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on Tree
제이드 리치 드림
“좋아요, 다 됐습니다.”
제이드는 들고 있던 삽을 근처에 내려두고 손을 털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늦은 오후. 고물 기숙사 뒤쪽에 나란히 서 있는 제이드와 아이렌의 앞에는 작은 나무가 심겨있다. 막 옮겨심은 탓에 젖은 흙과 마른 흙이 뒤엉겨있는 모양새는 썩 보기 좋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은은한 조명이라도 켜놓은 듯 밝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선배. 덕분에 빨리 끝났어요.”
“뭘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일 뿐입니다.”
겸손하게 눈인사 한 그는 제가 심어준 나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 잎이 잔뜩 달려있을 뿐, 열매는 맺혀있지 않은 젊은 나무는 언뜻 보는 걸로는 종류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이게 무슨 나무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식물에 박식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아이렌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몬을 기를 거라고 하시다니. 꽃이나 허브도 아니고 과일나무를 심고자 한 이유가 있나요?”
보통 식물을 처음 기르게 된다면, 나무보다는 풀이 선호되기 마련이다. 그쪽이 관리도 쉽고 크기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굳이 이것저것 관리가 필요한 과수를 심다니.
아이렌은 즉흥적인 면이 있긴 하여도 충동에 따라 무작정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필시 이유가 있을 거다. 제이드는 그리 생각했고, 그의 예측은 반 정도는 들어맞았다.
“그냥. 우연히 마음에 드는 나무를 봐서요. 이 레몬 품종은 다 자라도 크기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즉, 작은 나무를 심었을 뿐인데 과실은 금방 맛볼 수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까? 효율적이군요.”
“게다가 레몬 나무는 기르기도 쉬운 편이래요. 벌레가 자주 꼬이긴 하지만, 농약을 쳐주면 좀 낫대요.”
선택은 충동적이었지만, 결정까지는 이것저것 고려했다는 건가. 호기심이 해결된 제이드는 입을 닫았다.
목장갑을 벗고 가죽장갑으로 바꿔 낀 그가 옷을 터는 사이. 주변을 정리하던 아이렌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살던 세계의 어느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삶이 당신에게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 인생에 고난이 와도 그걸 전화위복으로 삼으라는 말이죠.”
“과연, 레몬을 버릴 순 없겠지만 그걸 달게 만드는 건 본인 몫이란 거군요.”
“그렇죠.”
많은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란 얼마나 귀한가.
아이렌은 금방 제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제이드의 옆에 찰싹 붙어, 듣기만 해도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나중에 레몬이 열리면, 그걸로 선배한테 뭔가 만들어 줄게요. 레몬청이나 레몬 타르트 같은 거요. 아니면 그냥 드릴 수도 있고요.”
“이런. 제가 받아도 되나요?”
“물론이죠. 나무 심는 것도 도와주셨는데, 당연히 드려야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제가 직접 요구한 거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었다면 다른 걸로 보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누군가는 고작 레몬 하나는 너무 적은 대가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제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설령 파는 것만큼 품질이 좋지 않을지도 몰라도, 아이렌의 손을 탄 식물이 맺은 과일이지 않은가. 그걸 다른 이들도 아닌 제게만 준다면, 그것만큼 큰 보상은 없을 것이다. 이 점만큼은 다른 이들도 공감하리라. 적어도, 이 학교에 재학 중인 사람들…… 특히 아이렌과 친밀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제일 처음 열린 걸로 드릴 테니까, 기대하세요.”
“예. 잘 자라면 좋겠군요.”
아직은 조금 먼 미래를 말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 기대감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
“제이드, 어디 가?”
이제 막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할 이른 새벽.
귀가 간지럽도록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플로이드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제이드에게 물었다.
벗어놓은 잠옷을 정리하던 제이드는 어느새 깨어난 형제를 보곤,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깨워버렸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만 괜찮고. 다시 자면 되니까. 그래서, 어디 가?”
“잠깐 식물을 돌보러 갑니다.”
“이런 새벽에?”
“원래 농부는 바빠야 하는 법이랍니다.”
아니, 언제부터 농사를 생업으로 삼았는지 모르겠는데.
