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생일 연성

남자아이는 언젠가는 어른으로 자란다

러기 붓치 드림

* 24년도 러기 생일 축하 연성


예로부터,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맛있게 느껴지고, 배가 부르면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손이 가지 않는 것. 가진 이들은 무언가를 선택할 때 까다로운 기준을 내세우지만, 빈곤한 이는 일단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최선을 고르게 된다는 당연한 이치.

그리고 슬럼가에서 자란 러기는, 작은 것도 쉽게 버리지 않고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챙기고 보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손익을 따지고, 제 손해는 곧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니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그래서 생일같이 대가 없이 무언가를 선물을 받을 기회가 온다면, 비록 상대가 준 물건이 어떤 시시한 것이더라도 다른 이들보다 고마워 하며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러기 조차도, 올해 아이렌의 선물은 좋은 의미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거, 정말 제 선물임까?”

“예.”

“……진짜요?”

“그럼요.”

 

러기는 작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지갑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비싼 브랜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름값은 있는 상표의 가죽 지갑이라니. 제가 쓰기엔 조금 고급스럽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알게 뭔가. 일단 제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이건 제 지갑인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마음에 들고 말고여! 이거, 비싸지 않았슴까?”

“괜찮아요. 최대한 싸게 구하는 방법을 찾아봤거든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중고는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사실 중고라 해도 상관 없다. 이토록 상태가 좋고 브랜드 박스도 그대로 있다면, 새것이든 중고든 무슨 상관이겠나.

제 얼굴이 희미하게 비칠 정도로 광이 나는 새까만 가죽을 손 끝으로 문질러 본 러기는 내부를 구경하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가,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어라?”

 

분명 새 지갑이라고 했는데, 안에는 돈이 들어있다.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점심 한 끼 정도는 사 먹고도 남을 금액의 지폐 한 장. 이런 게 어째서, 여기 들어 있는 걸까.

은행에서 막 뽑은 새 돈인지, 구김이 없는 빳빳한 지폐를 꺼내 본 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이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지갑 선물은 빈 상태로 하는 게 아녜요, 선배.”

“이, 이것도 그럼 아이렌 군이 넣어 둔 검까?”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니지만요.”

 

그건 배부른 소리지. 밖에 나가서 땅을 파도 10마들 하나 나오지 않는 세상에, 지폐 한 장의 가치는 얼마나 큰가.

 

‘이거,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 같은데.’

 

지갑만으로도 충분한데, 안에 돈까지 들어있다니. 이래서야 얼마 전, 제가 아이렌의 생일 선물로 작은 액세서리 하나만 사준 게 민망해지지 않는가.

아무리 손익 앞에서는 뻔뻔해지는 러기라 하여도, 거기에 감정이 섞이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느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는 선물 받은 지갑을 챙겨 넣으며 중얼거렸다.

 

“아이렌 군은 저 같은 사람에게도 너무 잘해줘서 큰일입니다.”

“뭐가 큰일이에요?”

“뭐랄까, 분명 야무지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알지만……. 정에 약하니까 나쁜 놈들에게 홀랑 속아서 손해를 볼 거 같다고 할까.”

“어라, 그 논리대로라면 선배가 나쁜 사람이란 소리인가요?”

 

글쎄다. 빈말로도, 자신은 좋은 사람 보다는 나쁜 사람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자신을 속이는 것 보다는 합리화 하는 게 빠른 러기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우물거렸다. 아이렌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귀와 붉은 뺨이 귀여워서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꾹 참고 말을 이었다.

 

“자주 이야기 하지만, 저는 선배가 좋아서 잘해주는 거고 아무에게나 막 잘해주는 사람은 아니니까 착각하시면 안 된다고요.”

 

알고 있다. 아이렌은 모두에게 친절하긴 해도, 친절함과 다정함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정중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건 가능하지만,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는 일정한 선을 지키는 사람. 그게 아이렌이지 않던가.

하지만 러기는 그걸 알기에, 더욱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명문 마법사 양성 학교인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안에는 장래가 유망한 학생들이 한가득 있다. 왕자님 같은 녀석부터 진짜 왕자님. 별장이 몇 채나 있는 부잣집 도련님에 세계적인 인기 스타까지. 그런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것이야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고 현명한 행동이지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소시민이지 않나.

슬럼가에서 나고 자란 제게 있는 건 날렵한 움직임과 처세술 정도 뿐. 제 가치가 이것 뿐이라고 자조하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만약 제가 아이렌이라면 제게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이렌 군은 제 어디가 그렇게 좋은 검까?”

 

이런 걸 물어보는 건 너무 멋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심을 감추자니 부끄러움도 같이 옅어졌다.

그러나 가벼운 것은 물음 뿐. 헛웃음과 함께 시선을 피하는 러기의 물음에 제비꽃색 눈을 빛낸 아이렌은 논문 발표라도 하듯 조곤조곤 칭찬을 늘어놓았다.

 

“음, 일단은 생활력 있고 사회성 있는 점이라고 할까요. 저는 사람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잘 하지도 못하지만, 선배는 사교성이 있잖아요. 자신에게 없는 점을 매력으로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그, 그렇슴까?”

“예. 그리고 대범한 면도 있어서 꽤 카리스마 있다고 할까요. 레오나 선배처럼 군림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믿고 따를 수 있는 행동 대장 같은 느낌? 그리고 손익에 밝으셔서 같이 다니면 손해는 안 볼 거 같기도 하고.”

