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언제나 당신의 곁에.
한 여름 밤의 꿈 합작 참여물입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먼저 올립니다.
참조 출연해주신 로망아일 두 사람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남의 드림 진심녀-
쓸때 들었던 곡은 모형정원의 코랄입니다 u//u)♥
극동의 여름은 생각보다도 덥다는 말은 들었지만, 더워도 이리 더울 줄은…. 살짝 목덜미 끝에 닿는 정도의 녹색 머리카락을 겨우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한 여자는 의자에 기대어 늘어졌다. 에어컨이 있어도 눈이 자주 건조해지는 편이라 틀지 않고 버티던 것도 이제는 슬슬 한계다. 리모컨을 찾으려고 시선을 돌릴 때쯤,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문 좀 열어줘.”
“네.”
건조한 답변에도 자연스레 움직여 손잡이를 돌려 열린 문으로 시선을 움직이면, 한눈에 봐도 꽤 묵직한 장을 봐온 그가 있다. …아르바이트 다녀온다더니? 그런 의심도 잠시, 문이 열리니 그 짐을 전부 들고 성큼성큼 들어와 신발을 벗고 들어온다. 그러고는…….
“나 없다고 에어컨도 안 틀고 있었어? 이 날씨에 더위 먹어서 쓰러질 생각인가?”
“…아, 아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나갈 땐 켜놓고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가 더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진짜 더위로 아가씨가 쓰러진다니까. 내가 아르바이트하다가 아가씨 신변에 이상 생긴 거 느끼고 뛰어오는 게 보고 싶어?”
“…….”
“나야 이렇게 온도 차가 심해도 크게 구애받지 않지만, 아가씨는……. …….”
음, 또 시작했다. 잔소리. 푸른 머리와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짐을 전부 주방에 내려놓으며 시작한 잔소리는 리모컨을 찾아 틀고 문을 닫은 후에도 도통 끝나질 않았다. 제 걱정에 그러는 건 알겠지만, 종종 보면……. 꼰대 같지 않나? 드물게 그런 생각을 하던 여자의 이마에 가볍게 그의 손가락이 부딪혔다. 아야. 그런 소리를 내며 다시 시선을 맞추면 자신만 바라보는 집요하고 날카로운 시선은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 자신이 ‘그 말’을 할 때까진 계속 이 분위기겠지, 직감한 여자는 말문을 열었다.
“…잘못했어요.”
“진짜지?”
“네….”
순순히 답하니 그가 그제야 흔쾌히 웃는다. ……내가 저 웃음에 홀렸지. 잠시 스스로에 대한 고찰을 마친 여자는 앞으로 더 철저해야겠다는 –들키지 않으면 완전 범죄다- 결론을 내리고 그가 올 때부터 들고 온 짐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다.
“랜서, 저건 다 뭐예요? 일주일 치라고 하기에도 좀 많은 것 같은데.”
“아? 바닷가나 좀 가려고.”
“…혼자?”
“무슨 소리야? 아가씨랑 데이트지.”
“데이트 신청을 이렇게 해요? 전엔 그래도 좀 분위기 있게 하시더니?”
“그렇기엔 아가씨랑 나는 꽤 오래 살 부딪히고 살 사이니까?”
진짜 이길 수가 없네…. 그의 행동은 종종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고 했지만, 어느 정도 알고 지낸 후로는 그조차 그의 성격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어쩐지, 좀 많더라니…. 그의 당당한 논리 앞에서는 뭐라 항변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도 진즉 알았기에 그와 함께 장바구니를 살펴보기로 했다. 기본적인 캠핑 도구부터 고기, 과일, 숯, 철판…. 하루 지낼 정도가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와 함께 용도별로 구분하고선 그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콱 찔렀다.
“이 계산 빠른 사람. 2박 3일 짐을 챙겨오셨네요.”
“뭐 어때, 아가씨도 기분 전환하고 좋잖아~. 낚시도 같이하고, 괜찮지?”
“거절 못 하는 거 알면서 그래요?”
“응.”
