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의 빛》
커미션 신청본
ⓒ파퍼
“나쁘지 않군. 안 그래?”
미케가 말을 건네자 리바이는 조용히 진의 모습을 훑었다.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정도라면 밖에서 뭘 하는 건 무리다. 빨리 익혔으니 이 정도도 나쁘지 않겠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말이 쏟아졌다. 리바이가 칼을 뽑았다. 진은 그 모습을 보다 검신을 한 바퀴 돌렸다. 어쩔 수 없지. 잠깐 놀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위험은 감수하고 있었다. 특히나 날카로운, 거인을 말 그대로 오체분시할 수 있는 서늘한 검신이 나타나자 엘빈이 그를 막아섰다. 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는 당황한 내색을 숨기고 있었다.
“자네들이 나설 필요까진 없어 보이는군.”
엘빈의 표정이 한순간에 진지해졌다.
“흠.”
리바이가 다시 칼을 집어넣고 뒤로 물러났다. 미케는 그 기세에 함께 벽 가까이 붙었다.
“에이, 진짜로? 이러지 말자. 누구 피 보는 건 싫어.”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진은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다. 다른 게 아니라 엘빈을 다치게 하는 게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게를 가진 걸 보는 순간 그는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긴장 풀게. 간단한 테스트일 뿐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엘빈이 사라졌다. 진은 보지 않아도 그가 위로 솟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간단한 테스트’라면서? 장치 손잡이를 쥔 진은 앵커를 훈련장 오른쪽 벽으로 꽂았다. 그 옆으로 무수한 구멍이 다시 메워진 채였다. 잠시 생각하는 순간 엘빈이 위에서 칼을 찍어눌렀다. 진은 그의 속도에 맞춰 몸을 틀고는 더미의 머리를 손으로 뜯어냈다. 엘빈에게 던져진 그 덩어리가 두 쪽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역시 단장님인가. 우수한걸. 진은 자신마저 진지해지는 순간 엘빈이 다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피하는 방향으로 마음먹었다.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어!”
“왜 이렇게까지!”
엘빈의 몸이 유연하게 공중을 날았다. 건물이 빼곡한 시내도 아니고 우뚝한 나무로 울창한 숲도 아니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마치 물총새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공기 중에서 흩날리는 금발은 빛줄기에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체감하니 문득 인간이 얼마나 한계에 도전하는지 알 수 있었다. 타인보다 큰 키에도 쉽게 방향을 틀고 수족처럼 기계를 다루는 모습이 근사했다.
이제 엘빈은 진의 가까이 붙었다. 앵커의 반동을 추진력으로 사용해 고속으로 접근하자, 진은 칼을 꺼내 손잡이로 엘빈의 어깨를 막아냈다.
“이제 할 마음이 들었나?”
“난 언제나 준비완료야.”
캉, 하고 검신이 장애물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진의 손잡이가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이런.
“자네 장비는 아닌 것 같군. 와라!”
진은 자신이 적당히 하면 엘빈이 눈치챌 것을 확신했다. 그가 아니더라도 미케와 리바이가 그걸 알 게 뻔했다. 그러면 엘빈의 위신도 흠집이 나겠지. 어떻게 한다....
“오지 않으면...!”
단단한 벽면을 디디고 선 군홧발이 하늘로 다시 한 번 뛰어올랐다. 진은 손잡이를 틀었다. 앵커가 방향을 바꾸며 갈고리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으나 진이 간과한 건 방금 한 쪽 조종간이 박살 났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결국, 측면으로 날아오는 칼날을 진은 왼팔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엇...!”
“흥미롭군.”
쨍강하는 소리와 함께 엘빈의 검신이 두 동강 났다. 미케와 리바이가 반응하는 것이 멀리서도 똑똑히 들렸다. 엘빈은 자신의 칼을 내려다보더니 어쭙잖게 붙어있던 날을 떼버렸다. 그리고는 진이 놀랄 정도의 속도로 뒤로 날아오르더니 돌진했다. 날개가 없음에도 새와 같군. 진은 피 흘리는 팔뚝을 무시한 채 더미 하나의 어깨를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더미가 그 힘에 고꾸라졌다.
엘빈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군홧발이 벽에 금을 그을 정도로 강한 출력을 내자 진을 따라잡을 수 있었기에. 엘빈이 자주 디디는 장소를 훑던 진은 결국 허리를 젖힌 채 한 손으로 깨진 바위를 산산조각냈다. 높은 바위의 위치상 엘빈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한다면 기동 범위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 정도로 질 엘빈이 아니었다. 그는 부서진 바위의 큼지막한 조각을 발로 눌러 땅속으로 고정했다. 진의 수는 오히려 엘빈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한 꼴이 되었다. 영리한걸.
이제 미케와 리바이는 둘의 대련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진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진은 엘빈이 순간적으로 다가오자 그를 내버려두었다. 아무리 권능이 있더라도 첫 시도란 건 사실이었기에 진의 몸에는 작고 큰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애초에 자신의 몸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응한 결과였다. 조사병단 군복에 온갖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엘빈은 그걸 보더니 잠시 뒤로 물러났다.
진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칼날을 비스듬히 쓰는 것을 깨달았다. 정면돌파의 결과가 부서진 칼날이었으니 그조차 전략인 셈이었다. 실로 대단한 인물은 인물이었다. 진은 놀라지 않았으나 감탄했다. 이 정도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능력을 쓸 뻔한 적도 한 번 있었다. 앵커를 반대로 놀려 엘빈이 뒤에서 다가온 때였다.
진의 뺨 위로 핏줄기가 흘렀다. 엘빈은 맨손으로 선 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더 안 하고?”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엘빈이 고개를 돌렸다.
“리바이, 이 정도면 되겠나?”
리바이가 조용히 대답했다.
“훈련장 수복할 사람은 네가 구해.”
진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몸에서 활력이 뿜어져 나왔다. 엘빈의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을 보던 그는 제안했다.
“쉬러 가는 게 어때.”
“...따라오지.”
한지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진은 그저 엘빈의
강함에 대해 재정립할 시간을 가졌다.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얼굴과 팔에 생채기가 난 엘빈이 들어가자 한지가 경악했다.
“에엑?! 무슨 일이...아니, 싸웠어?!”
그의 기겁은 너덜너덜한 진이 들어가자 이어졌다.
“맙소사.”
한지가 더 크게 한 마디를 꺼내려는 순간, 엘빈이 나직하게 읊었다.
“다른 병사들에게 알려지는 건 원치 않네만.”
“아, 그래, 맞지. 일단 앉아봐.”
진과 엘빈은 나란히 한지의 방 한편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한지가 저 안에서 뭔가를 끓이는지 부글거리는 소리가 칸막이 너머로 들렸다. 곧, 그가 쟁반에 잔 두 개를 가져왔다.
“당장에라도 널 확인하고 싶지만, 오늘은 엘빈도 있으니까, 아아, 아쉬운걸.”
진은 그의 말을 받아치며 잔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는 찰랑대며 김을 내는 우유가 있었다.
“뭐,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잡아봐. 없을 거지만.”
“엘빈, 이 녀석 말 들었어?”
엘빈은 그 둘을 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적당히 해.”
진은 다음 대련을 기대하며 우유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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