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락에 대하여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속의 공백을 조금씩 채워나가다 더 큰 죄책감에 잠기는 것 뿐이다.
+ 명일방주 스카디 더 커럽팅 하트 드림.
+ 카이룰라 아버 세계선의 보카디와 박사의 이야기.
+ 적폐 해석, OC 박사 주의.
+ 자살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 사람이 헤어질 결심을 그만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추천 BGM:
https://youtu.be/adOfY28Av-E?si=ATRG_4zmFWQbgTbO
0.
뭍으로, 뭍으로.
마음은 쉬이 하강한다.
1.
세상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 이래로, 남자는 목소리를 잘 내지 않게 되었다. 무뚝뚝했던 사냥꾼은 그런 그의 변화를 애석하게 여겼다.
에이드리언은 흐릿해져가는 기억을 되짚어보더라도, 그리 적막한 남자는 아니었다. 속에 품어둔 말을 꺼내는 데에 시간이 걸릴 지라도, 혹은 올바른 때를 고르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을 돌아볼 적이면 감정이 찰랑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중하게, 이름을 부르고는 했다. 스카디. 하고, 고작 세 음절을.
그 발음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은, 마땅히 사랑일 것이다. 물결을 향해 노래하던 어린 퍼스트본은 다리를 달랑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근래에는 이름을 영 부르지 않더랬지. 고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서는. 너, 그 쪽, 혹은...
"이샤믈라."
육지 생물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제 그 자 밖에는 남지 않았다. 흐릿한 아쉬움을 삼키며 이샤믈라는 고개를 돌렸다.
"박사. 잠에서 깬 거야?"
근래에는 잠에 깊게 들지 못하더랬다. 창백한 낯의 남자는 눈을 잠시 찡그리고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 뿐인 몸짓인데, 이샤믈라는 휘청이며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손을 들어 얼굴에 대는 행위를 그는 거절하지 않는다. 늘 서늘한 24도를 유지하는 에기르인의 체온에 비해 박사의 체온은 늘 뜨겁게만 느껴졌다. 앓고 있는 것인지, 시들어 가는 것인지... 정신에 연결된 '지식'을 돌아본다 할지라도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를 언제는 잘 알았던가. 남자가 고개를 뒤늦게 빼며 여린 손바닥에 남는 감촉은 화인처럼 남는다. 덜 깎인 수염의 꺼끌함, 그리고 열을 품은 생물의 체온. 이 감상을 무어라 불렀더라... 생각하는 사이에 남자는 걸음을 옮겨 곁을 떠나간다. 갈 곳도 없이, 바닷가를 헤매이는 망령처럼.
"박사, 어디로 가는 거야?"
어린 아이처럼 질문하며 따라붙는 이샤믈라를 박사는 다시 한 번,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바닷가에는 두 쌍의 발자국이 난다. 그마저도 곧 물결이 따라잡을 테지만.
테라는 바다에 잠긴지 오래. 수면에서 수많은 새 생명들이 고개를 내미는 가운데 육지를 고집하는 것은 오롯이 그 남자 뿐이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어떠했던가. 텅 빈 것처럼 말라 가벼워진 몸. 바닷 바람을 맞아 엉망이 된 머리채. 그리고, 형형하게 빛나던 두 눈. 그 눈.
그것을 생각하면 이샤믈라는 슬픔에 젖는다. 바다를 건너 육지를 가로질러 드디어 만났건만, 그의 사랑은 그를 환영하지 않네. 어찌할까... 슬픔은 자주 노래의 원동력이 되니, 노래를 부르면 되는 일이다. 무언가를 찾듯 오늘도 바닷가를 헤매는 남자의 뒤를 쫓으며 그는 노래했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가 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에이드리언은 한 번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가사의 의미를 물어오며, 어색한 발음으로 노래를 모방하지 않는다... 역시 미움 받는 것일까. 노래는 더욱 구슬픈 가락이 되어간다. 그마저도 나쁘지는 않다. 아직은 싸울 힘이, 미워할 힘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투지가 있는 것들은 오래 살아남는다. 눈에 독기가 어린 것들은 유난히도 목숨줄이 질기다. 혈족이 되어가는 과정마저 저항하던 이들처럼.
