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고시키 환생IF물 드림

1. 변신

하이큐 고시키 환생IF물 드림 -w. 22.09.

드림 by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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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부터 무덤까지, 우리는 배우고 잊는다. ‘가능하다’, ‘할 수 있다’의 범위는 제로에서 시작해 제로로 맺는다. 나는 내 생의 온점의 자리를 미리 정해 두었고, 신중하게 찍었다. 이왕이면 뭐든 내 것이라면 내 손에 있길 원했다. 내세는 믿지 않았다.

 

좀 믿어볼 걸 그랬다. 제정신으로 에베베거리며 기어다닐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계속 살다 치매에 걸리는게 나았을텐데.

 

환생이든 뭐든 간에, 완성된 하나의 자아가 태아에 깃들었다. 이 사실이 시사하고 지랄같은 점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경험자로서 장담할 수 있는게 하나 있다. 평범한 사람도 자기를 인지하는 상태로 신생아부터 다시 시간을 보내면 미친다.

 

머리는 끝도 없이 무겁고, 식물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의식과 신체가 따로 논다. 그나마 뇌가 설익어도 한참 설익어 사고고 인지고 뚝뚝 끊긴 덕에 시간 감각이 완전히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없이 맨정신으로 몇년을 보냈다면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어떻게든 죽으려 했을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정신보다 통제되지 않는 신체가 두려워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걸음마를 뗄 즈음부터 드디어 시야가 트였다. 부모는 꽤 좋은 사람들 같았고, 일단 보이는 집안이 괜찮았다. 그럼 굳이 다시 죽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나는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 활발하게 몸을 쓰고 잠에 빠지는걸 반복하며 시간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내려고 애썼다. 기억하는 인생 중에 가장 고달픈 시기였다. 아무리 구강기라지만 나는 원래 깔끔 떠는 성격이었다. 입에 아무거나 넣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서 싫은데, 이거 발달과정에 괜찮은건가? 나중에 애가 그때부터 좀 이상했어 같은 소리 들으면 어떡하냐고. 이런 답도 없는 번뇌를 생후 십몇개월짜리 뇌로 굴리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잘 가긴 했다. 이런 사고가 지적 자극이 돼서 뇌 발달이 빨리 된다면 좋겠다. 제발.

 

입을 열심히 움직인 덕에 마마를 말할 수 있게 된 날에는 너무 기뻐서 울었다. 어머니는 기쁨을 채 느낄 새도 없이 바쁘게 날 달랬다. 하지만 달래는 목소리에서 들뜸이 느껴졌다.

 

인생 너무 힘들다…

 

이름은 고시키 츠토무. 중산층 가정에서 아래에 달고 태어나다니 딱 좋다. 부모를 보니 미래를 기대해봄직했다. 아버지는 인텔리 계열이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다. 종종 지인을 불러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양을 보아하니 척 봐도 있는 집 부인이라는 느낌이다. 어린 고시키는 벽 모양으로 쌓은 블럭의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쳤다. 그러자 같이 쌓던 애가 와락 화를 내며 울었다. 원래 애는 난리를 좀 쳐줘야하는 법이다. 이 나이에 책을 읽겠답시고 한자사전을 펼쳐놓고 앉아있는게 더 이상하다.

 

고시키 부인은 제 아들이 다루기 꽤 쉬운 아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데리고 여기저기 나가기 시작했고, 꽤 풍부한 유년기를 보내게 해주었다. 어떻게든 즐거움을 안겨주려고 애쓰는 티가 났다. 이맘때의 어머니는 아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법이다.

 

체육관에 가서 공을 잡았다. 역시 남자애는 공놀이지. 주녁에 집에 돌아가면서 공을 사달라고 조르자 부인이 저녁에 아버지가 퇴근하면 말해보자며 웃었다. 웃는 낯이 참 단아했다.

 

“엄마, 엄마.”

 

나는 팔을 쭉 뻗어 부인의 손을 꾹꾹 잡아당겼다. 부인이 왜 그러니, 츠토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는거 좋아. 히-”

 

조그만 손가락을 접어 양 검지로 웃는 입꼬리를 덧그리자 부인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츠-토-무-”

 

하이톤의 비명을 지른 부인이 나를 휙 안아들고 둥기둥기하며 웃는 소리를 냈다. 엄마 많이 웃을게? 우리 천사- 하는 목소리가 구름 위에 있다. 나는 따라 웃었다.

