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4.1 그는 히어로를 사랑한다 (上)

행복만 남기를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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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메모하지 말고 듣기만 해주세요.”

나이프의 레이디, 세월이 죽었다.

“우선 최근 나이프의 이동 경로, 거처… 많이 흐려져 있지만, 마지막으로 머무른 장소가 어딘지는 알아냈습니다. 그쪽은 세쌍둥이가 조사 중이고요.”

그리고 사이코메트러인 마고가 그 시체를 통해 알아낸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현장에, 타냐는 와있었다. 일개 상담사인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를 몰라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게 필요한 정보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기꺼이 제공해야겠지.

타냐는 고작 그런 애매한 생각으로 나가와 사사 사이에 앉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완벽이라는 보석을 입수했습니다.”

“…!”

“그럼 여기서 타냐 양의 증언을 듣도록 할게요. 타냐 양?”

“네, 네에….”

타냐는 그 당시 몸을 지지는 고통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 몸이 말끔해져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호가 추가적으로 치료했다고는 하지만, 그땐 이미 어느 정도 회복해 심각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정과 나가가 대화했던 그 내용…. 영정이 백모래에게 넘기려고 했던 바로 그 ‘완벽’. 그래서 타냐는 어떤 사실을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이미 보고하기도 한 사실이니 더욱 거리낄 게 없었다.

“그, 마고 씨, 일단 완벽이 정확히 어떤 건지 설명부터 해주시겠어요…?”

“예. 쉽게 말해 특기의 저장 매체로, 이걸 쥐면 특기자가 아니어도 특기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럼 확실히 설명돼요, 제가 나이프에 끌려갔던 그때, 그들이 쫓고 있던 사람이 완벽을 제공했을 거예요.”

“그건 어떻게 확신하지?”

다나의 날카로운 질문이 본인의 의문이라기보다는,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한 질문으로 보였다. 타냐는 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 안에 있던 완벽을 꺼내 들었다.

“그때, 전 죽음에 준하는 상처를 입어 땅에 파묻히고도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정신을 잃었던 와중, 그가 저에게 이 보석을 주는 감각을 느꼈었죠. ‘이걸로 보답은 했다’라며….”

“그리고 영정 님께 발견되어 치료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그의 말로는, 제가 죽을 정도로 상태가 심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아마 이 완벽의 힘이었겠죠. 아주 미약하긴 하지만 회복의 힘, 정도로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타냐가 꺼내 든 완벽을 쳐다보는 시선이 뜨거웠다. 특히 헤이즈가 그랬지만…. 어쨌든 모두가 타냐의 증언을 납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나이프에 납치당한 사람의 외관을 기억하고 있나?”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특이한 푸른 피부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어요. 뿔도 있었구요.”

“소금보라가 확실하네요. 뀽, 도움 되는 게 없어.”

귀능은 마침내 결론이 나왔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납치였다지만 스푼을 두고 나이프에게 완벽을 넘길 정도면 그렇게 친하진 않은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지? 타냐는 습관적으로 의문을 떠올렸으나 입을 다물었다. 일단 이 자리, 이 맥락에서 할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대신, 웃어넘겼다.

“아하하…. 들어가 봐도 될까요?”

“그래.”

사실 그때의 기억은 공포로 남아있다.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몇 번이고 말할 자신이 남아있지만, 아니, 도움이 된다면 오히려 다행이지만 조금 힘들다. 그래도 이럴 때면 그때 타냐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덧없는 짓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날의 회의는 늦도록 계속되었다.


“랩터 씨?”

“타냐쌤~ 좋은 저녁이야! 식사하고 오는 길?”

“네. 랩터 씨도요?”

타냐는 저녁 악수회가 끝난 뒤, 식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건 체질이 사라진 게 이렇게 좋았다. 평범하게 나가서 저녁 식사를 하거나 산책도 가능하고, 식사 후 돌아오며 한가로운 대화도 나눌 수 있지 않은가. 오늘은 다른 업무가 있어 간부의 감시역을 데리고 따로 먹고 오긴 했지만, 중간에 이렇게 랩터를 만났으니 기쁨이 이전의 감정을 상쇄할 만했다.

“어, 혜나?”

“타냐 언니! 랩터 언니! 스텔 오빠도 있다!”

