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독재 (2)

스터디그룹 피한울 드림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 잠에 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밤은 시간이 가는 걸 용납하지 않았고 허락된 건 꿈으로의 도피뿐이었지. 그럴거면 행복한 꿈이라도 꾸게 해주지 이게 뭐야. 그건 꿈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주마등 같았어. 여태까지의 일을 쭉 보여주는. 

탕, 꿈에서도 들린 총성은 피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낮보다도 아득한 옛 기억에서부터 울렸어. 그날 규리는 생전 겪지 않았던 가위에 눌렸는데, 그건 마치 20kg가 넘는 방탄복의 무게 같았어. 포탄이 날리고, 모래 먼지가 날리고... 피 냄새로 예민해진 감각은 중동의 더위를 더욱 뜨겁게 받아들였어. 

발단은 한 나라의 내전. 생각보다 길어진 전쟁에 자국도 파병을 보냈고 거기에는 강규리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어. 3년간의 긴 전쟁 끝에 정부의 승기가 잡혀 마지막 공습으로 기나긴 대치도 막을 내릴 예정이었지. 당시 규리는 중위로 대위 임관을 앞두고 있어 누구보다도 종전을 바라고 있었어. 

특수전학교에서 빌어먹을 훈련을 마치고 재능을 인정 받아 중사에 저격수로 투입되었지만, 여자가 특전사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소위까지 달고 일반 부대로 이동한 끝에 얻은 커리어였지. 문제는 대통령은 안전 확보가 됐는데 여당 대표의 행동이 묘연해진 거야. 

그래서 규리네 소대가 수색에 나섰을 것 같아. 그렇게 3인 1조로 흩어져서 찾다 규리는 모르는 복장의 군인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했어. 아니, 용병인가. 어느 측에서 고용했는지 알 수 없으니 건물 뒤로 돌아간 규리는 소총을 들고 건물에 혼자 진입했겠지. 분쟁 지역의 근처라서 적습에 대비해야 하고, 언제 저들과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까.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던 규리는 다행히 얼마 안 가 여당 대표 의원을 찾을 수 있었을 거야. 목이 베인 채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가 연설 때마다 입는 하얀 토브는 피로 흠뻑 젖어있었고, 옆에는 검은 갈라베야를 입은 남자가 서있었어. 불길하게 까만 옷에는 피가 튀어도 티가 나지 않아 그는 홀연히 나타난 것처럼 보였지. 손에 쥔 피 묻은 시미터(칼)이 아니었다면. 그는 도저히 야당의 군사처럼은 보이지 않았을 거야. 아까 그 용병단원인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어. 

사고는 남자가 입을 열자 뚝 끊겼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푸른 눈만 내놓은 암살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입에 올렸어. 목격자는 살려두면 귀찮아지는데. 고작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남자. 유창한 영어가 쓸데없이 귀에 쏙쏙 잘 들어왔지. 젠장. 반사적으로 총을 겨눈 규리가 영어로 말해. 무기를 내려놓고 양손 들어. 의외로 순순히 말을 들은 그는 총구를 마주하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어. 오히려 웃고 있었지. 입이 가려져 있었지만, 규리는 왠지 그 남자의 초승달 같은 웃음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어차피 너는 내게 이길 수 없어. 그는 심드렁하게 자신의 승리를 입에 올렸어. 체급이나 완력 따위, 총 앞에서는 무쓸모잖아. 규리의 대답이 우스운지 남자는 피식 웃어. 그게 아니라― 나는 너를 죽일 수 있지만, 너는 나를 죽일 수 없잖아. 그치? 농담이 아닌지 그는 한 발씩 가까이 다가왔어. 규리는 물러서지 않는 게 고작이었지. 규리라고 군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을리가 만무했어. 게다가 그녀는 저격수, 타겟의 숨을 확실하게 앗아가는 게 기본이잖아. 그런데도 남자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 대체 자신의 무엇을 믿고.

그러나 정말 그를 생포할 생각이었던 규리는 총을 쏠 수 없었지. 살려서 데려가지 않으면 그가 의원을 죽였다는 걸 증명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소총은 살상 무기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를 무력화할 수는 없지. 그렇게 어이없게 총을 뺏기려는 순간, 규리는 있는 힘껏 소총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어. 그리고 남자의 발을 걸어 그 위로 제 몸도 던졌지.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는데. 허리춤에서 뽑아든 단도가 목에 들어와도 그는 태평하게 농담을 쳤어. 이 남자는 위험하다. 죽음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결국 규리는 왼손으로 쥐고 있는 단도를 푹 내리찍었어. 남자의 오른쪽 어깨 근육을 끊고 들어가는 감각이 생경했지.