여자가 연신 쿡쿡 찔러대는 옆구리가 아프지도 않은 지 태연하게 답하던 남자가 손을 뻗어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무리하지 말고, 에어컨 바람은 너무 건조하다며. 아가씨가 나랑 같이 보고 싶다고 했던 바다를 오래 보자고, 걷기도 하고. 라며 말을 해주는 그의 태도에 결국 여성은 웃어버리고 찌르던 손을 멈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가을에는 산으로 가서 단풍도 봐요, 겨울엔 집에서 눈도 보고….”
“당연하지, 내가 옆에 있을 이유는 아가씨면 충분하니까.”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짐을 전부 챙겨나온 후, 근처의 바닷가로 가는 길에 그를 알아본 시장 상인들이 나눠준 것들까지 합쳐지니 상당히 양이 많아졌다. 그가 여기저기 아르바이트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신뢰받고 있는 줄은 몰랐던 여자는 더위에도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그가 이 마을에서 신뢰받는 이라는 것이 자신에게도 이리 뿌듯할 수가 있을까.
“청년, 여자친구랑 데이트야?”
“오! 응, 데이트. 내가 번쩍 납치해서 데려왔지.”
“그걸 왜…. 왜 자랑스럽게 말해요….”
“선생님도 좋은 얼굴로 보이는걸? 둘 참 잘 어울리네. …아줌마가 너무 주책맞았나?”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래, 고마워!”
전에 시장에서 랜서를 보러 왔다가 지병으로 인한 발작을 일으켰던 사람을 응급처치하여 병원으로 데려간 후 제 별명은 자연스레 선생님 혹은 의사 선생님이 되었다.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니 굳이 정정하지 않았기에 멋쩍게 웃다가도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보니 얼추 해가 저물 때쯤 도착했다. 딱히 시간에 구애받고 온 여행이 아니기에 적당한 자리에 텐트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으면 그가 자연스레 제가 들고 있던 집게를 빼앗아 들었다.
“아가씨는 앉아서 먹기만 해, 이런 건 내가 해야지.”
“…둘인데 서로 하면 더 좋잖아요.”
“아니~, 캠핑의 낭만 아니야? 아가씨는 가끔 보면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 낭만이 부족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튼!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아가씨는 먹기만 해!”
“어, 음…. 네에…….”
저런 상태의 그에겐 아무리 말해도 자신만의 의지가 있어서 듣지 않는다. 진즉 깨닫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여자는 순순히 그의 손에 이끌려 식탁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한 편으로는 약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게 부족하면 여기 오자 했어도 안 왔겠지…. 괜히 와서 그와 말다툼은 하기 싫어 입술만 비죽 내밀고 있으면, 그가 어느새 접시에 한가득 구워진 고기를 내려놓고 제 표정을 살핀다.
“식기 전에 먹어, 불만이 있으면 먹고 대화하자고. 어때?”
“……많이 못 먹어도 랜서하고 이야기하고 싶으니 맥주 꺼내놓을게요, 얼른 굽고 와요.”
야채와 고기를 먹고 있으면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워온 그가 다가온다. 풀썩, 하고 자리에 앉는 소리가 나서 보면 그가 고기를 먹지 않고 저를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하여간 얄미워. 그런 생각을 하다 여자가 고기를 집어 들어 그의 입에 가져다주니 남자는 그제야 입을 벌려 먹기 시작했다. 자신을 놀릴 생각을 할 때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익숙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건 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한숨에 여자는 놀라 잠시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화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자책하는 습관이 여전했다.
“아가씨?”
“…아, 아. 그게 랜서…….”
“편하게 말해, 괜찮으니까.”
“…저라고, 그렇게 메마른 사람은 아니에요.”
“응?”
그가 조금 놀란 눈동자로 쳐다보면,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하는 것이 언제나 자신의 최선이었다.
“바닷가니까, 나름…….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다음은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당신이랑 함께하는 여행이니까….”
부끄러움을 애써 이겨내고 뱉어낸 고백에, 그가 웃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완전히 달아올라 붉어졌음에도 억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이 기껍다. 주름지지 않고 활짝 웃는 얼굴 너머로 석양에 반사된 눈동자가 반짝거려 제가 보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여자는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왜 웃어요?”
“아가씨가 그 말을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기대하고 있었다니 다행이라서?”
“…나 놀리죠?”
당연한 거 아냐? 그런 말을 하며 그가 태연히 꺼내놓은 맥주캔의 뚜껑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이 이야기를 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한 모금 시원하게 넘기고서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주먹에 손을 올려 손을 풀어주고는, 주물러주던 그가 한참 정적을 지키다 뒤이어 말문을 열었다.
