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외전6. 타냐가 백모래의 보육원 동기였다면?

빛으로 나아가자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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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는 12살 남짓의 조그만 고아였다. 가족여행을 가던 길에 운 나쁘게도 트럭과 충돌했다고 했나, 그때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타냐는 그저 무덤덤했다. 오히려 보육원의 아이들을 더 가족처럼 여기며 빠르게 적응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더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가 있었지만.

아, 특이하게도 타냐가 더 가깝게 여기며 친하게 지내는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백모래. 아름답게 빛나는 노란 눈과 눈처럼 하얀 머리를 하고 있는, 하얀색 옷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타냐는 검은색 원피스가 더없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흑백의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으면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와아앙-”

“미호 또 운다~”

“얘들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 안 된다고 했지?”

“으응,”

“타냐, 일단 미호 좀 달래줄래? 나 지금 엘리 안고 있어서-”

“알았어, 잠시만-”

이렇게, 아이들을 보듬는 역할을 나서서 하는 바람에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엄마 아빠 같았다. 아이들도 그런 느낌으로 둘을 따르는 것 같았다. 보육원의 원장 수녀, 카디아는 그런 두 아이의 모습을 창문 너머로 흐뭇하게 쳐다보며, 오늘도 기도를 마쳤다.

저 두 아이의 앞에 빛이 있기를.


보육원에 특이한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 이호가 도착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그 소문은 보육원 내에 쫙 퍼졌다. 뛰어놀다가 무릎을 갈아버린 아이를 손대는 것만으로도 치료하는 것을 보고, 대단한 분이 보육원을 지원해준대! ··· 라며 말을 퍼뜨리는 것이다. ‘지원’이라는 말의 뜻도 잘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도는 것을 보며, 이호는 신기함을 느꼈다.

이호를 비롯한 불사신 일족이 인체실험을 진행하는 섬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인체실험을 진행하는 대신 의식주 모든 것을 제공하기 때문일까, 돈을 받고도 섬을 나갈 생각도 않고 나태해져 버린 사람들은 성장 의지도, 의욕도 없다. 하루하루의 인생을 탐욕스럽게 낭비해 나가다 의미도 없이 죽어갈 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생기가 넘쳤다. 이호 선생님, 선생님, 하며 호의적으로 자신을 따르고, 열심히 공부한다. 지금처럼 놀기도 하지만.

이호는 제 머리 위에 화관을 씌워주며 꺄르륵 웃는 소녀를 보며 말을 꺼냈다.

“생명을 경시하는 게 나쁜가?”

“네?”

“네에?”

그에 예민하게 뒤를 돌아본 것은 함께 책을 읽고 있던 두 소년소녀. 하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은 검은 정장을, 꿀 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어 흑백이 교차했다. 하지만 표정은 지극히 달랐다. 소년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소녀는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물론 나 개인적으로 안 좋아하긴 해.”

그제야 타냐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래, 저 아이는 좀 유별나긴 했다. 마치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듯이, 꽃과 나무, 풀을 사랑했다. 심지어 그리 신실한 신자도 아닌 것이 뻔히 보이는데 식사 전 기도를 할 땐 유난히 침중한 표정이었다.

“-근데 인간 전체를 보면 이걸 왜 나쁘다고 가르치는지 잘 모르겠거든. 인간들끼리 죽이지 말라는 건 확립해놓은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한 룰이지만, 생물이 살아가는 데에 다른 생물을 희생시키는 건 당연한 거잖아.”

“게다가 너희는 즐기려는 욕심이 유난히 강해.”

“왜 굳이 모피를 두르지? 염색하지 않아도 되는 옷을 물들이는 건? 고기를 더 맛있게 하려고 품종 개량을 하는 건?”

하지만 그런 타냐를 두고, 이호는 더욱 변덕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어린아이를 몰아세울 의도는 없었다. 그저 이호가 평소에 갖고 있었던 의문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호는 그것이 어린아이를 크게 바꿔놓을 질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불사신 일족이기 때문에. 그래서 일반 인간 중에서도 성인과 어린아이의 다름을 크게 이해할 수 없으니까. 어린아이가 어떤 가능성을 가졌는지 모르니까….

