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3.2 그는 마음이 약하다

다정의 다정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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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 씨.”

“듄 씨?”

“타냐 씨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스푼에 돌아와 일에 매진하던 어느 날, 타냐는 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정확히 누가 찾는 건지를 물었지만 얼버무릴 뿐, 정확히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결국 더 묻기를 포기한 타냐는 카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여기입니다.”

“네, 감사해요.”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타냐는 한 건물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회의장이 있었는데, 한 명을 중앙에 세워두고 다른 이들이 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일종의 재판장과 같은 구조였다. 유감스럽게도, 타냐는 그들을 올려다보는 쪽이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위축된 타냐는 어깨를 움츠리며 그 대회의실에 들어섰다. 타냐는 저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지만 그중에 아는 얼굴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아는 얼굴은···.

“시라노 님···?”

“오, 날 아나 보군.”

타냐는 그제야 자신을 부른 상황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스푼의 간부들. 히어로 영정이 속해있던 바로 그···.

하지만 그분들이 날 부를 이유가 뭐가 있지?

타냐는 의문스레 위를 올려다봤다. 나가를 데리고 봉사활동을 간다던 간부, 고트 역시 자리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내려다보는 자리에 타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럭키 씨?”

언럭키.

영정이 죽기 이전에 이끌었던 히어로 팀의 리더. 특기는 ‘불행’. 본인이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심화하는 능력으로, 그 본인조차 1년에 뺑소니를 몇 번씩 당할 정도로 시달린다고 한다. 하지만 타냐는 지난번, 아이돌 세크룬의 스토커 사태 때 언럭키와 접촉하고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으로 끝난 전적을 갖고 있었다···.

“타냐, 스푼의 히어로이자 상담사, 입사한 지 만으로 2년. 곧 3년 차겠군?”

“어리네, 어려.”

“네, 맞습니다···?”

그때, 드디어 간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하는 형식적인 신원 확인이었다. 언럭키는 부르지도 않았다. 이럴 거면 그는 왜 부른 걸까. 타냐는 조금 그런 의문에 조금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자네가 언럭키에게 한 일을 알고 있어.”

“아, 그··· 능력을 쓴 건이요?”

“그래, 그래.”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놀라웠는지.”

“그런 네게 제안할 것이 있다.”

“어떤··· 제안인가요?”

조금 불안해졌다. 이제 간부들은 타냐를 숫제 신기한 동물 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냐는 어떤 직감이 들었다. 언럭키와 자신, 그리고 자신의 특기. 이것이 모여서 제안할 만한 일은, 정말 부정하고 싶지만, 아마도···

“언럭키의 팀에 들어가 스위치 역할을 하게. 간부 직속으로 일하는 거야.”

“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습니다.”

“단호하기는. 정말이지, 해맑은 아이구나.”

“우리 밑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을 텐데.”

타냐는 입술을 짓씹었다. 옆에서 언럭키가 흠칫,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 불러왔나, 했는데 다 제정신이 아닌 소리를 하고 있었다. 타냐는 스푼에 입사하면서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타인을 위해서만 특기를 사용하겠다고. 실제로 그 이후, 타냐는 다른 사람의 회복이나 보호 외의 목적으로 특기를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언럭키 씨의 스위치 역할을 하라고?

“언럭키의 특기는 특출나지. 적아를 가리지 않고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타냐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의 언럭키는 너무도 불안정해 감당하기 어려우니, 타냐를 붙여서 언럭키의 특기를 좋을 대로 사용하겠다. 그것이 간부들이 말하는 바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언럭키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진정시키는 것만이라면 동의하겠다. 하지만 간부들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언럭키의 능력을 편할 때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것.

“하지만··· 그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 말은, 언럭키의 불행을 곁에서 가만두고 보거나, 상황에 따라 고의로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어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 역시 해야 한다는 소리다. 타냐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앞에 있던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은···

“왜, 고의로 불안하게 만든다는 게 싫어서 그러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뉴스에선 이미 해봤다던데, 이제 와서?”

“전··· 스푼 소속입니다.”

“대우는 간부 직속이 더 나을걸? 거긴 매일 과로하잖아.”

“직속으로 들어오면 리더가 될 테니, 훨씬 낫지.”

