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큐어트론+히마와리]가을의 만찬[큐어트론+히마와리]가을의 만찬

단둘이서 남몰래 맛본 것과는 또 다른 가을의 달콤함을.

반야로 트친 합작 ~Four Seasons Dream Gigs~ :: https://byrseasonsgigs.creatorlink.net/%EA%B0%80%EC%9D%84


힐끔. 히마와리는 테이블 맞은편의 상대방을 몇 번이고 곁눈질했다. 딸기 사탕 같은 눈동자와 그 이름대로 민트색 머리카락, 주문한 디저트를 행복하다는 듯 떠먹는 표정까지도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에덴에서의 합주 연습이 아니면 도통 얼굴을 보기 어려워진 친구의 변함없는 모습이 반가워 웃음이 났다. 이것도 먹어. 겉면이 노릇한 파이를 접시째로 들이밀자 건너편의 포크가 사양하는 법도 없이 날아들어 끄트머리를 크게 베어 삼켰다. 들뜬 콧소리가 흘러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행복해~ 오늘은 잔뜩 먹을래!”

“마음은 이해하는데……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훗훗후, 날 얕보지 말라구. 게다가 마리쨩도 데려왔잖아.”

“아, 나 그런 역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은 테이블 위에는 디저트 접시가 가득했다. 각종 케이크와 파이, 각기 다른 장식의 쿠키에 복잡한 이름의 파르페까지. 그중 하나, 민트가 먹다 만 케이크 하나에 시선을 준 히마와리가 그 일부를 포크로 잘라내어 입에 넣었다. 연한 노란색 크림에서는 부드러운 고구마 향이 났다.

“마리쨩은 이거 최소 한입씩은 다 먹어봐야 해, 알았지? 그러려고 데려온 거니까.”

“……? 뭐야, 나한테 부탁할 거라도 있어?”

“응! 내 첫 월급 기념으로 마일리네한테 디저트 선물할 건데, 같이 골라줄 사람이 필요하단 말씀.”

첫 월급 기념이라니? 히마와리가 고개를 기울이자 기다렸다는 듯 설명이 돌아왔다. 슬슬 가을맞이 새 옷을 사야 하는데 용돈이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특별한 것 없는 계기였다. 마침 일손이 필요했던 유키호네 포목점에서 민트를 고용했고, 그 덕에 귀여운 옷을 잔뜩 구경할 수 있어서 힘들지도 않다나. 미리 점찍어둔 옷감이 있다며 다음 월급날에는 그걸로 무대 의상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는 목소리에서는 생기가 돌았다.

어쩐지 한동안 만나기 힘들더라니, 아르바이트 시작해서 그랬나 보네. 한 박자 늦게 깨달은 히마와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린다. 평소에는 에덴이 아니더라도 신의 생선가게나 유명한 디저트 카페 근처를 지날 때마다 마주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러질 못해서 은근히 섭섭하던 참이었다. 그럼 이제 유키호네 가게에 찾아가면 둘 다 만날 수 있으려나. 가벼워진 마음으로 파이를 한입 떠먹으면, 이번에는 샛노란 호박의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으~음…… 디저트는 다들 뭐든 좋아할 것 같은데. 내 조언 필요하려나.”

“그치? 여기 디저트는 다 맛있어서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구…… 아 정말,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괴로워! 그치만 행복해! 시나몬 가루가 박힌 연노란색 과육을 작은 나이프로 가르며 민트가 종알거린다. 행복한 고민을 잔뜩 털어놓는 입에서 배어나는 향은 달게 졸인 사과잼의 향. 메뉴판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건만 그 작은 입에서는 익숙한 것에서부터 귀를 의심케 할 만큼 낯선 것까지, 각종 디저트의 이름이 쉴 새 없이 줄지어 나왔다. 어쩐지 직원이 민트한테 친근하게 구는 것 같더라니, 한두 번 방문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특히 가을 시즌은 한정 메뉴 종류도 많고 저~언부 맛있을 때란 말야. 나는 절대 못 고르니까 마리쨩이 골라줘!”

“나도 디저트라면 주는 대로 뭐든 잘 먹는 편이라 어떨까 싶은데.”

에에, 하는 볼멘소리에서 시선을 피한 히마와리는 접시 위의 마카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기자기한 박쥐 모양 아이싱이 귀엽게 자리 잡은 그것은 지난 시즌, 그러니까 할로윈을 기념하기 위한 게 틀림없었다. 그 박쥐는 코크의 파삭거리는 소리를 비명처럼 내지르며 입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견과류 향의 크림을 몇 차례 우물거리고 나니 민트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다름이 아니라, 그 말대로 정말이지 모든 디저트가 흠잡을 구석 하나 없이 맛있었던 것이다.