비유법인 걸 알지만 그런 대답이 절로 튀어나올 뻔했던 플로이드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걸까.’ 형제의 취미를 이해할 수 없는 플로이드는 신기한 광경이라도 보듯 나갈 채비를 하는 제이드를 응시했다. 자신 또한 몸을 움직이는 건 좋아하지만 그건 운동이나 놀이를 할 때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 무언가를 돌보고 기르느라 바쁜 건 사양인데.
애초에, 무언가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기새우도 요즘 뭔가 기르는 거 같던데.”
얼핏 들었을 뿐이지만 나무를 심었다고 했던가. 큰 관심이 없어 직접 본 적은 없을 뿐, 플로이드는 아이렌이 하는 이야기는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항상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는 제 아기새우의 말은 들어두어도 손해가 되는 일이 별로 없었으니, 저절로 귀가 열린다고 할까.
드물게 남의 일에 관심을 보이는 플로이드였지만, 제이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기숙사 뒤쪽에 레몬을 심으셨지요.”
“알고 있네?”
“예, 제가 함께 심었으니까요.”
‘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추가 정보에 반사적으로 대꾸한 플로이드가, 이내 얄궂게 웃었다.
많은 정보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제이드가 돌보러 가는 식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직관적으로 진실을 눈치챈 플로이드는 졸음이 가신 얼굴로 제이드를 추궁했다.
“설마 그거 관리하러 가는 거야?”
진실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말에,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던 제이드가 우뚝 멈춰 섰다.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었던 건지, 단정한 얼굴에 잠깐 난처함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검지를 입술 위에 얹어 조용히 해줄 걸 당부했다.
“아이렌 씨에겐 비밀입니다. 어차피 농약을 뿌려주거나 비료를 주는 게 다니까요.”
“그게 다라면 굳이 비밀로 할 이유가 있어? 어차피 같이 돌보는 거 아냐.”
“아주 작은 호의일 뿐이니 티 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뭐 잘못 먹었나.’ 플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건 티 내지 않는 게 손해이지 않나. 잘해준 건 드러내고 실수한 건 알아채지 못하도록 덮어두는 게 관계에 득이 되는데, 굳이 비밀로 하겠다니. 동화책에나 나오는 헌신적인 호위 기사 흉내라도 내고 싶은 것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에 고개를 젓던 그는, 이내 생각이 다른 쪽으로 튀어 버렸다.
“근데 레몬이라니, 맛있겠네. 레몬 케이크 먹고 싶다.”
플로이드는 본디 생각도 행동도 예측이 힘든 존재였다. 옛날부터 바로 옆에서 모든 걸 보고 겪었던 제이드는 그걸 잘 알았기에, 엉뚱한 소릴 하는 플로이드에게 핀잔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주었다.
“나중에 카페에서 하나 사 올까요?”
“그래 주면 고맙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죠.”
밖으로 나서는 제이드의 태도는 여유가 있었지만,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는 느긋하지 않았다.
대화 상대가 사라지자 다시 졸음이 몰려오는 플로이드는 눈을 감고 아까 전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나 본데.’
다른 누구도 아닌 제이드가, 무상으로 남 좋은 일을 몰래 해주는 건 이상하다. 단순히 호의로 좋아하는 이를 챙겨주고 싶어 그런 거라면, 그냥 티를 낼 테지, 비밀로 하는 이유가 없을 텐데.
하지만 이건, 저 혼자 생각해 본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형제의 의도를 파헤치는 걸 포기한 그는 다시 꿈나라로 가버렸다.
✻✻✻
제이드가 고물 기숙사에 도착했을 무렵엔 짙은 푸른색이었던 하늘에도 따뜻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잠든 이가 더 많은 이른 아침. 혹은 늦은 새벽.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건물 뒤로 향한 그는 레몬 나무 앞에 쪼그려 앉은 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런, 아이렌 씨. 일찍 일어나셨군요?”
물뿌리개를 들고 나무를 바라보던 아이렌은 다가오는 제이드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을 품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피곤함이 깃들어 있었다. 단순히 졸린 것과는 조금 다른 은은한 피로감. 그걸 눈치챈 제이드는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고 제 말을 정정하였다.
