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ttersweet darling
러기 붓치 드림
* 러기 선배 생일 축하해요 10연만에 나온 선배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러기와 협의되지 않은 혼담입니다.)
“아이렌 군, 이게 다 뭠까?”
4월 18일. 러기의 생일날. 1년에 한 번뿐인 기념일을 즐기던 러기는 아끼는 후배가 준 선물을 훑어보고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방과 후 자신을 찾아온 아이렌이 내민 건 이사할 때나 쓸 것 같은 커다란 상자였다. 크기와 무게부터 받는 이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주는 상자의 안에는, 실용성 있는 다양한 종류의 선물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선물을 들고 오느라 팔이 뻐근해진 아이렌은 뻐근한 근육을 주무르며 답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자잘하게 준비해 봤어요.”
“자잘한 수준이 아니잖아요, 이거!”
부들부들한 고급 수건에 영양제, 양말 몇 묶음과 남성용 스킨케어 제품. 대용량의 음료도 들어갈 큼지막한 텀블러에 휴대용 비누까지. 그 외에도 포장이 되어있어 내용물이 뭔지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여럿 들어있는 상자 안은, 그야말로 동화 속 보물상자 같았다.
“맘에 드시는 게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내 돈 주고 사긴 뭣하지만 남이 주면 좋은 게 뭐가 있을까 하며 산 건데.”
“전부 마음에 든다고요! 고맙슴다, 아이렌 군!”
원래도 선물 받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 러기는 어느 때보다도 기뻐하고 있었다. 이 모든 물건을 자신을 위해 고르고 담았을 아이렌을 생각하자니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커다란 상자 안에 아이렌의 관심이 한가득 담겨 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나.
여러 선물 중에서도 가장 먼저 텀블러를 꺼내든 그는 과연 이 안에 음료가 얼마나 담길까를 궁리해 보았다. 그 사이, 아이렌은 상자와 함께 가져온 작은 봉투를 뒤늦게 스윽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건 별거 아니지만……. 직접 만든 자두잼이에요. 별거 아니긴 한데, 빵에 발라 드세요.”
“별거 아니라뇨! 먹을 건 늘 환영임다! 시시싯, 잘 먹을게여!”
잽싸게 텀블러를 내려놓고 잼을 받아든 그는 수제인 티가 팍팍 나는 병을 살펴보았다. 라벨지로 제조일과 유통기한을 적어놓고 비뚜름하게 리본을 묶어둔 유리병에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아, 역시 생일은 최고라니까요? 매일 생일이라면 좋을 텐데!”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러기는 굳게 닫힌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오늘 하루 받은 선물들만으로도 2달은 풍족하게 살 것만 같은 게 기뻐서 한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렌은 그 말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364번 부활해야 하려나요.”
“응? ……푸핫! 그러게요. 이야, 그럼 그만큼 죽어야 하나? 그건 싫은데 말이죠.”
하여간 신기한 후배다. 평소에는 제 사람에게 물러질 때가 있긴 해도 생활력 있고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이면서, 가끔 이렇게 툭툭 엉뚱한 소리를 할 때면 어찌나 재미있는지.
누가 가져갈 리도 없는데 상자 뚜껑을 덮어 제 것을 보호한 그는, 귀까지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도 않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까지 챙겨줘서 고맙슴다. 어째 민망하네여.”
“민망해요?”
“저는 아이렌 군 생일에 이렇게까지 챙겨주진 않았으니까여.”
아이렌의 생일은 먼 과거가 아니었다. 겨우 열흘 전, 8일이었으니까.
그날 자신은 무얼 선물했던가. 말 몇 마디로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리 비싼 선물을 주지는 않았었지. 아이렌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 그 머리끈은 확실히 예뻤지만, 다른 이들이 준비한 으리으리한 선물에 비하면 분명 초라했을 터. 그런데도 아이렌은, 제 선물을 무슨 금은보화라도 받은 것처럼 기쁘게 받아주었었다.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선배가 제 생일을 축하해 준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는 러기와 달리, 아이렌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빈말인지 정말 괜찮은 건지 알 수 없는 상대의 말에 조금이나마 민망함이 사그라든 그는 괜히 구구절절 말을 덧붙였다.
