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발자취와 활자 ; 01

G2~G3의 이야기 + 약간 아이던밀레

베르다미어는 티르 코네일 광장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붉은 두 눈동자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이전과 같았지만 달랐다. 그는 빛의 기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자면 혀끝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복수와 상실, 거짓의 맛이었다. 그때 왜 에스라스의 말에 바로 반박하지 못했을까?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정령의 힘이 발현해 그를 도왔다지만 정작 그가 그때 느낀 것은 깊은 무력감뿐이었다. 거대한 골렘 속에서 튀어나온 작고 차가운 시신을 보고 밀려온 절망은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루에리가 외쳤던 원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종처럼 울렸다. 어쩌면 나 때문이 맞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모르고 지나갈 수 있던 걸 밝힌 게 문제였을지도 몰라. 어떤 사실은 차라리 드러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은가? 베르다미어는 눈을 감고 아예 드러누웠다. 티르 코네일은 한가했고 그가 바닥에 드러눕는 거야 거의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기대했던 목가적이고 안정적인 삶은 저 멀리 밀려났다. 그는 다시 여신의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오직 그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모든 밀레시안이 그렇듯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예전과 같이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삼 용사 중 아직 행적이 묘연했던 루에리를 만나고, 팔라딘의 힘을 얻고, 에스라스의 음모를 저지하고... 다시 부름을 받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그는 모리안의 이름을 등에 새긴 여신의 기사였다. 용사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다시 말하지만,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다. 그렇지만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걸 이런 식으로 깨닫게 할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야.”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 몸을 뒤척였다. 바닥에 누운 채 티르 코네일의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본다. 이번 일도 거의 끝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 의욕이 증발했다. 아이던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베르다미어 씨가 사고 없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제게 설명해주셔야겠습니다.’

 

사고 없이 안전하게 어떻게 돌아온단 말인가? 마족의 음모를 막고 파괴의 신을 강림하지 못하게 하는 게 뭐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베르다미어는 다시 약간의 짜증을 내며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쪽도 매우 곤란했다. 타르라크가 시간이 없다고 계속 걱정했단 말이야. 겨우 글라스 기브넨이네 타바르타스네 하는 것들을 이기고 돌아왔더니 이제는 파괴의 여신이란다. 그는 묵혔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끙끙거렸다. 왜 키홀 그놈은 포기를 못 하는 걸까? 걔는 뭐가 문제인 거지? 단순히 땅을 갖고 싶은 거야? 도우갈 말을 들어보면 마족의 침공으로 황폐해진 마을이라고 설명했었는데 그러면 자기들 잘못이니까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살면 되잖아. 땅을 정화하려는 시도라도 해보든지. 그게 안 되니까 자꾸 수작질인 건가? 그의 불만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한숨을 내쉬며 땅에서 한 바퀴 굴렀다. 옆을 지나가던 병아리가 겁도 없이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와 따뜻함을 한껏 즐기기 시작했다. 베르다미어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웅크린 병아리가 숨을 쉴 때마다 보송한 솜털이 그의 손바닥을 살살 간지럽혔다.

실상 그가 여신의 부탁을 계속해서 들어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작고 약한 생명들이 자라는 땅, 그가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은 곳. 그는 손바닥을 살짝 오므려 병아리에게 더 안정적인 쉼터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 곳을 자꾸 파괴하고 불태우고 구멍 내려고 하니까 문제인 거다. 사람이 마음을 착하게 먹으면 자다가도 빵이 나온댔는데 키홀 그놈은 신이 되어서는 모략과 음모만 꾸미고 있으니 시커먼 로브 속에 숨긴 음식도 다 달아날 판이었다. 숨긴 게 있다면의 이야기였지만. 혼자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베르다미어는 다른 손으로 병아리의 머리를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안심하고 지낼 수 있게 해줄게.”

