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수S 발걸음을 따라가도록 할까

“야. 근데 쟤 뭔데 저렇게 잘 빌려주냐?”

“기내중 대표 호구잖아. 천사계의 여왕이라도 된대?”

“푸핫, 웃긴다. 뭐야. 그건?”

애들이 깔깔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나쳤다.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로. 다른 생각을 하며 지나쳤지만 전부 듣고 말았다.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사실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 한 것뿐이다. 모르는 게 마음 편하니까. 좋다고 편하게 ‘이용’할 땐 언제고. 왜 뒤만 돌면 사람 하나 못 잡아먹어서 다들 안달인 걸까? 나도 바보같이 착한 여자 아닌데. 다 듣고 있는데. 이럴 땐 나 자신이 답답해진다. 가슴이 갑갑해진다. 왜 그들을 향해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걸까. 뭔가 말이라도 해봐. 가서 아니라고, 난 너네가 그런 말 할 줄 알았더라면 노트 필기 같은 거 보여주지 않았을 거라고 한 번 해봐. 하지만 그런 짓은 하지 못한다. 난 그런 용기가 있는 아이가 아니니까. 그래, 성준수 같은 인물이나 가능한 거다. 그런 거.

남이 어찌 보든 상관 안 할 정도로 자기에게 자신이 있어? 그거 부럽다. 질투난다. 난 안 되는데. 왜 애꿎은 애한테 화풀이를 하는 거람, 나는.

"응? 여기서 혼자 뭐 하니, S야?“

“아. 선생님…!”

“혹시 무슨 일 있니? 어째 평소보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아, 아니에요! 저 엄청 멀쩡해요. 히히. 보세요, 그네도 잘 타요!”

“뭐야. 그런 거였니? 난 또. 별 일 아니었음 됐다.”

헤헤. 선생님. 그러고 보니 저 이번에 영어 과목 5점 올랐어요! 뭐, 진짜? 아니, 고작 5점? 이번에 엄청 쉽게 냈는데. 그런 시시껄렁한 순간이 지나고 선생님이 지나치고 나면 다시… 적막이 느껴졌다. 밤이란게 이렇게나 조용했던가? 세상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

야, 뭐 하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하고 조금은 까칠한 목소리. 아, 목소리만 들으면 참 멋진데. 하하.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어, 안녕.”

별 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소꿉친구 앞에서 숨겨서 무엇하랴. 그냥 있는 그대로 축 쳐진 모습을 내비쳐도 그가 굳이 캐묻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의외였던 건, 그게 아니었다는 거였다. 힘 풀린 목소리 탓인지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뭔데.”

“…흐끅. 흑, 흐으…”

어김없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내가 그렇게나 슬펐던가? 그렇게나 상처를 받았었나? 호구 소리 하나가 그렇게까지? 뭐가 그렇게 대단한 욕을 들었다고. 아니, 그렇지만! 나 열심히 노트 필기 한 거였는데. 내가 아끼는 펜으로 빼곡하게 적은 거였는데. 졸려도 잠 안 자고 전날에 노트 수정도 해온 거였고. 괜히 서러웠다. 이상하게 비가 내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나의 부끄러운 감정이 숨겨질까. 눈물이 가려질까?

“누, 누가 울렸는데.”

“그런 거, 아닌데.”

“그럼.”

아, 이대로 말하면 내일즈음엔 후회할 거 같은데. 하지만 입에서는 창피함도 모르고 주절주절 나왔다. 그게 말이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냥, 별거 아니었는데. 열심히 작성한 노트를 보여주고 평소에도 체육복 빌려달란 말도 들어주고 지우개 빌려주는 거야, 항상 일도 아니었는데. 그랬는데. 걔네들이 나더러 호구래. 호구. 기내중학교 최고의 호구. 내가 얼마나 아까워하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걔네에게 쓴 노력보다 내가 쓴 마음이 더 아까워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말은 끝을 모르고 흘러 내렸다. 뚝뚝 흘러서 어느샌가 모래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바닥에서 시선을 들어올릴 수 없었다. 뭐라 할까. 바보같다고 타박하겠지, 얘라면.

“등신 같이 살지 마.”

그래, 거봐. 그럴 줄 알았어. 네가 보기에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을까. 언제나 바보였겠지. 노력해온 내 모든 것들이. 하지만 난, 될 수 없어. 너처럼. 너처럼… 홀로 우뚝 설 수 없으니까. 넌 그런 게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그는 내게 다가와서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하지 않냐.”

의외의 위로가 너무 서툴러서 웃음이 풋, 하고 새어나와버렸다. 나는 있잖아. 너같이는 살지 못하겠어. 네가 부러워. 그러니, 네가 나를 세워줘. 일으켜 세워줘. 그와 마주하지 않으려 하고 내심 품어온 진심을 또다시 줄줄이 흘렸다.

“그러던가.”

* * *

그 후로 준수와 S는 붙어다녔다. 아주 찰싹 달라붙은 것은 아니었다. 각자 바빴으니까. 준수는 여전히 농구를 했고 S는 손에서 필기구를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의 S만 품어온 동경은 친애가 되어 돌아왔으니, S는 기뻤다.

“야, 나 전학간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시기가 왔으니까. 입시의 시기에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S는 “알겠어.”라 답했다.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미였지만 준수는 S가 실망했다고 생각하고서 머리를 긁적였다.

“잘 지내고.”

“…그런 말 하지 마. 다시 안 볼 사람처럼.”

“뭐, 놀러 오던가.”

S는 그 말을 끝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그를 두고보다가 떼지 못한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그렇지만 그 후로 문제가 있었다면 그에 대한 그리움을 멈출 수 없었다. S는 상사병에 걸렸다. 필기구는 성준수란 글자를 노트에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끄적이는 선이 갈길을 잃고선 자꾸만 그의 이름 밑으로 선을 여럿 갈겼다. 끝에는 왜인지 자기 이름을 적어서.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 *

“넌 여기까지 오냐?”

준수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S는 그저 웃었다. 아, 이제 다시 곁에 있을 수 있어. 그냥 옆에서 보면서 응원할 수 있으면 돼. 그게 S의 기쁨이 되었다. 이번에는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내가 한 선택이니까. 비록 우기는 데 든 설득력은 닳아서 되돌아오진 않으니까.

“헤헤.”

바보 같이. 그저 다정하게 S는 웃었다.

"…괜히 그렇게, 바보 같이 웃지 마.“

준수는 뒤 돌아 농구장으로 향했다. 아, 잠깐만! 잠깐만, 가지 마!

그런 준수의 귀가 빨개져 있는 것을, S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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