“설마 몰라서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있을 곳은 스푼이다. 타냐는 그렇게 되뇌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차라리 이 상황이 꿈이길 바랐다. 이곳에 데려온 듄을 잠시 원망했지만, 동시에 무려 간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을 그의 사정을 이해했다.

“제가 언럭키 씨를 담당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그의 회복을 돕는 상담사로서의 얘기이며, -저는 끝까지 스푼 소속일 겁니다.”

한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타냐는 따끔따끔한 시선이 저를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괜히 당돌하게 말했나 싶었지만, 철회할 마음은 없었다. 차라리 간부들이 타냐에게서 흥미를 잃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히 들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언럭키, 너는 어떻지?”

“!”

“···저, 저는···.”

누구, 누군가를 위해, 일하, 할 수만 있다며, 면···. 뭐든···.

“-그렇다는데. 설마 그를 지원해주는 것도 안 된다 하진 않겠지.”

타냐는 눈을 감고야 말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장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리를 박차고 나오셨을까? 하지만 타냐는 그럴 깜냥이 되지 않았다.

“너무 겁먹은 것 같은데, 이건 그냥 제안이야.”

간부 시라노가 타냐에게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다른 간부들이 그를 돌아보았으나,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다만, 네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우리의 방식대로 할 수밖에.”

“···?”

“돌아가 보게.”

“다음에 봐-”

“? ??”

타냐는 순식간에 소강된 분위기에 잠깐 멍하니 섰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는 타냐와 언럭키만이 남아 있었다. 타냐는 묘한 눈길로 언럭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소심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나마 이제는 타냐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타냐는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 미, 미안···.”

“뭐가 미안해요. 미안해하실 게 하나도 없는데.”

“나, 날, 떠맡게됐, 됐잖아···.”

“그런 제안, 아직 수락 안 했어요.”

“그건, 그렇지만-”

“하지만 언럭키 씨가 찾아오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스푼으로 오세요.”

“!”

“손, 잡아도 될까요?”

타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언럭키의 손을 잡고 대회의실을 나섰다. 밖에서는 담배를 태우던 듄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뒷자리, 타냐의 옆에 앉은 언럭키의 얼굴은 드물게 편안해 보였다.


나가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나가를 그렇게 만들 만한 사람은 나이프밖에 없다는 건 당연했다. 타냐는 그 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으나, 할 일이 많아 차마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최근 들어 더 잦아진 테러, 범죄 때문에 상담을 필요로 하는 피해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결국 타냐는 그 일을 처리하고 나서야 나가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이런 말을 듣고자 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제가 그 두 명을 죽일게요. 제가 당해보니까··· 얼마나 끔찍하게 아픈지 아니까. 만약 엄마 아빠가 똑같이 당하면 속이 뒤집힐 것 같아요.”

“쓸데없는 소리. 너처럼 말랑말랑한 놈이 살인을 하면 멘탈이 버틸 것 같아? -오늘은 잠이나 자라.”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방치해서 생긴 피해자를 보면 그보다 더 힘들 것 같아요.”

진심이에요.

꽤 오래 이어진 대화는 나가의 단단한 한 마디로 끝이 났다. 문 뒤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타냐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고, 막 병실을 빠져나오는 다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타냐, 네가 어떻게 좀 해봐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뀽, 그래도 한번 말해봐요. 지금의 나가 군, 굉장히 불안해 보이니까···.”

결국 권유를 받아들인 타냐는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병실에 들어섰다. 나가는 여전히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타냐는 작게 인사하며 침대맡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가는 타냐가 밖에서 대화를 들었음을 깨달았는지, 멋쩍게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네, 일호 형이 다 치료해줘서···.”

“아직 왼쪽 눈이 조금 떨리는데.”

“아, 티 나요?”

타냐는 눈가를 매만지는 나가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가는 그런 타냐의 눈길이 되레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손을 내저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이 보여서, 타냐는 허락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손, 잡아도 될까요?”

나가는 어쩐지 이 말을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다고 생각했다. 석류색 눈, 처음 보는 듯한 정장 차림. 오늘은 가운을 걸치고 있지 않았고, 가슴에는 꽃을 달고 있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타냐가 나가의 손을 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늘 따뜻한 손, 그 너머로 어떤 감정이 전해져 온다.

