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쩨2

흉터와 기억

내스급 성현제 드림

J by Ms.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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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하고 침잠한 듯한 여자.

사람들이 제이를 평가하는 말이다.

흉터와 기억

결혼 생활 내내 제이가 알게 된 것이라면, 성현제는 생각보다 복잡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마치 켜켜이 쌓인 페스츄리처럼 찢어내면 결이 차곡차곡 존재하는 것 같다. 기억, 페스츄리 같은 기억. 그리고 경험. 그게 성현제를 만드는 것이다.

성현제를 읽으려고 한 적은 없다. 그는 그것을 싫어했고, 아무리 제이라도 경고했기 때문에. 무심코 능력이 튈 때면 제이는 곧장 사과하거나 필사적으로 다른 사람의 속을 들으려고 애썼다. 제이가 노력하는 것을 아니 가끔 실수하는 것도 성현제는 관대하게 넘어가곤 했다. 그들은 그 정도의 친밀함과 유대감은 갖고 있었다.

제이는 성현제의 아내로서 휼륭하게 행동했다. 트집 잡힐 일은 하지 않았고 거의 집에서만 살았다. 가끔 원고를 써서 타인의 명의로 소설을 출판하는 것을 빼면 제이는 할 일이 없다. 사람을 써서 청소했기에 잠만 자고 있어도 뭐라할 사람이 없었다. 가정주부로 사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취집'을 했다니 뭐니 손가락질 했지만, 제이는 상관없다.

성현제는 던전 공략으로 바빴고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아내랍시고 문자로 일상 보고를 하는 것은 좀 기특하다. 제이는 텅 비고 커다란 집에서 성현제가 만든 수조를 바라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다. 이 물고기와 내가 다를 바가 뭐지.

돌아온 성현제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때였다.

남자가 이상하다. 비척거리면서,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딪치며 들어왔다. 황급히 달려나간 제이가 그의 몸을 부축했는데, 오싹한 공포가 순간 제이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성현제가 아니다. 아니, 성현제가 맞는데, 맞는데 아니었다. 이건 뭐지? 사람 가죽을 입은 괴물이 그의 팔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제이의 팔을 붙든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색 짙은 금빛 눈동자가 오싹하게 제이를 응시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헌터?"

제이가 성현제에게 한 번도 불려본 적 없는 호칭이었다. 제이 양이 아니라, 헌터.

"헌터로군, 마력량만 보면 최소 B급…."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였다.

뭔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성현제라는 가죽이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채 어떤 것을 담고 있는데, 그것의 갈라진 틈으로 희미하게 뭔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압도될 것 같다. 진득한 시선이 뺨부터 목, 어깨. 몸을 천천히 훑는다. 확장된 동공이 보였다. 마약이라도 처했나, 제이가 무심코 튀어나온 말로 중얼거리자, 남자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처?"

"… …했, 했나. 당신이 잘못 들은 거야."

그의 두툼한 손이 천천히 뻗어진다.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제이는 숨을 참은 채, 남자의 행동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 손은 그대로 제이의 목에 얹어졌다. 성현제의 엄지가 실크 블라우스의 열린 틈을 타고 제이의 쇄골을 문질렀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목 양쪽, 가장 중요한 혈관이 지나가는 자리를, 꾹 누른다.

죽는다.

성현제가 나를 죽인다.

제이는 헛숨을 삼키며 성현제의 손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강철같은 피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찔러도 당신은 나를 찌르지 않기, 언젠가의 약속이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환청인가. 산소가 모자란 머리가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남자는 제이가 저항하지 않는 것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등급이 얼마든 헌터는 헌터다. 목숨에 영향을 받는다면 스킬을 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반격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이 검은 눈동자를 고정한 채 묵묵히 성현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성현제가 지금의 그를 잊은 듯 보였으니 읽지 않겠다는 약속 또한 일시적으로 무효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다. 이 마친 새끼가 진짜로 미쳐버렸는데 무슨 생각이나 하나 좀 읽어봐야겠어. 제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성현제의 이마에 손을 턱 올렸다. 접촉하지 않아도 능력을 발동할 수 있다. 다만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은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신호.

정보가 밀려들어온다. 수많은 세계. 세계. 생존과 삶과 방황과 죽음과 살육, 기억, 무게, 그리고, 그리고…. 코피가 툭 터졌다. 입술을 가로지른다. 쌓이고 쌓인 것을 제이는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건 그런 부류의 일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그에게는 오로지 읽는 일만 허락했기에, 제이는 감히 성현제의 무게를 덜어낼 수도 해소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누르고 있다고? 왜 터지지 않은 거지? 왜 사람새끼인 척, 이렇게 섞여서 살고 있는 거지? 열이 올라서 시야가 붉다. 제이가 쿨럭거리며, 목구멍과 코로 끊임없이 피를 쏟아냈다. '비밀'을 엿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을 때였다.

