 불이 꺼진 상점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도서관까지.

쌓인 눈에 제 발자국을 남기며 돌아다니던 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세상을 희게 덮은 눈을 기쁘게 구경하고 있을 누군가를 찾아 고물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어라.”

뽀득뽀득. 쌓인 눈이 밟히며 압축되는 소리에 손님이 온 걸 눈치챈 아이렌은 고물 기숙사 주변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새빨갛게 상기된 손끝과 뺨이 오늘따라 유독 붉어 보이는 건 주변에 쌓인 눈 때문일까.

보기만 해도 추워 보이는 아이렌에게 다가간 말레우스는 제 장갑이라도 벗어줘야 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치수가 맞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손을 거두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역시 잠들지 않고 있었나, 아이렌.”

“언제나처럼 그렇게 되었지요, 뭐.”

아이렌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늦게까지 무얼 하는지는 매일 조금씩 바뀌었지만, 보통은 이런저런 공부를 하거나 주변을 산책하고, 창가나 바깥에 앉아 별을 보곤 했지.

그러니 오늘도 깨어있을 줄 알았다. 눈을 좋아하니 밖에 나와 있을 것도 예상했지. 만나러 온 이를 마주해 기분이 좋아진 말레우스는 입김으로 손을 녹이는 아이렌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오늘 생일이시죠? 생일 축하드려요, 선배.”

뽀얀 입김을 토해내던 그는 갑자기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더니, 예상치 못한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제가 산책을 나온 지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눈치챈 말레우스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벌써 12시가 지났나?”

“어라, 모르셨어요?”

“방을 나섰을 때는 아직 17일이었으니까. 그 사이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을 줄은 몰랐군.”

아무리 자신이라도 시간의 흐름까지 파악하지는 못한다. 안 그래도 혼자서 돌아다니다 보면 늘 시간이 빨리 가기도 했으니까.

날이 바뀌기 전 돌아갈 예정이었던 말레우스는 밖에서 맞이하게 된 생일에 ‘으음.’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렇군. 생일인가. 또.”

아까 세벡이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제일 먼저 도련님의 생일을 축하해 드리겠습니다!’라며 다짐하는 걸 봤는데, 그 기회를 빼앗겨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다른 이에게 축하받은 걸 비밀로 하면 그만이긴 하겠지만, 그건 상대도 입맞춰 거짓말을 해줘야 하지 않던가.

‘뭐, 아이렌이라면 선의의 거짓말은 선뜻 해줄 것 같지만.’ 말레우스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 인간의 아이가 다른 이들의 기분을 잘 살피고 배려한다는 걸 알기에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 학원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생일인가.”

“흐음, 그럼 고향에서 맞이한 생일까지 합하면 몇 번째인가요?”

“그런 건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해 유감이군.”

아예 생일 자체를 잊어버려 새로 생일을 정한 릴리아와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제게 생일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무리다. 인간 노인들도 과거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들보다 훨씬 오래 사는 자신들은 오죽하겠는가.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아이렌도 이 고충은 이해하는지, 사과하는 그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역시 오래 살게 되면 생일에 무감각해지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1년마다 계속 반복되니, 그리 큰 행사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하지만 너희 인간들은 다르겠지. 그렇지 않나?”

“아무래도 그렇죠. 100년 살기도 힘든 종족이다 보니, 1년도 소중한걸요.”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새하얀 얼굴은 아까보다 더 상기되어 있었다. 찬 바람이 스칠 때마다 색채 차이가 명확해지는 얼굴은 만져보지 않아도 선명한 차가움이 느껴졌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제비꽃색 눈동자만큼은 봄처럼 따뜻했다.

“그래도 축하를 받는 건 싫지 않으신 거죠?”

“물론이다. 축하와 축복을 싫어하는 이가 몇이나 있겠나.”

“다행이네요, 무심코 축하해 버려서 걱정했는데.”

세상에 그런 걸 걱정 하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정말이지 별걱정을 다 한다.

평소 언행을 보고 있자면 세상 무서운 게 없어 보이면서도 이상한 곳에서 고민에 빠지는 별난 소녀를 팔짱을 낀 채 바라보던 말레우스는 마주친 시선에서 봄의 기운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너는 봄에 태어났다고 했던가?”

갑자기 제 쪽으로 관심이 기우는 게 불편한 걸까. 은은하게 웃고 있던 아이렌의 입술이 일직선을 그렸다가, 이내 조금은 어색한 호선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네, 4월생이에요.”

“그렇군. 아직 바람이 차갑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고 봐야 하나.”