“아이렌 군은 생일을 요란하게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긴 하죠.”
“머쓱하니까요. 제가 태어난 게 남들에게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닐 텐데, 축하를 받고 선물을 받고 하는 게 좀……. 저를 위해 시간과 돈을 쓰는 건 상대가 정말 원한다면 그래도 된다 생각하지만, 그게 ‘생일이라서’라는 이유로 강제로 신경 쓰게 만드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제법 냉소적인 이야기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청산유수로 쏟아내던 아이렌은 문득 생일을 맞이한 이를 위한 옷을 입고 자신을 빤히 보는 러기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 놀라 변명했다.
“아, 다른 사람들 생일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녜요! 이건 제 생일이 그렇다는 거니까요. 제 생일만 그래요! 다른 사람들에게 생일이 중요한 날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요! 축하를 요구해도 되는 날인 거 안다고요! 소중한 사람들의 생일이 기쁜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니, 어. 으음.”
두 손을 저으며 변명하는 아이렌은 혹 제가 러기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닐까 걱정되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러기는 아이렌의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상처받긴 했지만 그건 아이렌이 말 자체가 아니라 상대가 제 생일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보고 기분이 상한 거였다.
다른 이의 탄생은 소중히 여길 줄 알면서, 왜 자기 자신의 탄생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강제든 자의든 호의로 무언가를 주는 걸 그리 멋쩍어할 필요가 있을까. 매일 타인에게 양보하고, 사양하고 살아온 아이렌이니, 생일 정도는 그냥 편히 받아도 될 텐데.
허둥지둥하는 아이렌의 손을 가볍게 붙잡아 부산스러운 동작을 멈추게 했던 러기는, 저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
“저는 아이렌 군이 태어나 줘서 고마운데요.”
“예?”
“정말임다. 저는 아이렌 군과 만난 걸 행운이라 생각하니까여. 비록 태어난 건 다른 세계지만, 결국 여기로 와준 것도 고맙고. 그러니까…….”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마음으로만 내뱉는 말들엔 노골적인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이성이 돌아온 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떠들고 난 후였다.
이미 튀어 나간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이 무슨 실수인가. 뒤늦게 정신이 든 러기는 얼굴이 빨개져선 손을 놓았다.
“……아, 이 잼! 지금 먹어보고 싶네여! 수저 좀 가져오겠슴다!”
“예? 아니, 수저라면 제가…….”
“제가 갈게여, 제가!”
터무니없는 변명으로 도망갈 구실을 만든 그는 잼만 챙겨 들고 자리를 떠버렸다.
전속력으로 파티장에서 뛰쳐나온 러기는 사바나클로의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냐고, 나는!’
아무래도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자다가 이불 찰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른세수로 잠재우는 러기는 천천히 호흡하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혹시 누가 본 건 아니겠지. 만약 레오나가 보기라도 했다면, 아마 졸업할 때까지 놀림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지만 우스운 건, 이리 부끄러워하면서도 제 발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아아. 차라리 자신처럼 뭐든 욕심을 부려주는 편이 좋을 텐데. 어떻게 아이렌은 그렇게 매번 사양하고 거리를 두는 걸까. 원체 금욕적이라 타인의 욕망에도 비판적이라면 모르겠는데, 남이 욕심을 부리는 건 다 맞춰주면서 자신이 욕망을 가지는 건 금기시하다니. 아줄처럼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받는 걸 사양하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나도 모순되는 가치관이지 않은가.
타인에게만 관대한 아이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는 그는 터덜터덜 나무 숟가락을 가져와, 가져온 잼을 한 입 떠먹었다.
“……맛있다.”
그 와중 억울하게도 그가 만든 수제 잼은 왜 이리 맛있는지.
입 안 가득 퍼지는 단맛과 자두의 쌉싸름한 상큼함을 천천히 음미한 그는 뺨의 체온이 조금은 식은 걸 확인하고 주방을 나섰다.