“혹시 안 주무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흐음, 뭔가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재미있는 만화가 있길래 정주행하다가 밤샌 거예요.”
“아하, 그러셨군요.”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일단 들어준 후 해결할까 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나.
생각보다 귀여운 이유에 소리 죽여 웃은 그의 시선이 나무가 아닌 아이렌 쪽으로 향했다. 나른한 표정, 잠옷 위에 대충 걸친 겉옷, 느린 숨결까지. 여러모로 느슨한 그 모습은, 자꾸만 그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아침부터 나무를 보러 온 거예요?”
얼마나 아무 말도 없이 아이렌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시선을 눈치챈 상대가 제이드를 바라본다.
그는 진짜로 여기 온 목적이나 방금까지 제 시선을 빼앗은 게 무엇인지 설명하려던 걸 관두고, 얼버무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눈이 떠진 김에 와봤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여기까지 오는 것도 번거로우실 텐데.”
“전혀 번거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식물원보다 여기가 더 가까운걸요.”
사실 거리가 멀다 했어도 여기 오는 게 번거롭다는 뜻은 아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실을 애써 삼킨 그는 자신을 바라보던 제비꽃색 눈동자가 다시 레몬 나무로 향하는 걸 바라보았다.
처음 심었을 때보다 키가 자라고 잎이 무성해진 레몬나무는 희미한 향이 풍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벌레가 안 꼬여서 다행이에요. 이 계절엔 병해충으로 고생한다던데.”
생각보다, 라. 제이드는 그 말에 곧장 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당연히 벌레가 안 꼬이겠지. 제가 이렇게 매일 새벽마다 나와서 관리해 주는데, 해충이 생기면 이상한 것 아니겠나. 그 어떤 것도 나무를 상하게 하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제 것이 되어야 할 레몬을 건들지 않도록. 농약도 뿌리고 가지도 다듬고 애먼 관심을 보이는 이들까지 쫓아냈는데. 잘 크지 않으면 대지의 저주라도 받은 거겠지.
다만, 아이렌이 정말로 진실을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제 마음을 떠보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오랫동안 대답을 미루던 그는 결국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아이렌 씨가 잘 돌봐주셔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선배가 더 잘 돌봐주신 거 같은데요?”
“그럼, 저희 둘 다 힘낸 걸로 하죠.”
누군가는 기껏 고생해놓고 왜 티를 내지 않느냐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제이드는 이런 걸로 유세를 떨 생각이 없었다. 아이렌이라면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하여 더 많은 노동하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설령 그것이, 자발적인 행동이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선택한 거였다. 이 나무가 잘 자라 알찬 과실을 맺도록 도우면서 아이렌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방법은, 이것뿐이니 말이다.
그런 제이드의 섬세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렌은 조금은 들뜬 표정으로 물뿌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육아하는 기분이네요.”
“실제 아이라면 이렇게 가만히 서 있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죠.”
“그건 그렇죠. 선배를 닮은 아이라면 호기심이 많을 것 같긴 해요. 엄청 귀엽겠죠.”
“저보다는 아이렌 씨를 닮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딸이라면 예외고요.”
“어라, 왜요?”
“글쎄요. 왜일까요?”
제이드는 눈썹을 까딱이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솔직히 제 여자라고 생각하니 매력적인 거지, 만약 아이렌 같은 딸이 있다면 골치가 아플 것이다. 제 마음에 들기만 하면 아무리 괴팍한 남자라도 다 불쌍하다고 거둬들일 것 같지 않나. 그리고 괜히 오지랖을 부려 손해라도 보고 오면 큰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을 닮는 게 낫다.
하지만, 그래. 생긴 건 아이렌을 닮아도 좋을 거 같다. 그러면 얼마나 귀여울까.
아직은 먼 미래의 일임에도 상상하자니 절로 흡족해진 제이드는 선뜻 아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아침 먹으러 가겠습니까?”
“예, 좋아요.”
마주 잡은 손에선 서늘한 흙내음이 느껴졌다. 제이드는 그 냉기가 좋아서, 하염없이 아이렌의 손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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