“인간은 욕심으로 발전하니까요. 저도 선생님이 말하신 건 싫어요. 하지만 그 많은 욕심 중에 편리하고 도움이 된 건 많이 나왔으니까요. 자동차라던지, 냉장고라던지…. 그마저도 문제가 많지만.”

-하지만, 그에 제대로 대답하는 아이가 있을 줄은 이호도 몰랐다.

“사실 저도 고민해본 적 있어요. 인간이 동물이라 부르는 생물은 기껏 해봐야 제 삶의 투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해할 뿐인데, 왜 인간은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욕심 따위로 살해를 저지르는지….”

“맞아. 그런데 왜 굳이 생명을 경시하지 말라고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그게 옳은걸요.”

“? 옳다는 게 이유야? 그럼 죽이질 말아야지.”

제대로 대화가 핑퐁을 시작하며, 재미가 없어졌는지 이호에게 화관을 만들어주던 아이가 도망가버렸다. 타냐의 친한 친구인 백모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켰다. 고작 14살의 백모래에겐 지나치게 복잡한 이야기였다. 이호는 오랜만의 흥미로운 얘기에 그런 백모래를 제쳐놓고 있었다.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너무 무섭잖아요. 모든 작고 여린 것들부터 다 죽을 수 있는데. 지금도 인간은 충분히 잔인한 걸요. 거기서 인간을 포함한 생명을 경시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으, 꼭 가르쳐야 해요.”

“…넌 무슨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

“좀 객관적일 뿐이에요. 그래서 한 번은 장래 희망이 돌이었답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면 인간이 원망스러워져서요. 제가 다 부끄럽고. ···그러니 차라리 생각 없이 살고 싶어서.”

“오.”

그때부터 이호는 타냐라는 어린아이의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호가 살아온 긴 생애의 발톱만큼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의 눈이 그만큼이나 많은 고민들로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그런 인상을 준 타냐는… 이호를 늘 실망시키지 않았다.


“얘들아, 알았지? 꼭 둘씩 손잡고 따라오는 거야.”

“네에~”

아이들은 현장 체험학습을 나왔다. 15살의 백모래와 타냐는 이제 예전처럼 손을 잡고 다니진 않았지만, 꼭 붙어 다니는 것은 여전했다. 이호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현장 체험학습지’를 둘러보았다. 날개를 감춰야 한다며,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낫지 않겠냐고 수녀들이 권유한 것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이곳은 ‘동물원’이었다. 영물과 혼혈이 재롱을 부리고 있는.

“우와, 뿔 봐!”

“와아아, 신기해!!”

그것을 보며, 순수 인간인 아이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거봐, 내가 너희들을 처음 봤을 때 신기해한 게 특이한 게 아니라니까. 이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코웃음 쳤다. 시선은 자연스레 타냐를 찾고 있었다. 늘 붙어 다니는 소년과 소녀는 갈 길을 잃은 채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본 이호는 그 둘에게 다가갔다.

“너네는 왜 이렇게 축 처져 있냐.”

“미안해서요….”

“보기 불편해요.”

“? 뭐가?”

도대체가 이 아이들은 예상대로 되는 것이 없다. 이호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아이를 굽어보았다. 진심으로 그렇다는 듯, 침통한 얼굴을 한 타냐는 아이스크림을 느리게 할짝대고 있었다. 그런 타냐를 대신하여 백모래가 대신 대답했다.

“타냐가 오는 길에 그랬는데, 이런 곳은 잘살고 있던 생물들을 억지로 붙잡아다가 구경하라고 만든 곳이래요. 저도 다짜고짜 몰려들어서 절 구경한다고 하면 기분이 나쁜데….”

이호는 그렇게 말하는 백모래의 제법 다부진 얼굴을 쳐다보았다. 유약하고 다감하기만 하던 아이의 얼굴은 제법 강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타냐가 전해준 것일 터. 과연 타냐는 백모래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해줄 만한 아이였다.

“저어기 있는 동물 말이야?”

그래서였을까, 이호는 더욱 짓궂게 우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영물을 가리켰다. 거대한 몸체며, 가끔가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영물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동물원의 관람객은 그들을 ‘볼거리’ 삼아 보고 있었다.

“이호 선생님….”

두 아이는 곧 안절부절못했다. 이호의 등 뒤에 달린 날개를 알고 있는 아이들은, 지금 이호의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졸지에 아이들을 괴롭힌 모양새가 됐네, 생각한 이호는 곧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

“미안해요.”