섬뜩한 금빛 눈동자에 한기가 돌았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목성의 표면 온도는 약 -148°C정도 된다던 과학 칼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정도는 되는 한기다. 주위의 공기에서 오존 냄새가 났다. 번개가 치기 전처럼.

파직.

제이는 위기감을 느꼈고, 성현제의 공격을, 그의 생각을 조종하는 한이 있더라도 막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수였다. 스킬의 발동을 눈치채지마자 성현제는 대상을 공격했다. 한 번은 내어줬지만 두 번은 안 된다는 듯, 강경하게 턱을 치켜든 채였다. 타인에게 공격받지 않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성현제는 언제나, 한 발 빨랐다. 빌어먹게도 빠르다.

벼락이 왼팔에 적중했다.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찌릿한 전류가 팔을 타고, 어깨, 심장까지 퍼지는 게 느껴졌다. 번개를 맞은 사람이 살 확률이 얼마랬더라. 심장이 놀라서 미친듯이 질주하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제이의 의식이 멀어진다.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길드 내 길드장 사택이다. 마력의 흐름을 느낀 다른 사람이 올 것이다. 에블린 헌터나, 강소영 헌터 같은. 그들이 자신의 아내를 죽인 성현제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모르겠다.

그들에게 제이는 그저 길드장의 사모님 정도 되는 위치였다. 제이야 과묵하고 사교성이 드문 편인 데다 낯을 가리니 더욱. 가끔 에블린 헌터가 '어쩌다 결혼할 생각을 했느냐'라며 묻고는 했지만 그뿐이다. 거기서 멈출 것이다. 그들은 세성의 사람이고, 세성은 성현제로 유지되니까. 성현제의 아내는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자리였다.

차라리 실종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죽음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개, 큭, 개새끼야."

쿵. 심장이 뻐근했다. 불규칙적으로 요동치는 심장. 무표정한 얼굴의 성현제가 보였다. 제이가 그의 바짓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내가 코앞에서 죽어가도 무감각했다. 사람을 직접 죽여본 사람만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었다.

"지켜, 준다고, 했으면서…."

아, 한계다. 시야가 멀어진다. 머잖아 제이는 의식을 놓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엄마. 나 이 개새끼 조져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에블린 밀러의 고함이었다.

"에피네프린!"

"제세동기 바로 씁니다!"

"헉!"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의 1인실이었다. 온갖 기계가 제이의 몸에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 틀어놓은 뉴스에서 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성 길드에 숨어든 S급 몬스터로 세성 길드장의 부인이 중태…. 성현제가 태연하게 인터뷰를 하는 게 보인다. 제이가 중얼거렸다. 개새끼.

심장이 멎었으니 시일을 다퉜을 것이다. 어떻게 또 살려낸 모양이다. 아무래도 자기들 길드장이 아낼 죽인 치정살인범이 되는 건 싫은 모양이지. 세성의 모든 의료인력을 동원해서라도 살려내야 했을 거다. 제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게 성현제일 줄 알았다. 개새끼, 아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데 찾아오지도 않아. 제이가 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사모님."

여지 목소리가 들린다. 고갤 돌리자 에블린 헌터가 가늘게 웃는 게 보였다. 그가 보초를 선 것 같았다. 아니면 감시인가. 어쨌든 상관없다. 이제 세성이란 이름에도 질릴 지경이니까. 제이는 뻐근한 심장을 쥐며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에블린, 헌터."

"나흘 만에 깨셨네요."

"제가요."

"줄곧 혼수상태셨어요. 사흘 내내 코피가 멎지 않아서 수혈까지 받으셨고요."

처음 듣는다. 처음 들어야 하는 거겠지만.

거대한 트럭이 지나간 듯이 온몸이 아팠다. 종아리의 근육은 당겼고, 등은 부러진 것 같다.

숨을 쉬면 쉴 때마다 누가 갈비뼈를 부숴 심장에 꽂는 기분이다. 아니다. 뼛조각이 몸 안을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제이는 연신 기침을 하다가 왼팔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한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악. 으윽."

"번개를 맞으셔서 그래요."

"성현제, 그 미친 새끼."

에블린이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제이의 병원복을 걷어올렸다. 제이의 눈이 왼팔로 향한다. 이상한 게, 보인다. 붉은 흉터였다. 덩굴처럼 팔을 타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퍼져나간 게 보였다. 번개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영구적인 흉터가 남은 셈이다.

다치게 하지 않는다더니, 개뿔도 없는 말이었다. 아주 신이 나서 사람을 공격하셨지. 제이가 그것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그의 남편이었다.

