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외전4. 그 사람의 발렌타인

다정의 다정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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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가 오빠!”

아직은 이른(10시를 이르다고 할 수 있다면) 주말의 아침, 나가는 뜬금없는 혜나의 습격을 받았다. 오랜만에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자고 있던 나가는 덕분에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을 열었다. 각각 날개와 빗자루로 날고 있는 두 사람이 나가를 맞이했다. 별로 급해 보이지도 않은 것을 보면, 다른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주말까지 회사 동료에게 휘둘리는 삶, 이대로 괜찮은가.

나가는 잠시 스푼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에게 회의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타나가 부러.”

“곧 발렌타인이잖아. 초콜릿 만드는데 오지 않겠냐고 해서~”

“오.”

타냐 선배? 그럼 가야지.

-근데 주변에 시커먼 남자애들밖에 없어서 그런가, 직접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만든다는 소리가 영 낯설게 들렸다. 그보다 타냐 선배, 요리 잘하시던가? 왠지 그럴 것 같이 생기긴 했다. 그런데 왜 굳이 부르는 거지?

“근데 왜 우릴 부르는데?”

“왜긴. 좀 도와주고 초콜릿 받아 가라는 거지.”

“···? 일단 챙길게.”

그때 나가는 예감했어야 했다. ‘일손이 필요할’ 정도의 일의 규모를.


“어서 와요. 사실 혜나만 불렀는데, 다들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갠차나.”

“응, 언니는 손이 크니까! 일손이 많을수록 좋지 않겠어?”

“안녕하세요···.”

나가를 비롯한 비행조는 벨을 누르고도 조금 기다려야 오피스텔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방 두 개가 딸려 있는 복층 오피스텔로, 일개 공무원이 살기에는 호화스러운 구조였다. 하지만 그런 쪽에 무지한 나가는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들어섰고, 깔끔한 집의 구조를 보며 감탄하기에 바빴다.

하얀 석재 바닥에 부드러운 원목 위주로 구성된 가구, 테이블에는 포근해 보이는 러그, 창문에는 부드러운 노란빛의 커튼이 달려있었다. 그 외에도 아이보리색 소파 커버,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예쁘게 꾸며져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식탁에 보조 테이블마저 펼쳐두고 늘어서 있는 것은-

수많은 초콜릿 틀이었다.

“자아, 혜나는 이번에도 녹이는 것만 하는 거야. 잘할 수 있겠어?”

“응! 나 녹인 거 좀 먹어도 돼?”

“수저로 조금씩 만이야? 수저는 잘 닦고!”

“네넹~”

“사사 씨는 틀에 붓는 걸 도와줄래요?”

“응.”

심지어 두 사람은 익숙한 듯 역할 분담을 하고 있었다. 나가는 어쩐지 싸한 기운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심지어는 그 모습을 타냐에게 들켰다.

“아니··· 저··· 그게···”

“역시 좀 많죠? 힘들어 보이면 구경만 해도 되는데···.”

“-아뇨, 하겠습니다.”

“앗, 그럼 식혀줄래요? 아무래도 따뜻한 집안이다 보니 잘 안 굳어서. 그렇다고 냉장고에 넣으면 냄새 배서 싫구.”

그나마 쉬운 일이어서 다행이다. 나가는 그렇게 생각하며 초콜릿 틀을 받아 들었다. 사사와 타냐가 정성 들여 짜낸 초콜릿들이 초콜릿 틀에 얌전하게 박혀 있었다.

결국 역할 분담은 완벽히 끝났다. 커버춰를 녹이는 혜나, 녹인 커버춰를 틀에 맞춰 짜 넣는 타냐와 사사, 그리고 겨울바람과 염동력으로 굳히는 나가···. 그렇게 몇 판을 했을까, 동그란 다크 초콜릿이 몇 개의 양푼에 가득이었다. 그에 나가는 잔뜩 질렸다. 이 정도 인력이라서 1시간에 끝났지, 혼자였다면 4시간은 걸릴 분량이었다.

“언니, 나 힘들어-”

“응응, 그럼 소파 가서 좀 쉬고 있어. 초콜릿 하나 먹을래?”

“아니, 배불러.”

“이런, 서장님한테 혼나겠네. 초콜릿으로 배 채웠다고.”

“이따 점심은 잘 먹을게!”

그래도 이제 끝난 거겠지···?

나가는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 초콜릿 틀을 이리저리 흔들며 식혔다. 사사도 어느새 지쳤는지 소파 한구석에 가서 귤을 까먹고 있었고, 나가 역시 슬금슬금 그 주변에 가 앉았다. 타냐는 그 많아 보이던 다크 커버춰 봉지를 비워낸 채,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제 끝난 거죠?”