“맛으로 고르기는 글렀고, 흠…… 애들 이미지에 맞춰서 골라보는 건?”

“예를 들면?”

“예를 들어…… 민트 하면 생각나는 호박파이 같은 거.”

“왜 내가 호박파이야!?”

아 왜, 할로윈 기념 라이브 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때 잭 오 랜턴 컨셉 의상 귀여웠고. 작게 키득거리자 눈썹을 추켜올리던 민트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듯 눈을 데록 굴리더니 이내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긴, 그 옷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마리쨩 머릿속에 아직도 맴돌 정도로 귀여운 게 당연하지! 납득한 표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호박파이를 베어 문 민트의 얼굴에는 만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좋아, 일단 호박파이 채택! 그럼 마일리는…… 쿠키 어때?”

“쿠키가 토끼 모양이라서 마일리?”

“물론 그것도 있지만! 쿠키는 재료에 따라서 맛이 완전 달라지는데, 뭘 넣어도 맛있고 귀엽잖아. 그거 꼭 무슨 의상을 입히든 찰떡으로 소화하는 마일리 같지 않아?”

……그런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듯도? 이번에는 히마와리가 민트의 말에 수긍할 차례였다. 레시피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낸다는 점에서 마일리를 닮았을지도 모른다. 뭐, 무슨 의상을 ‘입든’이 아니라 ‘입히든’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이 마음에 좀 걸리지만. 평소 큐어큐어트론의 분장실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입히는’ 것이 옳은 표현이기는 할 것이었다. 구석에 몰린 토끼처럼 오들오들 떠는 마일리와 그런 마일리를 둘러싸고 즐거워하는 포식자가 셋…… 불쌍하게도. 짧은 묵념이 히마와리의 머릿속을 스친다. 그리고 빠르게 휘발되었다.

“유키호는 어떤 디저트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나 지금 떠오른 거 하나 있거든.”

“마리쨩도? 나도 방금 막 생각났는데.”

“그래?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해볼까.”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흔든 민트가 먼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하나, 즐거운 듯한 기색으로 둘. 그리고 마지막, 기대하는 표정으로 셋.

“화과자!”

“화과자!”

붉은 눈동자 두 쌍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동시에 휘어진다. 비눗방울이 톡 터지듯 경쾌한 웃음소리가 비져나온 것 역시 동시였다. 통했네, 우리. 그치, 유키호는 요조숙녀 이미지니까. 둘만의 암호가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들떠서는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마침 근처에 최근 들어 신경 쓰이는 화과자 전문점이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앞을 오갈 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곤 했는데, 진열대에 마련된 견본품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가을을 맞이해 고구마 앙금을 채운 화과자들은 하나같이 꽃이며 단풍을 모티브로 한 모양이라 눈이 즐거웠지만 그중 하나, 연보라색으로 물들인 등나무꽃 장식의 그것을 보자마자 유키호가 연상되었으므로. 언젠가 유키호에게 선물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으니, 이참에 민트의 선물 준비를 함께해도 좋을 것이었다. 멋대로 결론을 낸 히마와리가 음료에 꽂힌 티 스틱을 느릿하게 휘저었다. 고소한 옥수수 향이 눈앞에 아른댄다.

“그럼 마지막으로 셰리만 남았네.”

“셰리…… 우와, 어려워.”

한 모금 들이켠 음료의 당분도 아이디어를 내는 데에 힘을 보태주지는 않았다. 셰리, 셰리라. 본인이 좋아하는 티에 어울리는 디저트가 좋을까? 하지만 그럼 이제까지 고른 것들이랑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은데……. 케이크 한 접시 위의 크림을 포크 끝으로 건드리기를 두어 차례, 무언가 떠올린 히마와리의 시선이 민트의 얼굴로 향했다. ‘지금 완전 중요한 생각 하고 있음!’이라는 걸 티 내는 것마냥 아예 눈을 감아버린 민트는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민트, 가을 디저트의 왕은 뭐라고 생각해?”

“갑자기? 으~응, 글쎄…….”

“왜, 그런 거 있잖아. 가을에 이거 안 먹으면 허전하다, 섭섭하다 싶은 거.”

히마와리가 괜히 들춰내던 케이크의 가장자리에서 밀크티의 향이 감미롭게 올라왔다. 엷은 밤색의 크림을 작게 떠올렸다가 다시 얇게 펴 바르는, 정말이지 의미 없는 행동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민트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심각한 발언을 앞둔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사실 난 몽블랑을 최소 20개 정도 먹지 않으면 가을을 충실하게 보낸 것 같지가 않아……!”