 

 

*

 

 

무능함과 지루함이 주는 무기력함을 꺾기 위해 이것저것했다. 소프트볼부터 축구까지 여러 공놀이를 했고, 책을 읽었으며 주말이면 부모들을 졸라 이곳저곳 여행했다. 미대 출신인 어머니는 이따금 전시를 가거나 스케치를 그리곤 했는데, 고시키 부자는 그런 예술혼을 이해하기 어려워했으므로 가끔 분위기가 따로 놀았다. 늘 집 군데군데에 꽃장식이 있었고 매년 찍는 가족 사진을 제 그림과 함께 보관한다. 상차림과 아버지의 도시락은 언제나 과하지 않게 정갈한 멋이 있었다. 아버지는 늘 피곤한 인상의 남자지만 제 가정을 지극히 아꼈다. 생각이 많아 금방 지치는 고시키를 놀아주며 체력을 길러주려고 애쓰곤 했다. 당신도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며, 노력하면 된다고.

 

나이에 걸맞게 깔깔 웃는 어린애가 머릿속에 있다. 축복받았어! 피치 높은 어린애 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린다. 축복으로 늘씬 두드려 맞는 나날 속에서 어린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축복받은 삶이야. 그렇지?

 

웃어.

 

 

 

공놀음에 관심을 두었다. 한참 공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생각에 빠져있기보다는 놀이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양육자에게 숨을 돌릴 시간을 줄 수 있었다. 오죽하면 또래 아이가 있는 지인들이 놀러와 고시키에게 아이들을 붙여놓을 정도였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츠짱, 대단해-!”

 

마당에서 솜씨 좋게 공을 통통 튕기며 묘기를 부린 고시키는 씩 웃으며 브이자를 그렸다.

 

“공원 가서 축구하자! 나 이기면 가르쳐주지~”

 

“좋-아!”

 

“공 가지고 먼저 가- 곧 갈게.”

 

고시키가 공을 던져주자 제가 먼저 잡겠다고 달려든 아이들이 왁왁 소리를 질렀다. 고시키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싸우지 마! 말로 싸우지 말고 공원까지 승부해! 남자잖아?”

 

혼이 쏙 빠지는 고함에 멈춘 둘 사이에서 공을 휙 빼앗은 고시키는 그대로 담장 너머로 공을 던졌다. 아이들이 우르르 공을 쫓아 달렸다. 고시키는 손을 탈탈 털고 얼굴을 대충 손등으로 문지른 다음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애들이랑 공원가서 축구할래요. 가방 챙겨주세요.”

 

“결국 오늘도 나가니?”

 

살풋 웃은 고시키 부인이 다가와 손수건으로 고시키의 이마를 닦아주고 냉장고로 향했다. 차를 마시던 카미노야마 부인이 웃으며 손짓했다.

 

“츠토무가 있어서 아줌마는 항상 안심이야. 가면서 사탕 먹으렴.”

 

사탕 두어개를 얌전히 받은 고시키는 히히 웃었다. 냉장고에서 물병 세 개를 꺼내 가방에 집어넣고 수건을 두 장 챙겨넣은 부인이 정성껏 아들의 어깨에 가방을 매어주었다. 고시키는 양뺨에 사탕을 도록도록 굴리며 뭉개지는 발음으로 다녀오겠슴다 인사하고 쫄랑쫄랑 달려나갔다.

 

“아유, 낳은게 아들만 아니었어도 미래 사윗감 삼는건데 말이에요.”

 

“나중에 여럿 울리게 생겼죠? 어쩜 저렇게 예의바르고 싹싹할까.”

 

완전한 휴식 시간에 얼굴이 확 편 부인들이 너도나도 남의 아들을 띄워주기 시작했다. 활기 넘치는 남자애들을 싹 데려가서 대장 노릇을 하면서도 어린아이 특유의 과도한 무모함이 없는 고시키는 누가 뭐래도 어머니들의 인기 1순위였다.

 

“방금 들었어요? 싸우지 마! 싸우지 말고 승부해! 라니, 가끔 말하는걸 듣다보면 꼭 어디 코치 같다니까요. 어디 클럽에라도 들었어요?”

 

“에이, 츠토무 군이 어딜 꼭 들어가야 하나요? 공터 가서 공만 차고 있어도 사람들이 모이는데. 저번에 장 보러 가는 길에 분명 혼자 공터로 가는걸 봤는데,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니 우르르 뛰어다니고 있는거 있죠.”

 

고시키 부인은 말없이 웃으며 차를 새로 우렸다. 부인끼리 모여 자식 얘기하는게 당연하다지만, 자식 자랑을 할 틈이 없다. 어쩐지 그게 쓸쓸했다. 분명 더없이 자랑스러운 자식인데도.

 

소학교 생활은 적당히 독서와 기초 암기 따위로 시간을 보냈다. 한자와 영단어만 꽉 잡아도 미래가 훨씬 편하다. 사립으로 들어온 시점부터 반은 끝났다고 봐도 되지만 말이다. 에스컬레이터 루트를 탄 것이다. 여러모로 웃긴 구조다. 이러니까 오야가챠(부모뽑기)같은 말이 나오는 거지. 고시키는 공감해줄 이 하나 없는 생각을 접어넣고 방과후 클럽활동 신청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카미노야마 소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소-짱, 들고 싶은 클럽이라도 있어?”