돌아오는 길이던 나가네 팀을 본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근신 중이라던 나가는 또 산간 지역에서 화재를 진압했다고 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하다며 타냐와 랩터는 아낌없이 나가의 칭찬을 했다. 나가는 그것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타냐 역시 궁금해하던 점에 대해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헤이즈 선배가 없네요.”

“헤이즈? 걔 앓아누웠어.”

“…?”

“걔가 이번에 양보한 증거품인 완벽의 금전적 가치를 들었거든.”

…그랬구나. 타냐는 별생각 없이 증거품으로 제출했다가 돌려받은 완벽을 떠올렸다. 다나와 귀능이 말린 이유가 있다 싶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는 증거품이라면 제출해야 하지 않나? 게다가 나이프의 소지품이었고. -사실 그 정도 돈이라면 타냐 기준에선 가치에 비해 크게 아깝지도 않았다. 역시 헤이즈 씨는 만만치 않은 돈 귀신이구나….

보통 사람도 그 정도의 돈을 날려 먹었다면 배가 엔간히 아픈 게 아니었을 테지만, 일단 타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비행팀 오토바이 절도범 잡다가 과잉 대응으로 근신 받았다면서? 매일 어딜 갔다가 이렇게 늦게 와?”

“정확히는 저만…. 은퇴하신 선배님께 초능력 훈련받아요.”

“그럼 그동안 월급은?”

“안 나오지 않을까요? 제가 배우고 있는 건데.”

“나가 군, 인턴도 월급은 받아요. 서장님께 여쭤보는 건 어때요?”

-꺄악!! 소매치기야!

“음… 보통 회사도 학원비 안 주지 않나?”

-억?!

“헤이즈였으면 이미 펄펄 뛰었….”

쿠웅-

타냐는 평범한 대화가 진행되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매치기범을 잡는 나가의 모습을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스푼에 들어왔을 때 사람을 다치게 할까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눈에 훤한데, 이제는 태연하게 염동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너 혹시 평소에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범죄 현장 잡고 그래?”

“네.”

“휴일에도?”

“네? 네.”

“…그거 다 보고 하시죠?”

“아니요? 그냥….”

“그건 안 되죠! 나가 군, 그런 수당은 꼭 받아야 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나가는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이런 현장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라면 벌써 보답을 받고 넘어갈 일을 별것 아니라며 생각하고 넘어가는 성향이 있었다.

이렇게 100원 500원씩 빌려주다가 500만 원 뜯기는 건데…! 타냐는 이걸 어떻게든 설명해 주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근데 확실히 초능력은 눈에 안 보이는 점이 좋네. 누가 쓴 건지 표가 안 나잖아?”

저런 거 그대로 보여주면 온갖 또라이들이 들러붙을걸.

그 말에, 설명하려던 타냐의 손이 멈췄다. 생각나는 면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스스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은 타냐는 혜나와 사사가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을 애매하게 웃어넘겼다.

“그래요. 나가 군. 들러붙으면 꼭 얘기해요. 알았죠?”

괜찮아, 이상한 생각하지 마. 어쨌든 그들에게는 들키면 안 돼.

그렇게 혼자 거듭 생각하면서.


“좋은 주말이에요, 랩터 씨!”

“아? 타냐쌤이네. 오늘도 출근? 아주 고생이야~”

“하하, 오늘은 언럭키 씨 상담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이제 끝났어요. 랩터 씨는 무슨 일이에요?”

다시 돌아온 주말, 타냐는 여전히 새벽같이 출근해서 일하고 있었다. 요즘은 가면 갈수록 일이 늘었다. 스푼 사원들의 상담이 줄면 뭐 하는가, 다른 업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데. 상담사가 아닌, 히어로 타냐로서, 그리고 속으로 다른 작당을 하면서 일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던 타냐는 거의 울듯이 웃으며 출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타 기관에서 도움 요청이 와서 방금까지 있다가 왔었지…. 그래서 타냐는 해쓱한 얼굴로 랩터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 사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나가가 없어졌대서.”

헤이즈가 비과학적으로 수사하고 있어. 네?

나가가 사라졌다는 말부터 비과학적으로 수사하고 있다는 말까지, 이해되는 곳이 한구석도 없는 말에 타냐가 되물었다. 하지만 랩터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우리랑 같이 갈래?”