보통의 경우라면 20개라는 수는 그만큼 좋아한다는 의미의 현실감 없는 과장으로 받아들였겠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민트의 말이다. 히마와리가 아는 한 가장 대식가인 그였으니 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해야만 했다. 하기야, 그 정도 먹으려면 아무래도 아르바이트가 필요하긴 하겠지……. 히마와리의 얼굴에 어렴풋한 납득의 눈빛이 스쳤다.

“그럼 셰리는 몽블랑으로 할까.”

“응? 왜?”

“네 명 중에 누가 안 보이든 섭섭하긴 한데, 나는 셰리가 없을 때 제일 허전했거든.”

이제 다시는 그럴 일 없겠지만. 멀지 않은 과거를 되짚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음성 끝이 가볍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을 끄집어낸 뒤의 분위기를 전환하듯이. 히마와리가 무엇을 떠올리고 한 말인지를 곧장 알아차린 민트의 표정이 잠깐, 아주 잠깐 시무룩하게 어두워졌다가 금세 기세등등해졌다. 그렇지, 이제 절~대 그럴 일 없지. 밝은 목소리만큼이나 설탕 뿌린 과자를 조명에 비춰 보는 것처럼 눈동자가 반짝인다. 명백한 긍정의 반응이었으므로, 달리 언어적인 응답이 돌아오기 전부터 히마와리는 제 의견이 민트에게서 공감을 끌어오는 데에 성공했음을 알았다. 다만 민트가 금세 입을 열어 마음에 쏙 든다며 웃음을 쏟아냈으므로, 강한 확신을 재차 확인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네 가지 다 결정된 거네?”

쿠키와 몽블랑, 화과자에 호박파이까지. 얼마 되지 않는 종류였지만 그 잠깐 사이에 혹시라도 잊을새라 히마와리는 그 자리에서 디저트 네 가지를 몇 번이고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그러고선 입에 착 붙을 정도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키고는 곧장 카운터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정말이지 자연스러워서, 민트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시점에는 이미 주문이 끝난 뒤였다.

“잠깐! 왜 마리쨩이 주문해? 내가 사는 거라니까!?”

“그래도 난 꼬박꼬박 월급 받는 성인인데 학생이 알바로 번 돈 뜯어먹는 건 그림이 좀 이상하잖아.”

“그러는 마리쨩 월급도 최저 시급 반토막밖에 안 되면서!”

“무슨 소리야! 절반은 좀 넘어!”

근데 이거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했던 건가? 최저 시급 절반 좀 넘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미묘한 기분으로 지갑을 꺼내든 히마와리의 눈이 계산을 기다리는 직원과 마주쳤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조금 측은해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 에이, 몰라! 원치 않은 동정에 눈가가 시큰해지는 감각이 밀려와 눈을 질끈 닫았다 뜨면, 이번에는 두 사람이 잔뜩 주문한 디저트의 가격이 히마와리의 마음을 시큰해지게 했다. ……우리 많이 먹었네. 다음에 또 민트가 카페로 부르면 월급날에 만나자고 해야지……. 히마와리가 소리 없이 다짐하는 사이 포장된 디저트를 받아 든 민트가 한발 앞서 카페 문을 열어젖혔다.

“두고 봐, 다음 달 월급날에 또 마리쨩 불러낼 거니까!”

선전포고하듯 결연하게 말을 마친 뒤로 뜀박질이 이어진다. 걸음의 방향은 분명 화과자 전문점 쪽. 서두를 이유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빠르게 멀어지는 작은 체구가 괜히 마음을 조급하게 해서, 히마와리 역시 덩달아 달음박질로 민트의 등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동과 담쌓은 지 오래인 그녀가 현역 육상부인 고등학생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으므로, 금세 지쳐버린 다리는 가까스로 올려붙였던 가속도를 도로 꺼트리고 말았다. 뭐 어때, 어차피 가게 앞에서 만날 테고. 거칠게 차오른 숨을 터트리면서, 히마와리는 기어코 진 빠진 웃음을 짓고 말았다. 멀지 않은 네 사람의 티 파티가 몹시도 기대되었으므로.

호두 르뱅과 사과잼 쿠키, 몽블랑, 호박파이, 고구마 앙금이 든 화과자. 사람 수와 꼭 맞춘 가짓수의 디저트를 늘어놓은 테이블에는 셰리가 준비한 티 세트도 놓여 있으리라. 유키호가 가지런히 차려둔 식기 위를 규칙 없이 어지러뜨리면서, 마일리의 솔직한 탄성 소리를 향신료처럼 흩뿌리고…… 응, 재밌겠다. 저 멀리서 큰 궤적으로 팔을 흔드는 민트에게 손을 따라 흔들어 보이며 히마와리는 막연히 가늠했다. 단둘이서 남몰래 맛본 것과는 또 다른 가을의 달콤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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