 

병아리가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 그가 속삭였다. 그는 조금 더 자랐고, 조금 더 세상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하늘 아래 예쁘기만 한 게 어디 있겠냐는 말을 증명하듯 세상은 약간 나쁘고 못난 부분도 분명 있다만은, 이전의 그가 보았던 것처럼 아름다운 부분도 분명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랬다. 베르다미어는 병아리의 작고 뾰족한 부리를 톡 건드렸다.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고, 또 좋기만 한 사람도 없다. 나도 누가 보면 괴짜겠지. 그런데 키홀은 매일 한다는 소리가 인간은 타락했고 나쁜 놈들이니까 그놈들의 땅을 빼앗자! 뿐이다. 이건 일반화 아닌가? 그는 눈을 반절만 뜬 채 생각했다. 제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납작하게 만드는 거잖아. 포워르와 인간의 반목이야 늘 있던 일이고, 그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마족을 쓰러트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도 똑같으면서 뭐라는 거야?’라는 말만 맴돌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바로 눕고, 병아리를 조심스레 가슴팍 위로 옮겼다. 졸던 노란 공이 잠깐 눈을 떴다가 마저 졸았다. 얘도 태평한 성격이네. 그의 손가락이 자그마한 날개를 몇 번 더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타르라크에게 가야 했다.

 


카즈윈은 이마에 희미하게 묻어난 땀을 닦아냈다. 엉덩방아를 찧은 동료가 바닥에서 자기 엉덩이를 붙들고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가 한 짓이 아니라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또 우승이네. 다른 기사들이 너한테 기대가 많아.”

 

최근 들어 그를 눈여겨보고 있는-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정식 기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카즈윈은 일부러 겸손한 체를 하거나 뽐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단조롭게 대답했다. 기사는 씩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했으니까 상을 받아야지! 나한테 뭐 부탁하고 싶은 거 없어? 아니면 외출 기회를 잡아도 좋고.”

 

평소 같으면 ‘별로...’라는 답이 제일 먼저 튀어나왔겠지만, 오늘의 카즈윈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기사는 ‘어머, 웬일이야.’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게으른 것 같지만 무지무지하게 꼼꼼하고, 땡땡이와 낮잠에 파묻혀 있는 듯하면서도 하나하나 톺아보면 제 할 일은 제대로 해내는 이 될성부른 나무가 뭘 부탁할지 궁금했다.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은 곧 입을 열었다.

 

“보고서를 읽어보고 싶은데요.”

“보고서? 그거야 서고에 가면...”

 

창백한 눈동자는 물끄러미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그제야 앗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식 기사들한테 올라오는 보고서 말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느리게 다른 말이 따라붙었다.

 

“......곤란하시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흠, 이유를 알고 싶은데.”

 

나른하고 졸린 듯한 눈이 두어 번 끔벅였다. 그는 나이에 비해 남들이 속을 알기 어려운 편이었다.

 

“궁금해서요.”

 

역시나, 예상한 답변이었다. 크게 특이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참 웃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긴 바깥에 자주 나가지도 못하니까 애들한테는 소식지 같은 느낌이려나. 잠깐 고민한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전부 다는 곤란하니까 내가 옆에서 읽으면 안 되는 걸 걸러 줄 거야. 그래도 괜찮아?”

“... ...”

 

기사는 소년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귀찮은데.’를 놓치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라고 한 게 조금 전인데 아직 애긴 한가봐. 기사는 속으로 낄낄 웃었다. 카즈윈은 한숨을 내쉴 것 같은 얼굴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 훈련 끝나고 날 찾아와. 수고 많았어, 카즈윈.”

 

등을 팡팡 두드리는 손길에 푸른 머리카락 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별말 없이 기사에게 묵례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꽤 충동적인 부탁이었다. 원래였으면 입 밖으로 나올 일이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대련을 끝내고 스트레칭을 하며 재잘대는 동료들을 바라보다 짧게 긴장한 근육을 풀었다. 그냥 하필 그 생각이 났을 뿐이다. 거의 다 잊어버렸던 소식이 틈새를 노린 화살처럼 의식에 꽂혔고, 타이밍이 지나치게 좋았다. 그는 대체로 보상에 ‘약간의’ 휴식을 요구하곤 했다.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허락받았으니 상관없었다.

