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독재 (3)

스터디그룹 피한울 드림

규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어. 원래 꿈이라는 게 자고 일어나면 흐릿해지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눈을 뜨니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야. 영화의 하이라이트 짜집기처럼 지나간 꿈에서 놓친 디테일까지도. 이를 테면 꿈에서 본 남자― 피한울의 푸른 안광이라던가.

역시 다 알고 있었어. 오늘 낮의 대화가 꿈 속에서의 대화와 맞물렸다는 걸 깨달은 규리는 이마를 짚었어. 이래서 무의식이 무섭다니까. YB에 입사한 후 줄곧 피한울과의 과거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머리에 깊이 박힌 모양이야. 모르는 척을 하며 자백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불명예제대라도 사고 치고 나간 것과 명령불복종은 하늘과 땅 차이야. 후자에 해당되는 규리를 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지. 그런데 딱 한 군데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안이 들어온 거야. 근 몇 년 들어 크게 성장한 민간군사기업, 즉 용병회사인 YB였어. 어째 엮이는 일이 많네. 하긴 군인이 용병으로 전역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데 용병이 아니라 경호? 차라리 잘된 일이야. 회장 아들 경호라고 하니 용병인 그 남자와 조우할 일은 없겠지, 그런 나름의 계산 끝에 입사했어. 그런데 출근 첫 날 만나고 만 거야. 모래 먼지 속에서 한 줌의 피와 목숨을 주고받았던 사내를.

경호팀장이 도련님이라고 소개한 청년은 냉막한 인상이었지만 그보다도 푸른 눈을 하고 있었어. 그 눈을 마주한 순간 헷갈릴 수가 없었지. 대체 왜 용병이 회장 아들이 된 건지, 아니, 어째서 회장 아들씩이나 되는 사람이 용병을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딱 하나 확실한 건 입을 여는 순간 죽는다. 신입 소개가 끝나고 스쳐지나가는 그의 입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본 규리는 다짐했어. 결코 그 일을 아는 척하지 말자고. 

그렇게 YB에 입사하게 된 규리가 이후 피한울에 대해 알게 된 건, 회장 아들임에도 후계 1순위가 아니라는 것과 밀려나게 된 이유가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했기 때문이라는 것. 굳이 더 꼽는다면 생각보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지만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는 것. 밤잠이 없고 밤눈이 밝으며 자기 전에는 습관처럼 담배를 한 대 핀다는 것. 음악은 음원보다 음반을 모으는 걸 선호하고... 또, 여자 머리를 잘 묶는다는 것 정도일까. 아아, 그 이상은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아.

떠오른 것들을 애써 밀어내며 규리는 묵묵히 손가락을 움직였어. 엄지와 중지에는 앙증맞은 주황색 머리끈이 걸려있었지. 무릎에 걸터앉은 여아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며 솜씨 좋게 머리를 묶은 규리는 양갈래가 어긋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는 아이에게 거울을 쥐여주었어. 마음에 드시나요, 아가씨? 요리조리 거울을 돌려본 아이는 응! 하고는 도도도 맞은편 쇼파로 달려갔어. 다리를 꼬고 앉았던 피한울이 자세를 고쳐앉으며 양팔을 벌려 여자아이를 안아들었어. 우리 한솔이, 잘 어울리네. 언니한테 고맙다고 했어? 언니 고마워! 표정을 풀고 고개를 까딱이는 규리를 샅샅이 살피는 시선이 있었어.

머리 묶어주는 게 익숙한 모양인데? 여동생이 방을 나서자 피한울은 어느새 곁에 와서 뒷짐 지고 서있는 규리에게 말을 걸었어. 강규리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덤덤하게 답했지. 항상 묶고 다니니까요. 묶는 거 말고, 묶어주는 거라고 했잖아. 여전히 피한울은 상대하기 버거웠어. 그게 그겁니다. 고용주한테 거짓말을 뻔뻔하게 하네. 화난 기색도 없이, 오히려 즐거운 듯 그는 대화를 잡아끌었어. 그냥 넘어가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지만 방금 그 말만큼은 규리도 그냥 넘길 수 없었지. 

…제 뒷조사까지 해보셨습니까? 여동생이 있다는 건 이력서에는 없는 내용이었어. 그럼에도 내내 여동생이 있지 않냐며 찔러보던 그가 확신를 담은 어조로 말을 하자 규리도 더는 묵시할 수 없었고. 당연히 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 역시나 피한울은 부정하지 않았어. 나를 지키는 사람이 어떤 이력을 가졌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게 소양 아닌가? 거짓말하는 건 피차일반이었네요. 그런 이유 아니신 거 압니다. 넌 을이잖아.

소모적인 논쟁을 깔끔하게 끝낸 피한울이 확인 차 물었어. 계약서는 잊지 않았지? 강규리는 그저 그렇다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지. 왠지 모를 먹먹함이 남자 규리는 잠시 생각에 빠졌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긴 포니테일을 확 잡아당겨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피한울에 반사적으로 눈을 부라렸어. 누구 때문에 팔이 이 지경이라서 다시 묶어주지는 못 할 것 같네. 붕대가 감긴 오른팔을 슬쩍 흔들어보이고는 산뜻하게 방을 나서는 피한울의 등 뒤에는 산발이 된 머리로 멍하니 서있는 규리만 남았지. 저 미친 새끼.

