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록] 네스드림_스토커의 순정

오늘도 활기차게 ★ 스토킹 하고 있습니다! 네스카이네스 베이스★

0. 거슬리는 여자.

잠시 상황을 살필 겸 경기장 근처의 입구로 나온 네스는 익숙한 얼굴과 눈을 마주쳤다. 계단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 흔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카이저의 팬을 대부분 외우고 있는 네스로서는 그녀를 알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여자, 카이저의 그루피네.’

예쁜 얼굴을 한 소년은 여자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잠시 보고 있었을 뿐인데 여자도 네스를 알아본 눈치였다. 그녀는 퍽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고, 얼굴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카이저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흘겨보던 네스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이저는 이곳으로 안 나와요.”

거짓말이다. 카이저는 2시간 뒤 이곳으로 나와 숙소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래서 네스가 직접 퇴근길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이 여자 같은 그루피들이 카이저의 퇴근길을 방해할 것이다. 재빠르게 주변을 확인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던 네스는 계획이 틀어진 것이 불만스러웠다. 빈말로도 다정하다고 볼 수 없는 목소리의 이유는 그런 짜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불퉁한 목소리는 서늘하기 짝이 없어서, 평소의 네스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불쾌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자는 오히려 기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네스는 더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여자는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네스는 카이저의 방패로서 멍청한 추종자에게 경고했다.

“계속 여기에 있을 건가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후에야 네스는 여자의 손에 선물이 들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붉은빛을 띠는 보라색 리본이 엉성하게 묶인 상자였다. 저것을 주고 싶어서 여태 기다린 모양이었다. 네스는 여자가 카이저의 팬 중에서도 퍽 얌전한 축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상냥함과 동정심을 최대한 긁어모았다.

“선물은 스태프에게 맡기는 게 좋겠네요.”

카이저는 상냥한 편이라 팬들의 선물이며 편지를 곧잘 받아주었다. 그러나 모든 선물을 하나하나 직접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스태프들이 대신 받아 전달하곤 하였다. 직접 주는 것 보다 효율적인 일이다. 이상한 것이 섞일지도 모르니 확인 작업도 필요하고.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부드러운 경고에 여자가 위아래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스는 습관처럼 미소지었다. 귀공자의 웃음에 여자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입을 열었다.

“네, 네스군, 오늘 활약 멋졌어요. 나이스 어시스트였어요. 정확하고 신속한 판단이었어요!”

여자는 더듬거리며 네스의 활약을 칭찬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달음박질쳐 스태프에게 선물을 건네준 후 사라졌다. 네스는 그녀가 멀어지자마자 혀를 크게 찬 뒤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휴게실로 돌아간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카이저의 선물을 확인해 보는 일이었다. 저 여자는 얌전한 편이지만 꽤 끈질겼다. 툭하면 얼굴을 비추곤 했다. 카이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저의는 묻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제 얼굴을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네스의 앞에서 얼쩡거린 것도 그의 연장선이겠지.

‘질이 나쁜 벌레야.’

네스는 엉성하게 포장된 선물을 능숙하게 해체했다. 분해하는 솜씨는 이제 구단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네스는 작게 흥얼거리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작은 곰 인형이었다. 목과 몸통 사이에 엉성한 바느질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는.

 

*

 

축구 선수의 연봉은 순수한 실력만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인기야말로 연봉과 직결되는 요인이다. 비슷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보다 인기가 좋은 편이 표를 팔기 쉬우므로, 구단은 어떻게든 인기 있는 선수를 확보하기 위해 연봉을 올리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저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수였다. 수려한 얼굴과 근사한 피지컬, 거기에 실력까지 갖추었다. 이보다 명확한 지표가 어디에 있을까. 카이저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를 영입하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그런 카이저가 믿고 신임하는 파트너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네스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카이저에게 다가갔다.

“카이저. 수고하셨어요.”

미리 준비해 둔 음료수와 안경을 건네자, 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안경을 쓰고 잔을 들어 올렸다.

“고마워, 네스. 난 네 이런 점이 좋아.”

“야호~!”

칭찬을 받았다는 기쁨에 평소보다 더 귀여운 목소리로 웃자 카이저가 키득키득 목을 울렸다. 네스는 카이저가 웃는 소리에 맞춰 허벅지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었다. 카이저의 웃음소리를 들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건방져.’

