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고시키 환생IF물 드림

2. 수레바퀴를 피해서

하이큐 고시키 환생IF물 드림 -w. 22.10.

드림 by 실행
20
1
0

올해 인터미들에서 고시키가 할 일은 그다지 없었다. 예선에서는 온종일 시합을 보며 데이터 수집을 했다. 눈에 띄는 몇몇은 분명 고교에서도 먹힐 수준이었고, 참고할 만했다. 그리고 첫번째 경기는 스타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시지마가 드물게도 경기 운영에 말을 얹은 것이다. 한번 넣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아이카와가 나중에 슬쩍 알려주기를 우시지마도 1학년 때 에이스의 추천으로 경기를 바로 뛰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단 포지션이 겹치지 않으니 가능한거지만, 이라는 현실도 붙었지만 말이다.

 

“이야, 잘하자~ 알지?”

 

주전을 모아놓고 시선을 한번씩 맞춘 아이카와가 씩 웃었다. 고시키는 신남을 주체하지 못해 소리를 크게 낼까봐 입을 합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인 나가무시 중학교는 모난 점 없이 착실한 팀으로, 말하자면 시라토리자와의 하위 호환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3학년이고 고시키는 1학년이다. 분명히 약점이다. 누가 질까보냐.

 

어설프게 노린 서브가 고시키에게 곧장 날아왔고, 그는 부드럽게 리시브했다. 에이스의 득점으로 시합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우시지마의 서브였다. 깔끔한 폼의 점프 서브가 코트를 깊숙히 파고들었고, 상대 리시버는 제대로 받지 못하고 찬스볼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회전이 죽은 공이 비틀어지듯 곧장 고시키에게 날아왔다. 고시키는 몸을 낮춰 오버로 오픈 토스를 올렸다.

 

“우시지마 선배.”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다. 온전히 에이스를 위하여. 도움닫기를 제대로 한 스파이크가 엔드라인 바로 앞에 내리찍혔다.

 

고시키는 에이스가 되기 전에 먼저 에이스를 모시는 법을 배워야 했다. 대 에이스가 말했다. 나이스 토스, 하고.

 

“어째서 세터를 하는지 알 것 같았어요, 아까.”

 

6점을 연달아 내준 상대팀이 타임 아웃을 불렀다. 아이카와가 깜짝 놀라더니 고시키의 양어깨를 잡았다.

 

“안돼, 세터하겠다고 하지 마! 타임 끝나면 공 올려줄게!”

 

“그건 그렇고 고시키 오버 세팅 잘하더라. 리시브만 더 신경 쓰자.”

 

리베로 선배가 사람 좋게 웃으며 고시키의 등을 팡팡 쳤다. 사실상 큰 전략 없이 팀의 역량으로 밀어붙이는 경기인지라 별 다른 피드백 없이 고시키를 키워주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고시키는 스트레이트로 블록 사이를 뚫으며 속이 뻥 뚫렸다. 가끔 힘을 빼서 낚는 재미도 쏠쏠했다. 신난 고시키에게는 아쉽게도 경기는 2-0으로 싱겁게 끝났다.

 

준결승전부터는 벤치에서 보기만 해도 제법 유익할 수준의 경기가 이어졌다. 결승전 상대는 키타가와제1중이었다. 세터인 주장을 중심으로 기교가 빛나는 팀. 주장의 점프 서브 폼은 아름다울 정도였다. 우시지마의 폼도 물론 그렇지만, 왼손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닿을 수 없이 먼 느낌이라면 오이카와의 폼은 교본 삼을 만했다.

 

두학년이나 차이 나서 아쉽고, 두학년 차이라 다행이었다. 녹화 잘 되고 있겠지?

 

“괴물 대전이다, 괴물 대전.”

 

“뭐, 그래봤자 질 것 같지는 않지만.”

 

코트에 있지도 않은 놈들이 말은 많네. 고시키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기분탓인지, 반대편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소우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대개 이럴 때는 착각으로 치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의식적으로 머릿속에 집어넣는 정보량을 늘렸다. 강서브에 맞춰 변화하는 리시브 포메이션, 세터의 수신호에 따라 약간씩 바뀌는 위치 선정 등등. 덜 다듬어진 중학생들의 시합이라 오히려 나쁜 습관이 잡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결국 집중하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는거다. 지쳤으니까. 그의 팀의 승리로 현 예선이 끝났다. 키타가와제일 팀은 많이 분해보였다. 다음 대회에서 또 보겠지. 고시키는 경기를 마치고 나온 주전들을 챙기며 긴장을 낮췄다.

 

 

*

 

 

사람이 성숙해지면 그간의 경험의 집약체로 취향이라는 것이 생긴다. 고시키는 자신의 호불호도 가불가도 잘 알았다. 이미 잘 아는 것들은 곧 지루함을 선사한다. 취향껏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자신을 다듬었다. 운동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이상 머리는 깔끔하게 짧은 편이 좋고, 귀는 몇 개 뚫고 싶지만 아직 이르다. 대신 왼손 엄지, 검지, 약지에 적당히 두꺼운 반지를 꼈다. 어머니가 수놓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교복은 보통 셔츠에 가디건을 입었다. 가방부터 신발까지 학교 것이라 솔직히 심심하다.

 

그래서 고시키는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슬리퍼 한켤레를 샀다. 시험 프리미엄이 몇시간 밖에 안 남았다며 몰려와 게임에 열을 올리는 친구들 옆에서 송곳과 칼로 수공업을 하고 있자니 와타나베가 빵 반쪽을 입에 물려주었다. 고시키는 두 입에 우적우적 씹어삼켰다.

 

“대체 멀쩡한 슬리퍼에 무슨 짓을 하는거야?”

 

“링 걸어놓으려고.”

 

“한짝에만? 5개나?”

 

“응, 5개만.”

 

“대체 어디가 ‘만’이냐!”

 

게임기를 한창 두드리던 스즈키가 고개를 홱 거꾸로 젖혔다. 고시키는 제 왼쪽 귀가 드러나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히죽 웃었다.

 

“귀도 뚫을거지롱. 5개만!”

 

소우가 게임을 종료시켰다. 황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짓말이라고 해.”

 

“포기해, 소우. 완전 진심인 얼굴이야.”

 

고시키는 생글거리며 문방구에서 사온 고리를 뜯어 세 대를 달았다. 소우가 제 머리를 뜯으며 흐느꼈다.

 

“삐뚤어지면 제일 무서울 놈이 가장 먼저 사춘기가 와버렸잖아. 누구야, 누가 츠토무한테 바람 넣었어!”

 

“…배구부 중에 피어스 뚫은 선배 있긴 하잖아.”

 

할머니가 금은방을 하는 스즈키가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오호라. 고시키는 눈을 반짝였다. 스즈키는 어렸을 적-지금도 충분히 어리지만-금붙이들에 관심을 가졌다가 사내애가 무슨 장신구냐며 대차게 까인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고시키는 소파에 냉큼 올라가서 스즈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같이 뚫을래?”

 

“엥? 나?”

 

“함께 하자, 친구들이여! 너희 다섯명이잖아, 하나씩만 뚫어! 내가 모두 감당하겠노라!”

 

고시키가 다른 팔을 연극적으로 흔들며 외치자 잠시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소우가 게임기를 대충 발로 밀어버리며 물었다.

 

“위치 맞추자고?”

 

“응응. 우리 우정 영원히-”

 

불현듯 스즈키가 손톱을 세워 고시키의 귓볼을 콱 꼬집었다. 악! 고시키는 깜짝 놀라 스즈키의 손을 세게 쳐냈다.

 

“무슨 5개야. 어디 뚫으려고?”

 

“귓볼 아래쪽 하나, 옆쪽 하나, 귓바퀴 둘, 안쪽 하나!”

 

“아, 절대 무리.”

 

“응, 무리무리. 너희 게임 안 할 거면 우리 주라.”

 

착한 어린이 둘이 하하호호 웃으며 자리를 밀어냈다. 소우가 고시키를 짤짤 흔들으며 우는 소리를 냈다.

 

“츠짱을 돌려줘, 이 마귀야! 배구는 어떡하고?!”

 

“그야 우시지마 선배의 스파이크를 맞는 순간 파사삭 흩어지기야 하겠지.”

 

“윽!”

 

상상력은 좋지만 비위는 약한 스즈키가 쏠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시키를 밀어냈다. 고시키는 헹, 웃었다.

 

“안 맞으면 되지! 무협 고수가 머리 짧은거 봤냐? 그것이 ‘강함’이라는 거다-!”

 

“젠장, 멋있잖아…”

 

소우가 분하게 중얼거렸다. 그새 격투 게임을 한창 하던 와타나베가 악, 죽었어! 소리치고 뒤를 돌아봤다.

 

“어차피 소우는 할 거잖아?”

 

정곡이었다. 고시키는 가려운 곳을 긁어준 와타나베에게 히죽 웃어보인다음 타겟을 소우로 갈아탔다.

 

“충신이여, 그대에게 제일 먼저 자리를 고를 기회를 주겠노라!”

 

“야, 누가 한대?”

 

“아, 난 할래. 근데 첫번째는 말고. 할머니가 츠짱 핑계대는거냐고 할 것 같아.”

 

스즈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스즈키 할매는 고시키가 금은방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주전부리를 주머니에 밀어넣곤 했다. 동료 낙점이다. 고시키는 히죽거리며 소우에게 엉겨붙었다.

 

“아~ 둘이 하면 커플이지만, 셋이 하면 우정인데~ 낫쨩은 7개 뚫는거 어때? 아니면 장신구 갯수를 7개로!”

 

스즈키의 이름은 나나세로, 더할 나위 없이 예쁜 여자 이름이었다. 스즈키는 자기 소개를 할 때 꼭 성으로 불러달라는 말을 넣곤 했다. 의미는 일곱개의 별이다. 스즈키는 약간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풀었다. 다른 사람이 반짝이는거 7개를 몸에 달고 다니라 하면 놀리냐고 쏘아붙였겠지만 상대는 고시키였다.

 

“그냥 네가 친구를 둘 더 데려와라. 대신 만족할게.”

 

“아니, 한 귀에 7개는 좀.”

 

“5개도 많아!”

 

소우가 고시키의 귀를 잡아당기며 츳코미를 넣었다. 얘 왜 이렇게 짜증을 부리지? 고시키는 살풋 미간을 찡그렸다가 풀었고 소우의 찡그린 이마를 톡 건드렸다. 원래 눈꼬리가 올라가 있는 사나운 인상이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화나보였지만, 고시키가 보기엔 아니었다.

 

“왜 그래, 소우?”

 

“…아니, 나 이렇게 열 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냥… 진짜 무슨 이상한 바람 든 것 아니지?”

 

소우가 눈을 굴리며 물러났다. 고시키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소파에 도로 앉았다. 사춘기는 네가 제일 먼저 왔구나.

 

“나참, 농담에 스스로 넘어가버리면 어떡해? 진짜 단세포.”

 

말문이 막힌 소우는 잔뜩 얼굴을 찡그리더니 주저앉아 과자 봉지를 입에 털어넣었다. 고시키는 고무 조각을 모아 버리고 손을 씻었다. 십년이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해자가 되기 충분한, 이해자라고 생각하기 충분한 시간. 문득 궁금해지고 마는 것이다. 단 한순간도 위화감을 느낀 적이 없어? 없다면 내가 잘한 걸까, 아니면 애초에 이상했던 적이 없던 걸까.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고시키는 수건에 손을 닦고 거실로 도로 가서 게임을 하고 있는 스즈키의 등에 이마를 대고 기댔다.

 

“츠토무?”

 

“뭐랄까,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달까…”

 

“엑, 지금? 저녁도 안 먹었는데!”

 

“그럼 라멘 먹으러 가자, 라멘-! 먹고 싶어!”

 

고시키는 빙글 몸을 돌려 등으로 스즈키의 등을 꾹꾹 밀며 팔을 퍼덕였다. 잠자코 게임을 끈 와타나베가 카라스노 식당? 하고 물어왔다. 소우가 힐끔 쳐다보더니 핸드폰을 두드렸다. 고시키는 졸음을 핑계로 우스꽝스럽게 흐느적거리며 가까운 친구에게 늘러붙었다.

 

“고, 고-”

 

 

역시 생일선물이 문제였나? 고시키는 한껏 응석을 부리고나서야 평소와 같은 기색으로 돌아온 소우를 잠깐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가 타인에게 전하는 기념 선물은 책이었다. 잘 아는 책도, 내용을 잊은 책도, 펼쳐본 적조차 없는 책도 있었다. 딱히 읽어주길 바라며 주는 것도 아니어서 독후감이 바로 다음날에 전해질 때도 있었고 몇 년 후에 갑자기 얘기가 나올 때도 있었다. 매년 무슨 선물이 책이냐며 툴툴거리는 아이들이 꼬박꼬박 책장 한켠에 그의 선물을 모아둔다는게 꽤나 즐거웠기에 곧잘 서점을 들락거렸다.

