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국언 드림] 끔찍하고 쉬운 것
오리캐 드림 21.04.21 타싸 재업
1.
김남진은 도무지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글쎄, 사람이란 원래 자신을 알 수 없는 법이지만 요즈음 들어 더더욱 그랬다. 평생 혼자 먹고살기 편하려고 찾은 의사라는 직업도, 황명이라는 큰 병원도 내려놓고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는지. 국회의원의 주치의였다는 경력만 있다면, 굳이 그 경력이 없더라도 자길 부르는 사람은 수두룩 빽빽한데.
나는 여기서 무얼 하지.
찬 공기에 숨을 뱉었다. 흰 숨이 공기를 타고 올라갔다. 하. 김남진은 숨을 참았다. 그녀는 겨울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한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은 축복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초등학생이 된 어느 겨울날 밤 중에 집을 나가 눈밭에서 오들오들 떤 이후로는 그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지금 김남진이 있는 곳은 발이 눈 아래로 푹푹 꺼지는 차가운 눈밭이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건지.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찬 공기가 폐에 들이쳤다.
아, 이게 전부 성국언 때문이다. 사랑이 날 망쳤구나.
2.
성국언이 죽은지도 몇 주가 지났다. 어영부영 모였던 성국언을 위한 보조팀은 어영부영 흩어졌다. 김남진은 그들 중 하나였다. 굳이 특별한 점을 부여하자면 성국언의 애인이었다는 점 정도.
그러면 뭐 해, 시체조차 볼 수 없는 것을.
그날은 장례식 마지막 날이었다. 사랑받는 국회의원이었던 만큼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마지막 날에야 시들해질 만큼. 김남진은 그저 검은 띠에 갇힌 사람의 얼굴을 한참 앉아 보았다.
아가, 네가 이럴 필요는 없단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성국언의 어머니였다. 식사 몇 번 한 것이 다였음에도 당신들은 나를 무척이나 잘 대해주셨죠···. 친가족 보다도 더욱. 숙인 고개를 들어 조금도 눈물에 젖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아무말도 못하고 말았다. 김남진은 유가족의 배려로 3일을 장례식장에서 보내다 나올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내고 맞이하는 공기는 낯설었다. 하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례식은 머리가 어지러워서 싫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조금 더 보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장소에 제일 멍청한 사람이 가버렸구나.
글쎄, 네가 그럴 줄 알았어. 김남진은 중얼거리며 덜컹이는 버스 창에 머리를 대었다. 불안정한 덜컹거림. 나는 주치의잖아.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너는 할 수 있다며 강행할 때도 있었으니까. 플레이어의 사망률은 다른 직업보다 높았고, 너에게는 적이 많았으니까···. 중얼거리던 입을 한참을 다물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내 말 좀 듣지. 손으로 눈을 비볐다. 마른 눈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사표를 낸 건 이튿날째였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나?
오랜만에 출근한, 사실은 그다지 오랜만도 아니고 삼사일에 불과한 날짜였지만, 아무튼 오랜만이라고 느껴질 만큼 느린 시간이 지나고 출근한 병원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시계 초침 소리를 셌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두 번을 조금 넘게 돌고나서야 은사는 입을 열었다. 성국언과 인연을 주선한 사람이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미묘한 걱정이 묻어난다. 만약 지금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뒤도 안보고 거절할 것이다. 바닥에 누워 떼쓰는 한이 있더라도 엉엉 울며 거절할 것이다. 후회는 늘 하고 있었다. 김남진이 할 수 있는 건 수만 마디를 삼키고 단 한 음절을 뱉는 것이 전부다.
예.
김남진은 후회로 얼룩진 삶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단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후회는 미련이다. 미련을 남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지금 처럼 커다란 미련을 남긴 이후에는, 더더욱.
3.
감히 말하건대 김남진의 세상은 아직도 병원을 떠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병원이라는 커다란 울타리는 억압하는 장소인 동시에 김남진을 세상에 메어놓는 끈이었다. 그 울타리를 걷어낸 지금은, 갑자기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미련을 벗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걷어찬 굴레로 들어간다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밟은 적 없는 먼지 낀 신당을 열었다. 괜찮겠니. 스스로 무당의 길을 벗어난 이후 한번도 말 건적 없는 바리공주의 전언이 들렸다. 괜찮냐는 말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것이 너의 뜻이라면.
···.
김남진은 추운 겨울 나무도 떼지 않아 차가운 바닥에 누워 얇은 이불 한 장을 덮고 떨었다. 고작 작은 감정 하나에 휘둘려 충동적인 행동을 한 댓가다. 입김이 얼어 흩어졌다. 나는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 지. 나는 왜, 왜···. 추위에 하얗게 질린 손을 만지작거리다, 잠에 들지 못하고 별이 뜬 하늘을 보다, 결국 회의감의 굴레에 빠진다.
제일 우스운 건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는 나.
어린 학생 둘을 만난 건 그 즈음이었다.
애기무당이시죠?
갖은 고초를 겪어왔음에도 조금도 시들해지지 않은 눈으로 학생이 말했다. 추억의 단어였다. 아주 오래 전, 이 신당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있는 무당이셨던 외할머니의 연줄들은 외할머니와 비슷한 운명을 걷게 생길 아이를 농담조로 그렇게 불렀었다. 문득 그들 중 하나가 눈 앞의 소년과 닮은 듯 했다.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그래.
너희가 올 줄 알고 있었어.