“그럼 좋죠!”

결국, 설명이 필요했던 타냐는 결국 랩터의 파티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 짧은 파티 신청으로 구성된 인원은 헤이즈와 랩터, 스텔, 그리고 상담 담당의 타냐와 힐러 일호였다. 심신으로 아주 든든하고도 낯선 조합이었다.

“어? 뭐야?!”

“우와, 일호 씨도 오세요? 든든하네요.”

“타냐 씨야말로….”

···대충 이런 혼란 속에 차는 출발했고, 도착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에서 내렸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을 정도로. 타냐는 드물게 한발 먼저 와 있는 경찰차를 보며 왜인지 새삼스러워 머리칼을 꼬았다.


-나가는 어떤 미친놈에게 납치되어 인질을 통한 거래를 권유받았지만, 그 자리를 깨부수고 나왔다고 한다. 타냐는 그 과정에서 다친 사람이 나가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속이 상했다. 물론 모두 다쳤어야 했다는 건 아니지만, ‘하필 나가 군은 다쳤구나’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가는 그렇게 해야 하는 히어로였다. 타냐는 일호에게 초코파이를 받아 드는 나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타냐 선배,”

“나가 군, 무서웠죠? 저희가 빨리 찾는다고 찾았는데, 너무 늦었나 봐요.”

“아뇨, 이제 괜찮아요….”

타냐는 담담하게 초코파이를 씹는 나가의 등을 이어서 두드려주었다. 그 미친놈은 수사를 받고 곧 이송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마주칠 일이 없기를,

“아, 그리고 선생님.”

바랄,

“다음에 또 봐요.”

바랄 뿐이었는데….

“기대해요~ 우리 꼭 다시 만날 거예요. 부모님 전화번호도 어디 사는지도 다 알았는걸-”

짜악-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악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인물이 미친놈의 뺨을 올려붙였기 때문이다. 굳게 다문 입,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은- 타냐 본인이었다. 타냐는 손이 화끈화끈하게 달아오른 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로 똑똑히 말했다.

“다시 나와서 헛짓거리하기만 해봐요. 그땐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미치게 해줄 테니까요.”

나가는 당황했다. 스푼에서 최고의 인격자라고 손에 꼽힐 만한 인간이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히어로가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 참….”

퍽-

“말 드럽게 많네.”

뭐라 더 중얼거리려던 범죄자는, 스텔이 다친 다리를 걷어차 넘어지는 것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범죄자가 이송되고 나서야, 타냐는 잔뜩 후회하는 기색으로 손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다.

“~어떡해, 저 화풀이해버린 것 같은데 어쩌죠?”

“응응, 그랬어? ‘헛짓거리하기만 해봐요~’ 했지?”

“흐그으흑….”

“인상 깊었습니다.”

한 구석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가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화풀이라니, 그럴 일이 있었나? 아니, 그마저도 미안해서 후회하는 게 아니라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후회한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타냐 선배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변했나? 그런가 싶기도 하고…. 영 긴가민가하다. 아니면 이번에 만난 범죄자가 특이한 경우일지도 모른다. 나가는 회상하며 상황을 더듬어 보았다.


이 일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면,

요즈음 나가는 ‘황로’라는 히어로 선배에게서 염동력을 조절하는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는 나가와 비슷하지만 더 약한 위력의 염동력을 특기로 갖고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조절하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따라서 종이 위의 여러 검은 점을 타격해 힘을 분산시킨다든지, 종이 두 장을 겹쳐 하나만을 뚫는 식으로 위력을 조절하는 등 오랜만에 훈련다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선배의 조수라고 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라라고 했던가.

한라는 어릴 적 범죄자들에게 인질로 사로잡힌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런 한라를 구하려던 선배는….

‘지금 여기서, 한쪽 팔을 자르면 인질을 돌려줄게.’

‘꼭 선생 팔을 자르라는 건 아니야. 인질 팔도 괜찮아. 다리도 상관없고.’

그때 한쪽 팔을 잃은 선배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돈도 받지 않으며 조수로 일하고 있다는 한라의 사정은, 꽤나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나가와는 크게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면, 좀 더 의심해볼 걸 그랬다. 나가는 징징 울리는 두통을 애써 무시하며, 기절하기 직전 마주쳤던 한라의 돌아버린 눈빛을 기억해냈다. 여기가 어디지? 일단 특기를, 아니 투시-

주륵, 뚝,

“…?!”