 

표지 낚시도 슬슬 해볼까. 문제집 표지를 뜯어서 안쪽에 야한책을 붙여놓는다든가. 반대도 재밌겠다. 고시키는 입시 블록으로 넘어가 내키는 대로 손을 뻗어 문제집을 훌훌 훑었다. 성의없이 탁, 내려놓은 문제집 밑으로 누군가의 손이 쑥 들어왔다. 밑의 것을 집어보려고 했던 듯했다. 고시키는 당연하게도 고교 입시 코너를 구경하고 있었다. 잽싸게 문제집을 다시 들며 고개를 들자 썩 곱상하게 생긴 옅은 인상의 남학생이 미간을 찡그렸다. 눈빛을 직역하자면, ‘사과 안 하냐?’였다.

 

“아, 죄송합니다.”

 

고시키는 살포시 문제집을 옆에 내려놓고 가방을 뒤졌다.

 

“아니, 괜찮…”

 

“이거 드세요.”

 

사탕을 한주먹 꺼내 내밀자 앞머리를 사선으로 자른 남학생, 시라부가 눈을 굴렸다. 그냥 무시할걸 꼬라봐서 괜히 귀찮아졌다는 표정이었다. 시라부는 냉큼 받아 제 가방에 쏟아넣으며 그럼, 하고 고개를 까딱인 다음 빠르게 사라졌다. 표정이 너무 재밌어서 괜히 치근덕거렸던 고시키는 소리없이 웃고 사탕 하나를 제 입에 까넣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친 여자 배구부같은 인상이었다. 손이 딱히 공부만 하는 곱상한 샌님같지도 아니었고. 고시키는 그쯤에서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흩어버리고 얼마 전 소우의 생일에 줬던 고전을 찾으러 갔다.

 

수레바퀴 아래서. 근데 제목 의미가 뭐더라? 일단 주인공이 삐-하는 결말인건 기억이 나는데 고전이 늘 그렇듯 특징적인 몇 장면만 떠올랐다. 하여간 시골에서 그린듯한 모범생으로 자란 주인공이 신부였나 목사였나 하여간 종교 권위자의 추천으로 명문 신학교를 가서 특색 없는 노잼 모범생 생활을 하다 정반대 타입의 똑똑이와 어울려다니며 변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책 앞부분을 넘겨읽던 고시키는 갑자기 뉴런이 손에 손잡고 저를 가운데에 몰아넣고 히히 못가, 하는 듯한 직감을 느꼈다. 설마. 아니지? 미야기가 시골이라 배경이 비슷하다지만, 내가 아무리 모범적이라지만… 고시키는 그 뒤로 한 열가지쯤 세보다가 소우라면 이 중 절반쯤은 캐치했겠다 싶어 이마를 짚었다. 교양있는 SOS 신호로 보였을까. 내가 할 만한 짓이긴 하네. 약간 감탄스러울 정도야. 다음에 심심하면 읽고 생각해볼까. 고시키는 자신에게 보내는 메일로 메모를 하고 폴더를 닫았다.

 

자연스럽게 남의 고뇌를 스루해버렸잖아. 그것도 예비 10년지기 친구인데. 고시키는 혼자 곤란한 미소를 짓다가 서점에서 나왔다. 알아챘으니 신경을 쓰자.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이제 와서 책에 대해 떠보거나 한들 의심이나 더 사지 않을까. 살살 꾀어서 착각으로 치부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착각이 아니고, 누군가를 좌지우지하는건 썩 즐겁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어지럽게 섞여든다. 고시키는 앞머리를 후 불으며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피어싱이나 뚫을까?

 

“얼-레. 아직도 안 뚫은 거야?”

 

여러 개의 피어싱, 밝은 금발에 시원하게 올라간 눈을 가진 양아치 여고생이 골목에 기대 욥,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예전에 몇 번 피어싱샵을 기웃거리던 고시키를 가게로 밀어넣고는 갈아끼우러 왔는데 둘 중 뭐가 낫냐며 물어온 넉살 좋은 누님이었다. 마찬가지로 넉살 좋은 고시키는 그 자리에서 농담을 주고 받다가 들여보내준 선물이라며 제 취향의 피어싱을 몇 개 사서 들려줬었다.

 

“오늘 뚫어버릴까요.”

 

고시키는 허물없이 웃으며 가게 문을 열었다. 사탕을 까득 깨문 그녀가 막대를 퉤 뱉고 짤랑짤랑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진짜? 결국 결심? 와우!”

 

먼저 들어가 문을 잠깐 잡아준 고시키는 네네, 결심입니다- 하고 길을 텄다. 그다지 연이 깊은 사람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편한 관계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너 말이야, 꽤 모범생인 것 같은데 피어스 뚫어도 괜찮겠어?”

 

“뭐어… 글쎄요?”

 

고시키는 깔끔한 셔츠 칼라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옆에 선 사에코가 노골적으로 고시키를 훑어보았다. 검정 반팔 셔츠에 청바지,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흰색 운동화는 잘 관리된 느낌이 강했다.

 

“아무리 봐도 초-모범생이고, 다른 애들도 다 너 모른다고 하고, 왠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인 애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사에코, 연애는 밖에 나가서 해라! 번잡시럽다!”

 

“아! 누가 이 쪼끄만 거랑 뭘한다고요?!”

 

“니보다 한참 크구만 뭘! 대화는 밖에서 해라!”

 

“아니, 일단 저는 손님인데요.”

 

고시키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제 피어싱을 다 갈아끼운 주인장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라, 완전 아구만. 사에코 니 아 데리고 뭐하나?”

 

“베, 아 돈은 잘 받으시더니! 이따 봐요!”

 

혀를 쭉 내민 사에코가 고시키의 손목을 휙 낚아채더니 선수 못지 않은 힘으로 그를 질질 끌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제 바이크부터 확인하고 안심하며 기대 섰다.

 

“담배도 피우십니까?”

 

“어? 으응, 뭐.”

 

딱 담배 말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사에코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고시키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고 손을 팔랑거렸다.

 

“당기면 피우세요. 저는 사탕이나 먹을게요.”

 

“너 학년이니?”

 

사에코가 황당한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능글거리는게 딱 익숙해보이는데 불량아는 또 아니다.

 

“1학년이에요, 누님-”

 

고시키가 같잖은 애교를 섞어 말하자 사에코가 제 팔을 긁었다.

 

“너 누나 없지?! 난 네 또래 남자애들은 다 내 동생처럼 보인단 말이야!”

 

이거 보이냐며 소름돋은 팔뚝을 가리킨다. 고시키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으며 사탕을 입에 물었다.

 

“이상하다, 그래도 연하 환장하는 애들 몇 있어서 알만도 한데. 어디 학교야?”

 

“아, 시라토리자와요.”

 

“켁, 어쩐지! 명문생이었어!”

 

거기 애들 밖에 돌아다니지도 않으니 알리가 있냐며 삐죽거리던 사에코가 엑, 하며 고개를 퍼뜩 들었다.

 

“기숙사제잖아, 거기?”

 

“음, 뭐. 누나는 어디 학교신데요?”

 

“카라스노. 근데-”

 

“오, 거기 작은 거인 있죠? 알아요?”

 

고시키는 화제를 돌렸다. 사에코가 흐흠, 하더니 미묘하게 화색인 낯으로 말했다.

 

“솔직히 알진 않아! 스포츠맨하고 양아치는 극과 극인 법이니까!”

 

“우와, 그거 여러모로 난감한 발언.”

 

“뭐야? 너 스포츠해?”

 

고시키는 어깨를 으쓱하고 사탕을 입에서 뺐다.

 

“그냥, 듣자하니 다가가보고 싶었는데 그런 이유로 먼발치서 보기만 했다는 말로 들려서요?”

 

“헛소리!”

 

사에코가 입을 떡 벌리고 서서 목각인형처럼 입을 움직였다.

 

“진짜 헛소리!”

 

빨개진 얼굴이나 식히고 말하지. 고시키는 웃음을 참고 사탕을 입에 넣으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뭐어, 저는 잘 모르니까요. 아니면 됐고요.”

 

“…너 진짜 끝내주게 내 친구 취향이다. 여자친구라든가 있어?”

 

내 나이에 고등학생을 만나면 어느쪽이든 곤란하다. 고시키는 노골적으로 도망각을 잡으며 눈을 굴렸다. 사에코가 호탕하게 웃었다.

 

“뭐, 곧 졸업하는데 신입생 만나면 안 되지!”

 

“네에~ 동급생 만나세요, 누님.”

 

고시키가 눈을 찡긋거리자 식어가던 얼굴이 다시 폭발했다. 사에코가 순식간에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이더니 바이크를 타고 사라졌다. 모범생은 학교나 가라면서. 기분 전환이 된 고시키는 사탕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피어싱 뚫을거냐?”

 

담배를 피우러 나온 가게 주인이 담배를 주머니에 숨기며 여상하게 물었다. 고시키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저었다.

 

“다음에 올게요.”

 

어쩌면 나는 어떤 기억거리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위하여, 기억되기 위하여. 부유하지 않고 제대로 땅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확신을 위하여. 어쩌면 눈을 감고 뜨는 사이에 날아다녔을지도 모르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 몇번 켰다 끄다가 도로 넣었다. 집에 가야지. 가서 공이나 만져야겠다.

 

“무슨 고민 있니, 츠토무?”

 

“응, 엄마. 곧 대회예요-”

 

예민한 감각이 전신을 훑는다. 신경이 닳는다. 고시키는 어머니에게 생긋 웃어보이고 방으로 돌아갔다. 손가락 푸쉬업을 하고 샤워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아, 미치겠네…”

 

문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식 새끼 상태가 이상한 것 같으면 방문 좀 서성거릴 수도 있지. 잠근 문 따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문은 열어두었다. 작은 끼익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약간 따뜻한 손이 머리를 만졌다.

 

“좋은 꿈 꾸렴.”

 

선의를 경계하는건 대체 언제 그만둘 수 있을까.

 

 

*

 

 

“소짱- 오늘 너희 집에서 잘래.”

 

방학이 시작되었다. 고시키는 다른 반인 소우와 복도에서 만나자마자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소우가 곁눈질하더니 헹 웃었다.

 

“사춘기.”

 

피어싱 선언 이후로 걸핏하면 사춘기냐고 놀린다. 고시키는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며 말을 줄줄 받았다.

 

“맞아, 사춘기. 끝도 없는 예민함. 모자갈등. 부자갈등. 갈등에서 피어나는 아이덴티티-”

 

“갈등? 네가?”

 

역시 그만둘까. 웃으면서 팔을 빼자 소우가 황급하게 어깨에 팔을 둘렀다.

 

“취소, 취소! 신작 게임 사서 가자!”

 

고시키는 잠시 찡그리며 웃었다가 얼굴을 폈다. 착해가지곤.

 

“좋아, 도전을 받아주지.”

 

소우는 허접이 무슨 도전을 받냐고 하는 대신 씩 웃었다. 고시키의 게임 실력은 말그대로 허접했다. 5시간을 연달아 하고 나니 저녁이었다. 그러면서 먹은 과자 봉지가 한 보따리였고 부스러기가 한 움큼이었다. 고시키는 GG를 외치고 벌렁 누웠다가 벌떡 일어났다. 게임을 정리하던 소우는 곧바로 청소하는 제 친구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깔끔하기는.”

 

“너희가 지저분한, 야, 게임기 닦고 넣어야지.”

 

봉투에 과자 봉지를 넣고 묶은 고시키는 냅다 손을 뻗어 게임기를 낚아챘다. 어차피 멀티용이라 돌고 돌아 다시 제가 만질 물건이다.

 

“네가 엄마냐. 잔소리는.”

 

“으응, 우리 아기는 잔소리가 필요할 나이니까.”

 

“너는…”

 

소우가 머뭇거렸다. 게임기를 다 닦고 바닥을 닦아낼 때까지. 고시키는 바닥에 앉아 인내심 있게 되물었다.

 

“아직 생각 중?”

 

“…너희 집은 잔소리 같은 것도 없을 것 같달까, 싶어져서.”

 

그들 주변의 아이들은, 종종 부모에게서 고시키의 반만 닮으라는 둥의 잔소리를 듣곤 해서 한때 고시키를 멀리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시키는 변함없는 태도로 대해서 소우는 종종 기분이 나빴다. 야, 뭣하러 잘해줘? 하지 마! 해도 고시키는 난감한 얼굴로 웃곤 했다.

 

“으음, 그러니까… 그렇긴 하지? 형제를 더 낳으셨으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그는 또래와 달리 지극히 초연했다. 동생이 있었으면- 하는 흔한 말을 저렇게 하는 또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고시키가 웅크려 앉아 제 손깍지 위로 머리를 숙였다.

 

“응, 역시 어렸을 때 동생을 더 졸라볼 걸 그랬네. 나보다 훨씬 귀여웠을텐데.”

 

“츠토무.”

 

소우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시키가 으응? 하며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솔직히, 난 바보라 네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아니, 일단 그렇게 바보 아니고.”