“?”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나중에 커서, 꼭 저런 일 없게 할 거예요.”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백모래 역시 그에 깜짝 놀랐지만, 곧 그에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호는 미래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말들을 수 없이 겪어왔다. 여기서 얻은 돈으로 가게를 차릴 것이다, 병이 나으면 여행을 할 것이다. 결국 나태에 젖어 스러지고 마는 공수표를.

하지만 어쩐지 타냐의 말은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이, 진심 어린 목소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인체실험을 위한 섬과 이곳이 뭐가 그렇게 다르길래 똑같은 인간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걸까? 이호는 그것이 의문스러웠지만, 이 차이가 꽤나 기껍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이 아이를 바란다면 이런 아이라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그런 시간들을 넘고 넘어, 두 아이는 성인이 되었다.

“연구원이 된다고? 넌 교사가 된다고 했잖아.”

“응, 권유받아서…. 분야는 다르지만.”

“분야?”

“그, 우리 은사님 있잖아. 그분 의학 연구소에….”

“아아….”

타냐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거라고 말하며 관련 연구소로 지원했었지.

백모래는 수줍게 웃으며 학사모를 매만졌다. 둘은 같은 대학을 나왔다. 한 명은 사범대, 한 명은 공대. 백모래가 그런 전공을 가지고도 의학 계열 랩실을 간다고? 싶었던 타냐는 의외라는 얼굴이었지만, 그것을 막지는 않았다. 도리어 잘할 수 있을 거다, 격려하며 백모래를 응원해주었다. 언제나의 타냐와 같은 태도였다.

타냐는 언제나 백모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늘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해주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벽이 있긴 했지만, 백모래는 그 벽 안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백모래가 제일 많이 배웠던 것은 그 신념. 이호와의 문답은 타냐의 신념을 더욱 굳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얘기를 들어온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백모래 역시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백모래는 타냐와 함께 있지 않은 자신을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작별의 시간이었다.

“가서도 연락해.”

그렇게 백모래는… 연구소를 빙자한 인체 실험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그 진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모래야, 요즘 많이 바빠? 애들 모이는 자리에도 네가 없네.]

“응, 요즘 4시간도 못 자서….”

[뭐? 잠은 자야지. 거기서 계속 일해도 돼? 어차피 너 기록이나 허드렛일만 한다며. 다른 곳에서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내가 지원해줘도 되고…. 거기서 나오면 안 돼?]

“어떻게 그래. 소장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많이 믿고 계시니까 뭐라도 해야지. 괜찮아. 어제부턴 잠도 조금씩 자고 있어.”

[왜 그 일을 하는 건지 생각해 봐, 모래야. 거기 계속 있겠다면 말릴 수 없겠지만… 너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보여.]

“괜찮아, 정말로.”

뚝, 백모래는 전화를 끊고 그대로 마른 세수를 하며 주저앉았다. 이 일에 끌어들일 수 없어서 차마 말하지 못한 말들이 입 안을 맴돌았다. 이곳, 인체실험을 하는 곳이었어. 있잖아, 나 실험체를 감독하는 일을 하고 있어. 처음엔 적응되지 않았는데, 이젠 그 앞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 나, 정말 어딘가 고장 나버린 것 같아….

동물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월급을 받으며 제 발로 우리 안에 들어간 영물을 보고 저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백모래는 유리방 안에 갇힌 각종 혼혈들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소장이 그를 '믿고' 있으니까.

이제는 거의 마주치지도 않는 이호 선배와 저 먼 곳에 있는 타냐. 백모래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매달릴 만한 곳은 우습게도 소장뿐이었다. 그로부터 떨어지는 조그마한 친애와 인정에, 백모래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발목이 잡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을 나간다는 선택지는 점점 더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백모래 씨?”

“아, 네. 지금 가요.”

오늘 전화기를 썼으니 다음은 또 언제일까. 백모래와 타냐는 이젠 숫제 편지로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편지 대신 자신이 달리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았다.

백모래는 현실 속에 잠겨갔다.


“인체실-?!”

“쉿, 쉿. 이게 뭐라고 목소리를 키우고 그래.”

