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파편
원형×가내 아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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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갈라지기 전, 그리고 종말이 아이테리스를 덮치기도 한참 전의 일.
막 여행에서 돌아온 이리스는 다시 찾아온 겨울의 초입과 그 초입을 기념하는 축제 기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며 거리를 걷다가 좌명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위원회의 회의가 끝나고 퇴근 시간대가 가깝긴 했기 때문인지 에메트셀크가 대의사당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에메트셀크, 여긴 어쩐 일이야? 안 그래도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퇴근하는데 네가 보이잖아. 그래서 오자마자 또 사고칠까 봐 잡으러 왔다, 왜. 다들 축제 준비로 들뜬 거리에서 네가 만든 환영이 폭주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해……. 그건 내가 아젬이 되기 전 일이잖아. 아르얀로드하고 라하브레아한테 확실히 교정까지 받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넌 주변인의 기쁨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으니까.”
“치……. 휘틀로다이우스는 안 왔어?”
“오늘도 야근이랬어. 늘 이 기간만 되면 축제용 이데아가 잔뜩 제출되잖아.”
그렇구나, 하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자 에메트셀크가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함께할 수 있으니 그때 겨울 축제를 함께 즐기자고. 그래도 함께 기다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약간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검은 가면을 벗긴 에메트셀크가 하얀 가면을 씌워주었다. 그의 가면도 어느새 순백색의 것으로 바껴 있었다.
“어차피 널 아는 사람이라면 곧바로 너라는 걸 알겠지만, 이러면 겉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지. 막 돌아왔는데 이런저런 부탁을 받고 다니면 피곤할 거 아니야.”
“상관은 없지만…… 하데스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면 그게 좋겠지.”
미소 짓고서 곁에 선 자의 손을 잡은 이리스는 그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벌써부터 도로를 따라 늘어진 가로등과 드문드문 심긴 가로수에는 작은 전구가 줄줄이 달린 조명이 감겨 있었다. 그것은 처음 겨울을 기념하는 축제를 시작한 이후로 꼭 창조되는 이데아였다. 항상 비슷한 것이 나오고는 하지만, 이번은 흔들릴 때마다 방울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저러면 밤에 시끄럽지 않으려나.”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니 이데아로 나왔겠지.”
에메트셀크의 대꾸에 동감하며 문제가 있었다면 휘틀로다이우스가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웃은 이리스의 시선이 어딘가에 닿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거리를 덮은 눈만큼이나 새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붉은 가면이 덮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그것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이리스가 그를 부르자 돌아보았던 이는 그녀의 좌를 부르려다가 가면을 보더니 부르려던 이름을 바꾸었다.
“아……. 이리스, 하데스. 여기서 만날 줄 몰랐는걸. 어디 가고 있었어?”
“보고하러 갈 겸 산책 중이었어요. 엘리디부스는요?”
“알티마원에서 겨울 전시회를 시작한다고 해서 가 보던 차였어. 두 사람도 함께 가겠어?”
“어머! 물론이죠!”
“나는 아카데미아까지만 같이 가지. 해야 할 일도 있고, 엘리디부스도 같이 있는 데에다 이 녀석이 학술원 안에서까지 사고를 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엘리디부스의 입장에서는 영문 모를 말에 그가 의아해했지만, 이리스는 그에게 “자꾸 그러면 정말 사고칠 것”이라며 투덜거렸다. 두 사람이 투닥대는 것을 본 엘리디부스가 말했다.
“이리스의 어릴 적 이야기인가 봐. 라하브레아도 그때를 회상하면 한숨부터 쉬던데. 가는 길도 같으니 가는 동안 들려주겠어?”
그의 말에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어깨를 으쓱이고 그에게 두 사람이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위의 감정에 휩쓸리기 쉬웠던 시절의 이리스가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환영을 만들었다가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함께 즐거워진 그녀가 다시 창조 마법을 쓰는 과정에서 그대로 환영이 과도하게 창조된 탓에 라하브레아원 복도가 꽃의 환영으로 가득 찼던 일, 빛이 가득 차서 눈을 뜰 수 없었던 일 등. 마침 자신이 함께 있거나 가까이 있었기에 망정이었다며 한숨을 내쉬는 에메트셀크와 정말 어릴 때의 일이라며 투덜대는 이리스를 보며 웃은 엘리디부스가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정말 엉뚱한 면이 있었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오히려 얌전해진 편이지. 그대로 자랐으면 난 홧병으로 쓰러졌을 거다.”