 

너 성적 좋잖아- 하는 말을 줄줄 잇기 전에 소우가 말을 끊었다.

 

“들어!”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인 고시키가 웅크린 몸을 펴고 바르게 앉았다. 들으란다고 바른 자세부터 하는 거냐는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지만 소우는 일단 말을 계속 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뭔가 가슴이 엄청 아파. 아직 이게 뭐 때문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근데! 그게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야. 그러면 너만 계속 아플 것 아니야. 그런건 싫어. 분명 네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고시키는 으으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알겠어. 이해했어.”

 

“그럼… 집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냐?”

 

긴장 탓에 더욱 삐죽 올라가 있던 눈매가 내려간 소우가 우물쭈물 물었다. 고시키는 손을 물티슈로 닦고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전혀? 아무 일도 없어.”

 

“뭔가, 너무 플래그 같아. 뭔가 그래. 만화에서 본 패턴이야!”

 

“아하하, 오타쿠 같아! 뭔데?”

 

고시키는 봉지를 서로 묶어 버리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소우가 벌떡 일어나 봉투를 낚아챘다.

 

“평소처럼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패턴. 손님은 놀기나 해!”

 

“어어, 소짱. 그럼 경기 비디오 보자.”

 

고시키의 등을 밀어 제 방에 넣은 소우가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 승낙했다. 고시키는 희희낙락 소우의 책장을 뒤져 최근 프로 경기 비디오를 꺼냈다.

 

*

 

“앗, 카게야마 군 안 보이네~ 화장실이라도 갔나?”

 

고시키는 언뜻 경박할 정도로 팔랑거리는 태도로 체육관에 들어갔다. 어느덧 세번째 인터미들이다. 어엿한 주장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어깨에 손이 날아들었다.

 

“남의 세터는 신경 끄고 우리 세터나 챙기지?”

 

“그야 유라 군은 매일 보니까- 아따따, 아파!”

 

고시키의 등을 힘껏 꼬집은 소우가 손을 탁탁 털며 주전들의 컨디션을 챙겼다. 고시키는 눈을 굴리며 다른 학교 선수들을 스캔하다 키타가와의 에이스와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었다. 눈인사를 한 에이스가 옆에 있는 미들과 몇마디 말을 나눴다. 어쩐지 반년 사이 분위기가 많이 굳은 것 같았다. 원래도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세터의 분위기가 나날이 살벌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겠지. 고시키는 제 앞머리를 입으로 한차례 불고 정리하며 웜업을 하러 갔다.

 

결승은 아니나 다를까 키타가와제1중과 붙게 되었다. 다만 분위기는 아주 정반대였다. 연계 중심이면서 살얼음판이라니. 정말이지 재원이 아까웠다. 고시키는 블록을 손쉽게 쳐날리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저쪽 에이스는 그야말로 죽상을 쓰며 블록을 뛰더니 제 팔에 맞고 날아간 공을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팔로 요청도 안해, 팔에 힘도 제대로 안 줘. 코트에서 시위하나?

 

“지금 뭐하는 거야. 이딴식으로 할 거면 때려치우지?”

 

간신히 심판에게 걸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지만, 감독이 즉시 타임 아웃을 올렸다. 고시키는 소우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감독이 끙, 소리를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고시키의 어깨를 짚었다.

 

“왜 그러냐, 고시키? 잘하고 있었는데.”

 

그야 당연히 나는 잘하죠. 고시키는 말을 한번 삼키고 머리를 쑤석였다.

 

“당연히 저는, 우리 팀은 다 잘해요. 근데 쟤들은 잘하면서 제대로 안 하잖아요!”

 

“야, 야. 들린다.”

 

스즈키가 슬쩍 몸으로 그를 가려주며 목소리를 낮췄다. 고시키는 있는대로 짜증을 부렸다.

 

“들으라 그래. 짜증나, 진짜!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쉬우면 좋은거지. 3일 내내 지치지도 않냐. 종일 날아다녔으면서.”

 

수분 보충하고 정신이나 차리라는건지 내미는 물병을 얌전히 입에 물기 무섭게 타임 아웃이 끝났다. 코치가 허허, 웃더니 그렇다고 텐션 너무 낮추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아주 납작쿵으로 부숴버리고 올테니 걱정 마세요.”

 

성격 나쁘게 투덜거린 고시키는 다음 서브인 유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난하게 들어간 서브를 시작으로 경기가 재개되었다. 키타가와의 속공은 토스가 빠른 감이 있었지만 그만큼 블록이 따라가기 어려웠고, 점차 난타전으로 이어졌다. 그 말은 에이스가 활약할 때라는 의미였다. 고시키는 점프 서브를 날카롭게 넣고 기분이 째졌다.

 

상상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네트 건너에서 세트된 공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더니 굴렀다.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일대에 정적이 돌았다. 세터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고시키는 너무 황당해서 눈을 크게 뜨고 뚫어지게 상대 코트를 쳐다보기만 했다. 세터의 폭언이 심하긴 했다. 경기에서조차 거칠게 명령하는걸 보면 평소에도 심하긴 했을 거다. 그들의 대답은 늘 묵살되었겠지.

 

그래서, 경기에서 그들의 답을 드러낸 것이다.

 

“카게야마, 교체해라.”

 

감독이 선고했다. 제왕이 버려졌다. 그순간 굳었던 고시키의 뇌가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쟤는 시라토리자와에 못 와. 원래 키타가와제1중 출신이 시라토리자와에 오는 경우는 적었지만, 저 제왕의 실력이라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에이스에게 외면받는 세터 같은거, 전혀 쓸모 없잖아. 이 사건으로 세이죠에 갈 생각도 추호도 못하겠지. 고시키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로테이션을 돌렸다. 집중이 흐트러졌다. 코트의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쇼타, 서브 실수하지 마.”

 

“네, 넵!”

 

2학년 세터는 분위기에 눌렸는지 전형적인 ‘들어가는 서브’를 넣었다. 서브 연습 더 시켜야겠네. 고시키는 타이밍이 어긋난 스파이크를 블록하고 한점 더, 를 외쳤다.

 

3년 중 가장 엉성한 결승전이 끝났다. 기분이 개판이다. 그래도 고시키는 방글거리며 베스트 스파이커 상을 받고 관람하러 오신 할머니 앞에서 트로피를 라이온킹한 다음 회식으로 빠졌다.

 

“자, 다들 수고했다. 먼저 맛있는 밥을 먹게 해주신 OB회와 학부모님들께 감사 인사-”

 

“감사합니다!”

 

몇십 명의 떼창에 홀이 쩌렁쩌렁 울렸다. 감독은 알아서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코치와 함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저쪽은 이제부터 사회생활 시작이겠구만. 그래도 고등부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OB회의 관심은 보통 고등부에 더 쏠리니 말이다. 밥을 잘 먹여주는건 주는거고 딱히 인재 이탈이 되지도 않으니 관리랄게 없다.

 

생각을 끊은 고시키는 주전 테이블에 올라가 트로피를 들고 조공을 바쳐라, 충복들아! 라고 외쳤다. 그가 베스트 스파이커 상을 받을 수 있을지를 두고 내기했지만 사실상 강탈이나 다름없었다. 상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즈키가 키득거리며 사진을 찍고 제일 먼저 한봉지를 트로피에 던져 넣었다.

 

“잠깐, 다 던지지 마!”

 

네 봉지까지는 운동신경으로 받아냈던 고시키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과자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축하드려요, 선배!”

 

다시 한바탕 축하를 받은 고시키는 파하하 웃고 웃음기를 짝 지운 얼굴로 모 정치인 흉내를 내며 인사했다.

 

“후배들 앞에서 못하는게 없어!”

 

소우가 비명을 지르며 고시키의 발목을 붙잡고 뜯어말렸다. 한가득 과자와 트로피를 안고 있던 고시키는 어어 소리를 내며 몸을 기우뚱거렸다.

 

“야, 넘어진다!”

 

소우 옆에서 사색이 되어 소리친 스즈키가 벌떡 일어나 1차로 몸을 받쳤다. 고시키는 중심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냥 그릇들을 걷어차며 넘어졌다. 2차로 그를 받은 소우가 천천히 숨을 터트렸다. 양팔을 콱 붙잡힌 고시키는 도로 들어오는 감독진과 눈이 마주쳐서 수줍게 웃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니?”

 

코치가 황망하게 물었다. 고시키는 발끝에 힘을 밀어넣으며 소우에게 기댄 채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그거죠. 카미노야마 군이 결국 제 발목을- 아야야!”

 

잡은 팔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던 소우가 삐걱거리며 고시키를 탁자에서 내렸다. 다리며 신발이며 음식 범벅이 된 고시키는 일단 내려왔다.

 

“나 옷 갈아입어야할 것 같은데. 버스에서 가방 좀 가져다줄래, 소우? 부탁해.”

 

“…어. 이걸로 먼저 닦고 있어.”

 

져지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내 던진 소우가 휙 자리를 벗어났다. 수십명 중에 밥을 제대로 먹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연장자마저도. 고시키는 소리 나게 한숨을 쉬고 트로피를 스즈키에게 건넸다.

 

“‘베스트 스파이커’를 부탁한다, 전우여.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의지를 이어다오!”

 

“잠깐?! 나 리베로라고?!”

 

“‘베스트 스파이커’를 부탁한다-!”

 

“아, 정말-”

 

스즈키가 제 머리를 마구 쑤석였다. 왼쪽 귓볼에 달린 피어싱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렇게 미야기 현은 내분으로 멸망했다, 는 싫으니까! 제대로 얘기하고 와!”

 

“멸망까지 가는거냐고?”

 

고시키는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내젓고 감독진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코치는 위장을 곧 뱉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의 기분이 매우 언짢아보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고시키는 코치의 위장에 애도를 보내고 화장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다리를 닦고 신발을 보며 고민에 빠질 즈음 전화가 울렸다.

 

“응, 소짱.”

 

-너 어디야? 화장실 아냐?

 

“아, 아니. 다른 애들도 화장실 가야할테니까, 아래층.”

 

-매번 배려가 과해.

 

투덜거리듯 내뱉은 소우가 전화를 뚝 끊었다. 그런 점에도 불만이 있었냐고. 고시키는 잠깐 웃고 손을 씻었다. 곧 소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땡큐~”

 

냉큼 가방끈을 당겨 받은 고시키는 어깨에 가방을 매고 웃었다.

 

“잠깐 밖에서 기다려줘?”

 

“오늘 무슨 팬티 입었는지도 아는데, 새삼.”

 

“그래서 그걸 굳이 보겠다는 의미…?”

 

소우가 냉정하게 문을 닫았다. 놀림이 안 통한다. 고시키는 흐음, 소리를 내고 냉큼 바지를 갈아입고 양말과 신발을 갈아신은 다음 피어싱을 갈아끼웠다. 연습하거나 할 때는 일일이 실리콘으로 갈아두는 탓에 피어싱보다 실리콘을 끼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다들 그걸 바보 취급했다. 사실 그마저도 즐거워서 아랑곳 않았다. 바보나 단세포는 나쁘지 않다. 바보나 단세포 취급 당하는 것은, 전혀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고시키는 문을 열었다.

 

“가방 갖다두러 갈까?”

 

“…그래.”

 

소우가 제 뒷목을 긁으며 눈을 피했다. 고시키는 빙긋 웃고 가방을 매고 소우의 소매를 당겼다. 계단으로 내려가자고, 6층을 내려가며 진득하게 얘기나 하자는 뜻이었다. 한층을 내려가는 동안 계단은 내딛는 소리만 울렸다.

 

“매번 잘도 말하는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버렸어, 방금.”

 

“으응? 무슨 의미?”

 

고시키는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 끝을 올렸다. 소우가 내려가는 속도를 늦췄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망설임이 행동으로 드러난 듯했다. 고시키 또한 여과없이 제 생각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엷게 웃는 낯으로 걸음을 멈췄다.

 

“매번 그렇게, 혼자 여유가 넘치잖아. 네가 우리들을 놀아주고 있다고 생각해버려.”

 

소우가 토해내듯 말했다. 매번 그래, 너는. 늘 여기에 없는 듯이.

 

그 뒤로 두서 없는 낱말의 향언이었다. 고시키는 난감하게 뺨을 긁으며 신중하게 그것들을 주워담았다. 하나같이 투박하고, 크고, 더없이 빛난다. 갈고닦지 않은 감정의 원석들이다. 그 끝에서, 꾸역꾸역 퍼올린 기색이 만연한 목소리가 울렸다.

 

“발목 잡고 싶지 않아.”

 

네가 언제 내 발목을 잡았다고? 고시키는 곧장 머리를 굴렸다. 방금까지 경기를 뛰고 있었으니…

 

“야! 분석하지 마, 누가 해결해달래?! 그냥 내가 그런 기분이 든다고!”

 

두 계단 위에서 소우가 냅다 멱살을 잡자 발끝이 약간 들렸다. 사나운 얼굴이 엄청났다.