특기가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귓가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저번의 오르카를 만났을 때, 자신의 공격에 역풍을 맞은 것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느낌. 딱히 공격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타격이 온 거고, 왜 특기는 먹히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해 뭐라도 부여잡기 위해 한 손을 들었는데-

절걱-

“아야!”

? 자신이 누워있던 다 헐은 소파, 그리고 손에 끼워져 있는 못 보던 반지들에 집중하던 나가는 이 너덜한 공간에 자신 외의 타인이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심지어 그는 나가의 손목과 수갑으로 이어져 있었다. 나가가 무심코 수갑이 걸린 손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팔이 함께 끌어올려져서 신음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목소리를 보니 한라는 아니고, 어린 남자애?

“…넌?”

안면이 있는 아이였다. 나가가 황로를 찾아왔던 첫날, 다리를 다쳤다며 업혀 오던 바로 그 아이. 한라가 자신 탓에 다친 아이라며 데려왔었고, 황로가 치료까지 도와준 바로 그 아이였다.

“한라 형이….”

“아, 일어났어요?”

그때, 뭐라 상황을 공유할 틈도 없이 한라가 나와 끼어들었다. 자신이 잠들기 직전에 봤던 한라의 돌아버린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는 나가는 아이와 한라 사이를 가로막으며 방어적으로 물었다.

“뭐예요?”

“침착하네요. 얼굴 보면 달려들 줄 알았는데.”

“왜 그런 건지 듣고 화내려고 참는 거예요.”

“아~”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나가는 한라의 눈빛이 선득한 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전에 랩터 선배가 말했던 ‘또라이’의 눈빛이었다.

아, 저번에 서장님이 황로 선배를 뵈러 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다나는 한라를 보며 뭔가 수상한 새끼라고 했던 전적이 있었는데, 가히 야생의 감이라 할만했다. 나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투시를 쓸 수 없는 지금, 평소처럼 눈을 감은 채로 상황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선의란… 뭘까요?”

“어떻게 사람은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걸까요?”

아, 미친 소리.

나가는 결국 죽은 눈을 하고야 말았다. -세상엔 미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선생님이 절 구해주셨다고 했죠? 팔이 잘리는 건 단순히 죽을 만큼 아프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앞으로의 인생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일상생활의 모든 게 불편하고, 밖에 나가면 싫어도 주목받고,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느끼는 위화감…. 상상만 해도 비참하죠.”

“하지만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저를 탓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제가 신경 쓸까 봐 그 불편함을 늘 감추려 하셨죠. 완전 멋있죠?”

나가는 그 미친 소리를 무시하려 노력했다. 굳이 저런 구구절절한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는 건데…. 이 작은 아이가 인질처럼 붙잡혀 있어서 신경 쓰인다. 나가는 먼저 아이와 자신이 이어져 있는 수갑을 풀어내기로 했다.

“처음 왔을 때부터 눈여겨봤어요.”

“남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 왔구나…. 벽을 뚫고, 하늘을 날고, 강물을 끌어올리는 히어로가.”

절걱, 절걱절걱절그럭-

뚝, 투둑,

“-손으로 빼려고 해봤자 소용없어요. 저같이 평범한 놈한테야 그냥 액세서리지만 특기자한텐 치명적인 특기 차단기죠.”

“히, 익…. 형아, 나 집에 갈래요. 이거 재미없어요….”

손목에 수갑을 찬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한라는 그를 쌈박하게 무시했다. 한편으로 수갑과 씨름하고 있던 나가는 숨이 가빠왔다. 손아귀 힘으로 수갑을 빼기 위해 피가 나도록 절그럭댔지만 실패. 언젠가 들었던 것처럼 힘을 최대로 방출해서 특기 차단 장치를 깨어버리려고 해도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파편으로 어린아이가 다칠 것이 염려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 나가는 결국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알았어요. 내 의견이 궁금한가 본데 같이 토론해줄게요. 근데 얘는 뭐예요? 아무 상관 없는 애 끌어들이지 말고 돌려보내요. 안 그러면 나도 아무것도 안 해요.”