개운한 기분이었다. 마치 막 감기를 털고 일어난 듯한, 그런 안온한···. 나가는 내내 몸이 뻣뻣하게 긴장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닫고 허허, 웃고 말았다. 긴장이 풀린 어깨가 다시 평소처럼 내려앉았다. 나가는 늘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채는 타냐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가운 벗은 거 보면 알겠지만, 오늘은 상담사가 아니라 직장 선배로 왔어요.”

“···? 뭐가 많이 다른가요?”

“무조건 나가 군 편은 아니라는 소리죠.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

그제야 타냐 역시 나가를 말리러 왔음을 깨달은 나가는 가볍게 머리를 헤집었다. 어쩐지 조금은 성가신 기분이 들었다.

평소엔 그렇게 백모래를 잡으라고 말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말리는 걸까? 아, 너무 삐딱한 생각이었나.

나가는 다시 마른세수를 했다. 다른 사람을 몰라도 타냐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 의도 역시 아니었을 텐데. 스스로가 너무 예민해져 있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오늘, 나이프를 만났다면서요? 들어보니 오늘은 이상한 능력을 써서 더 힘들었다고 하던데.”

“네···. 능력이 이상하게 나가서. 의도치 않게 자해했죠.”

“안 그래도 엄청 심하게 다쳤다고 해서. 오늘 내내 걱정했어요.”

“···”

차마 괜찮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나가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타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픽, 웃으며 손을 뗐다. 그리곤 상담실에서 가져왔을 법한 초코바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이거 먹어요. 입이 심심할까 봐 가져왔는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냥 맘 편하게, 제 말 좀 들어줄래요?”

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믿어요. 알아요, 아모르 씨와 비슷하죠?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벌레가 무서울지언정 죽이고 싶진 않았고, 풀을 밟는 걸 싫어했고, 돌이나 바위 따위가 생명이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사람을 엄청 싫어했어요.

-어, 진짜요? 안 믿기는데.

정말이에요. 사람은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을뿐더러 서로 역시 죽여 버리니까. 왜, 다른 생명들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잖아요. 각종 실험은 실험 동물을 토대로 이루어지죠. 돈을 위해 생명을 사고팔고, 그것은 사치품으로 전락해요. 저한테는 살인범이나 사냥꾼이나 별다를 것 없이 느껴졌어요. 심지어 저 자신조차.

-아···.

그래서 상담사로선 편했죠. 상담사는 재판관이 아니니까요. 제 안에선 좀 더 나쁘거나 덜 나쁜 사람일 뿐인데 내심 내담자들을 함부로 판단할 일은 없죠. 그 말은, 내담자가 누구든 그의 입장에서 공감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다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그게 범죄자여도.

썩 도덕적이라곤 못해요. 어때요, 저 별로 착한 사람은 아니죠?

-···그래도 불법적인 짓은 안 하셨잖아요.

그야 전 착한 사람은 아니어도 착한 사람이 되고는 싶거든요. 적어도 다른 사람이 의지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사람. 어쨌든 그래서··· 나이프를 미워하는 데에 애를 먹었어요.

-네?

저한테는, 음···. 뭐랄까, 그들도 도축업자나 동물 실험을 진행하는 연구원, 그리고 박제와 동식물의 부산물을 사치품으로 사용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거든요. 스푼 사원들을 괴롭혔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건 제 원칙에서 좀 어긋나고.

-객관적이시네요.

우유부단한 거죠. 전 도통 사람을 미워할 줄을 모르니까요.

-어렸을 땐 엄청 싫어하셨다면서요?

결국, 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서는 미워하는 데에 소심해졌거든요. -어쨌든, 제가 나이프를 어떻게 미워하게 됐는지 알아맞혀 볼래요?

-···스푼 사람들이 좋아져서?

그것도 정답이에요.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이건 비밀이에요? 아모르 씨에게 가서 나이프가 저를 죽이는 미래가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정당방위는 법적으로 인정되니까, 그리고 저도 납득할 만한 이유니까 마음껏 미워하게 됐죠.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요. 제 능력의 원칙을 어기자고 마음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까요. 전 일반 범죄자의 제압 현장에 가서도 '실례합니다, 제가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가진 특기자인데요, 능력을 사용해도 될까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인걸요.

