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ist the Colours
사바나클로 기숙사 드림
* 원작과는 다른 판타지 배경의 AU 글입니다.
* 드림 해적과 인어 합작 제출작.
세상 만물에는 반드시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있는 법이다. 신은 결코 쓸데없는 피조물을 만들지 않는 법이었으니, 방황하고 길을 잃은 존재가 있다면 그건 일시적인 시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 뿐. 신앙심을 가지고 자신을 갈고닦는다면 반드시 제게 주어진 사명이 보인다.
……라고, 했던가.
레오나는 오래전 왕가의 시종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해적기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요란하게 펄럭거리고 있는 흉흉한 검은 깃발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는 이 불길함이 싫지 않았다.
대놓고 드러낸 적의. 음습하게 말속에 가시를 숨기고 암투나 벌이는 궁중의 것들과는 다른, 당당하고도 솔직한 정복 선언. 상대에게 자신이 적임을 선포하고, 맞서 싸우거나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저 상징물이. 제게는 더 어울린다.
‘잔소리하는 놈들도 없는 점도 좋고, 역시 나한테는 이게 천직인가 보지.’
왕국의 제2 왕자로 태어나, 십몇 년간 자신의 무용을 입증했음에도 왕위를 보장받지 못한 레오나는 형이자 제1 왕자인 파레나의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바다로 나섰다.
‘어차피 왕궁에 내 자리는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이유로 사략선의 선장이 된 그는, 놀랍게도 갈고 닦은 검술 실력과 뛰어난 머리로 5년 만에 바다의 제왕이 되었다. 떠나며 꺼낸 말은 변명이었을지언정,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국고를 불리고 타국의 국력을 깎아 먹는 영웅이 된 것이었다.
“레오나 씨! 다 옮겼슴다!”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운 바람 온도에 제가 걸어온 길을 잠깐 떠올리던 레오나는 러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깐 사이에 갑판 가득 올려진 습격한 배에 있던 재물을 쓱 둘러본 그는 한쪽 입꼬리만 씩 올려 웃었다.
시켜준다고 한 적이 없는데도 기꺼이 부선장 역할을 자처하는 러기는 돈을 좀 많이 밝히긴 했지만, 늘 이렇게 싹싹하게 일 처리를 하는 게 썩 괜찮은 녀석이었다. 제 아랫것이 성격 나쁜 건 참아도 무능한 건 참을 수 없는 레오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돌아섰다.
“7할은 창고에 넣고, 3할은 너희 나눠 가져라.”
“어라? 이번엔 3할이나 주는 검까?!”
“저번 달 실적이 좋다고 이번 달은 더 가져도 된다더군. 참으로 고맙게도 말이지.”
“시시싯, 그러게요. 참 고~맙네요.”
노략질은 자신들이 하고, 그 과정에서 다치고 죽는 것도 자신들인데 여전히 7할이나 국가가 가져간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언제 해군에게 잡혀 처형당할지 모르는 일반 해적단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이 사략선에 있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 선장인 레오나는 똑똑하고 강하며, 이 선박 자체가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은가?
먹고 살기 위해 여러 배를 전전하면서 살아온 러기는 입으로는 레오나와 함께 왕실을 비꼬았지만,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재물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배는 부술까여?”
“그래야지. 국가 소속 상단도 아니고 똑같은 해적 놈들인데, 뭐하러 살려 둬?”
“그건 그렇슴다. 수영 잘하고 운만 좋으면, 몇 명은 살아 남겠지만여!”
“그렇지. 그럼, 처리 잘하라고. 난 쉴 테니.”
“Aye aye, sir~!”
약탈한 물건들 속에서 금으로 된 목걸이를 찾아내 제 몸에 걸친 러기는 레오나가 선장실로 들어가기 무섭게, 선원들에게 외쳤다.
“대포조 전원! 발포 준비! 나머지는 창고로 수확물을 옮기도록! 아, 이만큼은 우리 몫이니 내버려 두십셔!”
“예, 러기 씨!”