카즈윈은 훈련을 마치기 위해 제 몫의 석궁을 집어 들었다. 이제 석궁을 다루는 데에도 점차 요령이 생기고 있었다. 손바닥이 덜 찢어졌고, 활만큼 정교하게 궤적을 다룰 수 있었다. 그가 특별히 신경을 쓰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뒤에서는 정식 기사로 거의 낙점이 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소문이었지만. 그는 과녁을 겨누고 잠시 숨을 참는다. 정확한 순간에 시위가 화살을 쏘아 보내게 한다. 과녁에 화살이 꽂히는 소리와 함께 숨을 내쉰다. 훈련이 끝난 뒤를 기대하고 있었을까? 그는 뭐든 섣부르게 확신하지 않았다.

 


“난 꿈이 싫어.”

“꼬꼬.”

“삐약.”

 

베르다미어는 드러누운 채 말했다. 그러면 닭들이 대답했다. 그는 막 타르라크에게서 ‘아이던이 당신을 찾는다’라는 말을 듣고 온 참이었다. 이번엔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그는 다시 투덜거렸다.

 

“난 숨어들어 가야 하는 것도 싫어.”

“삐약.”

“꼭꼬.”

 

이번에는 병아리가 먼저 대답했다. 그는 푹푹 한숨을 내쉬고 도로 일어났다. 등에 풀이 잔뜩 붙어 있을 게 눈에 보였지만 털 기운이 없었다. 항마의 로브를 입고 바들바들 떨면서 저 세상 던전에 다녀왔는데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끝이 나기는 하나? 그는 파리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옛날의 그가 영웅은 고도의 아르바이트 발전형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걸 지금 자신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이랑 얽히지 말라는 건 이런 뜻이었나 봐. 베르다미어는 축축 처지는 걸음으로 이멘 마하를 향했다.


 

“음, 부적이 완성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니까 나중에 제가 부엉이 편으로 보낼게요. 그 사이에 반지를 주신 분에게 가서... ... 베르다미어 씨?”

 

스튜어트는 의아한 얼굴로 베르다미어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베르다미어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스튜어트를 바라보았다.

 

“아, 네. 뭐라고요?”

“그 사이에 반지를 주신 분께 가서 고맙다는 이야기라도 하시는 게 좋겠다고요. 하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완벽하게 거짓말이었다. 그는 거의 생각의 바다에 익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수호의 부적이 영적인 힘의 발현이고, 대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물건이라고? 그걸 아이던은 나한테 준 거고? 나더러 만들라고? 왜? 그는 스튜어트가 없었다면 자기 이마를 쳤을 수도 있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네, 살펴 가세요. 꼭 감사 인사하시고요!”

 

그는 여전히 반쯤 넋을 놓은 채 학교를 빠져나왔다. 고맙다는 말도 말인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리고 베르다미어는 그러고 싶을 때 그래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그 길로 곧장 이멘 마하를 향했다.

근위대장은 여전한 모습으로 영주의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숫제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이던은 희끗한 미소를 띠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부적은 완성되었습니까?”

“몰라요, 어련히 알아서 해주시겠죠. 저 그거랑 관련해서 할 말 있어요.”

 

아이던은 눈을 깜박였다. 왜 그가 반쯤 화가 난 말투로 앞에 서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음, 자유롭게 말씀하세요.”

 

베르다미어는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풀었다. 막상 이야기하자니 약간 민망했다. 뭐라고 시작하지? 그거 연인 정도나 되는 사람한테 준다던데 왜 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그럼 뭐라고 운을 떼야 해? 그는 한참 입을 꾹 다물었다가 툭 뱉었다.

 

“그거 저한테 주실 물건이 아닌 것 같아요.”

“...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진짜 몰라서 묻나? 그는 약간 도끼눈을 뜨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아이던을 바라보았다.

 

“다 들었어요. 그거, 심할 땐 대신 위험을 받아 줄 수도 있는 물건이라면서요. 게다가 죽을 수도 있고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한테 그걸 주신 거예요? 듣자 하니 아주 사랑하는 사람한테나 주는 물건...”

 

베르다미어는 갑자기 어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던은 잠깐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답잖게 얼굴을 붉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 이라던데... 아, 아무튼, 왜 그랬어요? 전 괜찮다고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 흠흠, 그분이 쓸데없는 말씀을 했군요. 그...”

