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사람
빌 셴하이트 드림
* 23년도 빌 생일기념 연성.
‘우와, 사람 엄청 많네.’
때는 화창한 4월 9일 오전 10시 즈음. 폼피오레 기숙사 안에 있는 빌의 생일파티장에 도착한 아이렌은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북적거리는 인파에 멈춰 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빌 셴하이트의 생일이니 손님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라니. 어제 있었던 제 생일파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인원의 손님이지 않나.
이래서야 사람들 틈을 헤쳐나가는 것도 일이겠다. 생각만 해도 피곤해지는 일에 한숨을 푹 쉰 아이렌은 손님들 틈에서 아름답게 웃고 있는 빌을 보았다.
‘바빠 보이시네.’
제게 인사를 건네고 선물을 주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빌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기품을 잃지 않는 점은 얼마나 폼피오레의 사감 다운지. 아이렌은 오늘도 새삼스레 빌에 대한 경외감이 한 뼘 상승하는 걸 느끼며 들고 온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전해드려야 하긴 하는데.’
지금은 너무 바빠 보이니 나중에 전달할까.
아니,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얼렁뚱땅 이라도 전해드리는 게 맞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느라 파티장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이. 아이렌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전화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금방 연락이 온 걸 눈치챈 그는 화면에 뜨는 익숙한 이름을 보곤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레오나 선배?”
「너 지금 어디냐.」
“저요? 그건 왜요?”
제 위치를 알려주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왜 상대가 제게 그런 걸 묻는지가 더 궁금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레오나는 평소엔 먼저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는 인물 아니던가.
‘쯧.’ 묻는 말엔 답하지 않고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아이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레오나가 짧게 혀를 찬다. 그렇지만 전해야 하는 말이 더 급한 건지, 그는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순순히 제 목적을 말했다.
「네 생일 선물 받아 가라.」
“예? 갑자기요? 어제 주셨잖아요.”
「내가 주는 게 아니야. 본가에서 온 거다.」
“선배네 본가에서 제게 왜……?”
「한 명 있지 않나? 네 생일을 챙겨주겠다 약속한 녀석이.」
그런 사람이 있던가.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렌은 킹스카라 왕가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통성명 한 이를 떠올리고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체카가 보낸 거예요?”
「그래. 얼른 와서 받아 가고 네가 대신 그 녀석이랑 통화까지 해라.」
“와!”
어차피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으니, 잠깐 사바나클로 기숙사에 들렀다 오는 게 낫겠다.
사람으로 가득 찬 파티장 안을 힐끔거리던 아이렌은 바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시간은 흘러, 오후 6시.
잠깐 레오나의 방에 들려 하루 늦은 생일 선물을 받아오려 했던 아이렌은 어쩌다 보니 레오나와 러기와 한참 시간을 보냈다가, 해가 질 즈음에야 파티장으로 향했다.
‘확실히 사람이 많이 줄었네.’
여전히 손님이 좀 있긴 하지만, 오전만큼 붐비지는 않는다. 아이렌은 그걸로 충분한지 조심스럽게 장내로 발을 들이고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빌에게 다가갔다.
“빌 선배.”
누군가의 편지를 읽고 있던 빌은 눈에 띄게 멈칫하더니, 천천히 아이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라?’ 상대와 눈이 마주친 아이렌은 잔뜩 구겨진 미간과 꾹 다문 입술을 보고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봐도 빌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읽던 편지를 봉투에 접어 넣은 빌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니?”
“예?”
“대체 지금이 몇 시니? 오늘 바쁜 일이라도 있었어?”
지금은 아직 6시밖에 안 됐는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아이렌은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저, 제가 혹시 약속을 잡았던가요? 몇 시까지 오겠다고?”
그 말을 들은 빌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진다. 아무래도, 이 질문은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인 모양이다.