레오나가 없을 때는 러기가 그 대리인이다. 법으로 정한 건 없지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위계질서에 해적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펑. 펑. 어느새 파도 때문에 점점 멀어진 상대 배를 향해 시작된 포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단 몇 발만으로도 이미 전투를 겪어 상한 배는 쉽게 침몰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배를 보며 대포에서 멀어진 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포조의 인원 모두 무사함을 확인한 그는, 나름 조의 대표로 러기에게 가 상황을 보고했다.
“이번 전투에 사용한 포탄은 모두 23개입니다. 방금 마무리한 것까지 포함해서요. 부상자는 없습니다.”
“그래여? 수고했슴다. 잭 군도 얼른 창고로 물건 나른 후 뭐라도 챙기세여. 꾸물거리면 좋은 건 다른 놈들에게 다 뺏길 검다.”
“으음. 예.”
포격의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던 잭은 재물 이야기만 하는 러기 때문에 머쓱해졌지만,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굶주리며 살았기에 제 몫을 잘 챙겨야 했던 러기에게, 재물을 챙기라는 조언은 굉장한 호의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 뒤를 긁은 후 무거운 상자를 번쩍 든 잭은 그대로 창고로 향하려다가, 문득 든 의문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선장님은 항상 제 몫은 안 챙기시던데……. 왕실에서 따로 대가를 받는 겁니까?”
“레오나 씨 말임까? 흠,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아마 그렇지 않겠슴까? 애초에 그 사람은 딱히 이런 거에 관심 없는 듯 보이기도 하고요.”
“하긴. 아무리 대단한 걸 약탈했어도 별 관심 없어 보였지요. 역시 왕족이라 그런 건가…….”
비록 지금은 바다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해도, 레오나 킹스카라는 태어났을 때부터 왕자였다. 계승권이 한참 뒤로 밀려났고 여러 정치적 문제로 능력을 폄훼 당했어도, 부족하게 살아오지 않았을 테니 재물욕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지. 가지면 가질수록 더 탐욕스러워지는 경우도 있지만, 애초에 레오나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바다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피붙이를 죽이고, 왕위를 강탈했겠지.
자신들의 선장에 대해 꽤 높은 이해도를 가진 두 사람은 당사자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평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잭 군, 그거 알고 있슴까? 레오나 씨 방에, 수상한 보물 상자가 있다는 거.”
“보물 상자?”
“예! 저는 ‘부선장’이니까 가끔 레오나 씨 방에 들어갈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보거든여.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작은 상자를! 보석함 정도 크기인데, 대체 뭐가 든 건지 자물쇠로 꽁꽁 잠궈놓았더라고여! 아마 대단한 보물이 들어있지 않을까여?”
“음……. 보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물건은 맞는 거 같군요.”
“그렇져? 전에는 슬쩍 뭐가 든 거냐 물어봤는데, ‘별거 아니다’라고 얼버무리는 거 있져? 항해사랑 조타수가 물었을 때도 얼버무렸다고 하니, 정말 보물이 들어있을지도! 아, 물론 그걸 탐낼 생각은 없지만여. 저도 목숨이 소중하니.”
아마 레오나 정도의 실력이면, 이 배에 탄 해적 모두가 덤벼도 이길 수 없을지 모른다. 진지하게 그리 생각하는 러기는 오해의 여지 없게 확실히 선을 그은 후, 잭이 들고 있는 상자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나저나, 계속 들고 있으면 안 무겁슴까?”
“괜찮습니다. 단련도 되고 좋습니다.”
“잭 군은 참 성실하다니까요~ 이런 사람이 어쩌다 이런 사략선에 타게 된 건지!”
“음. 뭐, 저야 선장님을…… 레오나 씨를 존경해서 들어 온 거지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저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걸까. 잭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몇 년 전, 레오나가 선장이 되기 전부터 그의 호위 기사로 있었던 잭은 여전히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레오나를 존경하기에 과감하게 기사직을 버리고 이 배에 올랐었다. 제가 생각해도 무모한 선택이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레오나를 따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러기 씨야말로, 여러번 물귀신이 될 뻔하셨으면서도 아직 해적질하고 계시잖아요?”
