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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 펠미에 드림
* 에펠아 생일 축하한다 나레칼 최고 상남자는 너다.
해가 막 지평선 너머에서 떠오른 5월 6일의 이른 아침. 생일을 맞이한 에펠은 아침부터 일어나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다 말고, 자신을 부르는 메시지를 받고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에펠 군, 생일 축하해.”
기숙사 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건 두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인사하는 아이렌이었다. 살갑게 인사하는 상대의 모습에 반가움을 느낀 에펠은 곧바로 ‘고마워’라고 답했지만,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혹시 그걸 말하기 위해 아침부터 찾아온 거야?”
고맙고 기쁜 것과는 별개로, 어째서 이런 이른 시간부터 자신을 불러낸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이렌은 이유 없이 행동하는 일이 없다는 걸 아는 에펠은 혹시나 하여 물었고, 예상대로 아이렌은 제 행동의 타당한 까닭을 밝혔다.
“그게 말이지, 내가 오늘 낮에는 선약이 있거든. 그래서 선물을 미리 전해줄까 싶어서.”
“아하.”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에펠은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일이 늦게 끝나 파티 시간에 못 맞춘다면 서로 서운하고 미안해질 테니, 이게 맞는 것 같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손등으로 비빈 에펠은 상대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그런 거였구나. 오기 힘들면 내일 전해줘도 괜찮은데, 굳이 시간 내줘서 고마워.”
“후후, 그게 말이지.”
장난스레 웃은 아이렌은 등 뒤에 감춰두었던 선물을 앞으로 내밀었다.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작은 상자는, 에펠의 눈동자와 같은 물빛 리본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사실 내 선물을 오늘 사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응?”
“자, 이거 받아.”
선물을 넘겨받은 에펠은 아이렌의 눈치를 보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포장을 풀어보았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영롱한 연보라색 내용물이 인상적인 유리병이었다. 멋있긴 하지만 가독성은 그다지 좋지 않은 글씨체로 무어라 적혀있는 병의 앞면과 설명서로 보이는 종이를 번갈아 보며 이것의 정체를 알아내려던 에펠은, 결국 선물한 당사자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헤어미스트야. 스타일링 후 머리에 뿌려주면 잔머리도 정리되고 향도 나서 나도 자주 써. 모발 관리에도 좋고.”
“아하…….”
화장품이라. 다른 이도 아니고 아이렌이 화장품을 선물해 주다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폼피오레의 선배나 동급생이 이런 걸 주었다면 ‘역시나’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아이렌은 평소 외모를 가꾸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 않던가.
‘아냐. 그러고 보니 아이렌 군도 섬유 향수 정도는 뿌리던 것 같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렌에게선 언제나 희미한 향내가 나곤 했다. 어떤 날에는 과일향 같은 게 났고, 어떤 날에는 비누향 같은 게 나기도 했으며, 가장 자주 느껴지는 향은 살 내음과 비슷한 은은한 머스크 향이었지.
그래. 제가 평소 사용하는 거니까 선물해 줄 수도 있긴 하겠구나.
그리 결론 내린 에펠은 제 모습이 비치는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아이렌. 그럼 오늘은 이걸 뿌릴게. 나중에 옷을 갈아입을 때 모자를 쓸 거긴 하지만…….”
“꼭 잔머리 정리용으로 쓰지 않더라도 향수처럼 뿌려도 돼. 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지금 뿌려줄게.”
“지금?”
“응. 원래 수시로 뿌리며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제품이거든. 나중에 옷 갈아입고 또 뿌리면 되니까, 지금은 향도 맡아볼 겸 한번 뿌려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디 사용해 볼까.
그에겐 이리도 적극적인 아이렌의 관심을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에펠은 기꺼이 헤어미스트를 상대에게 넘겨주고, 머리 전체에 미스트가 묻을 수 있도록 고개를 살짝 숙여주었다.
‘뿌릴게?’ 차가운 것이 살에 닿으면 놀랄 수 있다는 걸 아는 아이렌은 미리 통보하고,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분사했다.
“아.”
칙칙. 가벼운 소리와 함께 머리 위 내려앉는 향을 들이마신 에펠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묵직한 나무 향과 희미한 오존 향이 꼭 겨울 숲을 떠올리게 하는 미스트의 향기는, 자신보다는 눈앞의 상대에게 더 어울릴 것만 같은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어때? 향은 마음에 들어? 에펠 군에게 어울릴 걸로 골라왔어.”
향은 마음에 든다. 빈말이 아니라, 너무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차분한 분위기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지금 에펠에겐 제 호불호보다 더 중요한 쟁점이 있었다.
제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에 번뜩 고개를 든 에펠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내게 어울릴 거?”
“응. 내가 생각하는 에펠 군은 이런 향이 어울리거든.”
장난스레 웃는 아이렌은 에펠에게 다시 선물을 돌려주었다.
두 손으로 소중히 유리병을 받은 에펠은 여전히 놀란 얼굴로 커다란 눈만 깜빡거리다가, 이내 호쾌하게 웃어버렸다
“푸핫!”
누가 봐도 본인이 더 어른스러우면서, 자신을 이리도 어른처럼 취급해주다니. 이 모순된 상황이 우습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기분은 좋다.
선물을 도로 상자에 넣은 에펠은 어깨를 쭉 펴고, 부쩍 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고마워. 나, 마음에 들어. 이 향.”
“다행이다. 그럼, 나중에 저녁에 봐.”
손 인사를 하며 돌아선 아이렌은 일이 급한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치맛자락과 땋아 내린 긴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제 주변에 맴도는 향을 음미했다.
‘아이렌 군, 언제쯤 올까?’
저녁에 돌아왔을 때도 이 향이 느껴지도록, 자주 뿌려야겠다. 이왕이면 설명서를 보고 제대로 뿌려봐야지.
아침부터 기분이 붕 뜬 에펠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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