이 아이는 들어주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잘하지만, 딱 하나 대화 주제로 꺼리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아이렌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그 내면의 사상이나 생각을 묻는 건 괜찮지만, 과거나 가족에 관해 묻는다면 금방 입을 닫아버리는 이 미아는 상대가 제게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관심을 쏟는 걸 불편해했다. 정작 그러는 본인은, 상대를 속속들이 파헤치고 파고들면서 말이다.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를 파악하고 모든 걸 맞춰준다니. 만약 아이렌이 외교관이나 정치가였다면 저 또한 이런 태도를 높게 사주었겠지만, 상대와 자신은 그저 친밀한 관계일 뿐이라 곤란하기 짝이 없다.

대화 주제를 돌릴까. 아니면 이왕 받아주고 있으니, 계속 이 이야기를 할까.

잠깐 망설인 말레우스는 모처럼이니 제 호의를 그대로 드러내기로 했다.

“네 생일에는 내가 꼭 가장 먼저 축하해 주러 오도록 하지.”

“예?”

“이번 생일은 네가 제일 먼저 축하해 주었으니까. 나 또한 그렇게 해주어야지.”

세벡이 듣는다면 억울함에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건을 받는 것도 인사를 듣는 것도 멋쩍어하는 이 계집애를 대상으로 이런 좋은 건수가 생긴 이상, 기회를 살리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아까운 일 아닌가.

예상대로 아이렌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그 호의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한발 물러섰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어요. 이런 건 순서가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요.”

“내가 그리하고 싶어서 맹세하는 것뿐이다. 강요를 느끼거나 한 적은 없어.”

“그런가요.”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표정을 감추는 일엔 능숙하지 않은 아이렌은 제가 만든 눈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고작 축하를 기약하는 정도 가지고 심각하게 굴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기쁘게 받아주면 좋을 텐데.

내어주는 건 좋아하지만 받는 것에는 늘 경계심을 품고 있는 속 모를 후배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던 말레우스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심통이 나서 물었다. 

“혹시 내 축하는 꺼림칙한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질문에, 여기저기 방황하던 시선이 순식간에 제게로 돌아온다.

언제나 나이에 맞지 않은 어른스러운 낯짝을 한 채 사람을 대하는 아이렌답잖게, 지금은 당황한 게 한눈에 보인다. 그는 제 말 한마디에 크게 동요하는 상대를 보고 조금은 마음이 풀렸지만, 그래도 쉽게 굳은 표정을 펴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네 반응이 떨떠름한 것 같아서.”

“아…….”

아이렌은 한 손으로 감정이 다 드러난 제 얼굴을 매만졌다.

“그런 거 아녜요. 이 세상에 선배의 축하를 거절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세벡이라면 거의 기절 할 정도로 좋아할걸요?”

“킹스카라 같은 예도 있지 않은가.”

“그 선배도 굳이 바라지 않을 뿐, 막상 축하를 듣는다면 꺼리진 않을걸요?”

‘안 그래 보여도, 생각보단 귀여운 선배거든요.’ 그렇게 말한 아이렌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하며 키득거리는 상대의 모습은 얄미울 정도로 눈이 부셔서, 말레우스는 내뱉는 말에 박혀있는 가시를 미처 골라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너도 내 축하를 ‘꺼리지 않는 정도’인 건가?”

가시 산골의 차기 당주이자 위대한 마법사인 제가 축하해 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한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말하는 건 아니다. 이건 제 지위 같은 것과 상관없는 문제다. 그거야, 자신들은 기쁨을 나누고 고민을 들어줄 수 있을 만큼 친한 사이이지 않은가.

우리는 단둘이 별을 보며 이야기하거나 함께 밤거리를 걷거나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하며 마음을 나눈 사이인데, 제 진심을 담은 축하를 기쁘게 받아주지 않는다면 관계 자체에 회의감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된다.

말레우스는 그 수많은 생각을 직접 입 밖으로 뱉어내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이렌은 그 모든 걸 본능적으로 공감하여 느낀 모양이었다.

여전히 붉은 기가 도는 손끝을 뻗어 상대의 팔 위에 손을 얹은 아이렌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신경 써 주셔서 기뻐요.”

“그래 보이지 않는데.”

“제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가 봐요. 정말 기뻐요.”

누가 표현이 서툴다는 건가. 말레우스는 어이가 없어서 짧게 한탄했다.