 

“앗… 혹시, 음, 같이 배구 안 할래?”

 

소우가 우물쭈물하더니 물었다. 생긴 거나 하고 다니는 거나 소심함과는 거리가 멀면서 유독 고시키에게 꼬리를 내리곤 했다. 못 이길 상대라서 그런건지. 고시키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별 생각 없이 그럴까? 중얼거렸다. 소우가 활짝 웃으며 한손을 치켜들었다.

 

“배구 클럽 들 사람 붙어라! 츠토무도 할 거야!”

 

“어! 나 할래!”

 

“아, 종이 버렸는데!”

 

“이름 한 장에 쓰면 안 되나?”

 

같이 공 한 번이라도 차본 남자애들이란 애들은 다 모여서 시끌벅적하다. 고시키는 하품을 했다. 운동부 괜찮지. 운동계 텃세만 좀 없으면 말이다. 그래봤자 소학교인데 뭐 어떤가 싶었다.

 

방과후 배구 교실에 들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주말에 몇 번 배구 경기에 데리고 나갔다. 뭔가 인과관계가 뒤바뀐 느낌이지만 하여튼 공부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남자가 되란다. 본인이 비실거려서 그런가? 어차피 고시키는 그럴 생각이었다. 정신력은 체력에서 나온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인데 건강하지 못한 정신이니 몸이라도 건강해야지. 어느정도 배구가 손에 붙을 무렵부터 고시키는 거의 온종일 손에 공을 달고 살았다. 에이스에게 헌신을 바치는 이 스포츠가 마음에 들었다. 학교에서 그는 분명 에이스였다. 어렸을 적부터 이끄는 데에는 도가 텄다.

 

공 자체에 익숙하고 배구 클럽에 몸담았던 고시키는 중등부에 진학하자마자 입부했다. 곰살맞게 선배들과 재회하는 시간을 가지고 곧바로 솔선수범해서 잡무를 넘겨받았다. 학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클럽 활동을 한 덕에 이미 아는 얼굴이 꽤 됐다.

 

시라토리자와 학원 배구부는 전국 수준이다. 중학교 추천 입학, 내부진학, 고등학교 추천 입학 삼박자로 웬만한 학교는 따라하지도 못할 인재풀을 자랑한다. 사실 어딜 가든 간에 중학교 스포츠 추천 입학은 없다고 봐도 되지만, 현내 유년 배구 클럽까지 꿰고 있는 고교 감독이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과장섞어 인근 지역에 터잡은 중고등학교 코치의 절반은 와시조 감독 손에 굴러봤다고 봐도 될 정도다. 미야기 현 내에서만큼은 최고로 배구 고인물이다.

 

그렇게 추천으로 들어온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중심인 시라토리자와 중학교 배구부는 재작년부터 키타가와 제1중을 꼬박꼬박 꺾고 전국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고 한다.

 

도전, 해볼만하지 않은가? 무참하게 꺾여도 좋다. 나는 전력으로 부딪힐 만한 무언가를 찾으며 몇년을 보냈다. 스포츠는 건강하고, 향상적이며, 덧없이 아름다우니 그에 걸맞다.

 

코치의 손짓에 따라 신입부원들은 일자로 서서 선배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 최고의 배구를 해보자. 상등품들아.

 

보통 1학년의 부활동 시간은 잡무와 함께 어지럽게 사라진다. 곱게 자란 아이들이 보조를 맞춰 한 팀을 받치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연습에 적극적으로 끼워주는 것도 아니라서 신입생들은 이리저리 튀는 공을 줍고 정리하다 선배들이 휴식을 취하는 틈에나 잠깐 연습을 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눈치와 손이 빠르지 않으면 앗 하다 연습하지 않는 것에 적응해버린다는 의미다. 그러나 고시키는 고시키였으므로, 금세 벤치에 들었다. 위험하지 않게 공을 치우는 눈썰미를 눈치챈 감독이 리시브부터 해보라며 연습에 끼워준 것이 계기였다.

 

“키는 몇이냐?”

 

“170cm는 됩니다.”

 

“빨리 컸구만. 자율 연습도 할거지?”

 

“네.”

 

“그럼 스파이크 연습하고. 이제 저쪽 가라.”

 

고시키의 팔뚝을 툭툭 두드린 감독이 축객령을 내렸다.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고시키는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개털리고 있는 놈들 쪽으로 바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공을 제대로 못 주워서 주전이 넘어질 뻔했단다.

 

“소우, 공 올려줘!”

 

고시키는 자율 훈련이 시작되자마자 한손으로 소우에게 공을 던졌다. 마찬가지로 익숙하게 한손으로 공을 받은 소우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신입부원은 아닌게 확실한 사람이 공을 낚아챘다.