“섬세하지 못한 건 천성이라서, 아가씨가 신경 썼다면 미안. 나쁜 뜻은 아니었거든.”
“괜찮아요, 그건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난 나름 괜찮네. 아가씨가 이렇게 자기 마음속 소리를 내주는 거 말이야.”
늘 말했지만, 남을 위해서 꾹 참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나한테만이라도 참지 말고 말해야지. 그런 말을 하며 마주친 시선에서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자신이 보인다. 여자는 그런 생각에 잠시 숨을 참았다 내뱉고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불만이었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요.”
“이제 마음에 걸리는 건 없으니 편히 먹을까? 얼마 안 먹었잖아.”
타닥타닥, 숯이 타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풀린 마음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선선하다. 종종 그에게 먹여주기도 하고, 먹기도 하며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남자와 여자가 먹은 것들을 정리하고 보면, 벌써 밤이 한참이었다. 사람이 적을 때니 오히려 편했지만, 적을 뿐이었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그것을 꺼리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함께 바다를 걷기 시작했다. 선선하게 느껴진 파도 소리는 거짓이 아닌 것처럼 바람에 이따금 실려 오는 물거품이 기껍다.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다른 손으로는 각자의 신발을 들고 발목까지 젖을 정도로 함께 걸으며 웃고 떠들다 보면,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 각자의 빛으로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그리고 순간, 아주 잠깐 일그러진 느낌과 동시에….
─닥터?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분명……. 당황스러운 마음에 함께 있던 남자를 쳐다보면 그도 비슷한 기시감을 느낀 탓에 살짝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옆을 지나지 않았던가? 봄을 닮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상냥했던 그와 새하얀 겨울을 닮은 것 같은 이와 함께…. 동시에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저 고요하게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바랐던 환상일까? 그게 아니라면 만약─. 정말 만약 자신처럼 다른 세계의 그가 잠시 비추어진 거라면…. 어디에서도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열심히 달려온 만큼의 보상은 그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여자는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걱정하는 얼굴로 눈앞에 손을 휙휙 흔드는 걸 보니 여전히 섬세함은 부족한 연인이지만…. 그런 그를 보니 전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지금 전하지 않으면 어쩌면 영영 말할 수 없을 진심을 담은 고백. 걷던 다리를 멈추고 제 발걸음에 앞서나가다 멈칫한 남자에게 여자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랜서, 그래도…. 역시 제 결정에 후회는 없어요.”
“나와 함께하는 거 말이야?”
“네,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는 소망이요.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가 맞아도, 당신은 제가 바랐던 가장 큰 욕심이자 소망이었거든요. 당신을 억지로 붙잡은 게 아닐까 라고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당신은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니까.”
“아가씨.”
“…그래도, 제가 있는 한 당신을 붙잡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당신이 함께 해주고, 삶이 다하는 순간을 지켜봐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러니, 당신도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어요. 당신과 계약하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이안, 나의 마스터. 내가 너를 고른 건 그때도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 하고 싶은 걸 하자고 했지, 네게 말했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고마워요.”
“별말을, 이쪽이야말로 아가씨의 선택을 받아서 영광이라고? 나는 아가씨의 정의를 위해 창을 휘두르는 기사가 될 테니 말이야. 제법 나쁘지 않은 삶이거든.”
연인끼리 나누는 사랑이 담긴 밀어, 그런 걸 기대한 적 없었던 때가 있었다. 제게 있어 목적은 단 하나였고, 그걸 위해서라면 자신도 희생할 준비가 기꺼이 됐으니 당연한 말이었지만 남자는 자신에게 있어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었다. 다음 목표를 위해 나아갈 힘을 줬고,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을 일깨워 준 것도 그였다. 이 모든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그를 사랑하게 했고 그와 함께 걷고 싶다고 원하게 되었으니까. 기대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제게는 사치였던 것들을 알게 해준 그가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니….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여자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 입맞춤에 그가 씩 웃더니 다시 한번 더 가까이 다가온다. 온기와 온기가 맞닿고, 두 사람 사이로 일렁이는 파도가 부서진다.
두 사람의 여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