보라, 남자는 모래사장의 한 구석에 주저앉더니 맨 손으로 무언가를 파내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여, 이샤믈라는 박사의 어깨 너머로 그 보물을 훔쳐보았다. 형태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청록색 섬유 조각. 그것을 손 안에 말아쥐며 남자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듯 몇몇 어린 씨본이 기웃거리지만 이샤믈라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자그마한 퐁당, 소리와 함께 물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샤믈라는, 기다렸다.
그리고 박사는, 곧 다시 일어났다. 옷자락에 묻은 모래알이 떨어져내리는 것이 안타까워,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 붙어 걸어야했다.
2.
본인의 호오와는 별개로, 박사는 이샤믈라와 분리된 삶을 살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안전한 물이나 음식을 구하는 것, 씨테러나 씨본과 위험한 조우를 하지 않는 것. 생존을 위해 바다 괴물의 손을 빌려야하는 일이 유쾌한 일이냐 묻는다면, 박사는 단호하게 답하리라. 아니오. 드디어 미쳤는가?
더이상 씨본에 맞서싸울 '인류'가 없어진 테라는 얼핏 보면 지상낙원과도 같이 보였다. 이 꼴이 되기 전에도 지긋지긋했더랬다. 그는 버릇이 되어버린 쓴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공통된 적 앞에서 하나가 되는 테라? 그럴리가. 켈시나 미즈키는 이것을 경고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름 그대로 바다의 신과도 같은 퍼스트본을 목격한 인류는,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뿔뿔이 흩어진 인류 속에서 질기게 살아남은 것은 닥터 에이드리언이었다. 더이상은 어떠한 자격도, 호칭도 의미없게 되었으니 그냥 에이드리언이 될 테지만 말이다. 소매로 거칠게 얼굴에 묻은 모래를 훔쳐내면, 바닷바람을 오래 맞아 거칠어진 피부가 따가움을 호소해온다.
좋다, 아직은 온전히 인간이다.
본 적 없는 형체의 씨본이 어린 것들을 인솔하고 가르치는 듯한 풍경을 애써 외면하며 에이드리언은 고요함이 휩쓸고 간 땅을 거닐었다.
스카디였던 것이 그를 찾아온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에이드리언은 그를 향해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잠든 사이에 그 마른 목을 부러트리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했듯, 복수는 삶의 주제이지 않은가. 고요 속에서 사라진 리베리를 생각하며 그는 침묵했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위협하는 일 따위, 시도하지도 않았다. 잠든 시늉을 하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쉬는 이샤믈라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기만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인류가 침묵한 땅에는 오로지 겁쟁이 하나가 땅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이 밤도 그러할 터였다. 얼마 남지 않은 비상식량 캔을 까 내용물을 입에 밀어넣고, 어디선가 길어온 깨끗한 물으로 목을 축이고. 하룻밤 잠을 청하기 위해 누군가가 황급히 비운 것이 틀림없는 헛간에 몸을 뉘인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자문하며 지나온 날들과 잃어버린 낯들을 반추하고 있자면,
"어째서 나를 찾아왔어?"
분명히 묻어두었던 의문이 언어를 입어 혀를 타고 나온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드문 터라, 붉은 눈의 여성은 좁고 생명이 없는 공간 안에서 눈을 세차게 깜빡인다.
"...박사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니까."
어째서? 발화하지 못한 질문은 허공을 떠돈다. 이샤믈라는, 마치 여자아이의 시늉이라도 내듯 제 몸을 조금 웅크리기까지 한다. 말은 느리고, 음율마저 실린듯한 투로 이어진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박사와 함께 있고 싶어서... 함께 돌아갔으면 해서, 찾아온 거야. 박사나, 다른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야. 그냥,"
함께 있고 싶어서. 달싹이는 입술을 보기만 해도, 그것이 어떤 단어를 그려내는지 알 수 있다.
에이드리언은 몸을 일으켰다. 얼마 남지 않은 성냥을 꺼내, 전 주인이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촛불에 불을 붙이면 자그마한 불꽃이 일렁이며 좁은 실내를 비춰온다. 마주 앉으라 손짓하면,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이샤믈라는 가까이 다가와 자리에 앉는다. 그 나붓한 몸짓이, 눈에 가시와도 같이 박혀온다.
"...네 이름은, 이샤믈라야."
"박사가 그러길 바란다면."
"내가 그러길 바란다면...?"
그래, 하고 자그마한 한탄처럼 그녀는 답한다.
"그게 박사에게 의미가 있는 답이라면, 그래. 나는 이샤믈라일 거야."