 

“감독님이 스파이크 연습하라셨지? 세트는 나한테서 받아. 나 세터거든.”

 

금발을 꽁지로 묶은 이름 모를 선배는 그렇게 예비 벤치 멤버를 홀랑 낚아갔다. 금발에 반달눈이라 제법 날티나게 생겼다. 고시키는 네에, 대답하며 소우에게 눈인사했다.

 

“건너편에서 리시브해라, 1학년~”

 

첫날부터 섬세하게도 가른다. 고시키는 머리를 긁적이고 몸을 풀었다. 선배는 가볍게 천장을 향해 일자로 공을 띄우더니 토스했고, 고시키는 힘있게 내리쳤다. 소우의 리시브가 크게 튀었다.

 

“오, 나이스킬.”

 

선배가 작게 휙 휘파람을 불었다. 열몇번쯤 공을 올려준 그는 이제 자기는 간다며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냥 고시키의 실력이 궁금해서 남은 듯했다. 어쨌거나 고시키는 감독의 주문대로 스파이크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공을 올려주겠다고 나서는 부원들이 많았다.

 

“지친다- 배고파-”

 

고시키는 하품을 하며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함께 남은 소우와 걸었다. 다른 애들은 저녁 시간이라며 진작에 싹 빠졌다. 소우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중학교는 차원이 다르긴 하네. 솔직히 무서워-”

 

“확실히 운동부라는 느낌? 다들 기운이 막 뿜어져 나와.”

 

고시키는 키득거리며 가방을 고쳐맸다.

 

“내일부터 도시락 싸달라고 해야겠다. 소우는?”

 

“당연히 나도.”

 

소우가 주먹을 내밀었다. 고시키는 씩 웃으면서 딱 소리나게 주먹을 부딪혔다.

 

“3년동안 잘해보자!”

 

*

 

카미노야마 소우의 본가는 꽤 크게 산지 농사를 하는 집안으로, 시라토리자와를 나오지 않은 가족이 거의 없는 지경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교우관계에서 소외되면 어쩌지, 하는 사소한 것들뿐이다. 그러나 소우는 꽤 일찍부터 이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시키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끼리의 친교로 일찍부터 알게 된 그들은 곧잘 어울리기 시작했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소우가 느낀 츠토무의 첫인상은 지루한 애였다. 아직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과 지루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는 나이였기에. 그리고 곧 그 인상이 뒤집어진 탓에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츠토무는 뭐든 잘하는 아이였다. 낯을 가리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가고, 공통 관심사를 찾아 끌어당기는 솜씨는 또래 아이가 가질 법한 것이 아니었다. 소우는 금세 츠토무와 노는 것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심지어 함께 있으면 칭찬이나 간식을 받기도 했다! 그냥 같이 놀았을 뿐인데! 츠토무는 그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츠토무 집에 간다고 하면 어머니가 잠깐 기다리라며 그 집 부인에게 전화해서 차를 마시러 갈 수 있겠냐고 물을 정도였다. 하지만 종종 집에서 그래도 애가 애다워야한다는 말을 했는데, 소우는 이름을 듣지 않아도 누굴 얘기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츠토무는 애 답지 않고 어른 같다는 걸까? 그래서 어른들이 다들 좋아하는건가? 왠지 츠토무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츠짱, 애가 애다워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으음~?”

 

잠자리채를 들고 경쾌하게 걷던 츠토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츠토무는 뭐든 다 알아. 저 침음은 아는데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거다. 곧 츠토무가 손가락으로 소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는 애다운 편이 좋아! 학생은 학생다운, 어른은 어른다운 편이 좋아! 소우는 소우다운 편이 좋아! 그치? 다 같은 말이야!”

 

“역시 츠짱은 똑똑해-! 맞아!”

 

“그러니까 오늘은 대왕잠자리 잡자!”

 

“그래!”

 

아이들만이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 빛나는 동경이다. 돌아보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조차 가지 않는데, 고시키는 상대가 누구든 달변인 구석이 있었다. 카미노야마 소우는 분명히 그 어린 나이부터 고시키 츠토무를 동경했다.

 

그의 우상은 그때부터 그를 한순간도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한자를 읽었고, 어른과 대화를 길게 할 수 있었으며 무서워보이는 형들도 고시키와 몇마디 대화를 나누면 바이크에 올라타게 해주었다. 츠토무의 “굉장해-! 멋져-!” 는 듣기만 해도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정말 굉장한 사람의 굉장하다는 말은 파급력의 크기 자체가 달랐다.

 

넘어지면 반드시 일으켜주며, 울어도 된다고 말한다. 언젠가 함께 계곡을 넘다 발이 꼬여 소우가 크게 넘어진 적이 있었다. 츠토무는 그를 부축하고 산을 내려가고 제 집과 한참 먼 소우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소우는 엉엉 울어젖히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귀에 꽂히는 사과에 그만 뚝 그치고 말았다.