-푸흡, 아니 이건···.

웃기죠? 유일한 예외가 서장님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나이프도 그 예외에 속하게 된 거죠. 전 이제 그들이 사형되거나, 제압 과정에서 죽는다 해도 능력을 쓸 각오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살인에 대한 각오를 한 건 아니에요. 제가 죽는다고 해도. -왜일 것 같아요?

-···모르겠는데요.

폭력에 익숙해지면, 돌아갈 수 없거든요. 그리고 전 제 '원칙'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

폭력은 일종의 지름길이에요. 힘이 있다면 모든 과정을 더 쉽게 만들죠. 한 번 지름길을 사용하면, 두 번, 세 번 사용하는 건 일도 아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점점 무뎌지는 거예요. 예전에 말했던, 죽음에 대한 예민함. 기억하시죠?

-네, 기억하는데···.

살인을 저지르면 엄청난 죄책감이 따라와요. 그로 인한 정신적인 불안과 스트레스, 악몽까지 따라오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두 번째 살인은 더 쉬워진다는 거예요. 영정 님처럼, 효율과 이상을 위해 지름길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죽음에 대한 예민함, 그것은 곧 인간성을 뜻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전, 나가 군이 그렇게 지름길을 쓰지 않기를 바라요. 아니, 살인을 겪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제야 마음을 다잡았는데···.

네. 그래서 나가 군이 마음을 잡고자 하면 저는, 막을 수 없어요. 그건 온전히 나가 군의 결정이니까요. 그래도 지름길을 쓰고자 할 때, 한 번만이라도 저를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지름길을 썼다면- 저에게 오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꼭이요.

-···약속할게요.

진짜죠? 새끼손가락도 걸 수 있어요?

-이런 걸로요? 할 수는 있지만···.

“그걸로 충분해요.”


나가는 그 해가 지던 날의 대화 이후 조금 변했다. 힘을 쓰는데 망설임이 없어진 것이다.

“야, 저거 저 튄다!!”

“쏘지 마!”

“···!”

하지만, 유혈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나가는 괜히 마른세수를 했다. 무심코 가차 없이 제압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 짧은 사이에 떠오른 타냐와 영정의 얼굴 덕분이었다.

이대로는 정말 그때 타냐 선배가 말했던 것처럼, 효율을 위해 지름길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어···.

그래도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나가는 오늘도 타냐에게 갈 생각을 했다. 요 근래 나가는 타냐를 제일 자주 찾는 내담자였다. 상담 그 자체보단 휴식을 위해서 타냐를 찾았고, 타냐는 익숙하다는 듯 나가를 병실로 데려가 재워주었다.

그런 나날 중-

“···안녕.”

언럭키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나가, 널 보러 오셨단다.”

나가는 태연하게 인사했다. 행운 만렙인 나가에게 언럭키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좀 더 편안해진 모습이라면 더욱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나가는 전보다 더욱 여유로운 태도로 인사하며, 언럭키의 반대편에 앉았다.

“하···학생이지? 학교는···잘 다녀?”

“요 며칠 입원해서 좀 쉬었어요.”

“···괘, 괜찮으면 다음에 또··· 이만, 갈게···”

“?”

그리고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왜 오신 거지? 나가는 어이를 잃어버렸다.


“언럭키 씨?”

타냐는 주말에도 나와 대강의 관리 작업을 해야 했다. 타 기관의 상담 부서를 비롯한 다양한 정신의학과 관련 부서의 교육, 그에 따른 운영과 인원 관리, 그 외 오랜 정신병 질환자의 치료를 위한 작업들···. 그런 대강의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걷던 타냐의 시선 한구석에 익숙한 갈색의 토끼 귀가 등장했다. 타냐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듄을 비롯한 그의 팀원을 이끌고 있는데 모를 리가.

“아, 안녕···”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듄 씨도요! 그, 뒤에 계신 분도···.”

“윤이에요.”

네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나가를 보러왔다가 간다는 모양이었다. 타냐는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언럭키는 끝내 대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타냐는 이어서 말했다.