그대로 오른손으로 바꿔쥐고 왼쪽 팔도 못 쓰게 만들려는 찰나, 세상이 빙글 돌며 머리가 딱딱한 바닥에 쾅 찍혔어. 그 충격에도 눈을 부릅 뜨고 상대를 노려보자 남자는 유언을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어. 하지만 규리는 아무말도 없이 그와 눈을 맞췄지. 재미없어. 남자는 중얼거렸어.

네가 내 팔 하나를 가져갔으니 나는 네 목을 받아갈게. 뻔뻔한 계산법에 겁을 상실했는지 규리는 칼날을 보고도 빈정거렸어.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러자 그는 욱하는 기색 없이 농담으로 받아치지. 잠시 후에는 그럭저럭 유쾌한 말상대는 죽고 시체만 남을 테니까. 왜, 공평하고 좋은데.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신의 피가 묻은 단도로 규리의 목을 조준했어. 칼날과 어깨에서 떨어진 핏물이 이미 규리의 얼굴을 흠뻑 적시고 있었지. 뜨겁다. 비릿한 피가 후끈하게 공기를 덥히는 느낌에 의식이 몽롱해졌지만, 규리는 천천히 숨을 골랐어. 어째서인지 남자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고.

미친놈한테 걸려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이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어딘가 힐난하는 듯한 말투에 서늘한 예기가 스몄지. 남자는 일말의 흥미마저 사라졌는지 허공을 그어 핏물을 털어냈어. 끝까지 정체를알 수 없었던 자객이 미련없이 칼을 내리찍자 자연스럽게 그의 상체가 기울여졌어.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지며 규리의 까만 눈동자에 빨려들 것처럼 허리를 숙인 남자는, 거기서 무엇을 읽었는지 반사적으로 몸을 뺐어. 바로 그 순간을, 규리는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주먹을 쥐어 남자의 갈비뼈를 힘껏 후려친 규리는 올려찬 다리의 반동으로 몸을 굴려 단도를 피했어. 저격수의 기본은 호흡법. 막연히 조준이 흔들리지 않도록 숨을 참는 게 아니다. 상대가 들이쉴 때 들이쉬고, 내쉴 때 내쉰다. 호흡을 함께 하며 상대의 움직임을 상상한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최적의 순간이 온다. 바닥을 나뒹군 남자가 자세를 바로잡자 복면이 뜯겼는지 얼굴이 훤히 드러나있었어.

시리도록 잘난 얼굴. 입가를 닦아내자 그 하얀 피부에 피가 번졌어. 어느새 돌아온 웃음기에 규리는 드디어 그의 초승달 같은 미소를 목격했지. 그다지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원점으로 돌아온 승부에 남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빙글거렸어. 너, 계속 내 생각만 했지? 무슨 상상을 했는지 궁금한데?

 미친놈. 반사적으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어. 내 상상력이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라서. 맞받아치면서도 규리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어― 그럼에도 남자에게는 역부족이었지만. 이제 더이상 놀아줄 시간이 없다는 듯이 그는 순식간에 게임을 정리해버렸어. 하긴, 그래 보이긴 해.

여태까지의 분전이 무색하게 눈 깜빡할 사이에 그에게 제압당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손으로 목이 잡힌 채였지. 이번에야말로 죽는다. 그것도 목이 꺾여서.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계단 밑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어. 한울아, 찾아오라는 의원은 어쩌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

규리는 그 내용보다 언어에 먼저 반응했어. 한국어. 이들도 한국 사람인가? 이 남자 이름은 피한울이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해석하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이름을 불린 그는 미련 없이 규리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어. 내가 왔을 때는 이미 죽어있었어. 근데 이 여자가 나를 범인으로 오해하고 덤비잖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피한울에게 지영현의 서늘한 시선이 떨어졌어. 그거 오해 맞냐?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피한울은 증거품인 칼을 건네지. 의심되면 가져가서 확인해보던가. 그런데 그거, 내가 이 여자 죽이려고 할 때 쥐는 바람에 내 지문도 나올 거다~. 시체를 발 밑에 두고도 가벼운 말투와 달리 그 순간에도 피한울은 규리에게 시선을 던졌어. 그 푸른 안광을 보자 규리는 직감했어. 이 얘기를 하는 순간 저 자리에 드러눕는 건 내가 되겠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규리의 촉이 말하고 있었어. 저 남자가 피한울이라고 불린 그보다도 위험하다고. 

