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무에나 & 톨런드 & 츠시보르
※ 날조입니다
기사님, 기사님, 무지개를 주세요!
무에나는 톨런드와 함께 난민들을 어디로 인도할지에 대해 논의하던 중이었다. 전란 속에서 가족을 잃어버린 아이들이었다. 꼬질꼬질한 얼굴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뜩 기대한 얼굴로 무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에나는 당혹스러워했다. 일단 자신은 기사가 아니라는 말은 했지만, 아이들은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톨런드도 무슨 말인지 몰라 무에나를 바라보았다.
저쪽에 있는 오빠가 기사님이 무지개를 만들 수 있댔어요.
아이들이 가리킨 끝에는 츠시보르가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키도 많이 컸고, 출정 기사의 것은 아니었지만 흰 갑주를 입으니 어엿한 기사 같아 보였다. 그 번듯한 생김새가 어딜 봐도 제일 높으신 분 같아 보이는 무에나나 불량하고 위험한 일을 할 듯이 보이는 바운티 헌터들 보다야 다가가기 쉬워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를 찾았다. 무에나는 대부분 아이들을 보는 일을 츠시보르에게 맡겼다. 바운티 헌터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긴 하지만, 거칠고 난잡한 언어 습관이 벌써부터 아이들에게 퍼지길 바라지 않은 까닭이다. 츠시보르는 두 사람의 시선에 멋쩍게 웃었다. 아이들은 벌써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안 되는 거야? 못 해요? 왜 못 해요?
무에나가 아츠를 쓰면 비가 내리잖아…….
츠시보르는 더듬더듬 말을 이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무에나가 아츠를 쓸 때 내리는 비는 실체가 있는 액체이다. 짧은 시간 안에 상당한 범위에 걸쳐 구름이 생성되면서 비가 내린다. 아츠의 힘이 담긴 비는 옅은 황금빛으로 반짝여 마치 어둔 하늘에서 빛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풍경만 해도 이색적인데, 츠시보르는 매번 무에나가 아츠의 사용을 멈추면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가곤 했다. 츠시보르는 해가 있는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즈보넥에 있을 때, 마을에서 같이 놀던 형이 해가 있는 곳에서 비가 내린 곳을 보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고 했어. 그래서 무지개를 보겠다고 비구름이 보이면 그쪽으로 달려가곤 했지. 근데 애들이 달려간다고 얼마나 달려가겠어. 제대로 된 지식도 없고. 그래서 성공률은 낮았는데, 무에나의 비는 예상이 가잖아. 그래서 몇 번 무지개를 보려고 해 보니까 요령이 붙더라. 그 얘기를 애들한테 해줬더니…….
톨런드가 크게 웃었다. 그래. 비가 그치면 무지개가 뜨지. 무에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다가 말했다. ……내 아츠를 그런 용도로 사용하지 마. 아이들이 츠시보르를 붙잡고 그래서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물었다. 종알종알 말하던 아이들 중 여럿은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이미 돌아갔지만, 몇몇 아이들은 꽤 열성적이었다. 츠시보르는 무에나에게 사과하면서도 그래도 어떻게 안 되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해야 해. 이것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갈 수는 없으니까. 어른들한테 허락을 맡고 와. 그리고 츠시보르, 너는 좀 더 설명해라. 그런 걸 생각하고 아츠를 사용한 적은 없어서 위력을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아이들은 좋아라 웃으며 어른들을 향해 달려갔다. 지친 사람들은 그래도 순진하게 무지개를 찾는 아이들을 보며 표정을 풀었다. 바운티 헌터들도 대부분 무에나의 아츠를 그런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난민들은 어렵사리 무에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그 비를 받아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카시미어의 가을은 춥기도 하지만 건조하기도 했다. 우르수스의 군세에 쫓겨난 백성들은 가문 황야에서 목을 축일 물을 찾기도 힘들어 했다. 무에나가 곧잘 물길을 찾곤 했지만 황야를 떠돌던 무리가 필요한 만큼 찾는 정도로는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모자랐던 탓이다. 그렇지만, 그건 오리지늄 아츠로 형성된 비다. 안전하다고 검증된 게 아니야. 톨런드는 그 비를 식수로 사용하는 데에 찬성했다. 어디서부터 흘러온 물인지도 모르는 것도 꿀꺽꿀꺽 마시는데 그 물이라고 다를거 같냐고 말했다. 무에나는 또다시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멋대로 해. 나는 신경쓰지 않아.