“그럼 돌아가실 때 같이 가게 해주세요. 그동안이라도 케어해드릴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듄 씨, 알잖아요. 이대로 보내면 제 마음이 더 불편한걸요?”

그 정도는 괜찮은지, 언럭키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타냐는 화색으로 듄이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언럭키의 손을 잠깐 잡아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타냐는 덜컹거리는 차 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손잡이를 의자 헤드를 꽉 쥐고 혜나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작 타냐의 머리는 차 천장에 박게 생겼지만, 애가 부딪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탕, 탕, 총을 쏘아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 상황이 시작된 것은 나가가 혜나와 함께 듄에게 위장약을 전달하러 왔을 때 즈음이다. 곧 헤어지려던 그때, 검은 차를 탄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총을 쏘며 습격해온 것이다. 급하게 혜나를 무릎에 앉힌 타냐는 나가마저 차에 태우고 나서 문을 닫았다. 곧 격한 드리프트와 함께 무게중심이 쏠렸다. 언럭키, 타냐와 혜나, 나가가 앉아있던 뒷자리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그리고 차가 하늘로 솟아오름과 함께- 검은 차량끼리 다중충돌 사고가 일어났다. 타냐는 그 광경과 손으로 능숙하게 염동력을 조절하는 나가의 모습을 멍하니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다행히 전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등골이 오싹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상황 수습이 시작되었다. 듄은 상황 설명을 위해 붙잡힌 모양이었다.

“리더, 죄송합니다.”

“지금 마고를 불렀으니까 새 차가 올 때까지만···.”

“아냐, 거, 걸어서 갈게···”

“네?! 차로 2시간이 넘는 거린데···.”

그렇게 상황의 완결 이후. 혜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타냐는 언럭키의 걸어가겠다는 발언에 깜짝 놀랐다. 듄의 말마따나 차로 2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타냐 역시 주말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 거리를 걸어간다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괜찮아.”

“아, 안 돼요! 혹시 또 무슨 일 생기시면···.”

“그럼 제가 바래다 드릴까요?”

“저···정말요? 감사해요.”

그때, 나가가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타냐는 바로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듄 씨와 윤 씨는 여기서 상황 설명을 도우며 혜나를 데리고 있다가, 함께 돌아가 주시겠어요? 저와 나가 군이 언럭키 씨를 자택으로 모셔다드릴게요.”

“엇, 타냐 선배까지 같이 가시게요? 혜나와 함께 돌아가시는 게···.”

“-음, 나가 군이 못 미덥다는 건 아니지만. 윤 씨, 약도를 보여주시겠어요?”

“여기···.”

“볼 수 있겠어요, 나가 군?”

“그야 당연히··· 여기 맞나?”

“절대로 못 미더워!!”

혜나가 버럭 소리치는 것에 타냐는 애매하게 웃었다.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지만, 진짜로 그럴 줄이야···.

역시 나가는 묘하게 덜렁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는달까, 어느 정도는 수습이 된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지 사소한 부분은 그냥 넘겨버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관계로, 제가 같이 갈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듄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렇게 타냐와 나가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언럭키와 함께 길을 나섰다.

타냐는 그렇게 도착한 언럭키의 자택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공터 한가운데, 고작 컨테이너 박스 서너 개를 붙여놓은 그곳은 누군가의 집보다는 공사 현장의 임시 창고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간부 측에서 ‘근처에 민가가 있으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마련해주었다는 그곳은, 사람이 살기엔 너무 열악했다.

그 사람들이···.

타냐는 저를 불렀던 간부들의 면면들을 떠올리며 점점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잠시 떠올렸던 생각이 퐁, 모습을 드러냈다.

“저···. 둘 다 괜찮으면, 커피라도···.”

“···그럴까요?”

“감사히 마시고 갈게요.”

그렇게 언럭키를 따라 들어선 집 안은 더욱 심각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가구조차 자리해 있지 않은 이곳은 휑하다 못해 썰렁해 보였다. 노란 장판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창문···.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한 곳도 없는 ‘집’이었다. 타냐는 걱정을 감출 수 없어, 눈치를 보며 언럭키가 주는 커피 캔을 받아 들었다.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영정 님이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이게 용건이었구나. 타냐는 언럭키가 굳이 타냐와 나가를 집에 들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둘 다 영정의 마지막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가가 먼저 그 질문에 답했다.