“네? 당연히 아니죠. 화이트도 하고, 말차도 하고, 딸기도 생각 중이에요.”

“???”

“앗, 당연히 전부 시킬 생각은 없으니까요. 지금은 쉬면서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봐요. 다 시켜줄게요!”

“언니, 난 피자!”

그리고 나가는 찬장에서 줄지어 있는 커버춰 봉지들을 보았다. 다크 초콜릿의 몇 배만큼은 되어 보이는 화이트초콜릿이 줄지어 있었다. 거기에 말차 봉지까지. 타냐의 말이 진심임이 보이는 대목이었다. 안 그래도 달짝지근한 초콜릿 냄새가 집안을 채우는 바람에 결국 창문을 열었는데, 여기서 더···?

“그리고 남겨둔 다크 초콜릿으로 크런치도 좀 만들고-”

진심인가. 나가는 잠시 잘못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띵동-

그마저도 곧 피자가 배달되는 바람에 끝났지만. 나가는 타냐를 도와 먹을 자리를 정리하며 초콜릿을 우물대는 혜나의 모습을 보았다. 사사는 밥을 먹기도 전에 단 것을 입에 넣는 혜나가 걱정스러운지 흘긋거리고 있었다. 나가는 그것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다가 타냐에게 물었다.

“원래 발렌타인데이마다 이렇게 직접 만드세요?”

“아뇨, 처음엔 그랬는데 그다음엔 숙소에 살아서 못 했어요. 근데 이젠 자취방도 생겼고 해서···.”

일을 벌려버렸네요. 멋쩍게 웃어 보이는 타냐의 얼굴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즐거워 보였다.

“의외네요. 혜나나 사사 선배가 엄청 익숙해 보여서 매번 그런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것 같은데, 저 아직 스푼에 들어온 지 만으로 2년이랍니다? 한 번밖에 안 챙겨봤어요.”

“언니 근데 크리스마스도 한 번 챙겼었잖아.”

“마자. 그때도 우리가 도아저꼬.”

“오···.”

결국 두 번 정도인가. 그런데 이렇게 익숙해졌다면 그때의 작업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강 감이 온다. 나가는 다시 어깨를 떨었다. 이 공장에 제 발로 온 자신의 모습이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고작 몇 시간 후, 나가는 타냐의 집에 찾아오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앗, 쿠키 다 먹었네. 더 줘요?”

“커피 더 필요해요?”

“마들렌 맛있죠? 요번에 해본 건 진짜 잘 됐어요.”

따스한 온도, 부드러운 햇살, 가볍게 올라오는 차 향기, 혹은 커피 향기와 온갖 구움과자들···.

이건 극락인가?

거기에 한창 초콜릿을 만드는 타냐의 달그닥 거리는 백색 소음까지 더해지니, 온몸이 노곤해진다. 아침에 마저 자지 못한 잠이 몰려왔다. 나가는 이미 잠들어버린 혜나의 곁에서 꾸벅 꾸벅거렸다. 이따금 거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정도였다. 물론 그 전에 사사가 막아주었지만.

그렇게 자다 깨다, 가끔 타냐가 만든 초콜릿을 한 김 식혀주는 것을 반복하던 나가는 소파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묘한 꿈이었다. 초콜릿 동산에 파묻힌 채 사사가 사색이 되어 구하러 오는. 그와 동시에 입술에 느껴진 달콤한 감촉을, 나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동그란 그것은 씁쓰름한 단맛을 남기며- 뭐?

“앗, 나가 오빠 깼다!”

“···혜나?”

“초콜릿 맛있지? 데코까지 끝낸 거야. 볼래?”

나가는 초콜릿을 으적대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깜빡 자고 일어나보니 점심을 먹은 후로도 3시간이 훌쩍 지나있는 시간이었다. 타냐는 여전히 초콜릿을 신경 쓰는 틈틈이 오븐까지 살펴보고 있었다. 고소한 빵 냄새가 가득했다. 빵집에서나 맡아볼 수 있는 냄새였다.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타냐에게 차마 말을 붙일 수 없었던 나가는 혜나가 보라며 내밀은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예쁘게 초코 펜으로 데코 된, 동글동글한 초코볼들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는 초콜릿을 색깔별로 분류해주고 있었다.

“우와아···.”

“예쁘지?”

“이걸 다 언제 하셨대?”

“언제는 언제야. 나가 오빠 자는 동안 언니랑 내가 했지. 거의 다 언니가 했지만.”