네스의 주머니 속에는 작은 곰 인형이 들어있었다. 카이저에게 전달될 뻔한 선물 상자 속에 들어있던 그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재봉 부분을 뜯어 안을 살펴보니 작은 전자기기가 나왔다. 소형 도청기였다. 다행히 네스가 알고 있는 모델로, 근처 무선 인터넷에 자동으로 접속하여 음성을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종류였다. 단순히 녹음기였다면 숙소까지 들어올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라 경계해야겠지만, 도청기 정도라면 처리하기가 쉽다. 거기다 이 모델은 음질은 그리 좋지 않으나 이동 거리가 꽤 되는 종류다. 자신이라면 이런 허접한 기계 따위는 쓰지 않을 테다. 네스는 속으로 여자를 비웃었다.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네스의 목소리뿐이다. 카이저의 다정한 목소리는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제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 좋은 꿈 꾸세요.”

네스는 방긋 웃으며 다시 주머니 위를 긁었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와 보폭으로 방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도록. 문을 나서고, 복도를 지난 후, 자신의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는 기척을 낼 수 있었다.

여자는 분명 듣고 있을 것이다. 네스는 스토커들의 심리를 잘 알았다. 망상에 빠져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미치광이들. 괜한 분란을 일으키기 전에 짓밟아 줄 필요가 있었다. 네스는 엄지와 검지로 곰 인형의 목 사이를 비틀어 작은 기계를 꺼냈다. 기괴하게 비틀린 곰인형은 쓰레기통에 휙, 던져 넣었다. 부드러운 천이 플라스틱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입가에 도청기를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충분히 즐기셨나요? 제법 맹랑한 짓을 하네요. 당신. 봐 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에요.”

네스는 그대로 손에 힘을 풀었다. 도청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누군가의 마음처럼 새카만 전자기기는 신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으스러졌다.

 

*

 

여자를 다시 만난 건 경기가 끝난 후였다. 카이저의 활약으로 4:0의 깔끔한 점수를 낸 경기였다. 덕분에 네스는 보기 드물게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약간의 실수가 있기는 했으나 카이저가 만회했고, 후회나 반성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 후에 곱씹어도 늦지 않았다.

선수들이 퇴장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관중들이 삼삼오오 길목 근처에 몰려들었고, 여자는 그 사이에 있었다. 카이저의 그루피들 사이에서 여자는 양손을 움켜쥐고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팬들은 오랫동안 카이저를 따라다니던 무리로, 훌리건 못지않게 싸움을 벌이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네스는 소란스러운 팬들을 유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기에 멀리서도 그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이저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여자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보냈다. 여자는 쭈뼛거리며 펜스를 잡고 카이저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네스는 팬 서비스인 것처럼 웃으며 펜스 근처로 다가갔다.

“아, 아, 안녕! 하세요!”

여자는 덜덜 떨며 인사를 건넸다. 네스는 카이저를 보지 못하게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또 보네요.”

“그, 그때는 죄, 죄송….”

여자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전과 같은 밝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스는 그것이 퍽 흡족했다. 주제를 알라고 폭언을 뱉고 싶으나, 상대는 일반인이었다. 완전히 짓밟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여자는 짓밟는 것 보다는 적당히 목줄을 채워 두는 게 카이저의 평판에 도움이 되었다. 광신도는 종종 이용하기 좋은 장기 말이 된다.

네스는 검지를 입술에 댄 후,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카이저는 모르니까요.”

“네, 네스군…!”

여자는 이제 양손을 꼭 모으고 네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흡사 우상을 바라보는 신도와도 같은 얼굴이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감동이 흘러내릴 것 같이 초롱초롱했다. 네스는 여자의 얼굴을 손으로 구겨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깨물었다.

“오, 오늘 플레이 무척 멋, 멋졌어요. 다들 실수라고 하지만…. 카, 카이저님을 믿고 과감하게 패스한 거죠?”

칭찬하는 척 실수를 지적하다니, 영악한 여자 같으니! 오늘의 패스는 카이저가 멋지게 만회했을 뿐, 여차하면 실점으로 이어질 뻔한 실수였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카이저가 슛을 넣었기 때문에 지적받은 적 없었으나, 네스는 내심 그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에게는 완벽주의 성향이 어느 정도 있었고, 그것은 카이저의 방패라는 자부심에서 기인하였다. 그런데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다니! 네스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으나 여자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 네스군은 카이저님을 정말 신뢰하고 있군요!”