하데스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잡고 있는 손을 꼭 쥐었다. 어쩜 이렇게 솔직하지 못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모르는 척 명계까지 가서 꺼내올 것이라고 하는 이리스를 보며 그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의 걸음이 닿지 않아 여전히 새하얗기만 한 눈을 밟으며 이리스의 이번 여행에서 겪은 일을 듣던 세 사람은 어느덧 아카데미아 지부 앞에 있었다. 그제야 잡고 있던 서로의 손을 놓으며 가면을 바꾼 두 사람이 지부로 들어서니, 직원들은 용건을 묻지도 않고 아카데미아로 가는 전송 장치로 안내했다.
“역시 세 명이 동시에 오면 이유가 너무 뻔한가 보군요. 방문 목적도 안 물어 볼 줄은.”
“에메트셀크와 아젬은 늘 함께 다녔으니 유별날 것도 없지. 둘이 하나라는 말도 있잖아. 전시는 정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이번 행사는 할마루트원과 협력해서 하기로 했다더라고.”
“둘이 하나? 하, 무슨 끔찍한 소리를……. 이 녀석과 묶이는 건 이쪽에서 거절이야.”
엘리디부스의 말대로 아카데미아로 이동하자마자 그들이 본 것은 새하얗게 덮인 정원에 오색빛 전구가 반짝이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며 감탄한 이리스는 엘리디부스의 손을 잡고 아직 발자국 하나 없는 눈길 위로 걸음을 뗐다.
“에메트셀크, 나중에 봐요!”
“야, 보고는!”
“시간도 늦었으니 나중에 할게요!”
“아젬!”
몇 걸음 뛰어가 살짝 돌아보니, 에메트셀크가 입구 앞에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고 있었다. 엘리디부스가 뒤따라오며 키득이더니 말했다. 이리스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의 로브를 검게 물들여주고, 가면도 하얀 것으로 바꾸어주며 자신의 가면 역시 하얀 가면으로 바꾸었다.
“넌 매년 이 축제가 되면 들뜨는 것 같아. 아, 고마워.”
“별 말씀을. 이러면 조용히 즐길 수 있으니까. 에메트셀크 말대로 멀리서 보면 우리인 걸 모를 테니 부탁 들을 일도 없을 거고. 들뜨는 이유는, 아모로트에서 맞이하는 건 오랜만인걸. 그러니 들뜨지 않겠어?”
게다가 매번 달라지는 전시회니까 더 기쁘다고 기쁜 목소리로 말한 이리스는 들뜬 걸음으로 정원에 들어섰다. 하지만 할마루트원과 알티마원과 연결된 방향에서 나왔을 사람들이 보이니 그 들뜬 걸음은 사라졌고, 차분한 걸음으로 바뀌었다.
항상 짓는 잔잔한 미소를 건 채 엘리디부스와 나란히 반짝이는 전구를 두른 풀 울타리와 조경수,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들 사이를 걸으며 감상하던 두 사람의 걸음은 라하브레아의 피닉스를 얼린 것만 같은 조각상 앞에 멈추었다. 몸에서 타오르던 불꽃 대신 눈 결정과 찬 기운이 새를 휘감고 은은하게 빛났다.
먼저 그 앞에 머물며 보고 있던 시민 중 하나가 곁에 있는 이에게 속삭였다.
“역시 알티마 님이셔. 라하브레아 님의 피닉스를 이 정도로 구현해낼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걸.”
“그분을 본받아 더 노력해야겠군.”
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좀 더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천천히 다음 조각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리스는 그것을 보다가 곁에서 함께 조각을 보고 있는 엘리디부스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테미스?”
“……네게 그 이름으로 불리려니 좀 민망한걸. 알고 있었어. 전에 회의가 끝나고 알티마가 라하브레아에게 염령을 데려가서 관찰하고 싶다고 했었거든. 라하브레아는 기꺼이 빌려주었고, 한동안 염령은 계속 알티마의 작업실에 있었다고 들었지. 그런데 완성품을 보는 건 처음이야. 정말 아름답군.”
“그러게. 이번 주제가 겨울의 환상이라던가?”
“응. 눈은 날이 따뜻해지면 녹아버리니,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고 다음을 기대하자는 취지라더군. 그래서 날이 따뜻해지면 녹아내릴 거야. 이 눈 결정도 아마 환영이 아닐까 싶어.”