그리 대단하게 예쁜 건 아니지만, 정성이 가득했다. 나가는 절로 손이 가려는 것을 참고 조심스럽게 봉지를 내려놓았다. 그때, 나가가 일어난 것을 봤는지 타냐가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요? 안 그래도 저녁 먹고 갈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혜나랑 사사 씨는 이제 간다고 했거든요.”

“어, 그럼 저도 그냥 갈게요.”

단둘이 있는 것도 좀 어색할 것 같고···. 나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타냐는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묵직해 보이는 종이봉투를 꺼냈다. 인원수에 맞는 걸 봐서, 오늘 초콜릿 만드는 것을 도와준 비행조에게 주려는 선물 같았다.

“자, 이거 하나씩 가져가요. 오늘 정말로 많이 도움 됐어요. 고마워요.”

“언니, 내일도 초콜릿 줄 거지?”

“헤나야···.”

“당연하지. 나가 군도, 사사 씨도 내일 초콜릿 기대해요. 오늘 조심해서 돌아가구요.”

“내이 바.”

“안녕히 계세요.”

예상은 적중했고, 세 사람은 각자 손에 종이봉투 하나씩을 들고나오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것을 펼쳐 본 나가는 기함했다.

“이게 다 뭐야···.”

“타냐 언니가 한 번 일 벌리면 손이 엄청 크거든~ 남는 걸 줬을걸?”

“-이만큼 남는다고?”

각종 쿠키며 마들렌, 파운드케이크가 잔뜩 들어있었다. 아까는 초콜릿 만드는 것밖에 안 보였는데. 아, 오븐에 불이 들어와 있긴 했다. 나가는 타냐의 정성과 그 큰 손에 감동하며 쿠키를 하나 까먹었다.

“난 이거 먹으러 온다구~”

“선배도 이거 때문에 오는 거예요?”

“···마시쓰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다.

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하게 맛있는 것은 아니어도 정성이 가득한 수제의 맛이 느껴지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다음에도 또 오자!”

“응.”

또 몇 번쯤은 고생을 해봐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발렌타인데이의 날이 밝았다. 나가는 타냐의 집에서 보았던 그 수많은 초콜릿과 간식거리들의 향연을 떠올리며 출근길에 올랐다. 그거 다 가져가는 것도 일일 것 같던데, 괜찮나 싶기도 하고. 막상 가면 그 간식들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행렬로 북적이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가 오빠~”

하지만 그런 나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스푼은 여느 때와 같이 고요했고, 어느 복도에서도 타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 나가는 혜나에게 물었다.

“타냐 선배는 그 많은 선물 다 어떻게 했대?”

“아, 그거? 아침에 다 나눠줬대. 악수회 하잖아.”

“아.”

그걸 잊고 있었다. 대낮은 되어서야 출근하는 나가가 아침의 악수회를 떠올릴 리가 만무했다. 그럼 일사불란하게 줄지어서 제 이름에 맞는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받았으려나. 왠지 급식 아주머니가 된 타냐가 떠오르는 상상이었다. -어쨌든, 난장판을 상상하고 들어왔던 나가는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실망을 느꼈다.

그리고 헤이즈가 정말 열심히 딴짓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저거, 지금···.”

“발렌타인데이라 그런가 봐···.”

“튀ㅈ,”

“마침 잘 됐다! 포장 좀 도와줘요.”

헤이즈는 도망가려는 나가를 잡아채고는, 결국 포장 담당으로 나가를 채용하고야 말았다. 염동력은 리본을 묶기에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헤이즈는 초코 상자를 덮고, 나가가 포장하는 것을 혜나가 옆에서 지켜보는 상황이 되었다. 나가는 조금 타냐가 보고 싶어졌다. 뭐 타냐라고 이 상황에서 나가를 빼줄 능력이 되겠느냐마는.

“근데 이 다량의 초콜릿 어디서 난 거예요?”

“백모래가 랩터에게 보낸 걸 제가 꿀꺽했죠.”

“미친,”

그럼 이거 백모래가 보낸 거야?!

평정심을 잃은 나가는 포장하던 초콜릿 상자를 툭, 떨궜다. 그마저도 헤이즈가 받아냈지만. 이걸 팔아야 한다는 의지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최고급품이에요. 버리긴 아까우니까.”

“그걸 녹여서 팔 거예요? 그 변태가 여기 무슨 짓을 했을 줄 알아요! 머리카락이나 피를 넣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위생법상 전혀 문제없어요.”

·0·

나가는 할 말을 잃었다. 납득해버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기가 찬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나하나 정성을 담으며 초콜릿을 만들면서도 도와주는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던 타냐와, 초콜릿을 팔아먹을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자신을 부려 먹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는 헤이즈···.