강규리와 시선이 마주친 피한울은 입막음 할 거냐는 듯이 지영현에게 고개를 까딱였는데, 의외로 그는 규리를 정중히 모셨을 것 같아. 우리나라 군인분이시니 모셔다 드려야지. 세상에 군인을 에스코트 해주겠다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지만 규리는 조금도 웃지 못했어. 분명히 들었거든. 밑에도 일행이 있으니까... 라고 중얼거리는 거. 여기에 혼자 왔다면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어.

어쩔 수 없이 의원의 시체를 수습해 안아든 지영현까지 셋이서 건물을 내려왔더니 어째서인지 조원들이 쓰러져 있었어. 규리가 놀라서 지영현을 돌아보자 그가 멋쩍은 듯 말했어. 아, 통 들여보내주지를 않아서 거친 수를 썼다. 미안하다. 고개를 끄덕인 규리가 주저앉아 기절한 조원 둘을 들쳐업었어. 그러나 이미 체력이 고갈된 채로 자기보다 등치가 큰 남자 둘을 들처매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겠지. 낑낑대며 일어나지 못하는 걸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피한울이 손짓했어. 그러자 피한울이 이끌고 왔던 용병단원들이 두 명씩 규리네 조원을 부축했을 거야.

그렇게 거점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 다름이 아니라 이쪽에서 준비했던 공습보다 상대방이 먼저 선수를 친 거야. 낭패의 기색이 역력한 대대장의 곁에서 지영현은 태연히 턱을 쓰다듬었어. 흐음, 이거 연백 아저씨한테 한소리 듣겠구만. 팔짱을 풀어 당장 응전하라고 악을 지르는 대대장의 어깨를 꽈악 쥐는 지영현. 그러지 마시고 진정 좀 하십시오. 지금 진정하게 생겼는가, 자네는 누구기에 말참견이야! 입밖으로 내지 않아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라는 뒷말이 보이는 듯해.

뒤쪽에 도열해있는 수하들이 움찔하는 걸 한 손으로 막은 지영현이 차분히 입을 떼려는 그때, 무전이 들렸어. 적군의 수뇌부가 전멸. 공격 명령이 멈췄습니다! 그 뒤로도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어. 어떻게 된 일이냐. 암살입니다! 그, 그런 건 작전에 없었는데. 소속 불명… 아니, YB… YB의 용병입니다!! 

YB라는 말에 지영현을 돌아보는 대대장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지. 옆에서 피한울이 어쩐지 네 직속 밖에 없더라 하니까 지영현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어. 여기까지 왔으니 일도 해야지. 한눈 팔면서 전력을 놀게 하면 쓰나. 명백히 자신을 저격하는 듯한 말투에 피한울이 허, 하고 얼굴을 찡그렸어. 

규리도 그때 비로소 지영현이랑 피한울 소속을 알았겠지. 이번에 무슨 용병 기업에서 군사 자문으로 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결국 기회를 봐서 몰래 대대장에게 저 YB 소속 용병이 여당 의원을 죽였다는 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규리야. 그 마지막 전투가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돌발 공격으로 우세를 점한 상대군이 전투를 멈추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덤비기 시작했어. 번복에 대한 반항 심리인지, 마지막 발악인지, 눈앞의 승리를 놓치기 싫은 건지... 지휘 체계 없이 선동되어 터져나온 총격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밀려들었지. 그런데 그 순간 들린 거야, 아이 울음소리가. 

이곳은 이미 국군과 YB의 용병들과 적군이 뒤엉키는 바람에 사방에서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어. 시야가 안 보이는 상황에서 저곳에 뛰어드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지. 무엇보다 캐리어. 이 전쟁만 무사히 넘기면 진급인데 그걸 싹 날려먹을 생각인가? 지난 10년간의 시간이 주르륵 머리를 스쳤어. 