“남의 동정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치료받을 때까지 온전히 자신이 떠안고 있어야 한다고도 하셨죠.”

“정신을 갈고 닦아서 한 사람 몫을 하라고···. 죄송해요, 정확히는 기억 못 하는데.”

“고, 고마워.”

“근데 왜 아까는 안 물어보셨어요?”

“혹시··· 다른 사람한데···”

-상처 되는 말씀을 하셨을까 봐···.

알 듯 말 듯 했다. 영정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냐와 이호를 마구 밀어붙이기도 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독선적으로 나아가는 면이 있었다. 언럭키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타냐는 묘한 눈으로 언럭키를 바라보았다. 그때,

채앵! 쾅-

자그마한 총알 하나가 벽에 박히고, 뒤이어 큰소리와 함께 무수한 총 쏘는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타냐는 벌떡 일어났다.

“나가 군, 피해야-”

그리고 미성년자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외치던 타냐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난 탓이다.

잔뜩 우그러진 컨테이너 박스, 사람들의 위액이며 침이 떨어진 노란 장판. 총은 순식간에 뭉텅이로 타냐의 앞에 떨어져 있었다. 세 사람을 공격해온 괴한들은 컨테이너 박스의 철골에 몸이 묶인 채 바닥에 꽁꽁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유혈사태 없이 제압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타냐는 멍해진 기분으로 나가의 등을 토닥였다.

“···고마워요, 나가 군.”

“아니에요. 저, 그, 죄송합니다. 집이···.”

“괘, 괜찮아···. 안 다쳤어···?”

“네. 듄 쌤이랑 서장님께 말씀드려야겠다. 가요.”

“-아, 아냐, 그럴 것까진···.”

타냐는 나름 증거인 총기류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괴한들에게 늘 소지하고 다니는 수갑을 채우는 것은 덤이었다. 여기까지 온 게 무색하게도, 스푼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럭키 씨, 나가 군 말대로 해요. 어차피 집이 이 모양이 됐는데, 이런 곳에서 잘 순 없잖아요.”

“그, 그냥···.”

“혼자 계시면 위험해요.”

“아니···. 괘, 괜찮은데.”

“네? 하루에 두 번이나 습격당했는데요?”

“어어···. 익숙하고···.”

그때, 타냐는 불안한 기분이 엄습해왔다. 익숙하다니?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언럭키에게 불행은 흔한 일이라지만, 요즘은 제법 안정되어 있어서 본인을 찾아오는 불행도 잦아들었다. 게다가 이것은 불행으로 인한 일이라기엔 위화감이 있었다. 분명한 악의적인 습격. 누군가의 의도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언럭키를··· 누가?

“언럭키 씨, 익숙하다구요?”

‘다만, 네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우리의 방식대로 할 수밖에.’

“대체 누가 이러는 건데요? 모두에게 알려요! 도움을 청해야죠.”

“···”

-발밑이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난 괘, 괜찮아···.”

“저, 저 사람들에게 지시한 분도··· 누구든,”

간부진은 모두 누군가의 영웅이야.

타냐와 정확히 같은 생각이었다. 결국 간부들은 언젠가 위대한 영웅들이었고, 그만큼 존경을 받기에 지금의 자리에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변했다.

사람은 변한다. 그것이 법칙이다. 여러 사유와 경험 등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해 나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물이니까. 타냐는 그것을 사랑했다. 자신의 상처를 딛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동경했다.

하지만 스푼의 간부와 같은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성장한 것이 아니라 욕심과 아집에 사로잡혀 오히려 뒤로 퇴보한 것 같았다. 울화를 참을 수 없었다. 머리가 아파졌다. 한때 누군가의 영웅이었던 사람들이…

‘차라리 내가 더 히어로답다고 하겠어.’

지금도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아아, 참으로 쉽게도- 화가 났다.

“전부 현대 위인전에 실려도···. 손색이 없어···. 반면에 난 별명이, 이, 인간 재해고···. 손실을 따져보면 나보다는···.”