 

“매번 그렇게 간단하게 대신, 아, 나 진짜 말 잘 못해. 형편없어. 진짜…”

 

“아니, 일단 소우 그렇게 말 못 하지 않고-”

 

“배려도 하지 마! 너는 좀 형편없는걸 형편없다고 좀더 제대로 말해! 너에 비하면 다, 다 형편없는게 맞잖아? 에이스라면 좀더 요구하라고! 우리가 따라가지 못해도!”

 

소우의 시선은 빗겨나가 계단 아래의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고시키는 발끝을 든 채로 소우의 손목에 손을 가볍게 감쌌다.

 

“음, 뭔가… 소짱 말을 다 이해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의미불명이지만 말이야?”

 

소우의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고시키는 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뭔가 엄청 기뻐, 지금!”

 

웃음이 자꾸 샜다. 소우는 뭐가 웃기냐고, 웃지 말라고 몇 번 틱틱거리더니 결국 웃었다.

 

뭐야, 이거. 제대로 오간 말도 없고, 이해는 하나도 안 됐고, 그걸 둘다 아는데도. 즐겁잖아. 고시키는 배고프니까 그냥 다시 돌아갈까 물었다. 그렇게 뒤늦게 포식을 했다.

 

“3대3 하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떨어진 제안에 3학년들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어울리긴 하지만 붙어다니는 정도는 아닌 몇몇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엄지를 올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미 뱉은 말이 있는 소우는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비주전 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빠르게 눈짓이 오갔다. 이미 붙잡힌 희생양에게서 구조 신호를 받은 유라 쇼타는 쌍따봉을 날리며 선배님들 즐거운 시간 보내십쇼 하고 쏠랑 내뺐다.

 

“뭐, 2대2도 괜찮고. 들어가자!”

 

고시키가 트로피가 삐죽 튀어나온 가방을 흔들거리며 뒤돌자 못 이기겠다는 말이 투덜투덜 뒤에 붙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짜증을 냈던 거야, 츠토무?”

 

배구공을 꺼내온 스즈키가 가볍게 탕탕 튕기며 물음을 던졌다. 고시키는 팔짱을 끼며 턱을 괴었다.

 

“아쉬워서…?”

 

“이번 경기가 엉망이긴 했지만, 전국에 가는데 대체 뭐가 아쉬워?”

 

“에, 그렇게 물으니까 갑자기 전혀 모르게 되어버렸어.”

 

“츠토무는 꽤 제왕한테 정복욕을 불태우고 있었달까, 그런 느낌이… 뭔가 지금 경기 후 수다 타임이야? 부실 갈래?”

 

“찬성-!”

 

“아, 그래도 3대3은 할 거야.”

 

고시키는 생글거리며 제 동료의 희망을 작신 꺾었다. 그래도 자판기 음료를 잔뜩 뽑아 부실에서 과자 봉지를 터트려 먹고 던지며 수다를 떨었다. 전국에서 상대해본 학교 얘기라든가 고교 진학해서 배구부 관둔 선배 여친 생겼다더라 같은 얘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휘리릭 지났다.

 

“그래, 슬슬 3대3 팀 짜자.”

 

“나 방금까지 점프 잡지 밀려서 모아두고 있다는 얘기 했던 것 같은데, 분명.”

 

소우가 해산하고 점프를 몰아보든 말든 딱히 알 바 아니다. 고시키는 방긋 웃으며 씹었다.

 

“그래, 3대3 하자.”

 

“뭐… 그래.”

 

“포기 너무 빨라!”

 

“좀더 성실하게 말려줘!”

 

“오케이. 라이트, 리베로, 미들 한 팀.”

 

고시키는 마침 인원이 맞는 츳코미조를 한데 묶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례로 카미노야마 소우, 스즈키 나나세, 와타나베 렌이다. 소우가 그렇잖아도 수비를 강화하고 싶었다며 쓰레기를 모아 버렸다. 고시키를 제외한 인원들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오늘 3대3이 심상치 않다는 눈물 섞인 예측을 했다.

 

“블록 허접해!”

 

고시키는 소우의 블록 한가운데를 뚫어버리며 소리쳤다. 땀에 이마가 젖은 소우가 악 소리를 내질렀다.

 

“미안하게 됐네, 정말!”

 

“아니, 일단 미들이 아니잖아.”

 

그럭저럭 합격선으로 리시브를 올린 스즈키가 질린 목소리를 냈다. 네트 가까이 돌아간 공을 소우가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오픈 토스를 올렸다. 고시키는 블록을 모으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스트레이트가 주력인 고시키와 달리 와타나베는 크로스를 주로 쳤다. 항상 반쯤은 덤덤하던 와타나베의 눈썹이 들렸다.

 

“3단이냐!”

 

공은 고시키에 팔뚝에 맞고 강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시키는 웨이- 하며 그를 살살 긁었다.

 

“방금 분명 힘 빠졌어, 렌짱. 3단이라고 포기하면 안 되지!”

 

“하아? 대충 넣어도 뭐라고 했을 거잖아?”

 

“사실 그럴거라고 예상했어. 실은 렌짱도 스위치 켜졌었구나~ 뜨겁네~”

 

“너허는, 지치지도 않냐…?”

 

유일하게 예선 내내 고시키와 함께 전 경기를 뛴 소우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네트를 붙잡았다. 고시키는 머리카락 더듬이 느낌표가 보일 정도로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소짱 엄청 너덜너덜하네! 쉬자!”

 

“무슨 종이 인형인 것처럼 취급하지 말라고?! 3일 내내 경기 제대로 소화했으니까-”

 

“자자, 둘다 지금 텐션이 위험해. 숨 좀 돌려.”

 

공을 주워다 옆구리에 낀 스즈키는 한창 열이 오른 친구들에게 물병을 휙휙 던졌다. 그때, 체육관 문이 쾅 열렸다. 박력있게 문을 연 코치의 안경이 비뚤어졌다.

 

“너희 지금까지 집 안 가고 뭐하니?”

 

회식 중에 전력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고시키는 아차 했다. 연락을 깜빡한걸 보니 모두들 열이 오르긴 오른 모양이었다. 코치는 그들을 모두 밴에 태우고 집앞에 데려다주며 일일이 고개를 숙였다. 술집 특유의 냄새가 폴폴 났지만 다같이 한마음으로 묵인했다.

 

“저어, 제 감독 소홀이니까요. 그으… 데, 데송, 아니-”

 

결국 술기운을 견디지 못한 코치의 혀가 꼬였다. 고시키 부인의 낯이 차가워졌다.

 

“냉수 한 잔 내드릴테니 드시고 가세요.”

 

“네, 네에…”

 

고시키는 뜨뜻미지근한 시선으로 민망해 죽으려고 하는 코치를 쳐다보았다. 참 사람이 순하고 어리고… 딱 술 먹고 멀쩡하게 굴지만 필름은 끊기는 과처럼 보였다. 과연?

 

“아, 코치님. 슬슬 입시 시즌인데 스포츠 추천 들어오는거 있으면 알려주세요.”

 

“어?”

 

약간 열이 있는지 아리송할 정도로 혈색이 돌던 코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달아났다. 그는 취했나봐, 잠들었나봐 같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부인이 내온 냉수를 원샷했다. 끝끝내 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는지 코치는 예의있게 인사하고 차를 타고 떠났다.

 

“다행이네, 술이 깨신 모양이야. 자아, 들어가자.”

 

고시키 부인이 살풋 웃으며 손짓했다. 고시키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발을 뗐다. 집안으로 한걸음씩 들어갈 수록 몸이 축축 쳐졌다.

 

죽은 듯이 자고 어김없이 일찍 집을 나섰다. 새벽 공기는 기분 좋다. 몸이 지쳤는데 오히려 정신이 맑은 체하며 붕 떴다. 살짝 취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취한게 맞을지도 몰랐다. 고시키는 누구도, 이제는 자신도 어느정도 모르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살랑살랑 걸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교문 앞에 누군가 엷은 분홍색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저기, 받아주세요!”

 

소녀가 한손으로 편지를 불쑥 내밀더니 깜짝 놀라 우산도 내밀어 기울였다. 고시키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마음은 고맙지만…일단 편지부터 받아야겠지. 편지를 한손으로 건네받자 우산이 천천히 뒤로 빠졌다. 그런데 딱히 더 들리지는 않아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음… 고마워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 아니, 괜찮아요.”

 

“마음은 고마운데…”

 

고시키는 상대의 우산끝을 손끝으로 살짝 잡아당기며 걸음을 뗐다.

 

“그래도 너무 일찍 나오진 말아요. 비도 오는데 춥잖아요.”

 

우산을 살짝 당겼다 놓자 소녀는 우산을 천천히 들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확 가렸다. 고시키는 작게 웃음 소리를 내며 우산을 다시 당겼다 놓고 몸을 틀었다.

 

“나 우승한거 알고 축하해주러 일찍 나온거예요?”

 

“아, 네! 본선 절대로 보러갈 거니까요! 제가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선배가 최고였을거라고 생각해요…”

 

부끄러운듯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기어들어갔다. 닭살이 돋을 정도로 노골적인 동경이었다. 분위기가 미묘해지기 전에 하하 웃었다.

 

“고마워요, 후배님. 연습 힘내야겠네요. 그리고-”

 

편지를 가방에 집어넣은 고시키는 곱게 넣어둔 빵 봉지와 초코바를 꺼내 우산 너머로 건넸다.

 

“밥 못 먹고 나왔죠? 이거라도 먹어요.”

 

“앗, 감사합니다…”

 

“편지 고마워요.”

 

우산 밑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배꼽인사를 받았다. 고시키는 곤란한 웃음 소리를 내고 젖은 손을 거뒀다. 편지 받기에도 요령이 생길 수 있었다. 그건 사랑이나 헌신의 대상이 되는 것과 비슷했다. 동경이든, 사랑이든, 헌신이든 결코 온전히 돌려줄 수 없다는 점에서 그에겐 그다지 달리 느껴지지 않았다.

 

무겁지 않은가? 가끔 듣는 소리다. 사실 그렇다든지, 대답하지만 솔직히 무거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무언가를 기대할 만큼 여유 있는 사람들의 기대는 무겁지 않다. 저버린다고 해서 뺨을 때린다거나 하지 않는다. 세상은 넓으니 그저 돌아서면 되므로. 등지면 곧 세상에서 가장 멀리 있게 된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면 된다. 함께 남아 미련을 한껏 떤다 한들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여럿이 될 뿐이다.

 

그러니 부디, 기대를 꺾는 날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그전까지 최선을 다할테니. 고시키는 체육관 가운데 홀로 서서 공을 높이 올렸다. 높게, 높게.

 

부활동 시간 직전에 출근한 코치는 위궤양이 시작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줄곧 달라붙는 시선에 등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옆에서 토스를 올리던 소우가 살짝 손목을 당겼다.

 

“코치 왜 저래?”

 

“음… 음주운전 때문인가?”

 

“엑, 역시?!”

 

어쩐지 이상한 냄새가 났다고 말하려던 소우는 몰려드는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고시키는 손을 휘휘 젓고 연습을 재개시켰다. 전국이다, 얘들아. 우승해야지? 흥얼거리듯 내뱉는 말에 시선이 몰렸다. 중학교의 전국 배구 대회는 1년에 한 번 있고, 얼마나 운 좋게 좋은 재능들이 한데 모였느냐로 승패가 갈라진다. 작년에는 미야 쌍둥이에게 져서 4강에 그쳤다. 그러나 4강에 오른 학교 중 2학년 주력인 학교는 시라토리자와밖에 없었기에 상당한 성과였다. 체질 개선은 진즉에 끝났다. 모두가 의심치 않는다. 이 에이스가 요구한다. 헌신을 올려라.

 

시라토리자와 중등부 배구부의 코치는 손 대지 않아도 매끄럽게 돌아가는 체육관을 보며 살짝 물러나 있었다. 시라토리자와 고등부 스타일은 감독과 코치의 철권 통치 하에 운동하는 기계를 굴리는 것이지만, 중등부는 좀더 재능을 풀어놓는 것에 가까웠다. 굳이 부추기지 않아도 알아서 불타오르는 아이들은 살짝살짝 손대주기만 해도 바른 길로 달려간다. 이번 세대는 유난히 매끄러운 축에 속하기도 했다. 전적으로 에이스인 주장과 받치는 부주장 덕분이다.

 

“이야, 역시 제 선배들을 많이 닮아가네요. 특히 카미노야마 군 말입니다.”

 

“어떤 압도적인 재능은 경외를 낳는 법이지. 둘다 잘도 튀지 않고 팀을 받치는군…”

 

그리고 생각하겠지. 나는 여기까지야, 하고. 감독은 굳이 뒷말을 소리내지 않고 끊었다. 객관적으로는 둘다 재능있는 선수지만, 더 크게 빛나는 재능 옆에서 빛이 바래 스스로 알지 못하곤 했다. 애초에 재능을 보고 뽑아온 선수들로 팀을 꾸리는 고교 배구와 크게 다른 점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런 애매한 선수들을 굳이 독려해서 끌고 갈 필요성은, 감독에게 없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들의 배구는 끝난다. 코치는 어쩐지 입맛이 썼다.