“그렇구나……. 아쉽다. 오래 보고 싶은데. 할마루트는 뭘 만들었어?”
이리스의 질문에 테미스가 아직 자신도 모르니 천천히 둘러보면서 찾아보자고 말했다. 할마루트원의 직원들은 설원에서도 자랄 수 있는 식물종을 만들었다고만 들었으니 눈이 쌓인 나무를 보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그가 무엇을 보고 저쪽에 사람들이 많으니 가보자고 말했다.
그가 향한 곳은 정원의 정중앙이었다. 도착해서 보니 평소에는 보랏빛 꽃만 가득 피어있는 그곳에 사람 키만한 나무가 자라 있었고, 그곳에 있는 나무에는 각종 장식이 가득 걸려 있었다. 그뿐 아니라 거리를 채운 줄 조명을 둘러 반짝이는 것이 화려하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어머……. 마치 별빛 같네. 이게 할마루트가 만든 건가? 그런 것치고는 평범한데. 장식이 되긴 했지만 도시 밖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오랜만이야, 아젬! 엘리디부스도 있잖아?”
감탄하는 이리스를 부른 것은 할마루트였다. 에메트셀크와 만났는데 오자마자 전시회를 보러 갔다는 말에 안내해주러 왔다고 말한 그는 알티마가 직접 오지 못해 아쉬워 했다고 덧붙였다.
“오랜만이에요, 할마루트. 알티마는 일이 바쁜가 보군요.”
“합주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서 직접 안내하는 건 무리라나 봐. 그래서 내가 대신 왔어.”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그 나무를 보았다.
“아젬이 말한 대로 이건 새로 만든 창조물이 아니야. 기존에 세계에 풀려 있는 상록수 중 하나를 창조해 사람들이 직접 꾸미게 했지. 저기 달린 선물 상자들에는 저마다의 소원이 담겨 있어. 민중사무국과 협력해서 시도해보는 행사인데, 우편관리부에서 보관했다가 다음 겨울 축제 무렵이 되면 주인에게 다시 보내주기 위해 거주지와 이름이 적혀 있지.”
그의 말대로 선물상자에는 무언가 적힌 꼬리표도 달려 있었다. 할마루트의 설명을 들은 엘리디부스가 물었다.
“하지만 다음 축제 무렵에는 거주지가 바뀔 염려도 있지 않아?”
그 물음에 예상했다는 듯, 할마루트가 웃고는 답했다. 그에 대비해 민중사무국에서 그 시기가 되면 수취자의 정보를 확인해 새로 갱신해서 부치는 것이 계획의 일부였다.
“그리고 별로 돌아간 이들의 소원은 동거인이 있을 경우에는 동거인에게, 그렇지 않은 경우 남은 혈연 관계의 사람에게, 그도 아니면 크리스탈로 바꾸어 명계로 보내기로 했어. 이번 주제와는 맞지 않지만, 무언가 바라는 게 있으면 이루어지길 소망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이루어졌는지 되돌아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너희 둘도 해볼래? 이쪽 테이블에 있는 걸 사용하면 돼.”
“당연하죠! 안 물어봤으면 서운할 뻔 했어요.”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그가 가리킨 테이블로 가니 다양한 색의 리본과 그만큼 다양한 색의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얇고 긴 띠 형태의 종이가 펜과 함께 놓여 있었고,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쪽에는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 설명이 되어있었다.
이리스의 눈에 띈 것은 연보라색과 보라색이 섞인 리본이었다. 그 위에는 마치 별처럼 은빛 점이 수놓여 있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상자는 하얀 것으로 고른 이리스는 종이를 보다가 할마루트를 보았다.
“꼭 똑같은 것 두 가지를 쓰고 하나를 가져갈 필요는 없는 거죠?”
“물론. 그냥 방법 중 하나일 뿐이야.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이리스는 즉시 종이에 각각 두 문장을 적고 상자에 넣어 리본을 묶었다. 그리고 그걸 끝냈을 즘, 엘리디부스 역시 소원을 적고 상자에 넣는 참이었다. 그의 손에는 다른 종이가 곱게 접혀 있었다. 각자 상자를 집어드니 할마루트가 “나무에 걸면 된다”며 빈 자리를 찾아 주었다. 조금 높은 곳이었지만, 다행히 발판이 있어 밟고 올라가니 손이 충분히 닿았다. 엘리디부스의 것도 받아 곁에 걸어주고 나니, 할마루트가 손가락을 들고 말했다.