언럭키는 분명 위협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우연히’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흔적은 남지 않는다. 우연히 떨어진 공사 현장의 벽돌을 맞고 죽은 것에서 누구의 악의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언럭키에게 해를 가하려던 사람의 결과는 더 심각하다고 들었다.

이 점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아무리 위협적이어도, 건드리지만 않으면 불안할 일은 없는 것 아닌가? 꼭 뭔가 찔리는 짓을 한 것처럼···.

-찔리는 짓?

“그게 죽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아요, 언럭키 씨. 죽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응. 내, 내 시체가 남은 자리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죽더라도 가급적··· 그, 사람 발길이 안··· 닿는 곳에.”

“저기요!”

“···나가 군, 일단 119에···.”

타냐는 번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세뇌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타냐는 언럭키가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언럭키의 자존감이 저 모양인 것에는 간부진의 어떤 개입이 있었을 것이다. 저런 맹목적인 믿음과, 타고난 특기와는 상관없이 비정상적으로 불안한 정신상태···.

‘우리의 방식’이란 이런 것이었나?

이 점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타냐는 핸드폰에 그것을 메모했다. 119에 연락한 나가는 이제는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타냐는 다시 다나에게 연락을 남기고, 언럭키에게 다가섰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언럭키 씨,”

“으···응?”

“운이 나쁜 건 언럭키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 만···.”

“의도치 않게 피해를 줄 수도 있겠죠, 분명 죄책감이 들 거예요.”

“···”

“하지만 특기 때문에 죄책감을 이고 살아가야 하는 제일 큰 피해자는 언럭키 씨잖아요. 네? 안다고 해 주세요···.”

재해와 재난이 찾아오면 나약한 인간들은 그것을 탓한다. 사태의 잘잘못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으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타냐는 차라리 그것을 권장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불행이라는 재해를 이끌고 오는 언럭키는 곧 없어져야 마땅할 사람인가?

아니, 사실 음습함을 따지자면 타냐 자신의 특기가 더하다. 언럭키는 자신과 다르게, 적어도 악의로 특기를 사용할 수 없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공평한 불행이 찾아올 뿐이다. 심지어 언럭키 자신은 그 하나하나에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오히려, 자신이 불행 그 자체라는 이유로 고작 운조차 원망할 수 없는 삶이란.

불행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 다정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그저 지독한 불운의, 제일 큰 피해자일 뿐이다.

“···그러네요.”

“? 나가 군?”

“아니에요.”

벌컥!

“-리더! 괜찮으세···”

“으아-!”

하지만 타냐는 끝내 언럭키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랬어요.”

타냐와 나가는 스푼에 도착하자마자 상담실로 들어와 있었다. 언제나와 비슷한 차의 색깔과 향기,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의 모습조차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가운데 있는 타냐의 모습은 차라리 하나의 풍경화와 같아서, 나가는 잠시 말을 쉬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잘못했다고 백번 잘한 게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렇죠.”

“백번 잘했다고 잘못한 게, 그것도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게 없던 게 되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왜···!”

“나가 군, 생각보다 세상에 부조리한 건 많아요.”

···?

나가는 타냐로부터 들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체념하는 듯한 말투에 잠시 놀랐다. 늘 웃는 얼굴을 유지하던 타냐 역시, 조금은 흐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상담 시간만은, 쉽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가는 어쩐지 자신이 대단한 죄인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암약해 있는 범죄단체, 잡히지 않는 밀렵꾼들, 난무하는 비리···.”

범법이라 해서 그곳에 늘 정의 구현이 있지는 않답니다. 역시 히어로답지 않은 생각이죠? 하지만 그게 현실인걸요. 히어로가 활약하는 분야는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나가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타냐는 이전부터 포기한 일이라는 듯, 아니, 회의를 느껴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놓고선 예전부터 골라놓은 말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얼마나 오래 해왔던 걸까?

새삼스럽게 나이 차가 실감 났다. 평소 주변에 어른답지 않은 어른들이 많아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타냐는 나가보다 7살은 연상이었다. ···지금 여기서 떨리는 게 정상인가?

“나가 군은 다른 학생들보다 좀 더 빠르게 알게 된 것뿐이에요.”

“그럼 어쩌죠?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것도요.”

네?