진득하던 금빛 눈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슬아슬했었던 존재감도 돌아왔다. 다만 제이는 자신이 추석이 지난 뒤 눈을 떴다는 게 아쉽다. 성현제한테 명절 전 부치는 법이나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원대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롯데는 가을 야구에 실패할 것 같다는 예측기사가 같이 보였다. 저새끼들은 9월밖에 안 됐는데 왜 초를 쳐. 혈압이 살짝 치솟았다가 가라앉는다. 에이, 씨발. 올해도 가을 야구는 글렀네.

"제이 양."

"부인이라고 안 불러요?"

"…부인."

그가 마지못해 호칭을 정정했다. 에블린 밀러는 만약 성현제가 노망이 나서 사모님을 공격하려 든다면 개입하겠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성현제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제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제이의 걷어올린 팔에 아로새겨진 번개의 흔적도.

"심장이 두 번이나 멎었다는군." 성현제가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씨발." 제이의 답이었다.

원색적인 욕설에 성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는 뻐근한 심장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주인님, 저 죽어요' 하고 외친다고요. 미쳤어요? 이거 계약 위반이야. 당신한테 도시락 싸주고 뒷바라지하고 다치면 걱정한 대가가 심장마비 급사였으면 나도 그냥 누워 잤지, 이 사람아."

말을 쏟아내다가 다시 벅차서 심장께를 두드리자, 성현제가 '미안.' 하고 중얼거리며 제이의 등을 도닥였다.

"해결된 거예요?"

"…."

"아, 묻잖아. 내가 당신 사정 모를 줄 알아. 적어도 내가 당신 아내라는 자각은 하지 그래."

"조금은. 한유진 군이 내 심장에 단검을 박아넣어서."

충격적이다. 누가 누구한테? 그 총각 F급 아니었어? 제이가 숨을 들이키다 켁켁거리자, 황급히 성현제가 제이의 몸을 받쳐 안았다. 성현제의 품에 몸을 기댄 채 제이가 숨을 토해낸다. 목이 비리다.

"정리하고서 안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 제이 양을 보러 온 거라네."

"개새끼."

제이가 중얼거렸다. 개새끼. 나쁜 새끼.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성현제는 더 욕을 퍼부어도 된다고 말하며, 제이의 뒷달미를 쓸었다. 성현제를 도둑놈이라 부를 만큼 어린 아내다. 띠동갑도 넘었지. 그런 이에게, 그가 살아온 생의 몇 초 정도를 겨우 산 제이를 죽일 뻔했다는 게 성현제에게도 퍽 신경쓰이는 일인 게 분명했다. 그게 제이에게 나름의 위안을 주었다.

"흉터는…."

"안 없어진대요. 의사한테 들었을 거 아냐."

"그랬었지.“

성현제에게서 엷고 달달한 향이 났다. 언젠가 제이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던 그 향이었다. 무슨 이유로 이걸 썼을까. 제이는 궁금했다. 아내를 다치게 한 게 미안해서? 정신을 차렸을 때,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기억했을까?

"기억은 해?"

성현제가 눈을 깜박였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린다. 모르는 거군.

"날 죽일 뻔한 거, 기억 안 나요?"

"이후에 전투가 있었어서…."

"아하. 상대적으로 연약한 나는 잊혀졌다."

"부인."

"뭐. 그럴 수 있지. 나도 당신한테 별로 기댄 안 해요. 우리 부모님한텐 적당히 설명했을 테고. 그럼 됐네."

코 안이 화끈거린다. 다시 코피가 흐를 듯한 기분에 제이가 괜스레 코를 훌쩍였다.

"당신이 왜 내가 엿보는 걸 싫어하는지 몸소 체감했으니, 앞으론 주의할게요."

"제이 양."

"두 번 죽었으니 나도 목숨이 아까운 걸 알아서."

성현제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제이의 뭉친 근육을 찬찬히 주물러줄 뿐이다. 제이는 그의 무릎에 발을 얹는 호사를 누리며 가만히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난폭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나.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노망을 자처하고 있다.

뻐근하다 뻐근하다 했더니, 그게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혹은 콱콱 찔러대는 통증에 숨을 못 쉬는 게 안쓰러워서였는지.

성현제의 큼직한 손이 제이의 왼가슴을 문질렀다.

"이런 가증스러운 치한 새끼." 이건 제이의 말이었고,

"심장 마사지를—," 성현제의 변명이었다.

과일바구니를 든 채 병실에 들어오던 강소영 헌터가 비명을 지른 건 그때였다. 그 뒤로 해연의 길드장과 그 형, 심지어는 박예림 헌터까지 보였다.

그래. 세성 길드장이 병상에 누운 아내를 끌어안은 채 그의 가슴을 주무르는 것 말이다.

씨발.

제이는 해탈했다.

그래. 씨발. 다 봐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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