 

“죄송해요. 제가 계곡에 가자고 해서…”

 

“거짓말하지 마아아-!”

 

소우는 아픈 것도 잊고 츠토무의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들었다.

 

“내가 가자고 했잖아-! 츠짱은 잘못한거 없으어엉… 흐어엉-”

 

내가 바보라서 혼자 넘어졌다고 소리 지르며 또 펑펑 울었다.

 

카미노야마 부인은 눈물에 푹 절은 제 아들과 땀에 푹 절은 아들의 친구를 번갈아보다 몸을 숙여 꼭 끌어안았다.

 

“소우는 들어와서 치료 받고, 츠토무 군은 잘못한 것 없이 고개 숙이지 말아라. 들어와서 샤워라도 하렴.”

 

그 후로 카미노야마 부인은 츠토무를 반쯤 아들 취급했다. 자연스럽게 고시키 부인도 소우를 말괄량이 둘째 아들 취급했다. 동갑이지만 말이다. 위화감 따위 없었다. 츠토무 방에 놀러갔더니 책장 하나가 꽉 차 있었다. 완전 어른 같았다.

 

“3년 동안 잘해보자!”

 

그러면 3년 뒤는? 소우는 가로등 불빛에서 고개를 돌린 채 웃었다.

 

 

*

 

 

배구는 세터 놀음이다. 이를 모르는 배구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뛰어난 기량을 세터로 가꾸느냐 에이스로 가꾸느냐에 따라 이를 지지하는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시라토리자와는 명백한 후자였다. 키타가와 제일-아오바죠사이로 이어지는 세터 키우기와 대조되게도, 시라토리자와는 원석을 휘리릭 갈고닦아 에이스라는 무기로 삼는 것이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고시키는 첫날부터 차기 에이스로 감독에게 찍히고 곧바로 관심이 훨씬 많이 오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헌신의 대상을 찾는 하이에나들 같았다. 세터들은 공을 올려보고 싶어했고, 리베로들은 공을 받아보고 싶어했으며 미들 블로커들은 공을 막아보고 싶어 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오른손부터 퍼진다. 강하다는 것은 기분이 좋다. 그리고 아직 나는 강하지 않아.

 

“1학년 스파이커.”

 

부에 들어간 다음날 가벼운 몸을 끌고 일찍 등교했는데 의외로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운동복을 입은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교문을 나서다 멈췄다. 고시키는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시지마 선배님!”

 

“…이름이 뭐였지?”

 

“고시키 츠토무입니다!”

 

“그래, 고시키. 체육관 문은 열어뒀다. 연습해.”

 

“넵!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꾸벅이자 우시지마가 잠시 쳐다보더니 휙 지나쳤다. 달리기가 안정적으로 빠르다. 금세 시야에서 멀어진다. 로드워크 멋지네. 체력단련인가? 나중에 말 붙여봐야지. 고시키는 체육관 구석에 가방을 던져넣고 오버-언더 핸드를 번갈아 연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한 코치가 공 소리를 듣고 쑥 들어오더니 30분쯤 지나면 하나둘씩 오기 시작할 테니 몸 풀고 있으라고 말했다.

 

하나둘씩 오기 시작한 주전들이 한마디씩 말을 붙였다. 오, 1학년. 1학년 있네? 1학년 안녕~ 같이 혼잣말에 가깝긴 했다. 고시키는 꾸벅꾸벅 인사하고 혼자 연습을 계속했다. 뒤늦게 등교한 1학년들이 달려와서 기다렸다며 쪼아댔다. 곧 코치의 헛기침에 흩어졌지만 말이다. 아침 연습을 마치고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을 마셨다. 같은 반인 와타나베가 가방을 챙기며 고시키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시키는 눈을 굴리며 가방에 대충 물과 수건을 던져넣었다.

 

“왜?”

 

“아니, 너는 맨날 덤덤하게 열심이다 싶어서.”

 

“뭐야 그게.”

 

실없는 말을 들었다는듯 웃은 고시키는 고개를 까딱하며 1학년 무리에 합류했다. 앞으로 매일 일찍 나올거냐? 어, 연습할 거야. 레귤러가 목표? 정확히는 에이스가 목표지! 뭐, 츠토무라면 하겠지. 왜 기대가 낮은 것처럼 말하는 거냐. 시라토리자와의 에이스가 쉬워보이냐고! 그야… 네가 하겠다고 한 걸 못하는 쪽이 더 상상이 안 가잖아? 고시키는 좀더 존경을 담으라고 소리치며 헤드락을 걸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다. 고시키는 이제 행복에 지겨움이라는, 더없는 사치를 느꼈다. 전두엽에서 공사판이 벌어졌나. 어느정도 갈무리한 줄 알았던 잡생각이 도로 든다. 나아가서 좋을 것 없는 생각은 발전시키지 않는 편이 좋다. 고시키는 말을 줄이고 운동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키도 빨리 컸는데 사춘기쯤이야 빨리 올 수도 있는거지. 대외용 성격이 반쯤 제2의 천성으로 붙기도 했지만 체력을 소진하면 결국 본래 성격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굳이 따지자면 원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말소된 어른이었어서… 때 좋게 잠이 몰려와서 그냥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중학교 부활동은 딱 즐거운 부활동의 마지노선에 있다. 4월의 어수선함은 골든 위크의 합숙을 거쳐 정리된다. 고시키는 개인 공과 함께 짐을 챙겼다.