“…모르는 척하시네. 아무 상관 없으니까 데려온 거죠.”

슥, 스릉,

“히익!”

“뭐 하는 짓이야!!”

나가는 한라가 난데없이 아이를 칼로 찌르려는 것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나가의 손에서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안 한다길래…. 너무 튕기지 마요. 나가 씨랑 아무 상관 없는 애들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그나마 스친 수준이긴 했지만… 날카로운 상처 아래로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은 어린아이에겐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는, 용케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낼 태세였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 떨어진 것도 처음이었고, 어린 인질을 달래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던 나가는 쩔쩔맸다. 본인이 생각해도 허술하고 신빙성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그냥….”

“아, 정말? 괜찮아요? 누구한테 괜찮은 거지?”

“그만해!”

그 와중에 한라라는 범죄자는 히죽이며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 손에는 피가 묻은 칼을 들고 웃고 있는 모습이, 여느 매체에나 나올 법한 사이코패스 같았다. 나가는 그런 생각을 제쳐두고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손등의 아릿한 고통이 정신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알죠? 꼭 애한테 뭘 하려는 건 아니에요. 나가 씨가 어느 쪽을 고르느냐에 따라 그 팔의 운명이 결정될 뿐이죠.”

“포기하면 선생님 한 분에 대한 제 존경심은 더욱 깊어질 거고, 당신이 팔을 희생하면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늘게 되는 거예요.”

나가는 범죄자의 협박으로 인질의 팔과 자신의 팔을 저울질해야 했던 황로 선배를 떠올렸다. 그때의 인질이었던 사람이 이젠 나가에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황로 선배님이 실망하실 거란 생각은 안 들고?”

“그렇네요. 근데 전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요. 절 싫어하시든 아니든 선생님은 존경스러운 인격자거든요.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선생님이 앞으로는 남을 돕지 않을지, 그래도 도울지… 어떤 선택을 하실지 무척 흥미롭네요.”

“그럼… 고르실래요?”

거기 있는, 당신과 별 상관도 없는 애의 팔을 자를지. 아니면 본인의 팔을 자를지.

-결국 나가는 아이를 보호한 채로 특기 차단기를 부수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고작 물품 몇 개로 막기에는 나가의 특기가 너무 강한 탓이다.

한라는 몇 년 전, 황로 선배가 팔을 자르도록 주도한 것도 자신이라는 것을 자백했다. 황로 선배가 가진 힘의 총량, 버릇, 성격…. 그 모든 것을 곁에서 관찰하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타냐 선배가 싫어할 만도 하다.

“나가 군, 손잡아줄까요?”

타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가가 네,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손을 한 번 잡고, 물러난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코코아는 덤이었다. 어딜 보나 피해자 취급. 그러고 보면 타냐는 히어로를 히어로라기보단 하나의 연약한 인간이자 내담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런 걸까? 나가는 알 수 없었다.

뭐, 아무래도 괜찮겠지. 나가는 한라가 남긴 찜찜한 말을 애써 무시하며 손을 덥혔다.


손이 나가던 그때, 타냐의 머리에 스쳤던 생각은,

“다시 나와서 헛짓거리하기만 해봐요. 그땐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미치게 해줄 테니까요.”

“…히어로가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 참….”

아, 저질렀다.

퍽-

“말 드럽게 많네.”

범죄자가 연행될 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는 것엔 성공했지만, 차가 떠나고 나서는 무너져내렸다. 마른세수를 하며 손에 얼굴을 파묻은 타냐는 웅얼거리다시피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떡해, 저 화풀이해버린 것 같은데 어쩌죠?”

“응응, 그랬어? ‘헛짓거리하기만 해봐요~’ 했지?”

“흐그으흑….”

“인상 깊었습니다.”

찬 손으로 홧홧해진 얼굴을 식히며, 타냐는 요즘 들어 스트레스받을 일이 무엇이 있었는지를 헤아려보았다. 상담 업무, 좋아하는 일이고. 각 기관과의 협업, 좀 피곤하긴 해도 목표와 연관된 일이니 괜찮고.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잔뜩 늙은 간부의 얼굴들과, 그사이에 서 있는 타냐 자신…. 사실 그들의 뺨을 이렇게 올려붙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타냐는 부끄러운지 다시 얼굴이 발개졌다.