이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려는 타냐의 입을 막아 진정시켰다. 진정된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일단 목소리를 키우지 않겠다는 제스쳐를 보고서야 손을 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타냐는 보육원을 졸업했고, 이호는 그 이후로 보육원을 지원하는 것을 그만둔 후 연락이 끊겼으니까. 어느 쪽에서든 먼저 연락할 일이 없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백모래에게 이상함을 느낀 타냐가 이호에게 연락을 넣자마자 둘은 순식간에 약속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칸막이가 있는 카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면 차라리 이런 곳이 좋다며 타냐가 끌고 온 곳이었다. 이호는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음에 눈살을 조금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연구니까 조용해. 유출하면 잡혀갈 수도 있어.”

“그런 이호 선생님은요. 그래도 돼요?”

“나도 큰맘 먹은 거니까 이해해라.”

-그래, 사실은 말해선 안 된다. 소장과의 의리 아닌 의리를 위해서는. 그와의 친애를 생각하면. 하지만 타냐와 백모래는 특별한 사이였고, 이호에게 특별한 아이였다. 필멸의 인간 따위에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과는 다르게 자신은 이미,

-말이 통하는 앵무새에게 정을 주고 만 것이다.

“그래요, 그건 둘째 쳐요. 하지만 ‘이게 뭐라고’라니요. 이호 선생님. 설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인간들이 실험 쥐 쓰는 거랑 뭐가 달라.”

“하….”

이번엔 타냐도 할 말이 막히나 보다. 매번 달변으로 이호의 의견을 받아치던 타냐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백모래도 그 말에 말문이 막혔었지. 이 아이들도 별수 없나 보-

“선생님, 옛날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뭐?”

“저 이제 대답할 수 있거든요. 세상의 윤리는 인간성에서 시작된다고요.”

“…뭐?”

“정신에 여유가 생기고 인간을 가엾게 여겨야 다른 생물 역시 가엾게 여길 여유가 생긴다, ‘옳게’ 살아갈 여유가 생긴다. 그런 거요. 인간을 가엾게 여겨야 실험쥐 역시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대뜸 실험쥐를 가엾게 여기지 않으니 인간 실험체도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잖아요. 인간을 먼저 가엾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다른 생명을 소중히 생각할 것 같아요? 그건 공감을 잃어버린, 이미 생명을 도구 삼는 괴물이에요.

‘-맞아. 그런데 왜 굳이 생명을 경시하지 말라고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그게 옳은걸요.’

‘? 옳다는 게 이유야? 그럼 죽이질 말아야지.’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너무 무섭잖아요. 모든 작고 여린 것들부터 다 죽을 수 있는데. 지금도 인간은 충분히 잔인한 걸요. 거기서 생명을 경시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으, 꼭 가르쳐야 해요.’

어차피 인간은 제 욕심대로 다른 생물을 희생시키고, 그건 생물의 당연한 권리인데 왜 생명을 경시하는 게 나쁘다고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고작 중학생 정도 나이였던 당시의 타냐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만 그러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라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래가 아직 제정신인 게 다행이네요. 그 연구소는 지금 사람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났구나. 이호는 스스로가 할아버지 같은 감상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타냐를 쳐다보았다. 전날, 실험체가 죽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울고 있던 백모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맞아, 언제나 하는 소리였지. 그러니까 네 잘못이 아니야.’

그조차 백모래의 인간성을 죽이는 말이었을까?

“인조가죽, 공장식 축산 지양, 실험 동물을 쓰지 않는 제품, 이제 사람들은 동물원 문제에 예민하고, 더 나아지고 있어요. 그게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모…몰라.”

“다들 생명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가고 있으니까. 다들 인간만큼이나 다른 생명이 소중함을 기본적인 인간성을 통해 알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 연구소는….

타냐는 열변을 토하다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숨을 쉬었다. 단단히 속이 상한 기색이었다. 이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타냐를 달래고자 했지만, 크게 효과는 없어 보였다. 타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반쯤 녹아갈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들고 말했다.

“모래를 그곳에서 빼와야 해요.”

“하지만 소장이 그 애를 놔줄 리가 없어.”

“네? …설마 모래도 실험체예요?”

“아직 그건 아니지만…. 모래, ‘정화’ 특기가 있잖아.”

“정화… 요?”