 

“당연한거지만, 엄마는 아쉽네…”

 

고시키 부인은 제 알아서 짐을 싸는 아들의 방의 문턱에 서서 제 뺨을 감쌌다. 좀더 부모에게 의지해도 좋을텐데, 제 아들은 워낙 혼자 잘했다. 적어놓은 준비물의 목록을 체크하던 고시키는 침대에 앉아 씩 웃었다.

 

“걱정 마세요!”

 

“네가 뭐 걱정시키는 애니. 믿지 그럼.”

 

전력으로 실망시키고 싶다. 고시키는 생글거리며 가방을 잠갔다. 그 위에 공을 올리고 식탁으로 향했다. 3학년에 엄청난 스파이커가 있다고 한껏 재잘거리고 집을 나섰다. 동경이란 좋다.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매일매일 8일간 훈련이다. 짐을 각 기숙사에 처박자마자 로드워크 5바퀴를 돌고 2•3학년들은 팀을 짜 연습 경기를, 1학년들은 포지션 결정에 앞서 기록부터 쟀다.

 

“…2학년 레귤러만큼은 뛰는군.”

 

볼펜 끝으로 옆머리를 긁적인 코치가 파일을 덮었다.

 

“아이카와, 나와서 토스 좀 올려라! 대신 스기야마가 들어가고!”

 

“예에-”

 

아이카와 세이지는 3학년 세터로, 말하자면 주전 후보였다. 그 우시지마에게 토스를 올리던 선수가 미련없이 공을 넘기고 나왔다. 곱슬기 있는 옅은 갈색 머리가 깔끔하게 짧다. 눈에 띄는 외형은 아니지만 단정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얘 경기 뜁니까?”

 

“일단 키워보고. 골든 위크 동안 네가 맡아봐라.”

 

“잘 부탁드립니다!”

 

고시키는 일단 공손하게 굴기로 했다. 아이카와는 으엑 소리를 내더니 고시키의 어깨를 토닥였다.

 

“진짜 운동부 타입이네! 따라와, 고시키.”

 

고시키는 빠르게 눈을 굴리고 고개를 숙이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어느새 공을 옆구리에 낀 아이카와가 고시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자. 측정하면서 몸은 다 풀었지?”

 

“네.”

 

적당히 도움닫기할 거리를 벌린 고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파이크 백번을 쳤다. 스포츠 드링크를 생명수처럼 마시고 땀을 닦자 아이카와가 공을 휘릭휘릭 돌리며 구경했다. 그가 무어라 입을 떼기 전에 감독이 농땡이 피우지 말라고 말했고, 고시키는 곧바로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뭘하면 되겠습니까, 아이카와 선배?”

 

“농땡이 좀 피웠으면 좋겠는데…”

 

“네?”

 

아이카와가 약간 죽은 눈으로 뜨뜻미지근한 시선을 보냈다. 감회가 새롭다느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가 공을 들었다. 그리고 시라토리자와 고교에서 내려왔다는 전통 에이스 훈련 풀코스가 시작되었다. 같이 들어왔는데 하나는 주전 세터가 붙고 나머지는 볼보이 노릇이네 어쩌네, 같은 불만이 나올 수 없을 만큼 고시키는 개같이 굴렀다.

 

“선배, 그거 아십니까. 구급차에서 졸리다고 하면 응급대원들이 뜯어말린답니다. 잠들면 그대로 죽는답니다.”

 

“몸을 제대로 풀어라, 고시키.”

 

“지금 죽으면 근육이 이완될… 우시지마 선배?”

 

바닥에 늘어져 있던 고시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이마를 꾹꾹 눌러 잠을 쫓아주던 아이카와가 감탄하며 손을 물렸다. 우시지마의 눈썹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근성이 좋군.”

 

“오올, 에이스로부터의 인정.”

 

진이 빠져 고장난 고시키를 위해 아이카와가 친절하게 해설을 붙였다. 고시키는 머리를 박으며 감사하다고 외쳤고, 그대로 푹 고꾸라졌다.

 

“고시키?”

 

“…잠든 모양이다.”

 

“야, 1학년! 얘 죽었다!”