당연한 말을 굳이 꺼내는 이유가 뭘까. 네스가 적당히 대꾸하려던 찰나, 카이저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근처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팬서비스하고 있던 그에게도 대화가 들린 모양이었다. 카이저가 고개를 숙이자 부드러운 금발이 네스의 어깨 위로 우아하게 흘러내렸다.

“당연하지.”

“카이저!”

네스가 날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 하고 카이저가 네스의 귀에 속삭였다. 카이저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있었지만, 득점을 잔뜩 한 탓에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실수를 했는데도 이렇게 믿어 주다니! 네스는 기쁨으로 뺨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꺄악!”

그와 동시에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카이저의 달콤한 목소리가 저기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주변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리를 뜰 타이밍이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면 행렬이 무너지기 때문에 적당히 움직일 생각이기는 했다. 네스는 적당히 주변 사람들에게도 눈웃음으로 인사하곤 냉큼 카이저와 함께 자리를 떴다. 여자는 일어서지도 않고 카이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네스의 곁눈질로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망할 여자.

네스는 카이저와 자신의 몫으로 도착한 발렌타인 선물을 점검하며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산처럼 쌓인 선물을 점검하는 건 무척 귀찮은 일이었으나, 혹시 모를 미연의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잔뜩 쌓인 선물이 카이저의 인기를 방증하는 것 같아 기뻤다.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결국 유소년 축구단일 뿐이다. 프로가 되는 게 아닌 이상 인지도는 성인 2부 리그보다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저의 충성 팬이 많다는 것은 그가 ‘스타플레이어’라는 인증과 다름없었다.

“후후….”

선물 대부분은 장미꽃이나 초콜렛이다. 음식은 개봉되지 않은 시제품만 받고, 그것도 먹지는 않고 사진만 찍은 뒤 버린다. 주의하지 않으면 이상한 걸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독극물은 아니더라도 상태를 망가트릴 수 있는 약물은 무척 많다. 멍청한 놈들이 선물을 입에 마구잡이로 쑤셔 넣다가 게거품을 무는 꼴을 종종 보았기에 네스는 무척 신중하게 물건들을 점검했다.

아니나 다를까, 질이 나쁜 것이 두엇 섞여 있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괜찮은 것들은 다시 리본을 예쁘게 묶어 카이저의 선물 상자 안에 곱게 넣어 둔다. 그런 작업을 한참을 반복하자 이제 남은 것은 선물 상자 두 개뿐이었다. 네스는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분홍색 상자에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색의 리본이 묶여 있었다. 붉은빛이 섞인 보라색 리본. 얼핏 보면 갈색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색이다. 선물용으로 흔히 쓰이는 색은 아니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 네스는 곧장 선물의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카이저의 그루피, 끈질긴 스토커. 상자의 겉면에는 ‘네스군에게♡’라고 적혀 있었는데, 손글씨로 적었는지 꽤나 엉망이었다. 네스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었다. 그 안에는 작은 인형이 들어있었다.

인형은 손바닥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았는데, 머리카락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피가 묻은 것 같은 붉은 천을 기웠고 눈은 짝이 맞지 않는 단추가 양쪽으로 기괴하게 붙어 있다. 심지어 입은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X모양으로 꿰매 놓았다. 어딜 보아도 스산한 것이, 틀림없는 저주 인형의 모습이다. 버리면 다시 찾아올 것 같이 생겼다.

“이 망할 여자가….”

거기다 한눈에도 엉성하게 바느질을 해 들어 올린 순간 목과 몸통이 분리될 정도였다. 네스는 그녀가 자신을 견제하는 게 분명하다고 느꼈다. 발렌타인 선물에 자주 인형을 넣어두다니, 이것은 선전포고인 셈이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처음도 아니고, 카이저를 사랑하는 놈들의 견제는 수도 없이 받아봤다.

‘이런 짓을 해봤자 카이저는 당신 같은 거 신경 안 쓸 텐데.’

소년은 사랑스러운 얼굴로 비웃음을 삼켰다. 카이저는 팬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다. 사랑 따위는 그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네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부질없는 마음을 떠들어대도 카이저는 알아주지 않는다. 그의 재능은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는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사람, 필드를 지배하는 황제. 그의 등 뒤를 지키는 것은 이 알렉시스 네스 뿐이다.

“건방져요.”