아이렌은 부정적인 감정은 삼킬 때가 있어도 긍정적인 감정은 곧바로 상대에게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감탄, 친애, 공감과 경애까지. 마치 폼피오레의 루크 헌트처럼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호감을 쏟아내는 건 아니었지만, 말레우스는 아이렌이 표현하는 감정에선 담백한 진솔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지금 제 팔에 닿은, 이 손길 또한 어찌나 올곧게 다정한지.

움직이지 않는 얼음장이 된 손 앞에 어느새 팔짱을 풀어버린 그는,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 보니 선물을 드려야 할 텐데, 이렇게 찾아오실 줄 몰랐어요. 잠깐 기다려 주실래요? 방에 다녀올게요.”

“선물은 나중에 주어도 좋아. 어차피 학교에서 다시 볼 것 아닌가. 지금은 그냥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데.”

제가 비뚤게 말한 걸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죄책감을 느낀 아이렌이 선물을 핑계로 자리를 뜬 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일까. 말레우스는 아예 손깍지를 끼고 살짝 힘을 주었다.

다소 노골적인 접촉에 놀란 건지, 아이렌의 팔이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얽은 손가락을 풀지 않고 말로만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강요는 아니다.”

“알아요. 저도 왔다 갔다 하기 귀찮으니까, 나중에 드릴게요.”

‘귀찮다’라니. 정말로 이 애랑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는 아이렌 때문에, 그는 결국 다시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좀 있으면 실버 선배랑 세벡이 찾으러 오겠네요. 역시 선물을 가지러 오가기엔 무리였을지도.”

“찾으러 와? 나를?”

“네. 늘 이맘때쯤 왔던 것 같은데.”

확실히 그 둘은 자주 밤 산책을 나선 자신을 찾으러 나오곤 했지. 하지만, 언제 오는지까지는 기억하진 못했는데 그걸 이 애는 알고 있었단 말인가.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찾으러 오는 두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양쪽 다일지도 모르지.

말레우스는 부디 세벡이 생일 축하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길 빌며, 소소한 한탄을 했다.

“다들 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군. 내가 멀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늘 여기 온다는 걸 안다면 안심하고 내버려 두어도 좋지 않은가.”

“하지만 선배는 귀한 몸이시잖아요. 선배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디 가는지 알아도 불안할 수 있죠. 소중할수록 신경이 쓰이잖아요.”

‘글쎄다. 신경이 쓰여서 소중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 마음속으로만 그리 반박한 말레우스가 저도 모르게 붙잡은 손을 제 쪽으로, 몸이 휘청이거나 발을 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아주 조금만 잡아당겼다.

무던하디 무던한 인간의 아이는 그 작은 힘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제가 하려는 말을 계속 떠들어 댈 뿐이었다.

“뭐, 선배도 소중한 산책 장소가 순식간에 북적이게 되어 속상하실 테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네가 있어서 더 자주 오게 되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오늘만 해도 그렇다. 원래라면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가 내일을 준비했어야 할 자신이 굳이 여기 온 건 전부 이 애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니까. 심지어 뭔가 대단한 걸 하려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나 좀 나누다 가기만 해도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거 같아 온 거지.

“너는 나를 편안하게 하는 존재다, 아이렌. 그러니 네 존재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해.”

어차피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렌이라면 그리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 아이의 속내를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너무 깊으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 어쩌겠는가. 심지어 이 여자는, 그렇게 맑기만 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저 만약에 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뿐이었는데.

“그건 제가 무언가 대단한 존재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특수한 처지인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음?”

아이렌은 애착을 담아 뱉은 그 말을 정면에서 반박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 말은 겸양이나 짓궂은 장난이 아니라는 듯이. 명확하고 예리하게…….

“저는 이방인이잖아요? 다른 세계에서 와서 이 세계의 법칙이나 상식에 무지한 면도 있고, 이곳에서만 통하는 편견 같은 것도 알지 못하죠. 게다가 연고가 없어서 잘못 엮여 귀찮아질 걱정도 없는 존재인 거잖아요?”

감정 없이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말이 살짝 질려서 푸른 빛이 도는 입술 사이로 막힘없이 흘러나온다. 말레우스는 예상치도 못했던 반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 이방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해야만 했다.

“어딘가에서 읽은 글인데, 낯선 사람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주려 하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들이 더 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을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봐줄 거라고 여기기에, 평소 주변 사람에겐 말 못 할 속내를 터놓는 거죠.”

“……그래서?”

“선배가 절 편안하게 여기는 건, 제가 그런 존재라서 그런 거지 저 자체가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어쩌면 저같이 재미없는 사람보단, 좀 더 귀여운 아이가 감독생이 되었다면 그쪽을 더 좋아하셨을 수도 있겠죠.”