 

아이카와는 뒷정리 중인 1학년 둘을 불러다 기숙사에 날라다 놓게 시키고 뒷정리를 도왔다. 그러나 옆에서 손을 돕는 와카토시의 포스 때문에 자꾸 1학년들이 바짝 쫄아버리는 바람에 곧 자리를 비켜줘야만 했다.

 

“이야, 내가 굴렸지만 그걸 다 따라올 줄이야. 와카토시 군은 1학년 골든위크 때 무슨 생각했어?”

 

우시지마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역시 강하다고 생각했다. 네가? 아니, 이곳이.

 

같이 지낸지 3년쯤 되니 슬슬 저 짧은 말이 이해가 된다. 아이카와는 이참에 세터의 소중함을 느끼라며 우시지마의 팔뚝을 두드리고 먼저 욕실을 차지했다. 대답은 들으나 마나였다. 이미 느끼고 있다는 말이나 하겠지. 하지만 그건 세터로 누가 있어도, 자신에게 헌신한다면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당연하다.

 

고시키는 어떤 강렬한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을 차리니 온 얼굴이 따갑고 몹시 추웠다.

 

“어? 야, 꺼! 깼다!”

 

축축하고 추운, 샤워실 바닥이었다. 고시키는 오두방정을 떨다 넘어지는 제 친구를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가엾게도 멍청하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일어나 앉아 둔한 머리를 긁었다. 마찬가지로 젖어있었다.

 

“깨워줘서 고맙다. 나 씻을래…”

 

일단 따뜻한 물부터 틀은 고시키는 축축 처지는 느낌에 아래를 쳐다봤다가 웃었다. 바지는 안 벗겨놨다. 그랬으면 진짜 꼴이 웃겼겠다 싶어서 고시키는 실실 웃으며 친구놈들을 다 쫓아냈다.

 

졸면서도 깨끗하게 씻고 세탁까지 마친 고시키는 비틀거리며 운동복을 널고 숙사로 향했다. 깜찍한 놈들이 갈아입을 사복을 챙겨줘서 알몸 행진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라, 소-짱.”

 

“좀비 다 됐네. 부축해줘?”

 

“어어…”

 

고시키는 비척비척 다가가 소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를 기댔다. 소우가 수건으로 고시키의 머리를 탈탈 털었다.

 

“하여간 빼는 법이 없다니까. 선배들 눈에 다 써져있더라. 독한 자식-하고.”

 

“그야-나는-에이스가-될-남자니까-!”

 

고시키는 양손 주먹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소우가 에이스가 비리비리해서 되겠슴까~ 하며 장난을 쳤다.

 

“그럼 혼자 갈까?”

 

고시키는 언제 비틀거렸냐는 듯이 팔을 풀고 한걸음 물러나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꿰어넣었다. 밝은 복도 불빛 아래에서 크게 그림자가 질 리가 없는데도, 잠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소우는 순간 멈췄다. 고시키는 수건을 양손으로 잡고 씩 웃은 다음 소우를 끌어당겨 방에 넣었다. 과연 착한 어린이들이라 반듯하지는 않아도 성실하게 요를 깔아뒀다. 고시키는 대뜸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학년별로 방이 다른건 참 좋았다. 이런 장난도 칠 수 있고.

 

“일어나!”

 

귀에서 쨍 울리는 목소리가 높은 피치에 갈라졌다. 변성기 특유의 것이다. 고시키는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3학년들이 제각기 방법으로 1학년들을 깨우고 있었다.

 

“군인이냐? 빨리 일어나니까 좋긴 하네.”

 

고시키는 머리를 털며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몽사몽 잠투정을 중얼거린 와타나베가 눈을 뜨더니 기절하려고 했다. 주전 에이스의 스파이크를 잔뜩 봤던 기억이 재생되고 있지 않을까. 정작 그 우시지마의 왼손은 아주 친절하게 그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그외에는 발로 차이는 애들이 부지기수였다.

 

“씻으시는 동안 뭐 챙겨두면 되겠습니까?”

 

“어, 연습복. 수건도 부탁해~ 힘내고.”

 

아이카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3학년을 데리고 떠났다. 고시키는 아직도 비몽사몽한 1학년들을 공평하게 걷어차 깨우고 연습 준비를 이끌었다. 어디 부는 선배 양말에 팬티까지 빨아야한다더라, 같은 소문을 씹으며 샤워실에 연습복과 수건을 갖다놨다.

 

워낙 부원이 많아 등번호에 무너질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리 등번호를 외워둔 고시키가 커버했다. 오오오, 1학년의 에이스시여! 그럼 드링크는 너희가- 그건 좀. 네가 2명 몫은 들잖아. 차라리 만들테니까 너희가 들어라. 근육통에 죽을 것 같아. 아이코, 옛 말에 에이스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말라는 말이 있었지? 소우가 눈을 찡긋찡긋거리며 드링크 병을 돌렸다. 전날 밤에 씻어 말려둔 덕에 깨끗한 병에 산업혁명의 주역, 분업의 축복이 내려앉았다.