 

남자의 헛기침이 침묵을 슬며시 밀어냈다. 베르다미어는 괜히 옷 끝을 만지작거리며 민망함이 해일처럼 몰려오는 걸 견뎠다. 아니, 그래서 왜 그런 걸 나한테 줘가지고. 무슨, 뭐. 그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음, 흠... 저, 절대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개인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보아하니 아이던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밀레시안은 짜증 반 민망함 반이 섞인 손길로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뭔데요.”

“... 그저 제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베르다미어 씨를 지켜드리는 일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진짜 이상해. 베르다미어는 이마를 북북 문질렀다. 그는 이제 자기 신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낡았고, 흙이 묻었고, 어쩌면 수선이 필요할 것이다. 시몬이 또 거지냐는 소리를 할지도 모르지. 그런 상념으로 도주하려던 그를 붙잡은 건 약간 낮아진 아이던의 목소리였다.

 

“어, 어쨌든... 그 반지는 저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물건입니다. 오래전 가족에게서 받은 겁니다. 그러니... 이번 일이 모두 끝난 뒤,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베르다미어는 다시 아이던을 바라보았다. 기사의 상징인 짧은 브레이드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작게 흔들거렸다. 아이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베르다미어 씨의 손으로 직접. ...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진짜 이상해. 베르다미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아주었다. 마음이 기묘하게 부글거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던은 잠깐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을 멈추었다가 마저 입을 뗐다. 어떤 마음은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단조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밀레시안은 한참 침묵하다 대답했다.

 

“꼭 돌아올게요.”

 

이멘 마하에 어둠이 깔릴 때였다. 베르다미어는 천천히 켜지기 시작한 이멘 마하의 가로등 사이를 걸어갔다. 그가 이멘 마하의 정문을 지날 즈음, 부엉이가 종이로 싼 수호의 부적을 전해주러 날아왔다. 차가운 사슬 끝에 매달린 반지가 희미한 빛을 냈다. 그는 한참 그걸 내려다보다가 손목에 차 보았다.

 

“이런 거 없어도 되는데.”

 

그는 혼잣말처럼 작게 투덜거렸다. 그것이 어떤 염려와 걱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꼭 쥐여주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부적의 사슬을 둥근 손가락이 만지작거렸다. 받았으니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야 했다. 그는 잠시 바람이 가져다주는 이멘 마하의 물 냄새를 맡고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서고에는 팔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카즈윈은 별말이 없었고, 정식 기사도 가끔 ‘아, 그건 안돼.’하고 몇 개의 종이를 가져가는 것 외에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관찰했을 뿐이다. 얘는 보고서가 말하고 있는 게 뭔지는 알까?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니까 읽겠다고 한 거겠지? 기사는 생각이 뭉게뭉게 커지는 걸 느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참 별난 애라니까. 이 견습 기사는 전투 능력도 탁월하고 신성력을 다루는 데 큰 문제도 없어서 이대로 가면 정식 기사가 되는 거야 시간문제였다. 다만 걸림돌이 되는 건 그의 자유분방하고 이따금 게으르게까지 보이는 성정이었는데, 상부에서는 좀 더 지켜보자는 견해인 것 같았다. 나 참, 사람이 낮잠 좀 잘 수도 있지! 기사는 약간 속이 탔다. 이런 애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많은 걸 배우기 시작하면 훌륭한 기사가 되는 건 당연한 결과일 텐데! 기사는 소년을 바라보며 상부를 설득할 말을 열심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서 무슨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카즈윈은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고 있었다. 제법 재미있는 소식들이 많았다. 아주 위험하거나 중요한 문서들은 곁에 있는 기사가 걸러 주었기에 읽지 못했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카즈윈은 가끔 눈에 걸리는 밀레시안의 소식을 다른 것보다 몇 초 정도 길게 들여다보았다. 빛의 기사, 에린의 수호자. 그의 이름 앞에 걸리는 호칭들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소년은 잠깐 눈썹을 실룩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그 밀레시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궁금했을 뿐 특별한 유감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굳이 흥미의 방향을 따지자면 밀레시안이라는 종족 자체에 있었으니까. 그는 문서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밀레시안은 한계를 모르고 강해질 수 있다던데. 소년의 머릿속에는 여러 계율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언젠가 에린의 위협이 될 수도 있을까? 그는 짧게 의문했다. 언젠가 에린에 거주하는 이들이 모두 힘을 합쳐 그들을 몰아내야 할 때가 올까? 그가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기에 의문은 물 위로 올랐다가 금세 스러졌다. 카즈윈은 마지막 문서까지 읽고 나서 종이들을 정리했다.