마지막 말은 제 나름의 유머였던 걸까. 아이렌은 소리 없이 까르르 웃는다.

그러나 말레우스는 그게 농담이든 진담이든,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 자신의 가치를 단순화시키는 상대의 논리에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은 그는, 깍지 낀 손을 놓고 아이렌의 어깨를 잡았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위압적으로 굴면 안 된다. 자신은 지금 이 애를 겁주려는 게 아니다.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는 혹시나 상대가 자신을 무섭게 느낄까 봐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 노력 덕분이었을까. 아이렌은 자신을 낚아채듯 붙잡는 말레우스의 행동에 놀라긴 했지만,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저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절 너무 과대평가해주시는 것 같아서요.”

“너보다는 내가 오래 살았지. 누군가를 보고 판단하는 일도 내 쪽이 더 많이 했을 터다. 무엇보다 의미와 가치는 상대적이고, 그걸 정하고 판단하는 것 또한 각자의 일 아닌가.”

어쩌면 아이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자신은 아이렌이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점을 편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가 느끼는 ‘소중함’이라는 건, 그 정도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16살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조숙한 언행,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음에도 영원과 죽음이 제 친구인 것처럼 말하는 괴짜. 인간들 사이에 있기에도 요정들 사이에도 있기에도 어색한 이 계집애는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 흔한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탐을 내고, 그 마음을 원하고, 그게 안 된다면 곁에라도 있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라면 살아가며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제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좋을 대로 날뛰고 도망치는 이는 이 여자뿐이다.

말레우스는 내부가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마음의 창을 시선으로 열심히 두드렸다.

“나는 살아오며 수많은 생일을 맞이했고, 대부분은 그때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네가 축하해 주었기에 평생 기억에 남을 생일이 되었지.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너는 내게 특별하지 않다고?”

아무리 단단한 문이라도, 계속해도 두드리면 금이 가는 걸까.

잘게 떨리던 아이렌의 두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두어 번 숨더니, 이내 발치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던 건 아녜요, 죄송해요.”

“아니지. 지금 이 상황에선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닐 텐데.”

“그럼, 한 번 더 축하해 드려야 했나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당황한 말레우스가 말을 멈추고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바람만 불자, 표정을 가다듬은 채 고개를 든 아이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 대답의 의미를 해설했다.

“죄송해요, 농담이었어요.”

“…….”

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농담이라니. 정말로 겁도 없고, 대담하기 짝이 없다. 아니, 지금은 엉뚱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까.

너무나도 큰 황당함에 요동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그는, 결국 상대를 놓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너는 정말 이상한 아이야, 아이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별나긴 하죠.”

“하.”

그래. 잘 알면 됐다. 모른다고 했다면 더 잔소리가 길어졌을 텐데.

열이 오를 정도로 제 얼굴을 열심히 쓸어내린 말레우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농담을 들은 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마침 잘 되었군.”

축하는 몇 번이나 들어도 좋지 않은가. 사양할 이유가 없지.

살아온 세월만큼의 노련함이 있는 말레우스는 상대의 농담을 기회로 만들었다.

“아이렌, 내게 축복의 말로 축하해 주겠나?”

“예? 저는 마법사도 뭣도 아닌데, 제 축복이 의미가 있을까요?”

“말하지 않았나. 의미라는 건 보고 듣는 이가 판단한다고.”

그리고 당사자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아이렌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마치 언령(言霊)과 같이, 듣는 이에게 형용하기 힘든 에너지를 주었지. 말레우스가 원하는 건 그 에너지였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고 아픈, 이 계집애의 혼이 담긴 말 말이다.

‘으음.’ 단호한 말레우스의 말에 더는 반박하지 않고 입술만 오물거리던 아이렌은 축복해 줄 상대의 왼손을 잡더니, 장갑을 벗기고 예의 바르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말레우스 선배에게 행복과 평화, 그리고 사랑이 가득하기를.”

행복 하나만 빌어 주어도 되는데, 셋씩이나 말해주다니. 참으로 씀씀이가 큰 여자이지 않나.

바깥 공기에 식은 미지근한 입술의 촉감은 생생히 기억하는 말레우스는, 아이렌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제 입술을 똑같이 마주 대었다.

“고맙군, 아이렌.”

‘최고의 축복이었어.’ 차분하게 찬사 한 말레우스는 감사의 인사를 상대의 이마에 입술로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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