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howMustGoOn:Yun

0. 초대를 받아들이는 날

* 물론 제대로 통하는 언어로 도착한 초대장은 아니었다.

천명이라 여겼던 삶, 당연하게 평생 일궈나가리라 생각했던 업을 저주에 빼앗긴 것도 벌써 몇 해째던가. 그 와중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성마냥 무너졌건만, 이것만은─당연하지 않았던 이 일하나만은 변함이 없다. 윤은 낯선 채 익숙해진 검은 마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여름도 잦아들까, 아직 더욱 이 계절에 홀로 있으면 꼭 검은 마차 하나가 윤에게 찾아들었다. 딱 이 계절에, 한 해에 단 한번. ‘올해로 네 번째던가.’ 그리 생각을 정리한 윤은 마차를 흘겨보던 시선을 하늘로 던졌다. 다리마저 꼬고, 공원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건 그 태도만은 마차가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내 윤은 손가락을 딱 튕겨, 제 방에 있는 물건 하나를 손 안으로 불러들였다. 뜯은 자국 있는 봉투와, 글씨 같은 것이 차 있는 종이들. 유사한 것은 있어도 꼭 일치하는 것 없는 언어가 가득한 그 종이는, 그 약간의 유사함에 기대서 살펴보면 초대장이라던가, 안내장이라던가. 

처음에는 봉투 하나에 단정하게 담겨있던 이 편지는 검은 마차와 대충 엇비슷하게 윤에게 왔다. 윤은 그, 어쩐지 낡지도 않는 듯한 편지를 대충 볕뉘에 흔들어본다. 내용은 잘 몰라도 그 모양은 이제 외울 지경일 것을 괜히 뒤집어서 보기도 했다. ─그 내내 마차는 윤의 시야 언저리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무언가 답을 기다리는 듯, 여태껏 그래왔듯이 고요하게.

종이를 잘 간추려 봉투 안에 넣은 윤은, 등받이에 한껏 기댄 채이던 몸을 앞으로 숙인다. 팔뚝을 제 다리에 걸치고, 시선을 마차 쪽에다가 든다. 이 검은 마차는 꼭 이 계절에, 윤이 혼자 있을 적을 골라 나타났다. 그리고는 이리 가까운 듯 적당히 멀찍한 그늘가에서 기다리곤 했다. 네 번동안 조금씩 가까워긴 했을까, 그런 애매한 거리쯤에서 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나타나거나, 윤이 무정하게도 자리를 떠나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말발굽 다그닥거리는 소리도 없이, 말의 투레질 소리도 없이. 윤이 제법 오래 거하고 있는 이곳이─이 마차가 오기 전부터 재학중인 이 학교가 평소엔 제법 들고 나는 이에 대한 보안이 철저함을 생각하면, 참으로 수상쩍은 것이었다. 

기척도 없이 찾아들어, 조용하게 기다리다가 가는 것.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이 기이한 일은 무슨 집착일까, 무슨 저주일까. 그런 의심을 한가득 품은 채 살펴보아도, 윤의 눈에는 이 종이 쪼가리며 검은 마차가 분명히 무해無害하였다. 숨은 것 따윈 쉬이 간파할 수 있는 그 눈으로, 그렇게 한참을 살펴도 그랬다.

그저 모양만이 죽음과도 같을 뿐인, 이 검은 것들.

윤은 잘 간추린 편지를 허리춤의 가방에 대충 쑤셔박았다. 보이는 것보다 넓은 가방은 어둠 속으로 검은 편지를 감춘다. 이윽고, 이 여름 내내 우는 벌레 소리조차 잦아든 것 같은 순간. 윤은 공원 한 켠에 있는 길쭉한 나무의자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옆에 세워뒀던 짐가방의 손잡이를 꾹 붙들고, 검은 마차 방향으로 향했다.

그간 윤은 철저하게─ 아니, 어떻게든 이 의심스러운 마차를 무시해왔다. 여러 핑계가 있었고 사정이 있던 덕이다. 그러나 이젠 이젠 핑계도 사정도 남지 않았다. 윤은 천명을 잃은지 오래고, 지금 손에는 개인 작업실의 문제로 모든 기물이 정중하게 봉인처리된 가방이 들려 있다. 붙들만한 것이 더이상 남아있질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이 손에 들려있다.

어디서든, 대충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만치의 물건이 이 한 몸에 갖춰진 순간 찾아와버린, 이 마차. 그리하여 무시할 수 없게 된 이 호기심, ─아니, 충동은. 아하, 이 낯선 지 오래된 마차는, 사실 전혀 무해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조금 더 많은 게 필요해서, 그래서 이 순간 이토록 강렬한 충동을 선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윤은, 어차피 그날─제 천명을 송두리째 빼앗긴 그 이래 제정신인 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든, 마魔를 베기 위한 칼은 제 목부터 베려 드는 칼이었으니.

윤은 이 다음엔 미뤄진 형刑이 찾아올 수도 있겠구나, 그리 짐작하면서도 결국 웃었다. 이토록 방법도 없다면, 다음에는 시안에게 약속대로 베어 달라고 빌기라도 할까. 그리 날것의 무언가로 흔들거리며, 검은 마차에 올라탔다. 


자작 세계관의 TMI라 그냥 자른 풀 버전은 이하 링크.


초대를 받아들이기까지 (Full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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