 

“그럼, 적당히 수업 시간 되면 올려 보내라. 회의 간다.”

 

“옙, 다녀오십쇼!”

 

시라토리자와 학원 그룹 감독 회의였다. 오로지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끌어모으는 와시조 감독의 기조 덕에 소속 학교가 상당했다. 이번 회의는 예선에 드러난 원석을 솎아내어 정보를 공유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고등부 감독들은 스포츠 추천 입학을 넣을 선수를 물색하고, 중등부 감독들은 기를 펼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아무리 상호간의 호칭이 감독일지라도 서열은 분명한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라토리자와 중등부 감독은 확실히 웃을 수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가자 상석에 앉아있던 와시조 감독이 왔는가, 하고 인사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비디오 봤네. 여러모로 상대가 엉망이긴 했지만, 기대되더군.”

 

더 대화를 이을 생각은 없는지 와시조 감독이 휙휙 손짓해 제 오른쪽 옆옆자리로 그를 앉혔다. 그 뒤로 중등부 감독들이 앉고, 끝자리 고등부 감독 몇몇이 앉았다. 얼핏 보면 위계에 민감한 몇몇이 날카로워지기 쉬워 보이는 배치였지만, 사실상 와시조 감독과 나머지 고교 감독들이 중학교 감독들을 쌈싸먹는 배치였다. 실제로 토요쿠로 중학교 감독은 세터가 괜찮더라는 평을 듣고 딸꾹질을 했다. 와시조 감독은 딱히 아랑곳 않고 미야기 현에서 눈에 띄는 선수들을 몇몇 짚었다.

 

“키타가와 세터는, 상당히 기대 이하였지. 세터 키우기라면서 제대로 키워내지도 못하고. 쯧…”

 

세터야말로 팀의 핵심 부품인 만큼, 최대한 단순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 옳거늘. 언제나 키타가제1중-아오바죠사이로 이어지는 팀 스타일은 시라토리자와와 정반대였다. 와시조는 혀를 쯧 차고 다음 화제로 넘겼다. 전체적으로 미들 재원이 상당히 부족한 것을 제외하면 괜찮았다. 사실 쓸만한 에이스가 한 학년에 하나만 있어도 그 세대는 성공했다 봐도 좋았다. 당장 지금 고교 1학년들은 다 고만고만해서 2, 3학년들을 주력으로 키우고 있지 않은가. 안정적으로 세대 교체를 할 수 있다니 고무적인 일이다. 와시조는 회의를 파하고 중학 감독에게 저녁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언질했다. 그룹 회의가 끝났으니 이제 학원 회의였다.

 

부원들에게 몰래 사왓치로 불리는 사와시로 감독은 역시나 점심시간에 연습을 나온 고시키 무리를 보고 손짓했다.

 

“고시키, 요즘… 너 귀가 그게 뭐냐?”

 

고시키의 왼쪽 귀는 화려한 피어싱으로 거의 뒤덮이다시피 했는데, 원래 인상이 원체 단정해서 괴리감이 심했다.

 

“아, 친구들이 선물이라고 이것저것 달아줬는데… 빼다가 점심시간이 다 지나버릴 것 같아서요.”

 

고시키가 화려한 귀와 어울리지 않게 순박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었다. 감독은 피어싱을 건드리지 않고 귀를 잡아당길까 하다 불가능해서 잠시 아찔해졌다.

 

“피어스 있었냐?”

 

“예에, 운동할 때에는 실리콘으로 해놓았으니까요…”

 

모르셨군요…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그렇게 말하는 듯해 감독은 헛기침을 했다. 일단 당장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배구에 방해만 안 되면 됐다. 컨디션은 좀 어떠냐? 대회 끝나고도 한참 체육관에 있었다며. 연습도 좋지만 쉴 때는 제대로 쉬어라.”

 

“네에- 감독님.”

 

넉살 좋게 말끝을 늘인 고시키가 엉터리 경례를 했다. 모난 데 없이 참 좋은 에이스다. 감독은 흐뭇하게 웃으며 팔뚝을 툭툭 두드려 보냈다. 피어스가 좀 걸리지만, 때와 장소를 제대로 가릴 줄 아는 학생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히려 너무 바른 모습을 강요했다가는 역으로 비뚤어질 수도 있으니 저정도 일탈은 터치 없이 넘어가주는게 맞았다. 그리고 분명 조용히 넘어가주는 것을 눈치챌 정도로 영리하니 더더욱 자애롭게 굴기로 마음먹은지 오래된 감독이었다. 얼마나 좋은가. 이런게 진정한 신뢰 교환이라는 것이다.

 

이 방침은 감독이나 코치나 똑같아서, 술이 한잔씩 돌아간 다음 생활 태도는 어떻느냐는 물음에 코치의 입에서 감독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그대로 나왔다.

 

“츠토무요? 늘 잘하죠.”

 

“하나도 모른단 소리군.”

 

와시조가 덤덤하게 잔을 기울였다. 옆에서 사이토 코치가 허허 웃는 낯을 그렸다. 우리 감독님 폭언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양해 좀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와카토시와는 확실히 다른 타입의 에이스더군. 어딜 가도 잘할 녀석이야. 그리고 어딜 가도 잘할 녀석은 어디로 가도 이상하지 않지.”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에 기억을 더듬은 코치는 물을 마시다 사레가 걸려 켁켁거렸다. 맞은 편의 사이토 코치가 황급하게 냅킨을 마구 뽑아 건넸다. 코치는 얼굴이 벌게져서 잔을 모시듯 붙잡았다.

 

“그, 말입니다. 츠토무가… 추천이 들어오면 알려달라고-”

 

“뭐?!”

 

“전국 대회 끝나면 면담 보내고, 얘기나 더 해보게.”

 

와시조가 덤덤이 청탁을 쓱 넣고 정보를 캐냈다. 넋이 나간 감독 대신 더듬거리던 코치는 술을 들이켰다. 술이 절실히 필요했다.

 

“3년이나 봤는데 그것뿐인가? 순 칭찬뿐이군. 그런것쯤은 경기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네. 단점은?”

 

“어, 그으…”

 

차마 없는 것 같은데요, 라는 말을 술기운으로도 해내지 못한 코치는 입가를 매만졌다. 와시조는 술을 한잔 마시고 탁 내려놓았다.

 

“영 믿기가 어렵군. 결승에서 꽤 설렁설렁하던데, 애초에 배구를 좋아하긴 하는 건가? 그래서는 우승할 것도 못할 걸세. 좀더 신경을 쓰게나. 이제 술이나 들지.”

 

*

 

여느 때처럼 아침 연습을 끝내고 부실에 들른 고시키들은, 얼마 전부터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결국 와타나베가 총대를 매고 해맑게 고시키를 쿡 찔렀다.

 

“결국 찍혔냐, 피어스?”

 

“으음~ 글쎄…”

 

고시키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거울을 보며 피어싱을 바꿔 끼우기 시작했다.

 

“피어싱 때문은 아닌 것 같던데. 보는 눈빛이 뭐랄까… 흐음… 빈틈을 노리는? 약점이라도 잡고 싶다는 느낌이라, 기분 나빠.”

 

큼직한 손으로 조그만 피어싱을 맞추는건 쉽지 않지만 매일 하는 짓이다보니 제법 요령이 붙었다. 금방 다 갈아끼운 고시키는 실리콘들을 통에 쏟아넣다가 고개를 들었다. 부실이 무척 조용했다.

 

“의외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네.”

 

“어, 야. 내가 슬쩍 물어봐줄까?”

 

고시키는 의식적으로 표정을 펴고 소우의 제안에 손을 저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어린애한테 도움이나 구하면 안 되는 법이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됐어, 뭘 또. 하실 말씀 있으시면 어련히 하시겠지. 가자, 얘들아~”

 

공유하는 공기가 영 찌릿찌릿하다. 긴장감이 낮춰지지 않고 있다. 사실은 예선 이후로 줄곧 이런 분위기였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가 썩어가고 있는 느낌. 아니면 이게 다 거지같은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전국 우승이라는 목표가 새삼 다가오기도 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데에 기운 빼지 말고 대회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사왓쨩이 나를 너무 좋아하네. 미안해?”

 

“웩.”

 

“너는 가끔 그렇게 역겹게 구는 것 좀 관두면 안되겠냐?”

 

“챠라 연기 무지 잘해. 소름끼쳐.”

 

“아니, 챠라챠라하면 그냥 챠라챠라한거지 연기는 또 뭔데.”

 

고시키는 피식거리며 팔꿈치로 소우의 팔뚝을 툭툭 쳤다. 그러자 소우가 너는 나르시즘에 빠지기에는 너무 겸손하다며 핵심을 찔러왔다.

 

“의외로 자기 평가 낮지, 츠토무는.”

 

“옆에 있으면 같이 겸손해진다니까~”

 

“그을쎄, 그런가. 나 때문에 소우도 지나치게 겸손해진건가 싶네.”

 

“에, 나?”

 

“그리고 다들 그래!”

 

고시키는 앞으로 휙 나가 뒤로 걸으며 당당하게 허리를 짚었다.

 

“다들 은근히, 자기가 배구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것 같단 말이야? 내가 너무 잘해서 그래. 미안하게 됐다!”

 

“이야, 가슴을 푹 쑤시다 못해 뻥 뚫어버리네…”

 

스즈키가 약간 질린 얼굴로 제 명치께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와타나베가 그의 어깨에 팔꿈치를 얹으며 평소처럼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교실 가면서 하는 점이 대단하지, 응.”

 

“평가하지 말고 제대로 들어줄래?! 난 진짜 이 멤버로 우승하고 싶다고!”

 

고시키는 팔을 흔들며 왁왁거리다 계단을 밟고 뒤로 넘어졌다. 평소같은 난리판이었다. 제가 조금 다치는.

 

“너는 좀…”

 

소우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고시키를 잡아 일으켰다. 고시키는 으응? 하며 헤실거렸다.

 

“뭔가, 예선 전에 목표는 우승! 하는 것보다 본선 올라서 목표는 우승! 이라고 말하는게 훨씬 어렵단 말이지.”

 

“현실감이 전혀 달라.”

 

“첫 출장인 것처럼 굴지 마, 얘들아. 촌스러워!”

 

발랄하게 쿡쿡 찌르는 말에도 아이들은 뜨뜻미지근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더니 소우가 가장 먼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믿는다, 에이스.”

 

“웨이~”

 

미들블로커 평균, 리베로 평균, 세터 평균. 그리고 평균 이상의 에이스. 고시키는 가뿐하게 기지개를 켜며 엷게 미소지었다. 강함은 안심이 된다.

 

중등부 전국행을 알리는 현수막이 학교에 걸리고, 그들은 인터하이 응원을 가게 되었다. 많이 배워가라는 배려로 앞자리를 받았는데, 그 탓에 고등부 비주전들이 바로 옆이었다. 고시키는 떠밀려서 바로 그 경계에 서게 되었다. 3학년들이 섞여 있어 눈인사만 주고 받아야…

 

“어?”

 

익숙하진 않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사선으로 자른 옅은색 앞머리. 눈을 살짝 찌푸리는게 딱 언젠가 본 것과 똑같았다.

 

“뭐냐, 시라부. 아는 사이?”

 

“아닙니다. 착각이겠죠.”

 

목소리 엄청 쌀쌀맞아. 고시키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잘못 봤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소우가 톡톡 건드리더니 귀엣말을 했다.

 

“누구?”

 

“그냥.”

 

고시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코트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스야 당연히 눈에 띄지만, 유독 2학년인 세터가 잘했다. 서브로 따는 점수가 에이스 못지 않았다.

 

“유라도 서브 연습 많이 시켜야겠다.”

 

“저, 저요…?”

 

열심히 응원구를 부르던 유라가 삑사리를 내고 돌아보았다. 고시키는 씩 웃고 응원단이 한눈 팔면 되겠냐며 고개를 돌리게 했다. 2학년 레프트는 다른 학교에 갔다면 에이스일게 분명할 정도로 안정적으로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의외로 부드럽게 팀을 받쳤다. 성격 좋아보이네.

 

고시키는 눈을 굴려 벤치 멤버를 훑었다. 빨간 머리는 작년부터 벤치에 있었지만 코트에 자주 나가진 않았다. 나갈 때마다 굉장히 눈에 띄는 블록을 보여줬지만, 핀치 서버와 교체하는 등 코트에 오래 있지는 않아서 제대로 파악이 어려웠다. 뛰어난 블로커인건 확실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근육이 좀더 붙었나, 생각할 즈음 갑자기 그가 고개를 휘까닥 뒤로 젖혀 눈이 마주쳤다. 솔직히 호러였다. 그가 눈이 가늘어지게 웃더니 손을 휙휙 휘저었다. 우시지마의 서브를 보라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모든 주목은 에이스에게로, 라는건가. 고시키는 교가를 부르며 공명했다.

 

“후배군, 어땠어-?”