“이거로 소원 나무 장식은 끝이야. 이제 전시회를 안내해 줄게!”
할마루트를 따라 이곳저곳 둘러보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할마루트가 만든 창조물 앞이었다. 나뭇잎부터 뿌리까지,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은은한 빛을 내는 고드름이 열매처럼 열려 있었다. 얼어붙은 나무인가 싶어 그의 허락을 받고 만져보았지만 냉기라고는 하나 없었고, 평범한 나무 같은 질감은 오히려 따뜻하기까지 했다. 함께 살피던 엘리디부스가 손을 떼며 할마루트를 보았다.
“이건…… 주위 얼음 속성 에테르를 흡수해서 자라는 거야? 이 나무 주위만 눈이 녹았는데.”
“맞아. 때문에 날이 따뜻해져 얼음 속성 에테르가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수정 형태의 씨앗을 남기고 사라지도록 했어. 그리고 씨앗은 마찬가지로 얼음 에테르가 그 수치를 넘은 날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다시 싹을 틔우지. 그야말로 ‘겨울의 환상’인 거야. 물론 관상용이라 번식도 못하고, 자연 환경에서는 그리 크게 자라지도 못해. 이건 전시를 위해 인위적으로 성장을 촉진했을 뿐이거든. 환경을 변하게 할 염려도 있어서 영양소 및 에테르 흡수 능력도 좋지 못하게 했고.”
여러 가지로 무척 고민해서 만들었다고 웃은 할마루트는 허리를 짚고 나무를 보았다. 그의 눈에 하얀 애정이 가득 맺혔다.
“별로 내보낼 생명을 만드는 일만 하다가 갑자기 내보내서는 안될 것을 만들려니 고생 좀 했지. 그래도 이렇게 완성된 걸 보니 뿌듯하긴 해. 그래서 전시가 끝나면 집 안에 두기 좋은 작은 크기의 인조목으로 다시 개량할 예정이야. 완전한 모형으로 말이지.”
그렇게 형태가 변해서도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별을 위한 일일 것이라고 말을 마친 할마루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때? 안내는 충분히 즐거웠어?”
“네, 무척이요. 바쁠 텐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나도 무척 즐거웠어. 고마워, 할마루트.”
“하하, 평소에 알티마가 설명하는 걸 잘 들어둔 보람이 있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아젬도 얼른 들어가서 쉬어. 내일 회의에서 보자. 엘리디부스도.”
다음에 또 보자며 손을 가볍게 흔들고 걸어가는 이를 보던 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엘리디부스를 보았다. 그 역시 할마루트를 보다가 이리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도 이만 가 볼게. 슬슬 업무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이제 늘 그랬듯 라하브레아에게 갈 거지? 라하브레아는 연구실에 있을 거야.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바빠 보이면 바로 나와야 해.”
“알겠어. 고마워.”
그에게 걸었던 마법을 풀어주자 그가 다시 하얀 옷과 붉은 가면을 쓴 모습으로 걸어갔다. 이리스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그와 반대편으로 걸어가다가 슬쩍 ‘비프로스트’를 불러 ‘문’을 열고 라하브레아의 연구실 앞에 섰다. 다행히 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문’을 닫은 그녀는 로브와 가면을 정돈하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도록.”
중후하고 무감정한 목소리가 들려서야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간 이리스는 라하브레아가 고개를 들자 미소 짓고 다녀왔다는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고도 한동안 가만히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자를 위해 준비해둔 테이블로 걸어와 앉고 맞은편을 손짓했다. 이리스는 그 자리로 걸어가며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이데아를 불러내 손에 들었다.
“모습이 단정한 것을 보니 이번 여행에서는 별 다른 사고를 치지 않은 모양이군.”
“저라고 늘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건 아니라니까요. 여기, 당신이 부탁한 자료예요.”
“고맙다. 천천히 확인하지.”
“별 말을요. 그럼 얼굴도 비쳤으니, 이만 가 볼게요.”
“……이렇게 빨리?”
평소라면 삼십 분은 떠들지 않았느냐며 라하브레아가 의아해 했다. 설마 아쉽냐며 장난스레 물었던 이리스는 라하브레아의 가면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이 찌푸려지기도 전에 웃으며 말했다.