 

“다 읽었습니다.”

“아, 진짜? 뭐 더 읽고 싶은 건 없어?”

“...? 없어요.”

 

카즈윈은 문서 뭉치를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기사는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백 번을 더 생각해봐도 역시 될성부른 떡잎이라니까. 하루빨리 상부를 설득해야 했다.

 

“오늘 수고 많았어.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얼른 돌아가서 쉬어.”

“... 감사합니다.”

 

카즈윈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서고를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돌로 된 복도를 걸으면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그는 머릿속으로 읽었던 활자들을 더듬어 보았다. 스러진 의문들이 조각조각 다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언젠가는 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멈추지 않고 걸어 제 방으로 돌아갔다.

 


베르다미어는 턱 밑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헉헉거리며 끊어질 듯이 가빠진 숨소리도 그제야 들렸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안도, 어쩌면 불안과 불신이 그의 얼굴을 온통 적시고 있었다. 그는 이가 나간 검을 꼭 쥔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드래곤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밑바닥을 달래듯 다독이는 것 같았다. 현명한 자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지닌다. 그는 여신의 결계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종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주 이상하고 깊은 동질감 따위를 느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았다. 수호의 부적이 그의 손목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게 다 뭐였을까? 티르 나 노이가 사실은 에린이라는 말과 낙원은 낙원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오래 된 현자는 두 개의 날개를 비스듬히 내리고 웃었다. 그는 미약한 별빛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드래곤은 그 얼굴을 그의 코앞까지 내린 채,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는 듯이 자상하게, 또한 세계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라, 인간이여.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눈을 가리는 것은 타인이나 마족이 아니다.”

 

베르다미어는 거친 숨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아주 조그마한 무언가가 된 기분이었다. 티끌에 지나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현자는 질책하지 않는다. 현자는 지혜를 알릴 뿐이다.

 

“그것은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굴복시키고,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이다. 비록 네가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고통 속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이 이 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계율이다.”

 

티끌이 거대한 현명함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작은 별빛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겠다는 가냘픈 약속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맺어졌다. 드래곤은 만족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기의 계약자를 데리고 떠나기 전에, 별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말을 남겼다.

 

“아끼고, 사랑하고, 가꾸어라. 너와 같은, 그리고 닮지 않은 존재들을...”

 

거대한 날개가 펄럭거렸다. 베르다미어는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이 세찬 바람에 마저 흘러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대의 현명함이 자리를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는 존재를 파고든다.

 

“차이는 이해에 의해 사라질 것이고, 그것이 바로 너와 같은 존재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의미가 될 것이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밀려 허공에 너울거렸다. 그는 갑자기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삶에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새겨졌다. 그저 걷고 말하고 누군가와 웃고 떠들며 이 땅에 발붙이고 살던 소박한 삶의 파편들이 그 순간 의미를 가졌다. 베르다미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거대한 날개가 어둠 속으로 날아올라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두 글자의 무게가 그를 압도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 그에게 몰아닥쳤다. 단 한 마디 때문에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이 그가 이곳에 온 의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앞으로의 세계는 바로 너에 의해 바뀌게 될 것이다.”

 

드래곤은 마치 웃는 듯한 목소리로 어둠 속을 떠났다. 현자는 길고 긴 세월 속에서 무엇이 더 변하고 나아질 수 있을지를 헤아려 보는 것 같았다.

 

“다시 나를 불렀을 때는 티르 나 노이의 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기를 기대하마...”

 

대기를 갈라 나는 소리가 멀어지고, 베르다미어는 혼자 서서 침묵을 지켰다. 목소리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받아들인다. 증명하지 않아도 그곳에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를, 햇빛이 내려앉는 해변의 은은한 반짝임처럼 저마다의 불빛으로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그곳에서 돌아선다. 이전과 다를 바 없지만 결코 같을 수없는 발자취가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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