 

1회전이 끝나고 휘리릭 올라온 요괴같은 선배가 하이톤으로 물었다. 고시키는 저 말인가요, 같은 통상적인 태도를 집어치웠다.

 

“블록 엄청 멋있어요. 결승에서 많이 볼 수 있겠죠?”

 

“하아- 결승부터는 못 빼지. 다들 운동력 괴물이라니까~ 그보다 잘도 눈치챘네. 후배군의 시선, 너무 뜨거워서 마지막에 와카토시군도 알아챘어!”

 

마른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린다. 상상 이상의 4차원이다. 고시키는 그런가요, 하며 살짝 눈을 굴렸다. 다들 뭔데, 이 상황? 하는 표정이다.

 

“뭔가, 너 생각보다 무지 평범하네. 전국 힘내~”

 

왔던 것처럼 태풍이 휙 사라지자 분위기가 휑했다. 고시키는 으음, 침음을 흘렸다.

 

“너 텐도 선배와 아는 사이야?”

 

고개를 휙 돌리자 아까 대놓고 ‘모르는 척해라’ 압박을 줬던 시라부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뇨, 처음 봅니다만…”

 

“후배 괴롭히지 마라, 시라부~”

 

옆에서 옷자락을 주욱 당기는 손에 고시키는 고개를 돌렸다. 다들 눈으로 말했다. 체할 것 같으니까 빨리 가자…

 

“역시 우리 서브랑 리시브를 더 다듬어야겠더라. 블록은… 솔직히 한두달만에 될 것 같지는 않고.”

 

“쇼타한테 플로터 서브 가르쳐볼까?”

 

“그거 좋다! 소짱 부탁해!”

 

“대체로 중학생들은 오버 서투르니까. 우리 블록 상대를 더 하면 좋을텐데-”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아- 이번에 고등부에서 연습을 도와주기로 했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겨루게 될 일은 별로 없을테니, 이 기회에 서로를 잘 파악해봐라.”

 

“잘 부탁드립니다!”

 

고시키의 선창에 어영부영 눈인사를 하던 부원들이 일제히 인사했다. 코치는 흐뭇하게 웃더니 연습 경기를 시켰다. 중등부는 전국 대진대로, 고등부는 인원수를 딱 맞춰온 탓에 조율에 시간이 들지 않았다. 고시키는 살짝 눈을 굴렸다. 미들 라인이 썩 눈에 띄었다. 일단 머리 하나쯤은 더 큰 사람도 눈에 띄지만… 카와니시였던가, 일단 그가 이름을 알 만큼 잘하는 미들이 있었다. 작년에 예선에서 붙었었는데 눈에 띄게 깔끔한 실력자라 기억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비스듬한 앞머리 생각보다 키가 작다. 이쪽이 세터려나. 어딘가 기시감이…

 

“아.”

 

“하?”

 

“토요쿠로 세터 맞죠?”

 

한학년 위, 그러니까 고시키 기준으로는 두학년 위인 에이스와 콤비를 이뤘던 세터였다. 그 에이스가 졸업하고나서는 성적이 영 나오지 않아서 잊혀졌지만 말이다. 시라부가 노골적으로 눈빛을 쏘았다.

 

“연습이나 해.”

 

전력으로 부숴주겠다는 본심이 보인 것 같은데, 방금. 고시키는 제 등을 벅벅 긁는 소우에게 그만하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부원을 모았다.

 

“자, 자. 귀중한 연습 경기다, 얘들아. 그것도 고등부 선배들이라고? 블로킹 잘 보고, 연습한 것들 팍팍 써보자.”

 

연습 경기는 소우의 플로터 서브로 시작했다. 공은 다소 정직하게 날아가 오버로 붙잡혔다.

 

“카와니시!”

 

“네, 네-”

 

몇 번 맞춰본 적 없는 팀에서 흔들린 리시브. 고시키는 곧바로 레프트에 붙어 블록을 뛰었다. 셧아웃이었다.

 

“오…!”

 

“츠토무, 나이스블록!”

 

“웨이-”

 

고시키는 공을 맞은 팔을 두어번 털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확실히 높이가 부족했지만, 그만큼 수비 실력을 갈고닦았다.

 

몸을 낮춰라, 충신들아. 날아보이겠다.

 

고시키는 높게 뜬 오픈 토스에 충분히 힘을 들여 뛰어올랐다. 3단 블록이 스트레이트를 확실하게 좁혔다. 스트레이트는 물론 기분이 좋다. 뚫으면 확실한 쾌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코트 안쪽이 텅 비었어! 고시키는 크로스로 깊숙하게 찔러넣었다. 힘을 잔뜩 넣은 탓에 거의 박터지는 소리가 났다.

 

“우와- 세네… 엇, 시라부? 괜찮아?”

 

분명 블록 위를 쳤던 것 같은데? 고시키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와 시라부를 쳐다보았다. 왼손 소지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블록이 늦었어.”

 

“으아, 죄송합니다! 힘조절을 못했어요!”

 

고시키는 안절부절하며 네트에 달라붙었다. 인상을 한껏 찌푸린 시라부가 다른 손으로 고시키의 이마를 꾹 밀었다.

 

“살짝 스쳤을 뿐이니까. 테이핑하고 다시 들어갈 거야.”

 

“아니, 아프실텐데…”

 

다른 부원이 구급상자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오며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옆에 있던 카와니시가 휙 휘파람을 불며 말을 붙였다.

 

“시라부 스위치 켜졌네. 그보다 너 평소에 힘조절 해?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약해보이나요?”

 

“그야 근육 타입으로는 안 보이니까. 블록 조심해야겠네~”

 

확실히 그쪽도 근육 타입으로는 안 보이죠. 고시키는 그런 생각이 대놓고 드러나는 웃음을 흘리고 코치에게서 치료를 받은 시라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테이핑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잠깐 고시키를 응시하더니 코트로 쑥 들어갔다. 승부욕이 대단한 타입인가. 고시키는 공을 통통 튕기며 나가 서브 준비를 했다. 휘슬이 울렸다. 서브 토스, 깔끔해. 힘껏 쳐도 기분 좋겠지만… 굳이 연습 시합에 불을 붙일 필요는 없다. 팍 밀어친 공이 힘없이 날아가더니 네트를 겨우 넘었다. 속공으로 점수를 낸 시라부가 야, 하고 흐름을 끊었다.

 

“제대로 해. 이제 선배가 종잇장으로 보이냐? 때리면 찢어질 것 같고 그래?”

 

삐빅- 감독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고등부 기백 엄청나네. 고시키는 네트를 끼고 감독에게 다가갔다.

 

“분위기 날카롭잖냐, 이 녀석들아. 시라부 군, 후배 기 너무 죽이지 말아라. 고등부야 손가락쯤 찢어지는게 일상이지만 중등부는 아니야. 얘네 오늘 피 처음 봤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하자면 그런 시선이 힐끗힐끗 닿아왔다. 전부 고등부였다.

 

“그리고 고시키는 연습이라고 너무 편하게만 하지 말고… 그래, 팀 좀 섞어볼테냐?”

 

“좋네요.”

 

시라부가 선뜻 긍정했다. 카와니시가 잠시 옆으로 돌더니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고시키는 고개를 잠깐 갸웃하며 눈을 굴렸다.

 

“미들은 그대로 두고, 세터랑 리베로만 바꿔도… 라이트 한명까지?”

 

소우를 보자마자 얼결에 튀어나온 말을 감독이 전격 수용했다. 어차피 건물도 가까우니 이것저것 해보자는데, 의외로 고등부들이 선선히 수긍했다.

 

“그야, 너희 잘하니까.”

 

미래의 같은 팀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오묘하게 묶은걸까. 고등학교 1학년 밑에 0학년이 있는 느낌이었다. 고시키는 시라부의 수신호를 암기하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래저래 신기했다. 새롭고.

 

그보다, 이 사람 스타일 엄청 바뀌었잖아. 고시키는 높게 올라오는 오픈 토스를 보며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곧 보기 좋게 성공한 스트레이트에 기분 째져서 바로 잊었다.

 

“나이스 킬.”

 

시라부가 미소를 띤 채 지나가듯 격려했다. 고시키는 잠시 멈췄다가 생글거리며 나이스 토스, 하고 받아쳤다.

 

“의외로 박빙이었지, 오늘~”

 

“우리 전국에서 블록 강한 상대 만나면 위험하겠던데. 일단 블록 팔로가 너무 어려워.”

 

“아아, 소우랑 스즈키가 없으니까 우리 리시브 구멍 엄청났고..”

 

“우리는 우리대로 츠토무 스파이크 받느라 죽을 맛이었어. 에이스 엄청나.”

 

“그리고 그 세터가, 에… 성격 무지 더러웠지.”

 

“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겠냐?”

 

“츠토무. 좀 말려- 웬일로 조용하냐?”

 

“그러게. 평소라면 제일 시끄러울 놈인데.”

 

“으응~?”

 

고시키는 고개를 살짝 흔들거리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재미있었지~ 블록 상대 더 하고 싶었는데.”

 

“세터는 어땠어?”

 

“아, 벌써 여기네. 다들 내일 보자-”

 

“잘 들어가라!”

 

고시키는 양팔을 붕붕 흔들며 교문 앞에서 인사했다. 부지가 하도 넓어서 일과를 마치고 교문까지만 같이 가도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얘기할 수 있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더라? 아, 세터?”

 

“그 세터 엄청 까칠했는데, 뭐랄까… 네가… 으음…”

 

“내가?”

 

고시키는 기꺼이 기다려주겠다는 의미로 반문했다. 소우는 최대한 정확한 어휘를 짜내려는지 끙끙 앓았다.

 

“너 후배 주제에 왜 그렇게 선배처럼 굴 수 있는거냐…? 뭐랄까,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여유 없어보이니까~ 까칠하게 굴어도 별 생각 안 드는걸. 그 사람 분명 돌아가서 엄청 분할걸?”

 

“왜?”

 

“그야, 내 전력을 못 끌어냈으니까.”

 

고시키는 손을 활짝 펼치고 빳빳하게 힘을 주어 까딱거리며 히죽거렸다. 소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교하게 움직이는 손이 거미같았다.

 

“그리고 소우 역시 리시브 잘하더라~ 훌륭해. 좋은 리시버는 평소에 눈에 안 띄니까, 반대편에 있으니 확 체감이 되더라.”

 

“엣, 그, 그러냐.”

 

소우가 당황한듯 더듬거리더니 대놓고 쑥쓰러워했다. 고시키는 헤실거리며 한껏 띄워주었다. 이제 그만하라며 소우가 춉을 날리는데, 옆에서 대문이 벌컥 열렸다.

 

“오늘도 사이가 좋구나~ 하지만 오늘도 츠토무 집까지 가진 말고. 할머니 기다리고 계시니까.”

 

“아잇, 할매 보기 싫은데- 아야야!”

 

고시키는 소우의 볼을 한껏 꼬집고 놓았다. 카미노야마 부인이 호호 웃었다.

 

“속이 아주 시원하구나, 츠토무. 잘 들어가렴.”

 

“네, 다음에 뵈어요. 내일 보자, 소우.”

 

“그러든가. 아오, 손 무지 맵네.”

 

고시키는 키득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철문이 닫히자 곧 사위가 어둑해졌다. 그는 가방에서 배구공을 꺼내 돌리고 튕기고 던지며 천천히 집으로 갔다. 오늘은 차고에 차가 있었다. 대놓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운전석에 그림자가 보였다. 고시키는 다가가 창을 똑똑 두드렸다.

 

“아빠?”

 

썬팅이 짙어서 이렇게 가까이 왔는데도 잘 보이지 않는다. 조수석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창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일단 몸을 돌렸다. 힘이 덜 빠진 뇌는, 항상 불행을 향해 달려갔다. 고시키는 선 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츠토무? 방금 너였니?”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 방금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다. 고시키는 숨을 고르고 휙 몸을 돌렸다.

 

“네에, 다녀오셨어요. 안에 계신지 긴가민가했는데~”

 

손이 훅 다가오더니 이마를 쓸었다. 머스크 향이 훅 끼쳐 그렇잖아도 난장판인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시곗줄이 순간 반짝여 고시키는 눈을 찡그렸다.

 

“안색이 나쁘구나. 오늘 연습이 힘들었니?”

 

큰 손이 자연스럽게 어깨를 짚고 스쳐 등을 밀었다. 다행히 오늘은 두세시간쯤 떠들 수 있을만큼 화젯거리가 많았다. 오늘 고등부에서 연습 도와줬어요! 역시 미들 라인이 대단해서, 근데 가장 인상적인건 세터였고요. 중간부터 섞어서 연습했는데 소우랑 스즈키가 빠지니까 우리팀 리시브 완전 허접해서- 소우, 일단 한숟갈 뜨고 말하렴. 우리 어디 안 간단다. 그렇죠? 고시키는 헤실 웃고 맑은 닭육수를 한입 떠먹었다. 아, 따뜻해라.