아, 그러고 보니 얜 아직 소장이 뭘 원하는지 모르지. 애초에 백모래 자신도 모르는 백모래의 특기를 타냐가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이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까지 알면 너 진짜 못 빠져나가. 이쪽에 발 디디고 싶어?”

“-거기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려고 했는데요?”

“뭐? 네가 왜? 직장 잘 다니고 있잖아.”

하지만, 타냐는 만만치 않았다. 어디 한 구석 모자람 없이 자란 타냐의 의지는 뚫을 곳 없이 단단한 면이 있었다. 신념으로 붉게 반짝이는 눈이 이호의 푸른 눈을 관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요.”

-이호는 연구소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이걸 진짜 산다고요? 자기 자신을 저주하려고?”

“난 살아난다며.”

“대신 주변은 초토화가 되겠죠.”

“그건 내가 미리 준비하면 되니까. 효과는 하루 내외면 나타난다고?”

“네, 뭐…. 효과는 확실하니까요.”

“고마워.”

“-또 보지 맙시다.”


그날부로 타냐는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시체 같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르는 곳으로. 그곳에서 타냐를 마주치게 된 백모래는 대경실색했다.

“타, 타냐…?!”

“궁금해서 와봤어. …고생 많았네.”

그렇게 말하는 타냐의 눈빛은 늘 따뜻했던 것과는 달리 어딘가 의지를 띠고 있었다. 백모래는 제 죄를 낱낱이 까발려지는 기분이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반가움은 숨길 수 없어서, 백모래의 얼굴은 뒤죽박죽이었다. 그것을 본 타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주며, 백모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제 걱정 마. 어떻게든 해볼게.”

“그, 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라, 여기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니까.”

타냐의 시선은 곧 실험체들을 향했다. 그에 한 번 더 몸을 흠칫거린 백모래는 은근히 시선을 피하다, 제 실험체로 돌아가 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타냐는 그런 수작을 알면서도 당해주었다. 여전히 따뜻한 배려였지만, 어째선지 그런 배려를 받으면서도 미안하기만 했다.

“백모래 씨~ 이제 왔네. 잘 만나고 왔어요?”

“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 같은 보육원 동기랬나? 그럼 당연히 반갑지.”

자, 여기 차트.

동료 연구원은 백모래에게 관찰하고 있던 실험체의 연구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 알겠다. 타냐가 저 동료 연구원과 같은 처지가 된다는 것이 슬프고, 또 안타깝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순수한 호의를 간직하고 있던 아이,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 노력하고, 또 고민하는 것을 백모래는 그 옆에서 전부 지켜보았다. 하지만 저 하나 때문에 그것을 전부 뒤로하고 이런 곳으로 왔다는 것이-

또륵, 다시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눈물이 많은 점은 변하질 않는다. 백모래는 괜히 거친 손길로 눈물을 훔쳤다.


-그 후로 여러 날이 지났다. 백모래는 여전히 실험체 하나를 붙잡고 차트를 쓰며 그 앞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소장에게서 다른 실험체를 맡아보라는 지시가 들어왔던 것 같은데, 전부 타냐가 뜯어말리는 통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을 지켜낼 수 있었다.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백모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무슨 생각해?”

아, 달라진 점이 하나 더 있다. 타냐가 밥 친구를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메두사와 오르카라는 실험체를 맡은 타냐는 백모래의 바로 옆 유리방을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밥을 같이 먹는 것도 좋았지만-

“맞아, 모래야. 또 부탁해도 될까? 부작용인지, 오르카 팔이 또 썩어가고 있어서.”

“타, 냐 님-”

“응, 오르카. 뭐 해줄까?”

타냐가 실험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위안이었다. 물론 백모래의 실험체는 실험을 당한 뒤 앓거나 드러눕는 것 외의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이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왠지,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고 할까.

“나, 안아주세요-”

“응, 잠시만?”

주변을 휘휘 둘러 살펴본 타냐는, 익숙하다는 듯 오르카를 안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모래에게 썩어들어가는 팔을 건네는 것이다.

“아팠겠다….”

“그치? 근데 말도 안 하고 있었다니까. 오르카, 아프면 말해줘.”

“하, 하지만, 시끄, 럽다고….”

“…”

하지만 이곳이 인체실험 연구소라는 사실이 어디가는 것은 아니다.