인성의 차이가 여기서 극명히 드러나는구나.

나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포장을 계속할 때쯤이었다.

“뭐해요? 발렌타인데이라 마카롱을 좀 만들어 왔는데.”

“안녕하세요, 다들~”

일호와 오수였다. 두 사람 각자 종이백을 갖고 있었는데, 일호의 것은 마카롱인 모양이었다. 헤이즈와 혜나, 나가는 일호가 가져온 마카롱을 1차로 이곳에서 털어먹기로 하고 상자를 열었다. 먹음직스러운 마카롱이 색깔별로 줄지어 놓여 있는 모습이 입맛을 돋웠다.

“아, 저는 타냐 씨를 보러 온 거라···. 올라가 볼게요.”

“앗, 네.”

하지만 오수는 타냐를 보러 자리를 떴고(말하는 걸 봐선 답례선물을 주러 가는 길 같았다), 나가는 염동력으로 마카롱을 한 입 먹었다. 달달한 설탕의 맛이 감돌며 타냐가 만들었던 간식들이 생각났다. 각종 쿠키, 마들렌, 그리고 파운드케이크···.

그러고 보니 헤이즈 선배도 선물을 받았으려나?

“헤이즈 선배도 타냐 선배 선물 받았어요?”

“아, 그거요? 받았죠. 몇 개 먹고 스텔 줬지만.”

“진짜 스푼 전 사원한테 줬구나···.”

“···‘헤이즈가 받았다=전원이 받았다’라는 사고방식 같은데.”

“아니에요?”

헤이즈가 드물게 얼척 없다는 눈으로 나가를 쳐다보았다.


“사사 오빠~!”

마카롱을 만족할 만큼 먹은 혜나와 나가는 곧 사사를 찾아갔다. 휴게실 한구석에 앉아 있는 사사의 주변에는 초콜릿 상자들이 가득했는데, 포장지가 전부 반짝여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사사는 빛나는 것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다가, 두 사람이 오자 황급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언데 와써···?”

“진작 왔는데 헤이즈 오빠랑 얘기하다가 늦은 거야.”

“초콜릿 엄청 많이 받으셨네요.”

“응.”

우와, 오빠 이거 봐. 이거 비싼 건데!

이윽고 혜나와 나가는 초콜릿 구경 삼매경이었다. 각종 브랜드 혹은 수제의 초콜릿들이 형형색색 빛을 발하며 눈을 호강시키고 있었다. 나가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소박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유리병에 담긴 사탕들이었다. 아니, 사탕처럼 반짝이게 포장한 초콜릿인가?

“이건 뭐예요?”

“쵸코릿···. 타나가 중거야.”

“아, 오빠 껀 이렇게 포장했구나! 언니 포장지는 언니 평소에 입는 셔츠 무늬였는데. 유리병은 통일인가 봐.”

“오오···.”

유리병에 동그란 초콜릿을 하나하나 포장해서 넣은 건가?

엄청난 가내 수공업이다. 나가는 그 오피스텔 주방 구석에서 완성된 초콜릿을 하나하나 꺼내며 포장지로 싸고 있었을 타냐를 생각해냈다. 심지어 포장지도 다르게! 사사의 포장지는 반짝반짝한 은색과 금색이었다. 보통 은박지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이, 직접 골랐을 게 분명하고···.

언제 시간이 나서 이런 준비를 했을까. 평소 타냐의 일정을 아는 나가로서는 진지한 고민이었다.

“나가도 바드러 오래써.”

“아, 저도요?”

“늦게 출근하는 사람은 따로 받으러 오라고 했으니까 말이야~”

그럼 지금 상담실로 가봐야겠다. 나가는 사사가 전한 타냐의 말에 대뜸 기대감이 솟았다. 자신의 초콜릿은 어떤 포장을 했을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혜나가 말해준 것으로 봐서는 내용물도 조금씩 다른 것 같았는데, 덕분에 기대감이 증폭되어가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가 오빠, 스푼에서 초콜릿 많이 받는 순위 궁금하지 않아?”

“응? 어차피 사사 선배가 1위 아냐?”

“아냐. 사사 오빠는 2위.”

“?!”

당연히 1위일 줄 알았는데. 사사 선배보다 잘생긴 사람이 스푼에 있었던가?

나가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다. 그나마 타냐 선배인데, 여자니까 초콜릿을 받을 대상은 아니지 않나?

“일단 3위는 우리 언니.”

아, 여자도 초콜릿을 받을 수 있겠구나.