 

집에서 하루에 한끼만 먹으면 아쉽다는 부인의 의견에 따라, 그들은 밤늦게 들어오면 꼭 맑은 국과 쌀밥을 조금씩 먹었다. 그리고 잔업이 있으면 그대로 가장은 방으로 들어가고, 아니면 녹화된 프로 경기를 보며 가족끼리 단란하게 과일을 먹었다. 부부 둘다 스포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점에서 외아들에 대한 사랑이 드러난다. 고시키는 내키는대로 떠들다 경기에 집중하기를 반복하다 기지개를 켰다.

 

“들어가니?”

 

“예엡, 고시키 가문 전국구 에이스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러 갑니다~”

 

“잘 자렴, 츠토무.”

 

“정말, 저 넉살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니까. 당신이나 나나 넉살좋은 타입은 아니었잖아.”

 

“아냐, 당신 연애 초기 때는 꽤 넉살좋게 굴었어. 갈수록 여유없어져서 그렇지…”

 

20년째 신혼인 부부가 그새 알콩달콩 깨를 볶기 시작했다. 진짜 왜 동생 없는건데, 하던 고시키는 방에 올라가기 전에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참고로 저는 나이 차 나는 동생, 괜찮아요.”

 

“뭐- 츠토무!”

 

혀를 쏙 빼문 고시키는 방으로 올라갔다. 내일 아침에는 편의점에 들러야지. 그 상태로 계속 연습했으니 분명 상처가 벌어졌을 거다. 연고랑 반창고랑… 사탕도 살까. 수미상관 좋잖아. 고등부 체육관이 어디더라, 고시키는 학교 평면도를 머릿속에서 되짚어보다 까무룩 잠들었다.

 

“우와, 시라부. 뭐냐.”

 

카와니시가 시라부의 신발장에 놓인 봉투를 보고 감탄했다. 시라부는 봉투를 휙 꺼내 내용물을 살폈다.

 

“…그 갓파 애송이.”

 

-흉 안 지게 조심하세요 !

 

“섬세하네~”

 

그리고 글씨체 귀여워. 카와니시는 휘파람을 불려다 참고 제 신발을 신발장에 넣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라부는 꼼꼼하게 연고를 발랐다.

 

*

 

작년 전국 진출을 4강으로 마무리 지은 덕에 시라토리자와는 이번에도 시드 참여였다. 그게 아쉽다고 했다가 배구 바보 취급을 당한 고시키는 2회전 상대가 결정될 코트의 위치를 언질받은 뒤 자유롭게 경기를 보러 다녔다. 그리고 그 인파 속에서, 마주쳤다.

 

버림받은 제왕은 특유의 푸른기 도는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시키는 홀린듯 다가갔다. 소우가 뒤에서 말리더니 결국 놓았다. 하지만 얘 눈깔 상태가 정말, 도저히 돌아설 수가 없다.

 

“야, 앉아도 되냐?”

 

카게야마가 인간 물음표를 띄우더니 제 옆자리를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올려다보았다. 물어봤고, 반응했고, 거절 아니면 뭐 된거지. 고시키는 어깨를 으쓱하고 털썩 앉았다. 이미 D코트 경기는 2세트여서 분위기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아무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고시키는 경기가 끝나고 적당히 메모한 다음 몸을 일으켰다. 카게야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볍게 어깨를 툭 건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간다. 또 보자.”

 

“…어.”

 

두 박자 이상 늦은 반응에도 고시키는 작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코트에선 꽤나 시끄럽더니.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타입은 아니구나. 남 듣고 싶은 말은 안 하고 듣기 싫은 말만 해서 고립된걸까. E코트로 가자 듀스가 한창이었다.

 

“어, 왔냐.”

 

난간에 턱을 괸 채 보고 있던 와타나베가 손을 흔들었다. 고시키는 냅다 그의 어깨에 턱을 얹고 짧게 관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경기가 끝났다.

 

“상대 정해졌네.”

 

“그러네~”

 

“신경 좀 쓰라고. 다들 엄청 벌벌 떨고 있는데.”

 

꿍 꿀밤을 맞은 고시키는 어리둥절해져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렌짱도 겁 먹었어? 진짜?”

 

“설마 상대한테 쫄았겠냐.”

 

와타나베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시키의 이마를 밀어냈다. 고시키는 눈과 입으로 O자를 그렸다.

 

“입 다물어.”

 

잽싸게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음이 비실비실 샜다. 아오, 이 귀여운 자식들! 경기가 끝나 계단을 내려온 소우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왜 얼굴 가리고 있어? 고시키는 손을 빗겨 슬쩍 꽃받침을 하며 헤죽 웃었다. 소우가 3초쯤 정지하더니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 쓸어내렸다.

 

“짜! 뭐하는거야!”

 

“너는 진짜 긴장이란걸 좀 해라.”

 

고시키는 필요한 만큼은 하고 있다고 종알거리다가 다시 손바닥 세수를 당했다. 갈수록 취급이 너무하잖아, 소짱- 잘됐네. 너는 무시당하는걸 좀 즐기는 것 같으니까.

 

…그런가? 고시키는 새로운 시각에 잠깐 생각에 빠졌다. 스즈키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하나하나 고민하지 마, 츠토무. 역시 그렇지? 고시키는 스즈키의 밤톨같은 머리를 순식간에 헤집고 쫑쫑 앞서나갔다.

 

2회전 상대를 스트레이트로 꺾으며 그들의 전국대회는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시라토리자와는 언제나 그랬듯, 그다지 특색이랄게 없었다. 단순한 강함. 에이스 하나로 상대를 쳐부수고 나머지가 계속해서 버티는 팀이다. 최근 근육 트레이닝을 늘린 고시키는 명실상부한 전국 톱 에이스였다. 헛힘을 빼려고 쾅쾅 내리치다보니 경기가 금새 끝났다.

 

“물이 올랐구나, 츠토무~”

 

코치가 흐뭇하게 박수를 치며 반성회를 이끌었다. 실수를 줄이려는건 좋지만, 그렇다고 도전을 멈추지는 마라. 플로터는 좀더 시도해보자. 블록 타이밍에 신경 쓰고 제각기 뛰지 마라. 에이스의 공격이 확실해지면 블록 팔로 바로 들어가라. 에이스는 컨디션을 확실히 팀원한테 알려라. 뭐, 호조로 보이지만.

 

“당연하죠-”

 

고시키는 샐쭉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고 흔들었다.

 

“자, 그리고 다음 상대 말인데-”

 

무시가 빠르다고 지적할 틈도 없이 상대에 대한 정보가 줄줄 나왔다. 도쿄에 위치하여 후쿠로다니 그룹 영역에 있는 우시미츠 중학교는 딱 시라토리자와와 같은 결의 타입이었다. 리베로, 세터 평균. 평균 이상의 에이스와 미들 블로커. 특이 사항이 있다면 190쯤 되는 미들이 하나 있다는 것 정도였다. 페인트 어렵겠네. 고시키는 흐음, 소리를 내며 소우의 어깨에 등을 기댔다.

 

*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느냐를 묻는다면 역시 잘 모르겠다. 와타나베 렌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그랬다. 이것은 주관이라기에는 색이 옅었지만 분명히 한 뿌리를 맡고 있었다.

 

시라토리자와 학원은 초등부부터 고등부까지 있다. 초등부 입시(사실 입시라기엔 웃기지만, 전체의 통일감을 위해 사용하자)에 붙었다면 그대로 비슷한 면면을 12년이나 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과 보낸 시간보다 학원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가족을 대하는 방식과 대체로 닮는다. 알고 있다는 인식이 낳는 무관심까지도. 중등부쯤 되면 동급생쯤은 가볍게 꿰게 되고, 그건 알고 있다기보다는 익숙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리라.

 

초등부를 졸업하는 날, 와타나베는 문득 곧게 서 있는 고시키를 일별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 진짜 재미없어 보이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곧 고시키가 뒤에 선 애와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주변의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고 고시키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리는 경험은 손꼽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야 헤어짐 없는 졸업식이 어떤 새로움을 선사하겠는가. 하지만 어쩐지 작게, 밝게, 빠르게 불타오르고 사라진 불꽃같은 웃음 소리가 머릿속에 그을음처럼 남아서. 와타나베는 종종 생각했다.

 

재미가 뭐지? 즐거움과는 약간 다른 것 같아. 나는 그런걸 어떻게 느꼈더라… 이런 생각은 하면 할수록 그에게서 그런 것들을 조금씩 앗아갔다. 전과 같은 순수를 잃은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중등부에 입학하고 같은 반이 된 고시키에게 유달리 날을 세웠는데, 그다지 의도하지도 자각하지도 않은 변화였으며 그후로도 한참이나 깨닫지 못했다. 고시키가 오히려 즐거워하며 툭툭 건드리고 몰아 친구 삼은 탓이었다.

 

 

과할 정도로 남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에이스다.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같은 류의 자의식과잉이 아니라 순수하게 신경을 썼다. 사소한 변화 캐치부터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는 배려까지. 와타나베는 절대로 고시키의 부모님이 엄할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딱히 선천적으로 섬세한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만 보면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주변에서 그 자신이 가장 자기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신경 쓰지 않을 수가, 관심 가지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까워졌다. 거기에 더불어 몸싸움을 싫어해 배구부에 들어간 덕에 자연스럽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3년을 봤지만 고시키가 배구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매일같이 공을 모셨다. 마치 공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년 하는 신사 참배의 분위기를 항상 한폭 두르고 있는, 너는 가끔 신과 아주 가까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쌓아올린, 그래서 신과 아주 가까운 신자.

 

배구가 좋은가, 하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배구는 즐겁다. 여럿이 모여 하는 공놀이도 역시 판이 클수록 즐거운 모양이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운이 좋다는걸 안다. 알고 있다. 우리의 에이스가 최고여서 운이 좋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았다. ‘우리’로 엮일 수 있던 것은 오로지 에이스의 후광 덕분. 시라토리자와 배구부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하겠지만, 우리는 딱히 배구부에 속해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너를 위해 존재해,

 

“츠토무!”

 

와타나베는 몇번이고 올렸던 토스를 올렸다. 에이스는 얼굴이 활기로 가득 차더니 힘 있게 지면을 박차고, 날았다. 호쾌하게 블록이 박살나는 굉음이 눈에 보였다. 이걸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역시 운이 좋다.

 

“웨이-! 나이스 토스!”

 

에이스가 양손을 시원하게 치켜들며 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와타나베는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같은 포지션으로서 호승심이 생기지 않느냐, 한다면 가끔은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익숙한 체육관, 익숙한 친구들 사이에서만 발휘되는 것이지 출장 중에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낯선 공기와 체육관, 바닥, 풍경, 소음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에이스가 손가락 하나를 올리며 말했기 때문이다. 즐겁게 가자고.

 

시라토리자와 중등부, 우시미츠중을 2:0으로 꺾다. 준결승에 진출하다.

 

경기 분석을 마치고서는 완전히 자유였다. 호텔 옥상에 올라가 1시간짜리 루틴을 돌리자 몸이 후끈해졌다. 밤공기가 차다. 담배 피우면 딱 좋겠는데… 고시키는 상황에 맞지 않게 불쑥 튀어나오는 욕망에 맥없이 웃고 제 머리를 털었다. 그때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1시간 끝! 들어와!”

 

“어, 소짱-”

 

찾으러 와준건 고맙지만, 여기 나만 있는 것 아닌데. 하하 웃자 소우가 얼굴이 벌게져서 사방으로 사과하고 손목을 낚아채갔다. 고시키는 손목을 팔랑팔랑 흔들어 풀고 소우의 목에 팔을 걸었다. 소우가 뚱하게 쏘아붙였다.

 

“…뭘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 있냐. 그렇게 웃기냐?”

 

“으응? 아까 그거? 그걸로 웃는거 아니야~”

 

“그럼 뭔데?”

 

“에…음… 생각해보니 반은 맞을지도.”

 

그럴 줄 알았다며 소우가 헤드락을 걸었다. 소우 이러다 넘어져! 라는 고시키의 외침에 금방 풀긴 했지만 말이다. 내일은 준결승과 결승을 몰아 치른다. 숙소에서 다같이 스트레칭을 한 고시키는 샤워를 하고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결승 상대인 유리세이 중학교는 특이하게도 블록이 강한 강호다. 대체로 1학년 때 가입한 부활동을 쭉 하기 마련인데, 중학교 1학년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는가. 변수 요소가 너무나 많다. 전 로테이션이 단단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물며 블록은 기술보다 신장이 더 중요하다. 이론상 타이밍만 잘 맞추면 아무리 작아도 분명히 스파이크를 막을 수 있다지만 키가 크다면 굳이 타이밍을 칼같이 맞추지 않고 되는 대로 뛰어도 된다. 어렵지만, 해낸다면 분명 무기가 된다.

 

남의 배구부의 지도방침이 어떻든, 유능한 블로커는 분명히 에이스에게 압력을 줄 수 있었다. 감독은 제 루틴에 들어가 혼자 긴장을 잡는 고시키를 힐끗이고 유라에게 다시 언질했다. 초반에는 고시키에게 공을 몰아서 블록을 끌어들이라고.