소년은 자신을 주수혁이라고 소개하며 은사의 편지를 내밀었다. 디바이스도 꺼두고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 몹쓸 제자를 아직도 기억하시는 은사님. 언제든 돌아오라는 긴 편지를 읽는 동안 소년과 소녀는 재촉하지 않았다. 김남진은 편지를 접어 서랍 속에 넣었다. 결코 살아 돌아갈 일은 없었다. 학생들은 오랜 시간 바람맞힌 것이나 다름 없는 행동에도 큰 불만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잊힌 이름까지 뒤지며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니.
학생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김남진이 보기에는 한창 어른에게 보호받아야 할 어린 학생들의 어깨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학생들의 떠난 자리에 남은 컵 두 잔을 치우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문득 튀어나오는 성국언이 있었다면, 하고 가끔 하는 가정은 모른 척하고 지웠다. 여기에 있는 건 성국언이 아니라 김남진이었다. 그럼에도 평소라면 학생들은 그만두라고 했을 말이 나오지 않아서, 할 수 있을 만큼 지원하고 말아서. 그럴 때면 미련이 튀어나와서. 그녀는 오랜만에 갓 대학에 입학했을 즈음에나 피웠던 담배를 쥐었다. 눈으로 가득한 흰 세상에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주수혁과 안다인, 그리고 김남진의 만남은 짧았다.
이게 마지막이야. 앞으론 찾아오지 마.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이야.
마지막 만남이 되는 날, 김남진은 아껴두었던 마지막 담배를 피웠다. 학생들은 담백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김남진은 학생들의 등 뒤에 그득 붙은 사상을 보다 눈을 돌렸다. 너희도 결국 말려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지. 흰 연기가 앙상한 나무가지 너머로 올라갔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가물가물한 목소리가 떠오를락 말락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녀의 신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김남진은 알고 있었다. 점점 더 진실에 다가가며 알 수밖에 없었다. 이건 거대한 거미줄이었다. 오래 전 부터 촘촘히 짜인 거대한 판.
4.
김남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회복 아이템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더 사용하면···. 쿨럭. 입가에 피가 맺혀떨어졌다. 씨발, 그래.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안쓰면 죽는 거. 독이 섞인 매캐한 공기를 들이켰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렸다.
아, 진짜. 내가 왜 여기서 있지. 정말로 이럴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성국언, 너 때문이다. 너랑 처음 본 순간 알았어. 너랑 엮이면 개고생하게 될 거란 걸···.
이제 와서 따져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냐만은.
“인간치고는 오래 살아남는구나.”
미형의 진족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미물의 발버둥 쯤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꼴보기도 싫은 얼굴이다. 내가 너만큼 진족을 싫어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속살을 지근지근 깨물었다. 탈출할 방법, 그런 건 없다. 오늘이 내가 젯밥 먹는 날이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그 분께서 경계하는 미물답게 발버둥이 길구나! 새된 목소리로 귀가 따가웠다. 머리 속이 웅웅 울렸다. 그래, 이젠 정말로 끝내자. 나 치고는 오래 미련을 끌어안았다.
손에 들어가지 않는 힘으로 활 시위를 당겼다. 진족은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광림 ‘정正과 사邪의 경계’를 사용합니다.>
연한 녹빛이 나를 중심으로 퍼졌다. 삿된 독이 천천히 사라지고 숨 쉬기 편한 맑은 공기만이 남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닿지 않는 범위에 있던 독이 끝에서부터 좀먹듯이 들어왔다. 진족은 영 딱한 것을 보듯 기만했다.
“네 광림에 대해서 우리가 모를 성싶더니? 그래 봐야 치유계. 마지막 발버둥이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그게 무슨··· 커헉, 컥.”
삿된 것을 삿된 것으로 돌려보내는 광림은 회복뿐만 아니라 상처를 주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날아간 화살이 입구를 무너뜨렸다. 간신히 버티던 몸이 무너졌다. 죽어도 같이 죽자. 김남진은 흐리게 웃었다. 숨쉬기 고통스럽다. 쓰러진 몸의 자세를 바꾸어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팠다. 간신히 살아나도 독에 중독되어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겠지.
김남진은 오랜만에 속에 담아둔 웃음을 터뜨렸다. 아, 빌어먹을. 이게 뭐라고 내가 여기에서 죽는지. 성국언 개자식아. 너는 정말 죽지 말았어야 했어. 씨발놈아. 사람을 이렇게 망쳐두고 너 혼자만, 너 혼자만···.
이젠 들리는 소리도 없었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들렸다. 김남진은 색색이는 숨을 참지 않았다. 이것 좀 봐, 사람이 죽는 게 이토록이나 끔찍하고 쉽다. 눈앞이 흐렸다. 눈가로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피인지···.
그래도 다시 한 번 만난다면 그때는 너에게··· ···.
A.
성국언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러운 게,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찝찝하다. 괜히 옆에 있는 온기를 더듬었다. 이불을 걷어내자 눈부신지 눈썹을 찡그리며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쓸데 없는 악몽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든 말든 김남진은 웅얼거리며 이불을 찾았다. 맨살에 닿는 공기가 차가웠다. 몸 위에 붉은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성국언은 괜히 손가락으로 그 흔적을 더듬다가 조심스레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마님. 벌써 아침입니다?"
"꺼져, 성국언···. 어제 밤에 자자고 해도 안놔줬잖아 개자식아···. 더 잘거니까 아침이나 만들어와···.
그대로 사라지지 않으면 발로 찰 기세에 성국언은 괜히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커튼 쳐 줄까? 지은 죄가 있어 하는 말에 김남진은 눈도 뜨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흩어져 따라 흔들렸다. 성국언은 조심조심 깨지 않게 밖으로 나갔다. 뭘 먹여야 할까. 냉장고 속 재료를 생각하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김남진은 성국언이 빠져나가자 도마와 칼이 부딪히는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마저 단잠을 즐겼다. 이불을 쥔 손 약지에 보이는 반지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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