그러니 한 번쯤은 이 멍청한 여자에게 주제를 알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손안에서 우두둑, 인형이 우그러졌다.

 

*

 

알렉시스 네스는 내가 응원하는 유소년 축구팀의 유망주 중 한 명으로 무척 귀엽고 깜찍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선수다. 젖살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서 둥근 부분이 남아 있는 갸름한 뺨,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곱슬머리, 동그란 눈과 야무지게 미소짓는 입술이 무척 귀여운 소년이다.

선수로서 자질도 무척 뛰어나지만, 아무래도 좋아하는 부분을 꼽으라면 외모일까. 축구가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도 좋아하고 예상치 못한 골이나 전술이 나오면 가슴이 쿵쿵거린다. 네스의 플레이 또한 대단하다. 그의 깔끔한 패스나 부드러운 드리블을 보면 감탄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역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네스의 얼굴이다.

필드 아래의 네스는 계산된 듯한 미소를 짓는다. 예쁘고 정제된 웃음도 좋아하는 포인트 중 하나다. 그러나 필드 위의 네스는 전혀 다르다. 약한 팀을 상대할 때는 나쁜 버릇처럼 깔보는 미소를 짓고, 강한 상대에게는 도발하는 얼굴을 보인다. 동그란 눈이 일그러지듯 휘어지고 입술 끄트머리가 비틀려 올라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는 강하다. 그가 찬 공은 언제나 아름다운 괴도를 그리며 카이저의 앞에 대령 된다. 패스는 실패하지 않는다. 남들은 실패라고 짚어도 그에게는 모두 계산된 수식에 불과하다. 카이저의 앞에 공을 놓은 후의 그의 얼굴은 무척, 무척, 무척….

“야해.”

나도 모르게 목소리로 나온 감탄에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스럽게도 들은 사람은 없었다. 주변은 카이저를 응원하는 팬들로 가득 차 있어 들리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방금도 카이저의 슛에 다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다. 흡사 광신도의 중얼거림처럼 들리는 찬사가 사방에서 마구잡이로 들려왔다.

카이저의 슛은 무척 난폭하고 아름답다. 강제로 수비수들의 무릎을 꿇리고 공을 밀어 넣는다. 그 모습을 보면 경외라는 글자 외에는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네스군도 카이저님을 좋아하는 거지.’

네스는 카이저를 좋아한다. 그건 표정만 봐도 알았다.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으니 말이다. 항상 카이저를 쪼르르 쫓아다니는 모습까지도 귀엽다. 카이저 또한 네스의 보살핌이 싫은 건 아닌 모양으로, 가끔은 질투가 날 정도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카이저가 부럽다. 부러워서 오장육부가 끓는다. 천재에다가 잘생긴 남자가 네스의 사랑까지 받다니 뭐야,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어?

“카이저님! 여기도 봐주세요!”

카이저가 세리머니를 위해 손을 치켜들며 관중석 앞을 뛰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팬서비스 좋단 말이지, 카이저님. 카이저의 세리머니에 가장 먼저 달려오는 것은 네스다. 활짝 웃는 얼굴이 마치 강아지 같다. 아, 귀여워. 카이저는 네스의 복슬복슬한 머리를 마구 손으로 흐트러트리며 칭찬한다. 부럽다. 나도 머리카락 만지고 싶은데. 네스는 무척 기뻐 보였다. 달려 있지도 않은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삐익, 하고 게임 종료의 휘슬이 울렸다. 카이저의 이름을 환호하던 주변 사람들은 무릎에 힘이 빠진 듯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늘어졌다.

“오늘도 카이저님은 최고였어….”

최고였던 건 네스의 완벽한 패스와 얼굴이었습니다만. 나는 속으로 감상을 삼켰다. 카이저의 팬들은 꽤 과격한 데가 있어서 괜한 말싸움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과격한 팬이라고 인식되면 네스가 웃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각 팀의 인사가 끝나고 퇴장을 알리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일반 관중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주변 사람들은 느긋하게 짐을 챙겼다. 나도 손에 쥐고 있던 응원 도구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펜스를 잡겠지만, 최대한 네스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자 선수들이 퇴장하기 직전이었다. 네스는 여느 때와 같이 카이저의 오른쪽 뒤편에서 걷고 있었다. 나는 펜스를 붙잡고 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네스는 주변을 훑어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방긋 미소지어 보였다.

‘아아, 너무 좋아!’