“오셨어요? 맛은 어때요?”
러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고 있던 아이렌은 웃으며 상대를 반겨주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구는 건, 정말 제 말이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해 그런 걸까. 아니면 제가 민망해 하는 걸 감춰주려고 저러는 걸까.
이왕이면 후자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는 아이렌과 똑같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엄청 맛있슴다. 오늘 받은 선물 중 최고예요.”
“하하. 빈말이라도 기쁘네요.”
빈말이 아니다. 더 비싼 선물도 있고, 더 마음에 드는 선물도 있지만, ‘최고’라는 말을 붙이고 싶은 건 이 잼이었다. 한 스푼 떠먹은 것조차 아쉽게 느껴지는 자두잼과 아이렌을 번갈아 보던 그는 한 번 더 용기 내어 마음속 말을 털어놓았다.
“내년 생일에도 이거 만들어 주세요.”
경이로운 박애주의자인 후배와 달리, 자신은 욕심쟁이다. 가지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지만, 반드시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상대는 있지.
모두가 탐내는 이 학교의 홍일점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어떤 간절함이 있었다.
“생일이 아니라도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말은 고맙지만, 맨입으로 부탁하긴 좀 그렇잖슴까?”
“그럼 잼값으로 뽀뽀라도 받을까요? 그럼 ‘맨입’은 아니네요.”
‘아, 왜 저런 말을.’ 부끄러운 말을 하는 아이렌 때문에, 안 그래도 다시 뜨거워지려던 러기의 볼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만다.
이를 꽉 깨물어 기쁨과 괴로움이 섞인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막은 러기는, 제 입술을 가리키는 아이렌에게 바짝 다가갔다. 딱 한 걸음. 그 정도의 거리만 남겨둔 채 멈춰선 러기는 나름 비장한 얼굴로 선언했다.
“……입술이 부르틀 때까지 뽀뽀할지도 모름다.”
“하하. 그럼 졸업 후 잼 공장을 차려야겠네요.”
“…….”
상대도 자신만큼 부끄러워 하길 바라며 꺼낸 말인데, 어째서 아이렌은 저리도 태연할까.
당장이라도 뽀뽀해보라는 듯 손가락을 치우고 고개를 들이미는 아이렌 때문에 이번엔 정말 비명을 지를 뻔한 러기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말을 돌렸다.
“저, 저희 할머니께도 맛보게 해드리고 싶은데여. 괜찮슴까?”
“물론이죠. 조만간 항아리째로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 진정하십셔! 지금 이 병 정도 양이면 됨다!”
아이렌이 농담을 모를 정도로 딱딱한 성격은 아니지만, 워낙 퍼주는 걸 좋아하니 진짜 한가득 잼을 만들어 올지도 모른다.
강경하게 상대를 말린 러기는 문득 제 조모를 위해 자두를 다듬을 아이렌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문득 이게 대단히 가정적으로 느껴져 허튼 말을 꺼내고 말았다.
“아니면, 그, 나중에 저희 본가에 와서 직접 만드는 건…….”
“어? 이거 그건가요? ‘매일 아침 날 위해 된장국을 끓여줘’ 같은 건가?”
“네? 그건 또 무슨…….”
“제가 살던 세계의 이웃 나라의 프러포즈 멘트에요. 요즘은 잘 안 쓰는 고전적인 멘트지만.”
“…….”
아침 밥을 만들어주는 사이가 되어달라는 프러포즈라니. 평소라면 ‘참 마음에 드는 멘트다’라며 동조했을 자신이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영 좋지 않다.
이젠 부끄러워할 기력도 없는 러기는 꿍얼꿍얼 중얼거렸다.
“결혼해 주면 저야 좋지만.”
“잘 안 들려요, 선배.”
“지금 다 듣고도 또 묻는 거죠?”
“아하하.”
정말이지, 이래서야 루크가 아이렌을 여우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다정하지만 만만하지는 않은 아이렌 덕에 생일날 극한의 희로애락을 겪은 러기는, 입 안에 남은 자두 맛처럼 달콤하면서 쌉싸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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