“피곤해서요. 오늘 뱃길이 좀 험하기도 했고, 오자마자 전시회도 구경했더니, 조금.”
“……그렇군. 돌아가서 쉬도록.”
“방해는 내일 할게요. 그럼 내일 봐요.”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리스는 함께 일어나는 라하브레아를 보다가 그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잠시 서 있다가 물러섰다. 그을린 종이 냄새, 그리고 잉크의 냄새. 이제 정말 아모로트로 돌아온 것 같다며 장난스레 말한 이리스는 그제야 떨어져서 뒤돌아 방을 나가다가 한 번 더 뒤돌아 보았다. 그의 스승은 이미 늘 앉아 있는 책상 옆에 서서 이리스가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언제쯤 철이 들련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리스는 그에게 다시금 방긋 웃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고 방을 나왔다.
그 이후의 일은 담당 학술원의 원장실로 가 그동안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리를 비운 동안 비서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 주었지만, 꼭 학술원장의 확인이 필요한 것들이 더러 있어 그것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모아둔 것들이다. 오래 기다린 이들부터 차근차근 처리를 해주고 최근 올라온 것은 다음으로 미룬 후 보고서까지 작성을 마쳤을 때, 어느덧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은 남빛에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기다리는 이도 있으니, 일을 더 끌 수 없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원장실과 아카데미아에서 나온 이리스는 곁에 선 이에게 여행지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문득 장식으로 걸린 겨우살이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걸음이 멈추자 에메트셀크도 함께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 하데스. 저번에 여행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쪽 지역에는 겨울 축제 당일에 겨우살이 아래에서 입맞춤을 하면 다음 생에서도 함께 할 수 있다는 민담이 있어. 증명된 건 아니지만, 한 번 해볼래?”
“싫어. 다음 생에서도 네 녀석한테 끌려 다니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라고.”
“너무하네. 그래도 즐거웠잖아.”
즐겁긴 무엇이 즐겁냐며 싫증을 내는 하데스가 고개를 그녀에게 돌릴 때, 이리스는 냉큼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꼬리에 입을 맞추었다. “이러면 입맞춤까지는 아니니까 괜찮지?”라며 장난스레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하데스가 얼굴을 가리며 이름을 불렀지만, 이리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리스, 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너랑 한 번쯤은 만나고 싶은걸. 오늘이 겨울 축제도 아니고, 입술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말도 안되는 미신이길 바라야겠군. 됐어. 곧 휘틀로다이우스도 돌아올 거야. 자기 빼고 놀았다고 징징댈 테니 일찍 돌아가자.”
그는 질색하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조차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이리스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대며 그 손을 잡았다.
‘늘 싫다, 싫다 하면서도 다정하고 성실한 내 친구.’
“뭐야. 왜 웃어?”
“내 명왕님이 너무 좋아서. 정말 사랑해.”
“갑자기 뜬금없이…….”
“하지만 정말 좋은걸. 아……. 하데스, 봐. 눈이야. ……계속 너희랑 이런 풍경 같이 보고 싶다.”
그쳤던 눈이 다시 소리 없이 내리며 거리를 재차 덮고 있었다. 이리스는 이미 셀 수 없이 봐 온 계절임에도 매번 반가운 풍경을 보며 곁에 있는 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서는 자신은 싫으니 빼 달라며 귀찮다는 대답을 하는 하데스의 손이 이리스의 손을 감쌌다.
“하데스.”
“왜.”
“우리 바로 집에 가지 말고 히슬로디 마중 갈까? 가는 김에 입욕제 이데아도 받아와서 셋이 같이 들어가자. 욕조 크기도 넉넉하잖아. 오랜만에 같이 씻어도 좋을 거 같은데.”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
“무슨 향이 좋을, 앗!”
들뜬 발걸음을 옮기던 이리스는 순간 로브를 밟고 휘청였다. 곁에 있던 이가 부축해 주었지만 이미 발목을 접질렀고, 제대로 서지 못하고 앓는 그녀를 하데스가 한숨 쉬며 앞에 몸을 낮추고 등을 내주었다.
두 개였던 발자국이 하나가 되어 걸어갔다. 사라졌던 발자국이 눈 위에 다시 나타난 것은 창조물 관리국에서 또다른 발자국이 나와 셋이 함께 나란히 걸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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