순식간에 얼어붙는 공기. 가라앉는 분위기. 묘한 압박감에 아이렌이 어쩔 줄 모르는 그때, 보다 못한 에펠이 갑자기 아이렌의 팔을 끌고 복도로 나갔다.
“아이렌. 자, 잠깐 이리로.”
“응?”
“일단 따라와, 얼른!”
“뭐, 뭐야. 에펠, 왜 이래?”
정말 제가 뭔가 실수한 건가. 누구도 명확한 답을 알려주지 않아 답답해하는 아이렌은 아무도 없는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에펠에게 원망 섞인 질문을 듣게 되었다.
“도대체 왜 지금 온 거야? 무슨 일 있었어?”
그러니까, 아직 6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자꾸 자정 직전에 온 사람처럼 자신을 탓하는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킨 아이렌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큰일 있었던 건 아닌데. 아까 오니까 사람이 너무 많길래 나중에 다시 와야지 하고 입구만 서성거리다 돌아가긴 했었어. 갈 곳도 있었고.”
“왔었다고? 그럼 그냥 들어왔어야지!”
사람이 많아 돌아갔다는 대답은 벌써 잊은 건지, 에펠이 경악하며 고개를 젓는다.
아이렌은 동급생의 격렬한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저기, 내가 뭐 실수했어?”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다는 건 표정과 말투에서 다 드러난다. 그렇기에 에펠은 저 혼자서 한탄하는 걸 그만두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에게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아이렌, 빌 씨는 오늘 아침부터 네가 언제 오나만 기다리고 있으셨어.”
“뭐?”
“정말이야. 그런데 넌 연락도 없이 오질 않아서 점점 표정이 안 좋아지시더니…….”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진실에, 아이렌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설마 그 빌 셴하이트가, 아침부터 자신을 기다렸다니. 아무리 제가 같은 동아리 소속에 나름 친한 후배라 해도, 그렇게까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지러워진 아이렌은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언제 오느냐고, 지금 오라고 연락을 주면 되잖아. 난 사람이 좀 빠지고 나서 가려고 한 거지, 안 갈 생각이 아니었다고.”
“빌 씨는 손님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연락할 틈이 없으셨어. 그리고 다들, ‘조금 뒤면 오겠지’라고 생각해서…….”
그건 이상한 말이다. 연락할 시간이 없었다던가 기약 없이 기다린 건 그렇다 쳐도, 그렇게 바쁜데 왜 제가 오길 기다린 건가.
아까 전 빌 주변에서 북적이던 인파를 떠올린 아이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게 손님이 많아 바쁘셨으면, 내가 좀 일찍 오든 늦게 오든 상관없잖아. 오히려 한가할 때 보는 게 좋지 않아? 내가 뭐라고 그 바쁜 중에…….”
그런데, 아이렌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
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한 글자씩 꼭꼭 씹어 내뱉는 것 같은 정확한 발음과 억양 없는 음성이 참으로 날카롭다. 마치 말이라는 칼에 베인 것처럼 화들짝 놀란 아이렌과 에펠은 동시에 뒤를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 여기에 온 건지 모를 빌은 원망 담긴 눈으로 아이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강렬한 눈빛에 잔뜩 겁먹은 아이렌은, 조심스럽게 상대를 불러보았다.
“선배.”
“내가 네게 너무 큰 기대를 한 거니? 아니면, 난 네게 그렇게나 시원찮은 남자였니?”
“예? 그게 무슨…….”
그냥 늦은 거에 화내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빠지는 걸까. 제게 건 기대라니? 그리고, 왜 제가 빌을 시원찮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 반대라면 몰라도, 제가 어찌 감히.
아이렌은 자세한 설명 없이 묻는 빌 때문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강렬한 위기감을 느낀 에펠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자신 때문에 애꿎은 친구까지 같이 날벼락을 맞는 걸 원하지 않는 아이렌은,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복도에 단둘이 남게 된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오늘의 대역죄인이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 거니? 늦어서?”