나가는 자신의 편협함을 반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야생의 미친개 같은) 다나가 3위라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좀 무섭지 않나? 하지만 입사 초, 다나를 데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쇼핑을 하던 스푼 사원의 기 쎔을 생각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나가는 생각했다.

“의외로 우리 언니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편이거든.”

“진짜 의외다···. 그래서 1위는?”

“여자는 당연히 타냐 언니. 받은 만큼 돌려주는 편이지만 엄청나게 받지.”

“오, 이건 예상대로다.”

“타나는 잇사 초에도 마니 줘쓰니까··· 담레로.”

입사 초부터 대규모로 챙긴 덕에 답례도 그만큼 받는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자는? 공동 1위라도 있나.

“남자는 유서 깊은 부동의 1위, 비비안 오빠! 스푼 제일의 신사라고 인기 진짜 많아.”

“진짜? 작고 귀여워서 그런가?”

“내가 말했잖아, 신사라고. 얼마나 점잖고 매너가 좋은데.”

“난자하텐 얄쟐 업디만···.”

나가는 사사의 말로 비비안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금 재수 없을지도···. 남자의 입장이라 그런가, 비비안이 타냐와 같은 공동 1위라는 사실이 조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딜 봐도 타냐 선배의 인기가 더 많지 않은가 싶은데. 남녀 상관없이 모두의 애정을 받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인기는 타냐 선배가 더 많지 않아?”

“초콜릿은 여자만 주잖아.”

배은망덕한 남자들.

움찔, 찔리는 바가 없지 않아 있는 사사와 나가는 어깨를 흠칫거렸다. 화이트데이라도 챙겨야겠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은 발렌타인데이에 온갖 사람들에게 초콜릿을 뿌리는 경향이 있는데, 남자들은 화이트데이에 정말 사귈 사이거나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절대 챙기지 않곤 했다.

“반성하겠습니다···.”

뭐, 그런 얘기를 하며 세 사람은 금방 상담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확실히 여사원이 많은 의료실의 분위기는 잔뜩 들떠 있었다. 저마다 유리병을 들고 있었는데, 타냐가 준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저 초콜릿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난 초콜릿 별로 안 좋아하는데, 기억했나 봐. 쿠키랑 마들렌만 잔뜩 넣어줬지 뭐야.”

“그건 저도 좀 탐나네요.”

“난 레몬 파운드 케이크. 새콤한 거 좋아하니까 넣었대!”

“그래도 양은 초콜릿이 더 많잖아.”

“양으로 계산하는 게 맞나···?”

아, 그때 들려 보내준 게 정말 남은 게 맞았구나.

초콜릿을 싫어하는 사람의 몫도 그렇게 챙겼을 줄은 몰랐다. 하긴, 맛도 입맛에 맞춰서 다양하게 챙기는 사람이 그런 기본적인 기호를 챙기지 않을 리도 없다. 나가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담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아, 나가 군? 초콜릿 받으러 왔구나.”

저번에 골고루 잘 먹는 것 같아서 그냥 다 비슷하게 담았어요.

“감사합니다.”

나가는 유리병을 들고, 제일 궁금했던 포장지를 살펴보았다. 지구본? -나가는 저번에 멋있어서 집에 사 왔던 갈색 지구본을 떠올렸다. 딱 아빠와 닮았다며 엄마가 기함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것까지 말했던가?

“나가 군은 최강의 에스퍼니까, 지구로 해봤는데 어때요? 사실 입맛은 알아도 이런 부분은 힘들어서-”

아, 그건 아니구나. 하마터면 굉장히 쪽팔릴 뻔했던 나가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화이트데이 때 꼭 보답할게요.”

“에이,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잘 가요. 오늘도 힘내고!

짧은 만남 이후, 나가는 타냐의 배웅을 받으며 상담실 문을 나섰다. 상담실의 공간이 협소해 밖에서 기다리던 사사와 혜나가 나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나는 나가를 보자마자 유리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빠는 지구 모양이네! 무슨 의미지?”

“내가 최강의 에스퍼니까 골라봤다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영동녀그로 머그면 지구들 망대로 주무드는 거 가트니까···?”

“어···.”

오. 사사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가와 혜나는 납득했다.

“언니는 그런 의미 중요시하니까 진짜 그럴지도 몰라.”

“근데 난 그럴 생각 없는데.”

어쨌든 오빠 그런 캐릭터잖아. 뭐?!

“거기서 뭐 하냐, 농땡이?”

“히익, 서장님!”

그렇게 헛소리를 하며 놀고 있던 것도 잠시, 세 사람은 다나에게 걸려서 귀가 잡아당겨지다시피 하며 서장실로 끌려가야 했다.

어쨌든 즐거운 발렌타인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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