나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고, 덕분에 네스가 웃으며 걸어오는 것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쪽으로, 정확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로맨스 영화 15편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는 예의 아름다운 미소를 장착한 채로 다가와 속삭였다.

“발렌타인 선물, 잘 받았어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흥분하지 않기 위해 저것은 상투적인 인사말이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발렌타인 선물, 그건 경기장을 다니는 팬이라면 한 번씩 보내니 인사말로는 제격일 것이다. 몇 번이고 그 사실을 되뇌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장난감을 넣지 않았더군요. 귀여운 인형이던데요.”

심장이 그대로 터져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내가 준 선물을 그가 알고 있다니,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보낸 건 네스를 본떠 만든 수제 인형이었다. 그렇게 잘 만든 건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만든 물건이다. 그가 알아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사실 인형을 보내는 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곰 인형이었고, 그 안에 도청기를 넣은 탓에 네스에게 혼이 났다. 이번에 넣지 않은 것도 칭찬해주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수제품은 받을 수 없어서요. 제가 처분했답니다.”

네스의 팬서비스가 과해서 죽을 것 같다. 선물을 기억해주고, 수제품 금지 규칙을 이야기해주고, 직접 버린 것까지 말해주다니. 세상에, 나도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닐까? 신이 날 사랑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네스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 그럼, 다음에, 제대로, 그러니까, 제대로 된 선물이라면 받아주시나요?”

나는 최대한 용기를 쥐어짜서 그에게 물었다. 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의 바른 미소 위에 또 다른 웃음이 한 겹 더 겹쳤다. 그건 그가 경기 상대에게 흔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머리 위로 보랏빛 그림자가 드리웠다. 네스는 펜스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기 위해 머리를 완전히 뒤로 꺾어야 했다. 올려다본 소년의 얼굴은 태양을 등지고 있어서 무척 아름답고 성스럽게 보였다. 명화의 한 장면을 도려낸 것처럼.

“할 수 있다면요.”

그의 대답은 단호하고 명확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소년단의 규칙은 엄격할지도 몰랐다.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했다. 아름다운 소년에게 닿기 위해서는 규칙이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펜스에서 멀어져, 다시 카이저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아, 어떻게 뒷모습마저 저렇게 꼿꼿하고 우아할까! 까만 출입문이 네스의 그림자까지 삼킨 뒤에도 심장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주머니에 넣어 둔 녹음기를 꺼내 컴퓨터와 연결했다. 오늘 추출할 단어는 [귀여운]이다. 네스의 목소리를 조각조각 나눠 이어 붙이면 무척 근사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조금 더 공을 들이면 자음과 모음을 모두 분해하여 완전히 새로운 문장도 만들 수 있지만, 그건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데다가 네스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 같아서 싫다.

“좋은 꿈 꾸세요. 귀여운, 당신.”

역시 귀여운 다음에 들어갈 단어는 당신보다 숙녀분이 좋을 것 같다. lovely lady…. 아, 음률이 애매한 것 같기도.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이런저런 단어를 붙여보았다. 응원해주시는 분들, 도 어색하다. 고마운 관계자, 도 이상하다.

“좋은 꿈 꾸세요. 좋은 꿈 꾸세요. 좋은 꿈 꾸세요. 좋은 꿈 꾸세요.”

가지고 있는 음성을 아무리 넣어봤자 전부 어색하고 이상했다. 애초에 좋은 꿈 꾸라는 말은 카이저에게 하는 말이다. 그건 무척 부드럽고 다정했다. 혀끝에서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콤하고 향긋한 목소리다. 그런 목소리를 들어버리면 평상시의 네스의 목소리가 모두 가식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딱딱하고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목소리. 물론 그 목소리도 무척 매력적이지만.

키보드를 눌러 새로운 단어를 덧씌웠다. 스피커 너머로 완벽한 문장이 흘렀다.

“좋은 꿈 꾸세요. 카이저.”

부드러운 억양, 탄산이 혀끝을 두드리듯 톡톡 튀는 단어들. 무척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다. 나는 이 목소리가 영영 다른 곳을 향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다시 키보드를 눌렀다. 억지로 이어 붙인 목소리가 조각조각 단어를 뱉어냈다.

“좋은 꿈 꾸세요. ─.”

“좋은 꿈 꾸세요, 네스군.”

그래도 좋아. 그의 순간을 잠깐이나마 손에 쥘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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