 

첫 서브는 상대 세터의 서브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점프 서브가 고시키에게 꽂혔다. 꽤 코스가 좋았지만, 그리 묵직하지는 않았다. 고시키는 리시브를 조금 가운데 쪽으로 흘리고 곧바로 도움닫기에 들어갔다.

 

“정말!”

 

맞춰주기 힘든 에이스라니까! 소우는 최대한의 정성을 담아 토스를 올렸다. 약간 갈라졌다. 고시키는 크로스 방향으로 올라오는 손을 보았다. 역시 훌륭해! 갈라진 공에 맞추어 버틴 그는 마침내 직선으로 공을 내리꽂았다. 해설진이 뭐라뭐라 말하며 그를 칭찬했다. 뒤에서도 격려와 칭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고시키는 상대 블로커를 향해 눈을 빛냈다.

 

“블록 잘한다.”

 

벳쇼 카즈요시는 냉정한 낯으로 고개를 까딱하고 휙 돌아갔다. 속으로는 말이 아주 많았지만 어쨌거나 티는 나지 않았다. 선배, 서브심다! 하고 부르는 소리에 고시키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코트 왼쪽 끝에서 차분하게 나가고, 공을 양손에서 굴리며 휙 돈다. 곧 휘슬이 울렸다. 템포를 느리게 끌까, 빠르게 당길까. 오늘은 빠른 편이 좋겠어. 고시키는 항상 첫서브에서 그것을 결정했다. 그래서 첫서브는 항상 늦었다. 고개를 들자 리베로와 눈이 마주쳤다. 좋아, 오늘도 최선으로 즐겨보자. 서브는 리베로에게, 스파이크는 블로커에게! 고시키는 공을 높게 던졌다.

 

강하게 들어간 서브 리시브가 흐트러졌고, 공이 네트 사이에 꼈다. 노련한 상대 세터와 달리 아직 기술이 부족한 유라가 곧바로 사과했다. 소우가 예상했다는 듯이 부드럽게 공을 띄우고, 와타나베가 언더로 넘겼다. 깔끔한 B퀵에 그대로 서브권이 넘어갔다. 상대 서버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으로 온다. 고시키는 씩 웃었다. 역시 즐겁다. 강하다는 것은. 공격의 우선 대상이 되고, 수비의 우선 대상이 된다. 어디 한번 부숴봐. 강서브를 깔끔하게 리시브한 고시키는 마찬가지로 속공으로 갚아주는 유라를 칭찬했다.

 

서브 목적타는 곧 세터에게로 옮겨갔다. 모든 서브가 강하지는 않아서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렇잖아도 압력을 느끼고 있는 2학년에게는 버거워보였다. 고시키는 서브를 나가는 유라의 어깨를 툭 쳤다.

 

“위기다, 싶을 때는 에이스에게로. 알지?”

 

“-네.”

 

대답하는 얼굴을 보니 그대로 믿어도 괜찮겠다. 고시키는 몸을 돌리고 머리 뒤로 깍지를 끼었다. 곧 그럭저럭 합격점인 서브가 리베로 옆으로 들어갔다. 1세트 종반, 고시키는 점수의 7할가량을 홀로 득점했다. 의도적인 몰아주기에 덩달아 블록도 몰렸다. 이걸 이용해도 좋을텐데. 휘슬이 울렸다. 타임 아웃이다.

 

“츠토무, 상태는 어떻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감독은 에이스의 컨디션부터 살폈다. 고시키는 뒷짐을 지고 턱을 적당히 당겼다.

 

“아직 체력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1세트를 따내면 2세트는 좀 이것저것 해도 좋을 것 같슴다.”

 

“물론 괜찮지, 잘하기만 하면. 1세트 딸 자신 있냐?”

 

“네.”

 

짧게 답한 고시키는 대답과 함께 발을 물리며 지도에서 빠져나왔다. 분배에 대한 의견이 오가고 곧 타임아웃이 끝났다. 세트 종반, 상대편도 에이스에게 공을 모는 중요한 시기다. 그는 상대편을 힐끗 보고 유라를 톡톡 건드려 수신호를 보냈다. 유라가 입을 벙긋거렸다. 지금 말입니까? 고시키는 한번 씩 웃고 코트로 돌아갔다.

 

플로터 서브로 흔들고, 안정적으로 에이스에게 세트업. 블록의 완성이 빠르다. 부러 난타전으로 끌고간 것은 단지 호승심이 아니다. 멋진 3단 블록이다. 깔끔하게 스트레이트를 좁혔다. 그리고 1인 시간차.

 

휘슬이 울렸다. 시라토리자와 1세트 선취.

 

고시키는 손을 가볍게 털며 가까운 동료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힘 싸움의 우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다음은 보나마나 뻔했다. 기교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시라토리자와는 공격적인 로테이션을 1세트와 같이 유지했고, 유리세이는 약간 바뀌었다. 키가 큰 선수들을 고시키와 매치업 시키고 그 중에서도 에이스 블로커가 가장 많이 마주치도록 돌린 것이다. 예측 가능한 수므로 시라토리자와 또한 로테이션을 돌릴 법했으나 2세트에 상대의 수를 최대한 끌어내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상대 리베로가 리시브를 깨끗하게 올린다. 세터의 턱이 조금 들리고, 고시키는 외쳤다. 페인트!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있던 소우가 화들짝 놀라더니 뛰었고, 세터가 솜씨 좋게 빈 옆쪽으로 공을 흘렸다. 소우가 괴성을 지르며 제 머리를 잡았다.

 

“미안!”

 

“아냐. 훌륭해.”

 

세터, 토쿠라 리암은 턱을 당기고 상대 에이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분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토쿠라는 네트로 다가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벳쇼에게 말을 걸었다.

 

“벳군, 저쪽 에이스의 기를 좀더 팍 죽일 수는 없을까.”

 

“틀렸어. 저쪽 에이스 블록 완전 좋아하던데.”

 

“뭐야 그게.”

 

완전 괴짜잖아… 토쿠라는 서브 휘슬에 입을 다물고 무난히 넘어가는 서브를 보며 계산했다. 저쪽은 1세트에 에이스를 많이 썼다. 숨을 골라야겠지. 리베로의 깔끔한 A패스, 점수를 빨리 따두고 싶을 것이다. 토쿠라는 망설임없이 정중앙에서 블록을 뛰었다. 그때, 미들의 팔이 휙 내려가고 뒤에서 라이트가 날아올랐다.

 

백어택같은거 한 적 없잖아, 지금까지! 토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착지했다. 설마 지금까지 굳이 꺼내지 않은건가? 필요하지 않기에?

 

“와, 너희 이런거 준비했었냐?!”

 

에이스가 펄쩍 뛰더니 세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저기 에이스 웃기네.”

 

설마 진짜로 대회 준비하는걸 못 봤으려고. 벳쇼는 속으로 막연히 싫어했다. 사기 올리는 스킬이 진짜 위험하잖아. 그러면서 부담감 느끼지도 않는 타입. 진짜냐고? 에이스 성가셔. 블록 부술 때까지 치겠다는거 눈에 다 보이고, 진짜 위험해. 상식적으로 피하거나 흩트리려고 하지 않냐고? 우리쪽 에이스는 지극히 상식적이야. 완전 다행이지. 저렇게 무리하지 않는다고.

 

상대 블로킹은 그리 높지 않다. 읽기가 뛰어나지도 않고, 철통같이 단단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끈덕지다. 벳쇼는 제가 때린 공이 빗맞아 크게 튀었는데도 상대 코트를 훑어보았다. 분명 돌려보낼 것이다. 실점없이 돌려내는 것만으로도 잘하는 공이다. 하지만 저쪽은 때릴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블록 빼! 리시브!”

 

유리세이의 주장이 단호하게 외쳤다. 리시버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편이 낫다. 네트에서 한참 떨어진 공이 에이스의 손에 빨려들어가듯 하더니 강하게 내리쳐졌다. 코트 깊숙이 찌르듯 들어간 스파이크가 주장의 어깨를 치고 떨어졌다.

 

“윽…!”

 

“하아, 진짜 세네.”

 

솔직히 중학교 레벨이 아니야. 벳쇼는 한숨을 쉬며 서브를 하러 나갔다. 삐빅- 호루라기가 울렸다. 레프트인 벤치 멤버가 1번을 들고 있었다. 돌아보니 주장의 뺨이 터져있었다. 함께 맞은 건지 뺨이 터진 것이다. 주장이 제 뺨을 감싸고 빠르게 코트에서 나왔다.

 

“미안해…!”

 

별로, 네 잘못 아니고. 벳쇼는 공을 양손으로 꾸국 누르며 간신히 빨리 돌아오라고 말했다. 서브로 점수를 따자 시라토리자와에서 곧바로 타임 아웃을 울렸다. 현 점수는 18:20으로, 그렇잖아도 유리세이가 다소 뒤지는 모양새였다. 저쪽에서는 주장이 빠졌으니 단숨에 따자, 그런 얘기를 하겠지.

 

“역시 블록 판단은 네게 맡기겠다, 카즈요시. 지시와 직감 사이에서 버벅거리지 말고 마음대로 막아봐라. 저쪽 에이스의 텐션을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거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처럼 보여도, 블록은 스파이커에게 분명히 가장 큰 벽이야.”

 

감독은 자신이 내렸던 대부분의 지시를 철회하고 각자 가장 잘하는 것을 요구했다. 주장의 공백이 주는 정신적 타격을 최대한 줄이려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그덕분인지 결국 2세트마저 패배했지만, 흐름은 많이 넘어왔다. 지혈을 마친 주장의 빠른 합류로 사기가 이전보다 더 살아난 것이다. 아직 지지 않았다.

 

아직 지지 않았어.

 

“저쪽 미들한테 메일 주소 달라고 하면 줄까? 어떻게 생각해?”

 

“와, 또라이 새끼…” 와타나베가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라고 생각할듯?”

 

“진심이세요?”

 

“유라, 뭘 또 반문하니. 츠토무잖아.”

 

“잠깐, 잡설 그만. 얘들아 아직 경기중이다.”

 

코치가 애써 분위기를 진압했다. 고시키는 고민을 뒤로 미루고 다시 감각을 가다듬었다. 다들 긴장이 너무 풀렸는지 3세트는 미스가 여럿 나와 어영부영 넘겨버렸고, 다시 긴장을 다 잡고 4세트를 따냈다. 슬슬 다들 체력적으로 한계여서 몇번이나 위기가 있었다.

 

“5세트 진짜 힘들어…”

 

악수를 마친 와타나베가 옆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고시키는 하하 웃고 코트를 벗어나다 앗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벳쇼 군- 이따가 주소 교환하지 않을래?”

 

“어?”

 

손바닥을 마사지하던 벳쇼는 어리둥절해서 멈췄다. 그러나 고시키가 입을 떼기 전에 코치가 먼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시상식 전에 몸 풀어라- 츠토무-”

 

“주장-”

 

“에이스-”

 

“1분만 친교 시간 좀 주면 안되겠습니까?!”

 

“야, 쟤가 성가신 녀석이라 미안하다. 장난은 아닌데 기분 나쁘면 미안.”

 

불쑥 나타나서 사과하는 부주장에 벳쇼는 더욱 영문을 몰랐다. 쟤 지금 진짜로 나 마음에 들어하는거?

 

“아니, 뭐. 괜찮은데… 헉.”

 

울기 시작하는 팀원에 벳쇼는 재빨리 제 팀으로 돌아갔고, 고시키는 모든 부원에게 한소리 듣기 전에 먼저 응원단에게 인사했다.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경기 중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새삼 응원단 규모가 장난 아니었다.

 

“축하한다- 츠토무!”

 

익숙한 목소리에 고시키는 고개를 휙 들었다. 트럼펫을 든 아이카와가 유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외에도 아는 얼굴이 많았지만, 먼저 몸부터 풀기로 했다. 혹사당한 근육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고시키는 스트레칭을 마치고 나와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고개를 들고보니 옆에 사람이 있었다.

 

“벳쇼 군?”

 

“…어, 아까 뭐냐.”

 

벳쇼는 여러가지로 복잡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끙 소리를 냈다.

 

“너 진짜 뭐냐…?”

 

“아- 아까 너무 뜬금없었지. 근데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메일 주소 딸 기회?”

 

“그래 그거~”

 

고시키는 머리를 손으로 털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냈다. 벳쇼의 얼굴에 잠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보통 패자의 주소를 따?”

 

“안 따도 보게 될 얼굴이면 굳이? 근데 벳쇼 군 왠지 재밌어보이니까, 궁금해졌달까.”

 

“아니, 뭔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너 좀 이상한 녀석이네. 보통 자기가 처부순 블록한테 관심을 가지냐고.”

 

“안 부서졌잖아? 벳군 블록 끝까지 좋았어~”

 

고시키는 문가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나가며 메일 주소를 물었고, 결국 벳쇼는 육성으로 불러주어야 했다. 역시 엄청나게 말려든 기분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