 

“에휴, 쌓아봐라. 이 자식들아.”

 

고시키는 양팔 가득 요령좋게 드링크 병을 쌓고 눈썹을 까딱했다. 사실 이렇게 오래 할 할 일도 아니었고, 농담 따먹다가 아침을 굶고 싶지는 않으니 빨리 갖다 놓고 씻어야 했다. 그는 손이 남는 애들에게 먼저 가서 체육관 싹 환기해놓고 씻으러 가면 시간이 맞지 않겠느냐고 때려맞춘 추측을 던졌다. 그리고 슬쩍 2학년 방 확인도 해보라고. 점점 길어지는 체크 사항에 몇몇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이카와 선배가 시켰어?”

 

“아니? 내 생각에는 2학년들이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예상은 적중했다. 감독과 코치에게 까인 2학년들은 아이카와에게 다시 소집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래봤자 중학교 2학년인데 너무 혼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고시키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곧 휘발되었다. 알 바인가. 중학교는 어찌 보면 고등학교보다도 1년 차이가 하늘과 땅과 같고, 막 초등학교 졸업해서 운동부 경험도 없는 애들보다 못하냐? 대가리 박을래? 같은 상황에서 그 애들에게 걱정받는 것이야말로 중2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일 터다.

 

그 나이땐 자존심이 전부지. 고시키는 아이카와의 쓰다듬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키가 비슷한 탓에 저절로 숙여졌다. 곧 아이카와가 소리쳤다.

 

“자, 로드워크 나가자!”

 

이번 시라토리자와 학원 중등 배구부의 신입들은 반이 고시키와 친구들이었고, 반의 반은 그냥 적당히 운동부에 들러 온 내부진학생, 나머지는 입시를 치르고 들어온 진짜 신입생이었다. 바글바글해서 다같이 자려면 테트리스를 해야 했는데,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부를 갈아타거나 귀가부로 전환하는 인원이 생겨 여유가 생일 것이다. 쓸쓸할까? 고시키는 한적한 오르막을 달리며 생각했다.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쓸쓸하다. 하나하나가 소중하기에는 너무 많으며, 또 소중한 것들이 많은 이들은… 고시키는 숨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며 페이스를 높였다.

 

우시지마는 이미 앞질러 나갔다. 아이카와는 뒤에서 낙오자를 챙기고 있다. 고시키는 그 가운데에서 달렸다.

 

 

*

 

 

중간고사가 끝나자 곧장 인터미들 예선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고시키는 주전들과 급속히 친해졌다. 반은 처신을 잘한 탓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순전히 아이카와 덕분이었다. 그는 아주 쾅쾅 차기 에이스라고 도장을 찍고 곧잘 연습을 봐주었다. 사담도 곧잘 나눴다. 아침 일찍 체육관으로 나와 로드워크로 나가는 우시지마를 배웅하고 아이카와가 고시키에게 토스를 올려주는 일상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고시키는 3학년을 아우르는 정서를 꽤나 깊숙하게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도 아니고 중학교에 이례적으로 스포츠 추천으로 들어온 애가 배구를 한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문을 두드린 이들이 꽤 많았고, 절반은 나갔지만 절반은 남았다. 그들 중에는 주전 욕심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코트 안이든 밖이든 절대 에이스를 보고 싶은 마음은 다 같다. 병풍이라고 부르고 싶거들랑 그래라. 중요한건 그 순간에 가장 가까운건 우리였다는 거다… 변명하듯이 말이 자꾸 늘어졌다. 고시키는 저도 모르게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병풍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팀은 팀입니다. 아이카와는 한참 뒤에 되물었다. 와카토시도 그렇게 생각할까?

 

‘지나가는 팀’ 같은건 없습니다. 동료의 헌신이 에이스를 만듭니다. 그걸 모르는 에이스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에이스가 팀에 헌신하는 겁니다.

 

헌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하죠.

 

그 후로 아이카와는 대놓고 고시키를 아꼈다. 덩달아 우시지마도 고시키를 보면 가벼운 인사나 간단한 조언 등을 던졌다. 그 자세는 무릎을 계속 굽히고 있지 말고 뻗어가듯 펼쳐야 탄력이 더 붙는다느니, 팔꿈치가 내려갔다느니 제법 관찰을 필요로 하는 조언도 많았다. 우뚝 존재하는 에이스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주변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티를 내잖아.

 

 

 

고시키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 꽤나 고무되었는데, 종종 다른 비주전들이 괜찮냐고 물어왔다. 얼핏 엿듣기에는 솔직히 종종 살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들이긴 했다. 고시키는 요령 좋게 가끔 얼버무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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