타냐가 백방으로 노력하긴 했다. 연구원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고 나서는 그들을 설득하고, 실험체들을 대하는 대우가 나아지도록 했다. 제 실험체도 아닌데 모든 실험체의 상황을 파악하고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예사였다. 곧 연구소의 모든 사람들은 타냐를 주목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험체들의 모습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연구원들이 더 인격적이 되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변하지 않듯이. 연구소의 생리는 그대로였다.

“남은 쓰레기는 내가 버리고 올게.”

“그래 줄래? 난 오르카 보느라 갈 수가 없네…. 미안해.”

“으응, 아니야. 다녀올게.”

백모래와 타냐는 다 먹은 도시락 뚜껑 같은 것들을 정리하며 자리를 정돈했다. 수다를 떨면서 먹으니 더욱 금방 흘러가는 점심시간은, 차마 음식을 입도 대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던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백모래가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것을 자처하고, 타냐는 웃으며 보내주는 것까지.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백모래군,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직접 실험에 참여하는 게 어떨까?”

“아, 거창한 게 아니라 샘플 체취나 가장 간단한 시술 같은 것만. 자네가 참여하면 그만큼 다른 실험체들의 부담도 줄어들 거고.”

쓰레기통에 도시락을 버리고 오는 길, 복도에서 마주친 연구소 소장은 그 나이가 무색하게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백모래는 그 모습에 슬슬 혐오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장이 백모래를 보호하려는 타냐에게 손찌검을 휘두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소장은 마찬가지였다.

‘백모래군, 실험체가 될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주게.’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반복될 거라는 협박. 백모래는 괜찮다는 타냐의 어깨를 부여잡고 또 한 차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설득, 회유보다도 잘 먹히는 것이 협박이었다. 백모래는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타냐가 뜯어말렸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있었지만….

“그, 그건 싫어요….”

“어허, 저번에 내가 제대로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타냐도 괜찮으니 거절, 하라고 했는데요….”

“백모래군은 자기 의견이 없나?”

“네?”

그때, 난데없는 비난이 이어졌다. 그래도 늘 감사하게 생각해왔던, 그리고 한때는 의지했던 은사로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듣는 것은 백모래에게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말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명령을 내리면 내리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맡은 일은 다 하면서 실험체들을 희생시켜놓고. 자기 몸은 소중한가 보지? 지금 국가가 자네의 능력을 필요로 하네. 그 대의를 위해 몸 하나만큼은 내놓을 각오를 해야지. 여기 안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소장님. 방금 그 말은 좀 심하신 것 같네요.”

더 이어지려던 말은, 백모래의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타냐에 의해 멎을 수 있었다. 백모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야, 숨 쉬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타냐는 드물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와 다르게 인자하게 웃는 얼굴을 한 소장은 숫제 능글맞은 기색이었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나. 백모래군이 무기력해 보여서 기운을 북돋워 준 것뿐이네.”

“그렇다면 이제 데리고 가봐도 될까요? 곧 점심시간이 끝나거든요.”

“아, 말이 나온 김에 타냐 자네도 어떤가?”

“네?”

“백모래군이 거부해서 말이지. 자네가 직접 실험체가 되는 것은-”

“하겠습니다!”

명백히 백모래의 반응을 떠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앞뒤 가릴 것 없이 대답하고 말았다. 그 대답 하나로 두 사람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말하자마자 그것을 후회한 백모래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쯤 되면 백모래는 알 수 있었다. 소장의 목표는 처음부터 자신이었을 것이며, 그에 미끼가 된 것은 자신의 친구라는 것을.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는 걸로 알겠네. 연구원의 지시에 따르도록.”

눈물이 울컥 비어져 나왔다.

이 상황의 승리자는 명백히,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이 연구소에는 썩어도 준치라고, 대피소가 있다. 방공호라기엔 많이 허접한 비주얼이긴 하지만. 어쨌든 연구소의 실험체와 연구원들이 다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장소가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외근을 나간 소장과 측근들이 외출하는 날의 맑은 오후, 백모래는 난데없이 대피소로 향했다. 백모래가 실험체로 투입되는 첫날이었다.

“지, 진짜 이래도 되는 거 맞아요…?”

“다시 잡혀 들어가면 어떡해….”

“타냐쌤, 미, 믿어도, 되요?”