하지만 아이가 누구를 부르는지 깨달은 순간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반응했을 거야. 언니―! 아이는 언니를 부르고 있었어. 엄마가 아니라. 그 순간 한국에 두고온 동생이 생각나서 무작정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었을 거야. 그러다 누군가 홱 팔을 잡아채는 바람에 규리는 발을 멈춰야만 했어. 놔.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피한울의 악력이 허락하지 않았지. 너 죽고 싶어? 이게 정녕 다친 사람의 힘인가. 하지만 규리는 매서운 말에도 물러서지 않았어. 너 같으면 죽고 싶겠어? 그럼 왜. 울고 있는 저애도 죽고 싶지 않을 테니까! 초조한 마음에 목소리가 올라가도 팔을 붙잡는 힘은 세지기만 했어. 여전히 피한울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지. 

어쩌면 그게 정상일지도 몰라. 세상에 죽고 싶지 않은 건 다들 마찬가지인데 매번 대신 죽어주기라도 할 셈인가. 억지로라도 끌고가려고 했지만 먼지 먹은 목소리가 끝까지 버티고 섰어. 너와 나의 차이를 알려줄게. 용병은 쟁취하는 게 일이지만― 군인은 지키는 게 일이야. 그러니까 비켜. 그때 알았어. 붙잡은 팔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손아귀 힘이 풀린 틈을 타 규리는 반대손으로 피한울을 떼어내고 모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어.

혼자 덩그러니 남은 그에게 뒤늦게 직속 부대가 달려오지. 하, 피한울은 피 묻은 오른손을 내려다 봤어. 그런 와중에도 세게 떨쳐내는 게 아니라 반동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 게 뭐랄까, 참 고집스러워 보여. 피한울은 이중 누군가를 규리에게 붙일까 고민하다 말았어. 그 사이에 아까 본 규리의 조원들이 따라 뛰어들었거든. 그들을 등지고 교차해 지나간 피한울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어. 바보 같긴.

포탄이 터지는 와중에 규리는 애타게 아이를 찾아다녔어. 혹시나 큰 소리를 냈다가는 아이가 있는 곳까지 발각될 수 있으니 신속하게 발견해서 데리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전속력으로 뛰던 규리는 돌무더기 앞에서 멈췄어. 그 틈 사이로 자그마한 손이 비죽 나와있었어.

아아,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규리가 미친 것처럼 돌을 파냈어. 형태를 보아하니 바위로 쌓은 작은 기지였어. 내가, 언니가… 폭격이 시작되면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 말, 기억했구나. 아이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건물. 너무나 연약한 탓에 무너져버린 그것이 아이의 생명을 짓누르고 있었어. 

어느새 뒤따라온 조원들이 합세해 돌을 파냈고 끝내 아이를 구해낼 수 있었어. 미약하게나마 붙어있는 숨에 상황을 잊고 웃음이 피어올랐지. 규리는 방탄복을 벗어 아이의 몸을 감싸고 달리기 시작했어. 점점 거점이 가까워질수록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 

안고 있던 아이를 조원에게 맡기고 등을 떠밀었어. 먼저 가. 주저하는 조원들에게 명령이라며 소리친 규리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허리를 숙였어. 돌아가면 아마 더는 군에 있을 수 없겠지만, 그럼 당분간은 아이를 돌봐주며 지낼까. 언니도 찾아줘야 하고… 콰앙. 어디선가 또다시 수류탄이 터졌어. 그 충격의 여파로 앞으로 날아간 규리는 구르면 구르는 대로 발이 닿으면 닿는 대로 앞으로 나아갔어.

그렇게 거점으로 도착했는데 상황이 대강 정리되어 있었지. 그러나 어딜 둘러봐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 데다 대원들이 아무도 눈을 마주쳐주지 않아 규리는 눈앞의 지영현을 붙잡았어. 하지만 질문하기도 전에 대답은 돌아왔지. 아이라면, 죽었다. 규리는 말하려고 했어.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고.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 모래 먼지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목을 가다듬으려는데 불현듯 깨달았어. 지금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건 나구나. 

발을 대딛으려던 규리는 그대로 앞으로 무너져내렸어. 그러자 사방에서 소리가 터져나왔지. 앞만 보고는 몰랐지만 수류탄 때문에 뒤쪽은 옷이 다 찢어지고 피부가 터져서 피범벅이었어. 발 빠른 몇몇이 의무병을 부르러 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그중에는 피한울도 보였어. 아, 저 남자가 저지른 짓도 보고해야 하는데. 피곤하다. 자고 일어나서 해야지...

깜빡이는 푸른 시선을 미뤄둔 채 그렇게 눈을 감은 규리가 다시 눈을 뜬 건 2주 후로, 군 병원이 아닌 일반병원의 침대였으며 그때는 이미 명령불복종이라는 이유로 불명예제대를 당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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