에이드리언은 습관처럼 침묵한다. 관찰하듯, 일정한 힘을 갖고 보내오는 시선 앞에 여성은 더이상 상처 입거나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울처럼, 그 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 그래, 그러면 너는 이샤믈라야. 정확한 발음으로, 그는 그 이름을 부른다.
촛불은 침묵 속에 한참을 타오른다. 무언의 눈빛으로도 나눌 수 있는 대화야 수천수만 가지겠지만, 에이드리언은 자신과의 대화에 골몰한 듯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이윽고 입을 연다.
"... 바다의 것들은, 모든 것에게 평등하지. 너는 그렇지 않아. 마치..."
남자는 숨을 죽인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기대에 스카디 또한 숨을 죽인다.
... 아니야.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야.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는 중얼거렸다.
3.
바다에 가고 싶어. 남자는 처음으로, 그에게 청했다.
"네 고향에 가고 싶다는 게 아니야. 바닷가에, 가고 싶어."
모래투성이의 남자는 엄격한 얼굴로 말한다. 마치 어린 아이를 인도해야하는 어른의 것처럼, 꾸며낸 단호함이 있어 그녀는 후, 하고 웃고야 말았다. 즐거움, 그리고 기대란 드문 일이었다.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는 듯, 망령처럼 바닷가를 떠돌던 남자가 그에게 '바닷가에 가고 싶어'라니! 이샤믈라, 혹은 스카디가 들뜨고 만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루는 꿈결과도 같이 흘러갔다. 인적이 드물어 고요한 바닷가에는 이따금 뻐끔, 뻐끔하는 어린 씨본들만이 있었고 하늘은 드물게도 맑고, 청명하고, 따스했다. 파랗게 빛나는 바닷가 앞에 선 박사는 습관처럼 멈추어섰다가는, 곧 신발을 벗었다. 맨발이 모래사장을 디디고, 이윽고 물결에 닿는다. 곁에 있어도 좋을까, 고민하던 그녀가 우스울 정도로 박사, 에이드리언은 근사하게 손을 잡아 끌어주었다. 파도의 포말이 무엇보다도 희게 빛나고, 넘실거리는 파도가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부서진다. 남자가 웃는 소리를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을까? 처음 들었을 때에는 잘못 들은 듯, 귀를 의심하였다. 파도를 피해 달아났다가, 그 속으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놀이를 그는 즐겁다는 듯 반복한다. 스카디, 그녀의 손을 잡고!
고향처럼 아늑한 바다는 맨 발과 발목, 이윽고 옷자락을 적신다. 이래야만 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완전하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내쉬며 그녀는 웃었다. 소년처럼 웃는 그가 어딘가 눈이 부셔 웃고야 말았다...
즐거운 하루는 순식간에 흘러, 어설프게 피운 모닥불 옆에 앉아 그들은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체온이 낮아 그렇다는 이유였지만, 그의 체온은 여전히 36.5도. 자신에게는 데일 것처럼 따스할 뿐이었다. 철없는 연인들이나 그러할듯 붙어 앉아서는, 모닥불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를 들으며 먼 곳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는다. 혹은, 잠을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4.
스카디는 이윽고 잠에 들었다.
5.
눈을 다시 떴을 때는 혼자였다.
6.
걸어서 몇 십 분일까. 바다가 보이는 절벽 아래에 남자는 떨어져있었다.
굵은 모래와 흙이 섞인 바닥에는 필사적으로 누군가가 기어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탐욕스럽게 넘실거리는 물결로부터 반대의 방향으로, 느리고, 괴롭고, 확실하게. 뭍으로 향한 흔적이.
떨리는 마음 때문에 음정은 불안해졌고, 눈물은 혀끝에 떨어져 씁쓸함이 되어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갔으며,
목구멍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오열로 인해 자주 끊겼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청중이 필요 없다. 청중을 바라지도 않는다.
만약 노래 부르는 것이 그녀의 생명에 남겨진 유일한 의미라면,
계속 부르자.
...
이런 뒷맛이 나쁜 보카디 드림을 언젠가 쓰고 싶었습니다. 써놓고 나니 무지 부끄럽네요... 언젠가 퇴고하겠지요. 오늘은 여기까지 쓴 것을 자축하기로 합니다.
마지막 문단은 기억 각인 비석 중 "평화의 대가"에서 인용해왔습니다.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