실험체들의 말이 곧 백모래의 맘이었다. 지금 연구소 내의 모든 실험체들은 비밀리에 대피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비밀리도 아니었다. 협조하지 않는 연구원들은 총으로 위협을 당하며 따라오고 있으니까. 타냐와 뜻을 함께하는 연구원들은 진작에 순순히 총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실험체를 지키라며 백모래에게도 한 자루 주었다.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것을 말이다. 백모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아침에 보자마자 타냐가 벗어 던진 가운에서 나오던 노란 종이 쪼가리도, 그때부터 무슨 시간제한이라도 있는 듯이 굴며 대피소로 이동하는 타냐도, 그에 협조하고 있는 백모래는 이름도 모르는 다른 동료도….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동참하고 있는 이호도.

텅-

“자, 이제 나가지 않는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요.”

“전쟁이에요?”

“고, 공습?”

“태풍…?”

대부분의 연구원과 실험체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백모래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연구원들은 이것을 테러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작에 연락 가능한 수단을 전부 잃었기 때문에 별다른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우르릉-

“꺄아악!”

거대한 산울림이 울렸다. 산울림은 땅울림을 동반했다. 그에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른 실험체와 연구원들은 자세를 숙였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게 뭐야? 뭐야? 같은 말이 넓은 공동을 울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땅울림이 울리자, 다 함께 입을 다물었다.

쾅, 콰릉!

“헉”

“흐, 흔들려!”

“지진인가?!”

하지만 지진은 아니었다. 판판한 땅은 갈라지지 않았고, 땅울림은 불규칙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리는 흔들리기보단, 쏟아져 내려오는-?

“산사태다!!”

사람들은 단번에 창문으로 달라붙었다. 두꺼운 유리와 철창이 붙어있는 데다가 흐리기까지 한, 있으나 마나 한 창문이지만 다들 불안과 희망을 갖고 모여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말리는 것은 타냐의 몫이었다.

“진짜 산사태라면, 창문은 더 위험해요! 좀 떨어질까요?”

“우리가 당신의 뭘 믿고?!”

“믿지 않아도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해야 할 텐데. 머리가 발에 달리기라도 했나?”

그리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은 이호 선배.

백모래가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점 중 하나였다. 누구보다 먼저 연구소에 들어왔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던 사람이 대체 무엇에 불만을 가졌길래 이런 테러에 가까운 행동에 가담하는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아래, 다시 산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만이 사람이 가득한 공동을 울렸다. 이호는 이곳저곳을 돌며 몸이 불편해 보이는 실험체들을 치료해주고 있었다. 타냐는 백모래 곁에 앉아 그의 어깨를 빌렸다. 지난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잠이 덕지덕지 묻은 표정이었다.

“타냐 님, 갠차나요…?”

“응응, 당연하지. 그냥 졸려서 그래.”

“-타냐.”

“왜, 모래야?”

“산사태를 예측한 거야?”

“…비슷하지.”

백모래는 대답을 요구하는 무구한 표정으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그에 타냐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슬쩍 손짓했다. 귀를 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백모래가 그것을 따르자-

“사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뭐? 특기라도 있어?”

“그건 아니고… 체질?”

? 타냐는 그 이상으로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백모래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은 아침에 보았던 노란 부적이었다. 뭐, 그걸 찢어서 재해를 불러오기라도 했다던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빙성 없는 소리였다. 백모래는 실험체가 입는 옷 특유의 한기를 느끼며 괜히 머리를 헤집었다.

그 사이에 상황은 천천히 악화되어갔다. 심지어 창문을 뚫고 쏟아져 내려온 토사 때문에 사람들은 창문에서 떨어져 서 있던가, 저들끼리 모여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밖에서 커다란 폭음이 몇 번 들리고 나서는 타냐의 패거리가 그들을 협박해서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테러라기보다는 차라리 타냐에게서 어떤 특기가 발현되어 조치를 한 거라는 추측이 더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우르릉-

그리고, 곧 거대한 산울림과 함께 토사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반복되었다. 결국 대피소가 버티지 못했는지 조금씩 금이 가는 소리는 덤이었다. 결국-

“꺄아악!”

쿵, 콰강! 콰직,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큰 폭발 소리가 들렸고, 제일 약한 천장 중앙부부터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재난이다.