하늘에 구름이 짙게 뭉치더니 비가 내렸다. 은하수 속에 살면 이런 느낌일까? 무에나는 누군가의 물음을 못 들은 체 했다. 사람들은 뚝뚝 떨어져 내리는 비를 가진 통을 전부 꺼내어 담았다. 통 안에 담긴 빗물은 금빛이 돌지는 않았지만 맑았다. 아이들은 츠시보르를 따라 무지개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다 환하게 웃었다. 무에나는 비의 가운데에 있었고 톨런드는 그 옆에서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 날 이후로 무에나는 난민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기까지 하루에 한 번씩 아츠를 사용했다. 검 손잡이에 건틀렛 낀 손을 얹어 놓고 심각한 얼굴로 머리 위의 구름을 바라보았다.
라이타니엔의 국경을 넘어 즈보넥으로 넘어오니 해가 머리 위 높이까지 떴다. 톨런드는 젖은 숲을 보면서 문득 무지개를 떠올렸다. 무에나가 츠시보르에게 새 창을 선물해 준 게 그때 즈음이었다. 팔레니스코 가문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가고, 가족들이 쫓겨났을 때 밀고자인 츠시보르 한 명 만큼은 카시미어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 받았다. 하지만 츠시보르에게 남은 건 어린 몸과 빈 손 뿐이었다. 츠시보르는 그 이후에 용병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고 했다. 죽은 사람의 창을 주워들어 싸웠다. 여태까지 그랬고, 바운티 헌터들은 종종 괜찮아 보이는 창을 주우면 그에게 넘겨주었다. 젊어서 그런지 기운이 넘쳐서 매번 창대를 부러트렸기 때문에 그러고도 자주 빈손이 되기도 했다. 멋쩍게 웃으면서 부러트린 창을 보여줄 때마다 바운티 헌터들 사이에서 돈이 오갔다. 그러나 무에나가 선물해준 창은 츠시보르의 손에서 한 번도 부러진 적이 없다. 무에나가 어렸을 적 쓰던 검을 여태껏 쓰는 것처럼 츠시보르도 계속해서 그 창을 사용했다.
그 창이 지면에 박혀 있었다. 오늘 새벽부터 즈보넥은 내내 맑았다. 겨울이 들어서고 있으니 바람은 찼지만 카시미어 다운 날씨였다. 숲에선 비 냄새가 났고 츠시보르는 그곳에 창을 남겨두었다. 풀향이 피 냄새를 가렸다.
톨런드는 그곳에 오래 있지 않았다. 숲을 떠날 때는 밖에서 해가 보였다. 즈보넥으로 돌아가 무에나를 찾았다. 무에나는 온 길로 돌아간 모양인지 레이스톤에 있었다.
“사실 그저께 츠시보르를 보고 왔어.” 무에나의 등이 멈춰섰다. “숲을 나오는 데 해가 났길래, 뒤를 돌아보니까 무지개가 떴더라. 이런 거 찾는 건 그 녀석이 진짜 잘 하는데 말이야.”
무에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톨런드는 무에나에게 하루 정도는 마을에 묵고 가라고 권했다. 거절 당했지만. 무에나는 꾸역꾸역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도 저렇게 수심이 많은 얼굴이긴 했다. 멈추라고 해도 멈추지 않기도 했다. 톨런드는 하하, 하고 바람 빠지듯 웃었다. 뭐야, 아닌 척 하더니 그대로잖아. 문득 톨런드는 옛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츠시보르는 무에나에게는 비밀이야, 하면서 톨런드에게 말을 걸었었다. 무에나의 비는 빛이 나서, 그대로도 잘 보고 있으면 무지개가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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