방금 한 의미 모를 물음을 생각해보면, 그건 답이 아닐 거다.
아이렌은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려, 제 잘못을 떠올려냈다.
“아뇨. 선배가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점이요. 다른 손님들 때문에 바쁘실 테니 그냥 한가할 때 오려고 한 거지, 악의가 있었던 건 아녜요.”
다행스럽게도, 이 대답은 정답인 모양이다.
빌은 아이렌의 사과를 곱씹는 듯 잠깐 침묵하다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짚어주었다.
“내가 왜 널 기다렸을 거 같니?”
아이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 아이렌은 제 답이 상대를 더 화나게 할지 모른다는 걸 알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네, 죄송해요.”
‘후우.’ 길게 한숨을 내뱉은 빌은 모자를 벗고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덜컥 상대 앞에 다가서며 물었다.
“아이렌. 나는 네게 중요한 사람이니?”
“예?”
지금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아이렌은 오늘따라 이상한 빌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침묵을 깨고 답했다.
“그런데요…….”
“그런데 왜 날 우선시 하지 않는 거니?”
“그런 적 없어요. 전 바쁜데 귀찮게 하는 건 소중한 사람에게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널 귀찮아한 적이 있어?”
그러고 보니, 있던가?
순순히 답하지 못하고 기억을 되짚는 아이렌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제게 필요 이상으로 조언을 하고 관심을 보이곤 하는 빌은, 아쉬운 소릴 하는 일은 있었어도 자신을 귀찮게 여기진 않았었다.
“후우.”
바보같이 솔직한 아이렌의 태도에 김이 빠진 걸까. 땅이 꺼지게 한숨 쉰 그는 머리를 정리한 후 모자를 썼다.
“됐어. 너도 악의가 없었던 걸 알았으니, 그만하자.”
아이렌은 그 말에 안도하면서도, 속으로는 한탄하고 말았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제가 참겠다는 거 아닌가.
손안의 선물을 매만진 그는 빌에게 머리를 깊게 숙여 또다시 사과했다.
“좋은 날 기분 상하게 해버려서 죄송해요. 그, 선물은 두고 갈게요.”
“두고 간다고?”
“……아니, 그럼 그냥 가져갈게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넌? 어딜 간다는 거야?”
“그거야, 선배는 지금 별로 제 얼굴 보고 싶지 않으실 것 같으셔서요.”
이 좋은 날, 굳이 자신을 화나게 한 후배 얼굴은 봐서 뭐 하겠나. 그리 생각하는 아이렌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재빠른 빌은 그걸 가만두지 않았다.
뒤돌아선 아이렌의 손목을 순식간에 낚아챈 그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지금 가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
“늦은 만큼 내 옆에 있어야지. 어딜 내빼려는 거니?”
그러니까, 있어도 되는 건가. 그렇게나 화를 냈으면서?
뜻밖의 대답에 놀란 아이렌은 제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의 힘이 얼마나 센지도 잊고,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있어도 되나요?”
“바보 같은 소리 말고, 선물이나 이리 줘. 너는 다른 남자들 앞에선 그렇게나 살갑게 굴면서, 대체 나에겐 왜 이러는 거니?”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답할 수 있다. 제게 빌 셴하이트라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아름다운 노력가이자 성취자 이기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경외감과 존경심이 들어 그런 것이다. 그 아름다운 외모보다도, 그가 열여덟 해의 삶을 살아온 방식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에 자신 같은 사람은 감히 수작을 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말하는 건 지나치게 낯간지러운 일이다. 그래서 아이렌은 자신답게 능청을 떨기로 했다. 다른 남자들에게 하듯, 능숙한 능청을.
“전 미남에겐 약해서요.”
“……정말이지, 말이나 못 하면.”
그래도 기분이 조금은 풀린 걸까. 빌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그 아름다운 미소에 겨우 한시름 놓은 아이렌은, 늦어버린 축하와 선물을 상대에게 내밀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빌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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