“육지보다 여기서 더 많이 버니까여! 죽을 뻔한 위기는 뭍에서도 많이 겪었슴다. 오히려 바다에선 물에 빠질 때마다 도움을 받았거든요. 인어에게.”
“인어……, 말입니까?”
러기의 말을 들은 잭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인어의 존재를 믿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자신들 같은 수인도 있는데, 인어가 없을 이유가 뭐가 있겠나. 다만 그들은 분명 존재하면서도 육지 존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알려지지 않은 게 더 많은 종족인데. 인어에게 도움까지 받았다니?
“제가 생각해도 신기한 이야긴데 말이져. 기묘하게도 항상 물에 빠졌을 때마다 똑같이 생긴 인어가 와서 구해줬슴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땋은 보라색 비늘을 가진 여자 인어였는데, 생사가 걸린 위기 상황 때문에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아도 목소리는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다고여.”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특징을 기억하고 있다면, 환상이라 보기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저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잭은 묘한 표정으로 러기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예. 그렇군요.”
“……잠깐, 지금 제 말 안 믿는 검까?!”
“아니, 믿어요! 믿습니다!”
“거짓말 마십셔!”
“와하하!” 꼭 어린 소년들처럼 싸우는 두 사람의 대화에, 선원들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시끄러워, 선장실에서 낮잠이라도 자려고 했던 레오나는 어쩔 수 없이 깨어나 배의 뒤쪽으로 향했다.
‘하여간, 요란한 녀석들.’
물론 그들을 탓하고 싶진 않다. 승리와 성과에 취해있을 부하에게 시끄럽다고 윽박질러봐야 사기가 떨어질 뿐 좋을 게 뭐가 있나. 어쩔 수 없는 일을 헛웃음으로 흘려넘긴 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그는 주저앉아서 가져온 술을 홀짝이려다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이런, 또 찾아왔나. 아이렌?”
물에 젖은 발걸음은 배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되어 레오나의 옆에서 멈춰 섰다.
온몸이 젖은 채 서 있는 흑발의 여인은 물기를 머금고 피부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귀찮다는 듯 떼어내며 대꾸했다.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아서요.”
“하. 자의식 과잉이군.”
“하지만 찾아오라는 듯 계속 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건 왕자님 아닌가요?”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레오나는 대답을 내뱉는 대신 그 입을 술로 채웠다.
촉촉한 제비꽃색 눈동자를 깜빡인 아이렌은 익숙하지 않은 다리가 아픈 건지 허벅지를 주무르며 그의 옆에 앉았다.
훅 풍겨오는 심해의 냄새는, 제 옆에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레오나는 원피스 아래로 뻗어 나온 다리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줘놓고 다시 돌려받길 바라는 건가?”
“그건 아니고요. 오히려 별거 아닌 물건을 계속 곁에 두고 다니는 게 기특하다고 할까요.”
“날 애 취급하는군.”
“그거야 제가 처음 왕자님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린아이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아마 10살 즈음이었나.
선상에서 열린 형의 생일 파티. 어느 귀족이 ‘진귀한 상품’ 취급하며 바친 어린 인어. 다른 종족이라지만 엄연한 인격체를 아무렇지 않게 바치고 그걸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영부영 받는 왕실 어른들의 더러운 꼴이 싫어 배의 뒤편으로 도망쳤을 때. 그때 이 인어를 만났지. 제 동족을 구하기 위해, 겁도 없이 배에 오른 이 여자를.
“절 본 걸 비밀로 해주는 대가로 드린 거니, 돌려주시지 않아도 되어요.”
“돌려줄 생각도 없지만. 애초에 내가 이걸 가지고 있어야, 날 쫓아다닐 수 있지 않겠나?”
“감시받는 것 같아 싫어요?”
“딱히.”
“후후. 다행이네요.”
조용히 웃는 인어의 목소리가 마치 하프 소리처럼 아름답다.
레오나는 술 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소금과 미네랄의 냄새를 더 맡으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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