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냉커피

빌 셴하이트 드림

달그락. 달그락. 쇠로 된 스푼을 젓자 얼음들이 부딪히는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난다.

거슬리는 소음이라기보다는 금속 타악기 연주 소리 같은 얼음이 든 잔의 울림에 대본을 읽다 말고 시선을 돌린 빌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흰 손을 보고 숨을 삼켰다.

제 손이 뭘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걸까. 심각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는 아이렌은 오른손으로는 제가 주문한 커피를 계속해서 젓고 있고, 왼손은 턱을 받친 채 미동도 하고 있지 않았다.

상대의 성향을 생각하자면 이 모든 게 특별히 계산된 동작 따위가 아닐 텐데도 묘하게 고혹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아마 아이렌의 얼굴이 지성미와 궁합이 좋은 적당히 수수하고 단아한 스타일이기 때문이겠지. 근심에 젖은 제비꽃색 눈동자와 꾹 다문 입술, 고개를 살짝 움직일 때마다 중력에 따라 흘러내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따위에 순식간에 집중력을 빼앗긴 빌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는 걸 빌미로 한참이나 상대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커피가 입에 안 맞니?”

“……아, 예?”

 

빌이 말을 걸었음에도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3초 정도 정신을 놓고 있던 아이렌은 뒤늦게 반복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당황스러움이 뻔히 보이는 상대의 표정에 짧게 한숨 쉰 빌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낀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내가 뭐라고 한 건지는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커피 맛있냐고 물으신 거 아녜요?”

“비슷하긴 하네. 그래서, 맛있니?”

“예. 콜드브루로 유명한 집이라 해서 시켜본 건데, 진하고 부드러워서 입이 즐거워요. 역시 이 계절엔 시원한 걸 먹으니 좋네요.”

 

아이렌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흘러넘칠 듯 가득 담아져 온 커피는 천천히 젓는 것 정도로는 내용물이 주변에 튀지 않을 정도로 양이 줄어있긴 했다. 다만 거슬리는 건, 맛있다고 말한 것 치고는 마신 양이 영 시원치 않다는 거였지.

찬 걸 벌컥벌컥 들이키는 건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그건 자신도 알지만, 아이렌은 음료를 마시는 속도가 빠른 편이지 않던가. 빌은 다른 이들이 잔의 반 정도 음료를 마실 때 아이렌은 대부분 깨끗이 내용물을 해치우곤 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연기자에게는 꼭 필요한 관찰력과 제가 관심이 있는 이에게 눈이 가는 편애가 합쳐져 알아낸 지식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던 그는, 잠깐 대본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슨 고민 있니?”

“저요?”

“그래. 얼이 빠져있길래.”

“아뇨, 저 딱히 고민 없는데…….”

 

말끝을 흐리는 아이렌의 얼굴엔 의아함이 가득할 뿐, 난처함이나 곤란함은 찾아 볼 수 없다. 믿기진 않지만, 아무래도 저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딱히 심각한 고민도 없는데 그렇게 넋이 나가 있었단 말인가.

이제는 다른 의미로 이유가 궁금해진 빌은 침음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있던 거니?”

“아니, 뭐 그냥…….”

 

큼직한 얼음이 넉넉하게 든 냉커피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꾸한 아이렌은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제가 연주하던 유리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본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내랑 이런 카페의 야외 테라스 석에 앉아 대화하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그래?”

“예. 코미디 영화라 로맨틱한 장면이라기보다는 말장난과 다음 장면의 복선이 나오는 그런 장면이었지만……. 어쨌든, 그 장면에서 남자는 따뜻한 허브차를 마시고 여자는 차가운 커피를 마셨는데 우연히 겹친 게 신기해서 그 생각 좀 했어요.”

 

‘그 영화에서는 라벤더 차였지만, 선배는 로즈마리 차를 시킨 게 다르긴 하지만요.’ 그리 덧붙인 아이렌이 어깨를 으쓱인다.

생각보다 시시한 이유에 ‘겨우 그것뿐이냐.’라는 말을 하려 했던 빌은, 곧 그 영화가 무엇인지 기억해내고 작게 탄식했다.

내용이 좀 익숙하게 느껴진다 싶었는데, 이거. 한 4년 전쯤 개봉한 제 아버지 주연의 영화 아닌가. 평범한 회사원인 주인공이 시종일관 마법을 쓰는 아이를 주워, 자녀 독립 후 사이가 어색해진 아내와 함께 육아하다가 이윽고 다시 사이가 좋아지는 가족 영화였지.

 

‘개봉한 지 한참 지난 영환데, 용케 찾아보았군.’

 

아마 제 아버지가 나오는 영화라 굳이 골라 본 거겠지. 그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명석한 빌은, 어째서 아이렌이 그리 시시한 이유로도 깊게 생각에 빠진 건지도 눈치챌 수 있었지. 제가 참으로 아끼는 후배가 가진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잘 아는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앞머리를 정리하더니, 갑자기 친근하게 웃는 얼굴로 다른 톤의 목소리를 내었다.

 

“메릴, 당신은 애 둘을 키워낸 마법사잖아? 우리 애들은 비록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자기가 마법사니까 마법사 아기도 돌볼 수 있지 않겠어?”

 

평소 대화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연기 톤의 목소리에 움찔한 아이렌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제 머릿속 상상이 들킨 걸 모를 수 없는 아이렌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무슨 결심을 한 건지 최대한 도도한 표정으로 다음 대사를 읊었다.

 

“돌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헨리. 애초에 고아를 발견했으면 신고를 하고 부모를 찾아줘야지. 왜 당신이 돌보려고 하는 거야?”

“부모는 당연히 찾고 있어. 하지만 그동안 보육 시설에 잠깐 맡기려고 해도, 애가 마법을 너무 쓰는 탓에 맡아 줄 수 없다는 말만 하잖아?”

“나도 마법 쓰는 아기는 길러 본 적 없어!”

 

어지간히 인상 깊게 본 걸까. 술술 튀어나오는 대사에 빌은 헛웃음을 지었다.

도로 선글라스를 쓴 그는 허브차를 홀짝이며 신랄한 평가를 내뱉었다.

 

“표정이 어색해. 목소리만 들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이래야 배우라기보다는 성우 같구나.”

“애초에 저는 영화연구회에 각본 쓰러 들어 온 거지, 연기자로 들어온 게 아니니 상관없어요.”

“그래? 그럼 네 머릿속에서도, 그렇게 어색한 표정으로 연기했니?”

 

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크흠!’ 하고 과장된 헛기침을 지은 아이렌이, 단숨에 냉커피를 들이마신다.

차가운 걸 마셨음에도 열기가 식지 않은 얼굴에 소리 죽여 웃은 빌은 그제야 다시 대본을 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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