그런 화풀이라면 좀 미안할지도… 아냐,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지다가도,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린 타냐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건 확실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범죄자에게 미안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전의 타냐라면 입을 떡 벌릴지도 모르는 변화지만, 어쨌든 그랬다. 왜냐하면-

감히 내 소중한 내담자에게, 히어로를 시험한다는 같잖은 이유로 정신적인 압박을 가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

 


 

“-언니, 영화 보자!”

“혜나? 무슨 영화?”

“몰라!”

“?”

과거의 하늘이 맑은 어느 날. 타냐는 갑자기 혜나의 손에 이끌려 휴게실로 향했다. 대충 서장실에서 삥뜯어온 빔프로젝터와 노트북, 텅 빈 벽을 활용할 계획인 것 같았다. 그 자리엔 타냐 외에도 사원들이 몇몇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랩터를 포함한 출장조와 혜나가 속한 비행조. 다들 월급 루팡에 진심이었다.

“타냐도 왔네~ 안녕~”

“안녕하세요, 랩터 씨.”

“타냐 선배, 안녕하세요.”

“나가 군도요. 사사 씨도 좋은 오후예요.”

물론 그 외에도 의료실의 직원 몇몇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다들?”

“좀 봐줘요, 타냐 쌤.”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왔지~!”

타냐는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그 후 의료실의 사원들이 타냐를 애타게 부르긴 했지만, 타냐는 어린 혜나의 조름에 비행조 곁에 앉기로 했다. 하지만 내내 탐을 내고 있던 랩터가 결국 혜나를 무릎 위로 채갔고, 자리에는 나가와 사사, 그리고 타냐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장르가 뭐예요?”

“히어로물이라는데요?”

“…히어로 기관에서 굳이 히어로물을?”

“스테리 혀로 조아하자나.”

“아….”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기를 몇 분, 휴게실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대강 검색해본 줄거리는 간단했다. 갓 힘을 각성한 히어로가 고난과 역경을 거쳐서 진정한 히어로로 성장한다!…라는 내용. 제일 중요한 빌런은 꽤나 힘을 준 배우를 사용했고, 작품 내내 주인공과 팽팽한 힘겨루기를 했다.

하지만 스푼의 히어로들이 집중하는 부분은 격투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와, 저게 다 얼마냐….”

“우리가 저랬으면 월급이 남아나질 않았겠다, 그치?”

“빌런이 왜 히어로의 가족을 노리지? 오히려 더 각성할 계기를 준 사례가 있어서 이제 안 그런다고 들었는데.”

“그거 우리 언니야.”

“오, 서장님….”

히어로들이 전혀 히어로답지 않은 코멘트를 남기거나 말거나, 영화는 진행되었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히어로는 악역의 테러에 선택의 위기에 처한다. 당장 구하러 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연인, 그리고 당장 앞에는 구하지 않으면 터져 죽어 나갈 유치원생 정도 나이의 아이들….

‘자, 네가 진정한 히어로라는 걸 증명해 봐라.’

‘어서 애들을 구해야지! 당신이 그러고도 히어로야?!’

“선배? 어디 가세요?”

“네, 저 볼 일이 생겨서…. 혜나한테 좀 전해주세요.”

“앗, 넵.”

철컥-

타냐는 무사히 휴게실 문을 닫고 나왔다. 대부분의 히어로들이 업무차 현장으로 나가 있는 스푼의 복도는 적막했다. 타냐는 양옆을 잠시 돌아본 뒤, 그 자리에 잠시 쭈그려 앉았다.

“-이입돼서 못 보겠어….”

이래서 히어로물을 잘 안 보는데. 입이 댓 발 튀어나온 타냐가 비죽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다시 일어나며 핸드폰을 들었다. 가끔 들어가곤 하는 뉴스, 사회란을 들어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나는 바람에, 미처 히어로가 막지 못한 각종 사건사고들이 늘어서 있었다.

분명 스푼에 대해 제대로 잘 알고 있는 시민은 별로 없지만, 가끔 살펴보면 이런 댓글이 달린다.

[히어로란 새끼들은 이때 뭐함;; 월급 루팡들ㅉㅉ]

[사복경찰X 폭력경찰O 히어로 직함 떼야 하는 거 아니냐]

정작 히어로인 타냐로서는 쓴 미소가 나오는 말이다. 상담실에 도착한 타냐는 차를 끓일 힘도 없어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소모된 정신력을 채우려면 잠시 이대로 있어야 했다.