이호는 지금쯤 꼬리가 잘리고 끌려가고 있을 연구소 소장을 생각했다. 타냐가 말하기를, 거 뭐냐, 정권 싸움이랬나.

영물과 혼혈이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요즈음, 그들을 위한 정당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정당은 몸집을 불려 현재 정권의 야당으로 존재하며, 당연히 혼혈의 인권을 위해 분전하고 있었다. 이런 연구소 따위는 눈에 거슬릴 것이 당연했다. 아니, 전국적으로도 논란이 될 여지가 충분했다. 결국 이 문제를 덮는 것을 거래로, 두 정당은 극적인 타결을 봤으며 연구소는 그사이에 공중분해 되었다.

-까지가 타냐의 설명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사회의 윤리에 의거하면 그것이 없어져야 할 이유는 충분했고, 그로 인해 자신이 귀애하는 타냐와 백모래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자, 나오십시오!”

“노약자부터 천천히-”

저들을 데리러 온 구조 차량은 줄지어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저 앞에 있는 버스에서부터 연구소 관계자들이 차례대로 내리는 장면이 보였다. 그 앞엔 검은색으로 썬팅된 보호차량과 경찰차가 존재했다.

타냐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산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더불어 산 위의 차고지에 있었던 버스가 굴러 떨어져 폭발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고. 재난에 불운까지 겹친 사고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 때문에 연구소는 아주 박살이 났다. 회생 불가할 정도로. 이호는 제 어깨를 백모래에게 내주고 멍하니 버스의 창문 밖을 바라보는 타냐를 바라보았다. 지쳐 보였다.

“우,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저기 경찰차 있는데?”

연구원들은 기존에 타냐와 대화한 내용을 토대로 처우가 정해질 것이다. 그들은 대화가 녹음되고 있는 줄도 몰랐겠지만. 어쨌든 걸러질 인물은 정해져 있었다.

“우리, 어, 어떻게 돼요…?”

“괜찮을 거예요. 걱정마요.”

실험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아마 치료를 받고 나서는 본래의 일상, 혹은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겠지.

그려낸 듯한 해피엔딩이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면 그려내지 못했을 법한.


구조된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구조되기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던 백모래는 한참을 달게 잤다. 버스에서 자느라 몇 차례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근 몇 년 중 제일 마음 편한 시간이었다. 신경 쓰이는 발밑의 한기와, 괴로운 신음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래야, 백모래.”

“으응?”

“도착했어. 내려야 해.”

“아… 미안.”

괜찮아. 타냐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일어났다. 구조 차량 한 대에도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그 둘은 맨 뒤에서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백모래는 잠기운을 몰아내려 애썼고, 타냐는 오르카의 손을 잡고 장난스럽게 그 코를 퉁기고 있었다. 아이의 팔은 새하얬다.

“모래야.”

“왜?”

“나가면 뭐할래? 원래 선생님 하고 싶었댔잖아.”

“음… 이제 와서 시험 준비하기엔 좀 늦지 않았을까?”

“학원 선생님도 선생님이지 뭐야.”

그런가. 근데 진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갈 수 있는 건가? 백모래는 멈춰섰다. 처음부터 연구소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졸업식 때처럼 얘기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분명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끝없는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꿈에서 갓 깬 것처럼 상쾌했다. 지독한 악몽에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무슨 생각해? 얼른 내리자.”

“어? 응.”

그런 생각을 하는 백모래의 앞으로 차례는 다가왔다. 그럴 리는 없지만서도, 버스 계단과 바닥이 한참이나 멀어 보였다. 그것에 잠깐 망설이는 백모래를 보며, 타냐는 알만하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모래야. 햇볕이 따뜻해.”

“아….”

타냐의 말대로, 따뜻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연구소 내에서는 생각도 못 한 따뜻함이었다. 백모래는 그제야 그곳을 벗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더 이상 그 음지에서, 인간성을 잃는 것에 몸부림치며 굴러다닐 필요가 없었다. 백모래는 지금 몸이 떨리도록 환한 햇살 아래 타냐와 함께 서 있었다.

“나랑 같이 가자.”

“-”

백모래는 타냐의 손을 잡고 바닥에 내려섰다. 그에 타냐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몇 년 만의 환한 미소였다.

 

두 사람은 실로 오랜만에, 빛의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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