그 뒤로 피한울의 드레싱은 규리가 전담하게 됐어. 주치의에게도 도통 몸을 안 맡기는 바람에 의료진이 규리에게 억지로 구급상자를 들려줬겠지. 아니, 저, 간단한 소독 정도라면 할 줄 알지만 왜 제게... 그 물음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그래도 아버지뻘의 중년 의사가 사정하며 매달리자 규리도 결국 얌전히 교육을 받았을 거야. 어찌 보면 자신이 이들에게 일을 늘려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책임감을 느낀 거지. 절대 피한울을 위해서는 아니었고.

다만, 이것만은 업무 시간에서 제외되어서 생각보다 신경을 갉아먹었을 것 같아. 드레싱을 받을 때면 언제나 주위를 물리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독대 시간이 길어졌는데, 피한울과 방에 둘만 남아있으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거든. 차라리 나도 팔이나 부러트려서 붕대를 감으면 이짓을 그만둘까 생각한 적도 있었어. 하지만 쓰러져 잠들면 시간은 어찌나 빨리 가는지 또다시 알람이 울려. 규리는 기계적으로 이제는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 놔두는 구급상자를 챙겨들었어.

들어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는데 분명히 대답했던 피한울은 여전히 쇼파에 몸을 파묻은 채 책을 읽고 있었어.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피한울이 도통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한동안 가만히 서있던 규리가 먼저 입을 열었지. 붕대 갈 시간입니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피한울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마주쳤어. 아, 위험하다. 규리는 당장이라도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에 든 구급상자 탓에 그럴 수도 없었어. 결국 들어버리고 만 그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지. 그럼 벗겨줘. 규리는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남자한테 '벗어.'도 아니고 '벗겨줘.'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얼어붙은 규리가 눈만 깜빡이자 피한울이 어깨를 눈짓해. 아야. 이명이 들리는 게 분명했어. 설마 지금 아프다고 한 건가, 저 남자가? 정말이지, 총에 맞고도 낯빛 하나 안 변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엄살이냐고 따지고 싶었어.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가라앉으면서 냉정을 되찾은 규리가 받아쳤지. 한 번만 더 말씀해보세요. 그 길로 노동청에 신고하러 갈 겁니다. 그럼 이 부당 계약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네요. 한손에는 구급상자를 든 채 꿈쩍도 하지 않는 규리와 잠시 눈싸움을 벌이던 피한울은 결국 웃으며 스스로 셔츠를 벗었어.

너무하네. 이렇게 옷도 혼자 못 벗게 된 게 누구 때문인지 그새 까먹었어? 그 대신 남의 팔을 가져갔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러바칠 겁니다. 온당한 교환 아닌가? 민사는 원상 복구가 아니라 금전 배상이 원칙입니다. 상해죄도? 애초에 성립이 안 됩니다. 고의성이 없으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무슨 뜻입니까. 고의성이 없었냐고 묻는 거야. 내 눈에는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여태 따박따박 잘만 대꾸하던 규리는 잠시 할 말을 잃었어. 확실히 머릿속에서는 이 남자를 몇 번이나 죽였다 살려내긴 했지만... 그게 지금 이런 곤경에 처해도 되는 이유는 아니었어. 갑자기 이 상황에 부아가 치밀었지. 애초에 죽이려던 것도 저격수, 총을 쏜 것도 저격수인데 내가 왜. 요며칠 드레싱을 이유로 새벽마다 호출당한 걸 생각하면 규리야말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을 잡아다 팔이든 다리든 뜯어다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어.

구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내며 필사적으로 이 계약을 합법적으로 파훼할 방법을 궁리하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기도 전에 피한울이 무심하게 툭 던진 말에 붕대도 툭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갔어. 흐음, 법 공부를 했었나 보네? …뒷조사 해보셨으니 아실 텐데요. 사관학교 시절 규리는 경제법학과였지만, 무의식적으로 가족부터 언급했어. 아버지 강범준은 군법무관 중에서도 군검사였으니까. 그런데 여전히 피한울은 납득하지 못한 것처럼 굴었어.