대체 왜 히어로에게 환상을 갖는 걸까?

왜 히어로는 완벽해야 하는 걸까?

…왜 히어로는 더 큰 고난과 역경을 거쳐야 하는 걸까?

히어로는 좀 큰 힘을 갖고 있을 뿐인, 단순한 인간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약간 많다는 것 외에는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도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사람. 일단 타냐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에 상대하는 내담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각 히어로들의 인간적인 면모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히어로들도 결국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들을 히어로로 만드는 것은 그 작디작은 의지 하나.

하지만 시민과 악당은 그렇지 않다. 히어로가 무슨 대단한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말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어떤 사명을 지고 태어났다고,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거라고….

드문 경우, 모르는 사람을 구하고 보니 범죄자일 때가 있다. 그럼 네가 구한 사람이 악당이 되었으니, 혹은 악당을 살렸으니 네가 책임지라는 식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백모래를 구해줬을 뿐인데 악당을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는 랩터 씨, 힘내세요.

달칵,

드디어 몸을 일으킬 힘이 생긴 타냐는 생수병의 물을 전기 포트에 넣어 전원을 올렸다. 이제 물이 끓으면 티백을 우리면 된다. 좋아, 기분 전환이 되어가고 있다.

타냐는 고작 얼마 전 납치됐을 적에 웃기지도 않는 양자택일을 떠올렸다. 그가 이기면 돌아갈 수 있는 내기. 납치범은 타냐가 한 명을 구하고 50명을 포기하는 것에 걸었으며, 억지로 한 명을 죽이고 50명을 구하는 것에 걸도록 강요했다. 그것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려면, 타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히어로의 모습에 흔들리기 마련이니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50명의 목숨을 위해 1명의 목숨을 저버렸다는 것에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왜? 히어로에게 완전무결한 모습을 바라니까.

타냐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타협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냥 막막했다.

이번엔 나를 향했으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시련, 그런 시선이 내담자를 향한다면….

정말 싫을 것 같아.

 


 

-아마 이래서인가.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야 겨우 자신이 행동을 이해한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다, 나가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많이 놀라고 충격받았을 테니 케어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가 군, 손잡아줄까요?”

“네….”

어째선지 멍하게 대답하는 나가를 보며, 타냐는 가볍게 손을 쥐었다 놓았다.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제법 평온해졌을 것이다. 타냐는 이번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인질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관련인인 황로 선배라는 분도 좀 찾아보고…. 타냐는 이 자리에 오기를 잘한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주말의 저녁이 그렇게 저물었다.


“지쳤다···.”

처음으로 언럭키와 동행한 타냐는 언럭키의 날뛰는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유례없는 정신력을 소모해야 했다. 특기 자체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안정시켰다가 되돌리고, 또 안정시키면 몇 분 뒤 되돌리는 과정을 언럭키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감지하고 특기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력을 많이 깎아 먹었다.

내가 진짜 특기 아이템 개선하고 만다, 진짜….

게다가 감시인이 붙어있는 자리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증거 확보는 성공했으니까 그나마 나은가. 그렇게 자기 위안을 하고 있는 타냐는 오늘 아침에 나서서 해가 질 무렵에나 터덜터덜 스푼으로 돌아오는 참이었다.

“어, 나가 군?”

“타냐 선배?”

그때, 건물 밖의 테이블에 계란을 잔뜩 쌓아 둔 나가를 발견했다. 웬일로 혜나와 사사 없이 홀로 앉아있는 나가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런 나가의 미간을 장난스레 문질러 펴준 타냐는 언제나처럼 안부를 물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닥, 인 것 같아요.”

“음?”

“일호 형이, 담당 힐러로 이호 형을 붙여줘서….”

“아.”

그럼 충분히 찝찝할 만하다. 바이고 사막에서 만났으니 구해주긴 했다만, 스푼에서 겨우 잡은 백모래를 탈출시킨 인물이 아닌가? 심지어 지하철역이 터졌던 그날, 나가에게 자해공갈 협박을 해서 스푼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타냐라도 나가 입장이라면 좀 껄끄러웠을 것이다.