 

무작정 좋은 말로 포장한 뜬구름 잡는 듯한 칭찬이 아닌,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칭찬. 흘려듣고 싶어도 귓가에서 벗어나질 않는 칭찬에 다시 얼굴에 피가 몰릴 때, 아이렌의 입에서 결정적인 한 마디가 나왔다.

 

“무엇보다 선배는 멋있는 사람이니까요.”

“……예?”

“솔직히 미소년이잖아요. 키는 좀 작으시더라도, 눈도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귀여우시다고 할까. 그런데 행동이나 성격은 거친 면이 있어서 반전 매력이 있죠. 품에 껴안고 귀여워해 주고 싶다가도, 보호받고 싶어지게 한다고 할까.”

“…….”

 

혹시 아이렌은, 오늘 자신을 수치심으로 암살하기 위해 온 건가.

생일날이 제삿날이 될 위기에 처한 러기는 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쳐지는 귀를 아예 양손으로 잡아당겨 버리고 말았다.

킥킥. 러기의 반응에 숨죽여 웃은 아이렌은, 이번에는 제 쪽에서 질문해 왔다.

 

“그러는 선배야 말로 제가 챙겨주는 게 왜 신경 쓰이는 거예요?”

“……예?”

“저야말로 아무것도 없는데요.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진 탓에 지인도 혈연도 없고, 당연하지만 모아둔 돈도 없죠. 누구나 감탄할 만한 미인도 아니고, 딱히 귀엽거나 사근사근한 맛도 없는 걸요?”

 

꽤 거침없는 평가이지 않은가. 하지만, 저게 전부 사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

하지만 반박할 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 슬쩍 잡고 있던 귀를 놓은 러기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답했다.

 

“굳이 귀엽고 사근사근할 필요 있슴까? 저는 아이렌 군이 씩씩해서 좋은 검다.”

“그래요?”

“그럼요. 야무지고 의지 되는 여자가 얼마나 좋은데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기준 같은 건 어찌 되든 좋다. 중요한 건, 내 눈에 예뻐 보이니 가치가 있는 거지.

그 날것의 감정을 어떻게든 잘 다듬어 말로 내뱉으려던 러기는, 문득 제 대답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입을 닫았다.

 

‘……아. 그런 건가.’

 

제가 어떻든, 제 주변에 얼마나 잘난 놈들이 있든. 아이렌은 제 장점이 좋아서 이리 챙겨주는 거고, 다른 이들은 그걸 가지고 있지 않으니. 괜히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는 건가.

어쩌다보니 제 불안의 원인과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버린 러기는 밀려오는 황당함에 탄식했다.

딱히 자신이 명석하다 생각한 적은 없고, 철학적이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은 없었는데. 어느새 마음에 걸리던 문제의 답을 스스로 찾아내는 지경까지 오다니. 슬럼가에선 먹고살기 바빠 제 마음을 돌아볼 여유 같은 것도 없었는데. 역시 세월이란 놀라운 법이다.

 

“선배.”

 

요동치는 내면에 조용해진 러기 대신 정적을 깬 것은, 슬그머니 상대의 손을 잡아 오는 아이렌이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요, 봄에 벚꽃이 잔뜩 피었거든요.”

“벚꽃?”

“예. 버찌가 열리는 나무의 꽃 말이에요. 아, 체리랑은 좀 달라서 열매는 별로 맛있지 않은데, 꽃은 예뻐요.”

 

‘그건 좀 아쉬운데.’ 아무래도 꽃보다는 열매에 더 관심이 있는 러기는 속으로만 그리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벚꽃은 아주 예쁘지만, 초봄에 핀 후 금방 져요. 하지만 벚꽃이 지고 난 후엔, 겹벚꽃이라고 꽃잎이 풍성하게 달려 더 화려한 꽃이 피거든요.”

“흐음, 그렇슴까?”

“예.”

 

꽃 이야기는 그다지 관심 없지만, 아이렌의 이야기니까 일단은 들어야지. 가끔은 의뭉스럽게 말하긴 해도 쓸모없는 말은 하지 않는 걸 아는 러기는 여전히 귀를 열어둔 채 간간이 추임새도 넣었다.

 

“재미있지 않나요? 조금 늦게 피어도, 더 화려하고 풍성한 꽃이 핀다는 게.”

 

그렇게 말한 아이렌은 잡고 있는 손을 가볍게 깍지 껴 보았다. 그와 키는 비슷한 러기였지만, 손은 마디 하나 정도 차이가 나게 컸다.

야무지고 단단한 손. 뜨겁고 거친 그 손을 다섯 손가락으로 충분히 음미한 아이렌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저는 선배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예?”

“지금은 남들보다 돋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만개할 사람이라고요. 선배만의 모양과 색으로, 활짝 필 거예요.”

 

기분 탓일까. 손바닥으로 빠르고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전해져오는 것 같다.

그게 누구의 박동인지는, 두 사람 다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생일 축하해요, 선배. 아마 내년 생일에는, 더 멋있어져 있으시겠죠? 그때도 축하해 드릴게요.”

 

아. 턱 끝까지 더운 숨이 차올라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형용할 수 없는 울렁거림에 입을 꾹 다문 러기는 빠르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커플링
#드림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