·0·

멍한 얼굴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타냐는 진심이라는 듯,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며, 세상의 부조리함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던···.

“나가 군은 아직 어려요. 그리고 세상에는 생각보다 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는 어른들이 많죠.”

“네···?”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라는 소리예요. 나가 군은 여전히 조금 큰 힘을 갖고 있을 고등학생이니까.”

“하지만, 영정 님은···.”

“나가 군이 지금보다 크면, 마음에 여유가 생길 거예요. 그니까 이 일은 그때 가서 신경 쓰고, 지금은 그냥 클 생각만 해요. 나중엔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지겠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부채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나가는 여태 아무도 해주지 못한 말을 듣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나가를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봐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출석 일수를 조금 걱정해주기나 했지, 나가는 이미 어엿한 히어로였다. 일이 있다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출동해야 하는, 그런 히어로.

영정의 일로 그 부담감은 더했다. 죽은 이는 자신의 후계자라 여기는 남고생에게 큰 영향을 남기고 있었다. 그것이 의도였다면, 훌륭히 성공할 뻔했다. 타냐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의 말로, 방금 나가의 마음이 짐이 떨어져 나갔다. 아니, 어쩌면 그대로 타냐에게 옮겨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냐는 나가를 어린 학생 취급해주는 제대로 된 ‘어른’이니까.

그러니까, 기대고 싶어.

나가는 아직 고작 18살이었다.


“···그래서, 생각은 해봤나?”

“-네, 하지만 조건을 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오, 그렇게 제안할 여유까지 생겼나 봐?”

“언럭키님의 능력은···. 유용하니까요.”

“그래, 이해할 줄 알았다. 그래서 조정안은?”

타냐는 옆에 선 언럭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럭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간부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타냐 스스로도 발칙한 요구라고 생각했으니까. 타냐는 떨리는 손을 겨우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전 스푼 소속으로 남아있고 싶습니다.”

“흐음, 굳이?”

“스푼에서의 도움을 받아 언럭키 씨의 치료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일반인보다는 히어로들의 협조를 구하는 게 편하니까요.”

“!”

“그게 가능하겠어?”

“적어도 스스로의 불안정한 심리로 인한 주변의 연쇄적인 피해가 없는 정도까지라면, 지금도 가능해요.”

“그 정도라면···.”

타냐는 술렁이는 간부진의 모습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허락하는 기색이다. 이후의 제안은 조금 더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관대하게 허락해줄지도 모른다. 입안이 말라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지만, 나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라는 소리예요.’

“그럼 그렇게 하지. 그 외에는?”

“언럭키 씨의 치료를 진행하면서 기록을 남겨야 하는데, 이에 대해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어떤?”

“간부님들이 맡기는 임무에서 언럭키 씨의 특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기록이 필요, 합니다만···.”

“뭐야?”

“우리의 약점이라도 잡아보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무모하게.”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타냐는 고성에 더욱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바로 하며, 똑바로 눈을 뜨려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저에게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그대로 마주하기는 어려웠다.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쳐졌다.

“그 기록에 대해서는, 언제나 간부님들께 보고를 올릴 예정입니다. 당연히 언럭키 씨의 특기 내용에만 집중할 테니···.”

“뭐, 그렇다는데. 괜찮아 보이는구만. 다들 그렇게 찔리는 게 많은가 봐?”

“큼, 크흠, 그런 게 아니라···.”

다행히, 간부 시라노가 나서서 분위기를 소강시켰다. 타냐는 뜻밖의 행운에 속으로 환호했다. 한껏 저자세로 나간 것이 효과적이었는지, 간부진은 다들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성공이었다. 타냐는 이어서 설득할 사람을 생각하며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또 다른 요구사항은 없길 바라네.”

“충분해요. 물론입니다.”

“그럼 언제든 연락을 해야 하니, 인원을 붙이겠네. 기다리고 있게나.”

“네, 알겠습니다···.”

결국 타냐는 기꺼이 목줄을 걸었다.


“···정말로 그럴 계획이십니까?”

“음, 좀 터무니없을까요?”

“아뇨. 말하신 대로 충분히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 간부진들이 받아들일지···.”

“그들이 받아들이고 말고는 상관없어요.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곧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히어로, 한 번 제대로 되어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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