“찝찝할 만하네요.”

“그렇죠?!”

“일호 씨도 참 무심하시지…. 많이 당황스러웠겠어요.”

“그러니까요오….”

“힘내요, 나가 군. 손이라도 잡아줄까요? 지금 표정, 굉장히 안 좋아요.”

끄덕, 타냐는 바로 나가의 손을 잡아 최대한 세심하게 감정을 골랐다. 이번엔 집중력을 올려주도록 도와주었다. 계란이 괜히 있을 리는 없고, 특기의 연습을 위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타냐는 바로 물어보기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뭐 하고 있었어요? 특기 연습?”

“음, 계란 두 개와 종이를 두고… 두 번째 계란은 안 깨고 첫 번째 계란과 종이만 뚫을 수 있게 연습하는 중인데, 아직 한 번도 성공 못 했어요.”

“우와…. 어려워 보이네요. 원래 특기의 경로를 바로 바꾸는 건 힘들지 않나요? 구경해도 될까요?”

“별로 구경할 건 아닌데…. 괜찮아요.”

나가는 부끄러운 듯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지만, 타냐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공중에 들어 올려진 종이와 계란 두 개는 일렬로 나란히 나열되었다. 타냐는 그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고- 세 물체는 정확히 다 뚫려버리고 말았다. 그 망연자실한 표정이 웃겨서, 타냐는 쿡쿡 웃고 말았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웃지 마세요.”

“아뇨, 혹시 참견 좀 해도 될까요?”

“네? 네.”

“느리게 할 수는 없나요?”

특기가 나가는 속도를 조절하는 거죠. 바늘만 한 힘으로 살살 누르듯이 하면 좀… 모양은 어설퍼도 될 것 같은데.

“!”

생각해본 적 없다는 얼굴이었다. 다행히 불가능하진 않은가 보다. 타냐는 느긋하게 턱을 괴며 눈을 접었다. 나가는 그사이에 온갖 시도를 하는 것 같았다. 폐지를 들고 아주 느리게 구멍을 뚫는 연습부터, 계란을 느리게, 아주 살살 뚫어서 내용물이 흘러내리지 않고 구멍만 뚫린 계란을 만들기까지. 타냐는 그런 나가의 옆에서 지켜보며 박수를 쳐주었다.

결국 나가는 첫 번째 계란과 맨 마지막의 종이만 꿰뚫는 시도에 성공했다.

“아자!!”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타냐 선배. 선배 아니었으면 계란을 백 개는 더 썼을 거예요.”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죠. 고생했어요, 나가 군. 이걸로 연습은 끝난 건가요?”

“네? 네. 이제 다시 연락드려봐야죠.”

부우우웅-

“앞차 멈추세요! 앞차 멈춰요!”

시끄러운 마찰음이 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웬 차가 경찰차를 앞서 도망치고 있었다. 음, 연습 도중에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타냐는 그 추격전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가 군이라면 바로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아니, 어른이 되어서 고등학생에게 기대선 안 되는데….

그때, 나가가 날아올랐다.

“뭐야? 이거 왜….”

타냐는 순간 나가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느끼기로는, 명백히 눈치를 보는 거 같았다. 그리고 도주차량은-

-날았다.

아주 낮은 고도에 위치한 자동차가 공중에서 헛돌았다. 그 사이에 경찰은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 그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가는 자동차를 내려놓았다. 아주 평화적인 해결이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아, 예….”

그렇게 꾸벅거리던 나가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자리로 되돌아왔다. 타냐는 그런 나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네. 그래서 나가 군이 마음을 잡고자 하면 저는, 막을 수 없어요. 그건 온전히 나가 군의 결정이니까요. 그래도 지름길을 쓰고자 할 때, 한 번만이라도 저를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지름길을 썼다면- 저에게 오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나가는 그때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행동을 봐서는, 평소에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나가가 한없이 기특해진 타냐는 자리에 앉은 나가에게 다가가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착하다, 착하다, 말하며 토닥이자 나가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타냐 선배, 이런 건 좀…. 제 나이가 몇인데.”

“저한테는 여전히 어린 남학생이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

나가는 작게 툴툴거렸다. 그것이 마냥 귀여워서, 타냐는 밝게 웃었다.

피로가 다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나가도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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