부모가 하는 일을 꼭 자식이 따라할 필요는 없지. 그 얘기를 도련님이 하시니까 조금 웃기네요. 그럼 좀 웃지 그래? 됐습니다. 붕대를 주워 오염된 부분을 끊어낸 규리가 피한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맨살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스레 헌 붕대를 풀러냈어. 검붉은 피가 스며든 붕대를 한쪽으로 치워고 소독솜으로 핏자국을 닦아내자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어. 그새 속살이 벌어져 있었지. 이 남자는 나를 말려죽이기로 작정한 게 틀림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아야 이 짓에서도 해방되는데 피한울은 전혀 협조해주지 않았어. 그렇게 엄살을 부릴거면 가만히라도 있던가. 결국 규리는 소독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지. 어제 또 스파링 하셨습니까? 귀신 같네. 조금 거슬리는 놈이 있었거든. …그건 스파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샌드백이 되어주는 건 똑같잖아. 보통은 조금 거슬린다고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지도 않고요. 왜, 아예 시체로 만들어놓으면 속이 시원하겠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피한울이 만드는 시체는 다름아닌 강규리를 비롯한 보디가드들이 수습하게 되어있었어. 그러나 규리는 다른 이유를 들었어. 죽음에 익숙해지지 말자. 죽음에 익숙해지지 말자. 몇 번이나 되새겨가면서. 사람은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규리를 힐끗 내려다 본 피한울은 조금의 공감도 없이 비아냥거렸어. 그걸 군인인 네가 말하니까 우스운데? 규리가 대답했어. 도련님은 이미 웃고 계시는군요.

입을 닫은 꾹 닫은 규리가 소독솜을 바꿨어. 사실 핀셋으로 상처를 찌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쨋든 총에 꿰뚫린 상처니 섣불리 손을 댈 수도 없었지. 분명 아픔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닐 텐데 태연하게 책을 펼치는 게 경이로울 따름이라 규리는 그 안색을 살폈을 것 같아. 총에 맞으면 피가 나는 사람인 건 확인했는데... 설마 소독약이 이게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하는 찰나, 피한울이 피식 웃을 것 같아. 

그렇게까지 뚫어져라 보면 감상료를 받아야겠는데? 그제서야 자신이 고용주의 얼굴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규리는 서둘러 붕대를 꺼내들어 팔에 둘렀어. 이제 안 봅니다. 그럼 본 만큼은 급료에서 깎아야겠네. 아, 이것도 신고하려나? 네, 신고할 겁니다. 이죽거리는 말을 적당히 받아넘기며 어깨죽지에 붕대를 감은 규리는 잠시 망설이다 무릎걸음으로 피한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어. 맨손이 드러난 어깨와 쇄골을 오르내리고, 가슴팍과 어깨를 함께 고정하느라 흡사 피한울을 껴안은 모양새가 됐지. 얼굴이 맨살에 닿지 않게 몸에 힘껏 힘을 주는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말에 규리는 그만 앞으로 엎어질 뻔했어. 이렇게 만져댈 거면 신고하더라도 앞의 건 서로 없는 셈 쳐야 하는 거 아닌가?

웬만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규리가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어느새 피한울의 다리 사이에 끼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어. 참자. 다리까지 부러트리면 이번에야말로 사형이다. …도련님이 시키신 겁니다. 알아. 그런데 제 의료 행위에 무슨 불만이라도. 기껏 20억이나 주고 고용했는데 그 값을 못하는 것 같길래. 전혀 대화가 맞물리지 않았어. 손이 맨살에 닿는 건 불가피한 의료 행위일 뿐이라고 강조해봤지만, 피한울은 다른 소리나 해댔지. 결국 숙이고 들어간 건 강규리였어. 그래서 드레싱을 맡겨놓고도 부족하시다? 말이 짧아진 규리에 그가 눈썹을 까딱여보였지. 그래.

턱을 치켜들고 올려다 보는 강규리의 시선과 사람을 깔보듯 내려다 보는 피한울의 시선이 교차했어. 그럼 뭘 더 해야 놔주실 겁니까. 그걸 고민 중이야. 이거부터 놓고 실컷 해, 미친 새끼야. 턱끝까지 차오른 험한 말을 억누르며 규리는 얌전히 선고를 기다렸어. 그런데, 피한울이 입을 떼기 전에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목소리가 들렸어. 한울아! 들어간다? 홱 뒤를 돌아보자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1조의 최무규였지.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1조인 홍아성이 팔짱을 끼고 있었고.

1조 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끝내려고 했는데 그새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들과 눈이 마주친 규리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깨닫고 파드득 일어났어. 다행히도 이번에는 쉽게 풀려났어. 피한울이 기가 차다는 듯이 말해. 이미 들어왔잖아. 아, 미안 미안. 네가 이렇게 좋은 시간 보내는 줄 알았... 억, 자기야아... 홍아성에게 귀를 붙잡혀 최무규가 끌려나가자 정적이 남은 방에서 강규리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붕대를 동여매고는 서둘러 구급상자를 챙겼어.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방을 나섰지만 다행히 붙잡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어. 문을 닫고 후우, 한숨을 내쉬는데 두 쌍의 시선이 느껴졌지. 문 옆에 붙어 서 근무 태세에 들어간 최무규와 홍아성이었어. 여전히 최무규는 어딘가 실룩이는 표정이었고, 홍아성은 무표정으로 규리를 향해 턱을 까딱였지. 그만 가봐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규리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어. 달칵,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소리로 확인하고는 복도를 내달렸고. 

시간은 아직 오전 10시 4분. 낮잠을 자려고 해도 애매한 시간, 잊고 싶다면 애초부터 잠에서 깨지 말았어야 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캐릭터
#피한울
추가태그
#드림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